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도 학문도 융합해야 성공… 난 아직 멀었죠"
마흔살의 모험의사 가운 벗고 딸 데리고 美로스쿨 유학지식재산권·특허법 공부
학제간 융합 외치면서도 귀국후 받아 주는 곳 없어 유학생활보다 더 힘들어
스물다섯 살 결혼 때 처음 화장한 뒤 한 번도 얼굴에 분칠해본 적 없단다. 옷장에 화사한 정장 한 벌 없어 회색 원피스에 검정 재킷을 걸치고 나왔다. 염색도 몰라 머리가 희끗희끗하다. "원체 게을러요. 화장은 한번 시작하면 계속 해야 하니까 안 했고요, 옷은 눈에 안 띄게 입는 거 좋아해요. 흰머리도 별로 불편한 줄 모르겠어서…."
김미경(48)은 '안철수의 아내'다. 본의 아니게 그 수식으로 유명하다. 민망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카이스트 임용되어 인사드리러 갔을 때에도 누가 '새로 온 김미경 교수입니다' 그러니까 눈만 끔벅이던 분들이, '안철수 교수의 부인입니다' 하니까 '아~' 하더라고요." 남편이 부담스러울 때 많겠다고 하자 고개를 저었다. "저보다 훨씬 우수한 사람이니까 괜찮아요."
- ▲ “모교로 돌아오니 고향처럼 푸근하면서도 생소해요. 그 사이 학교도 변했고, 저도 변했고요.”오랜만에 서울대 의과대학 박물관 앞에 선 김미경 교수는 불볕 아래에서도 말 잘 듣는 학생처럼 사진 촬영에 임했다. 검은색 재킷이 칙칙하다고 하자“여벌이 있다”며 보여준 옷의 색깔은 흰색. 매사에 무채색으로 밋밋한 듯, 개성이 없는 듯 보이지만 그 속엔 올곧은 소신과 담력이 숨어 있었다. 동영상 보기 / 이명원 기자 mwlee@chosun.com
하지만 김미경을 아는 사람들은 그 말이 겸손이란 걸 안다.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그녀는 성균관대와 삼성서울병원에서 15년간 병리학 교수이자 전문의로 명성을 얻었다. 나이 마흔엔 의사 가운을 벗어던지고 미국 유학을 단행했다. 2002년 워싱턴주립대 법대에 입학했고, 2005년엔 스탠퍼드 법대 특별 연구원으로 뽑혀 '생명과학과 법센터'에서 일했다. 캘리포니아주와 뉴욕주의 변호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다. 학제간 융합의 선두에도 그녀가 있다. 2008년 귀국해 카이스트에서 의학과 법학을 접목한 융합 모델을 구축한 김미경은 오는 9월부터 모교인 서울대 의대에서 강의한다. 학제간 융합을 화두로 삼은 서울대가 김 교수를 전격 스카우트한 셈이다.
인터뷰를 요청한 지 5개월이 지나서야 마주한 김미경 교수는 여고생처럼 수줍음을 타면서도 솔직했다. 정치권 영입 경쟁이 치열한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의 정계 진출 가능성을 묻자, "남편의 성향으로 볼 때 그런 일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마흔 살 아내를 유학 보낸 참 좋은 남편'이라는 세간의 부러움에 대해서도 "반대는 안 했지만, 열광하며 보낸 것도 아니다"며 웃었다. 학문과 사랑 모두에서 '융합'을 일궈가고 있는 그녀는 강물처럼 고요하지만 뚝심이 있는 여자였다.
◆삼성과 애플
―'안철수의 아내'로만 김미경을 아는 이들에겐 '학자 김미경'이 생소하다. 우선 카이스트에서 해온 강의가 뭔가.
"지식재산권이다. 공학도로서, 과학도로서 발명을 하게 되면 자기 발명에 대한 지식재산권을 확보하고 관리해야 한다. 삼성과 애플의 싸움에서도 보듯 특허법, 특허괴물들에게 우리 업체가 당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고도의 기술에 기반한 회사들은 지식재산이 자산의 절반 이상이다. 어떻게 보면 건물보다 더 중요한 게 지식재산이다."
―서울대로 옮기겠다고 마음을 굳힌 이유는 뭔가.
"의과대학은 새로운 바이오 테크놀로지를 만들어내는 곳이다. 그들도 카이스트 학생들과 똑같은 이유로 지식재산권에 대해 알아야 하고, FDA 관련 법과 제도, 미국 특허법, 승인절차도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의사에 머무를 게 아니라, 바이오 테크놀로지 회사도 창업하고 신약도 개발해야 하지 않겠나. 스탠퍼드에서 펠로십 하면서 절실히 느꼈다. 우리도 그들처럼 대학에서 만든 기술을 상용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안철수 교수는 올 초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으로 임용됐다. 부부가 세