서울 4대문의 고유이름과 뜻
사대문 (四大門)
1396년(태조 5) 도성을 축조할 때 정남에 숭례문(崇禮門:지금의 서울 남대문), 정북에 숙청문(肅淸門), 정동에 흥인문(興仁門:지금의 서울 동대문), 정서에 돈의문(敦義門)을 세웠다.
서울의 네 대문. 동쪽의 흥인지문, 서쪽의 돈의문, 남쪽의 숭례문, 북쪽의 숙청문
음양오행에 따라서 동. 남. 서. 북 순으로 글 올립니다.
1. 서울흥인지문(동대문) 서울興仁之門(東大門)
보물 제1호 (1963년 1월 21일 지정). 조선 고종 6년(1869) 구조 : 1동, 정면 5칸, 측면 2칸, 2층의 우진각지붕 다포집 재 료 : 석조기단 목조 소 재 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6가 69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6가에 있는 조선시대 성문. 도성의 동쪽에 있다 하여 동대문이라 한다.
1397년(태조 5) 도성을 쌓을 때 함께 건축, 이듬해 낙성되었다. 지금의 동대문은 1896년(고종 6) 개축한 것이다. 문의 기부(基部)는 화강암의 모룻돌[臺石(대석)]을 잘 다듬어 무사석(武砂石)을 이루고, 중앙에 홍예를 틀어 출입구를 삼았으며 기부 위에 목조 2층 누각을 세웠다. 문 바깥에는 무사석 한쪽에서부터 반원형의 평면을 이룬 옹성을 쌓아 적에 대한 방어를 견고히 하였다.
누각은 상하층 모두 정면 5칸, 측면 2칸이고 다포계 형식의 우진각지붕 건물이다. 기부의 주초석 위에 둥근 기둥을 세우고 기둥머리에 창방과 평방을 걸어 공포(拱包)를 짰는데, 공포의 하층은 내3출목?외2출목이며 상층은 내외 모두 3출목이다. 그 형식은 살미[山彌(산미)]가 외부로 뻗어나와 수서[垂舌(수설)]와 앙서[仰舌(앙설)]로 되어 있고 내부의 살미 끝이 운공(雲工)으로 되었으며, 기둥 위에 안초공(安草工)을 두고 있어 조선 말기 양식의 특징을 나타낸다. 가구(架構)는 중앙에 고주(高柱)를 일렬로 배치하고 상하층의 대량(大樑)은 모두 이 고주에서 양분되고 맞끼어 연결되었고 내측 네 귀퉁이에 고주를 세운 것이 그대로 연장되어 상층 우주(隅柱)를 이룬다. 같은 도성 내의 숭례문에 없는 옹성을 갖추고 있다. 조선 후기 성문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건물이다. 1996년 일제지정문화재 재평가 작업에 의해 <서울동대문>에서 <서울흥인지문>으로 원래의 이름을 되찾았다. 보물 제1호.
서울흥인지문은 서울성곽의 동쪽 문으로서 인(仁)은 오행의 목(木)에 속하고 목은 동(東)에 해당하므로 흥인(興仁)은 곧 동방을 의미한다고 하며, 흔히 동대문(東大門)이라고 부른다.
또한 '흥인문'이 '흥인지문'으로 언제 개칭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철종 말까지의 ≪실록≫에는 흥인지문이란 명칭이 없는 것으로 보아 고종 때에 고쳐 짓고 흥인문을 흥인지문으로 개칭한 것으로 짐작된다. 흥인지문은 문을 창건한 지 50여 년이 지난 문종 원년(1451)과 단종 원년(1453)에 일부 보수가 있었고, 그 후 400여년이 지난 고종 5년(1868)에 개축한 기록이 있다. 당시 대원군은 경복궁 중건공사를 완료한 다음 광화문 밖 좌우편에 나열되어 있는 의정부?호조?이조?중추부?사헌부 등의 관아를 중수하는 동시에 흥인문을 개수하였는데, 《고종실록》에는 동대문 전체가 썩고 상하여 지탱하기 어렵기 때문에 전면적으로 개수하였다고 한다.
1958년 동대문 보수공사를 할 때 문루 천장에서 발견된 상량문(上樑文)에 의하면 훈련도감(訓練都監)에서 공사를 담당, 고종 5년(1868) 10월 2일에 착공하여 고종 6년(1869) 2월 20일 정초(定礎), 3월 11일에 상량하고 같은 달에 완공하였는데, 문루가 매우 낮아 문지(門址)를 8척 돋우고 그 위에 새로 홍예(虹霓)를 쌓고 초루(?樓)를 중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으로 고종 5년의 흥인문의 공사는 완전히 개건한 공사였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의 옹성도 고종 5년의 문루 건축 때에 새로 쌓았을 것으로 보인다. 흥인지문은 정면 5칸?측면 2칸 규모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앞에서 볼 때 사다리꼴 모양을 한 우진각 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그 형태가 매우 섬약하고 번잡하게 장식화된 부분이 많으며 조선 후기의 쇠퇴된 수법이 곳곳에 엿보인다.
문루의공포와처마
서울 도성(都城) 의 동쪽 문으로, 문 이름은 흥인지문(興仁之門)이며 태조(太祖) 7년(1398)에 창건되었으나 현재의 문루(門樓. 궁문, 성문, 지방관청의 바깥문 등의 위에 지은 건물.초루)는 고종(高宗) 6년(1869)에 중건한 것이다. 이 문의 특징은 문 밖으로 옹성(甕城 성문의 앞을 가리어 빙둘러 축조한 성문을 방어하기 위한 성)을 돌린 것이데, 이는 적을 공격하기에 합리적으로 계획된 시설이라 할 수 있다. 석축 중앙에는 홍예문(虹霓門. arch gate. 문틀 윗머리가 무지개 모양으로 된 문. 무지개문,아치문) 을 두고, 그 위에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重層) 문루를 세웠으며, 지붕은 우진각으로 되어 있다. 기둥 위의 공포(공包, 工包, 貢包. bracket sets. 기둥 위에서 처마를 받치도록 주두, 첨차, 소로 등을 짜 맞춘 것)는 다포식(多包式)이며 세부기법이 연약하고 장식 위주로 되어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흥인지문은 도성의 8개 성문 중 유일하게 옹성을 갖추고 있으며,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문루의 아래층은 주위 4면을 모두 개방하였으나 위층은 기둥 사이를 모두 창문과 같이 네모나게 구획하여 각각 한 짝 열개의 판문(板門)을 달았다. 내부는 중앙에 높은 기둥을 일렬로 배치하고 위?아래층의 큰 들보는 모두 이 기둥에서 양분되어 여기에 맞끼워져 연결되는 맞보로 되었다. 위층에는 마루를 깔았고 아래층에는 가운데 칸에만 마루를 깔았는데, 이는 그 아래에 위치한 홍예문의 윗 부분을 가리는 구실을 한다. 천장은 성문이라는 특수한 건물이기 때문에 지붕 가구재(架構材)를 전부 노출한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다.
앞쪽의옹성
흥인지문은 다른 문과는 달리 옹성(甕城)이 있는 것이 특색이다. 옹성은 곡성(曲城) 또는 치성(雉城)이라고 하며 밖에서 성문이 보이지 않게 성문을 둘러쌓은 작은 성으로서 적을 방어하고 지키기에 편리한 것이다. 동대문의 옹성은 태조 6년 1월에 착공하여 4월에 완공하였다. 태조가 동대문에 한하여 옹성을 쌓은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동대문 부근의 지형이 낮을 뿐만 아니라 동대문 북쪽의 낙산도 낮고 평탄하여 적을 방어하기에는 부적당한 곳이므로 이 옹성을 쌓아서 이러한 약점을 보완하려고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흥인지문 주변의 성벽은 일제가 도시계획이라는 미명하에 융희 2년(1908) 3월부터 동대문 북쪽과 남쪽의 성벽을 철거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보다 앞서 광무 3년(1899) 5월 서대문~청량리간 전차가 개통되면서 이곳을 지나가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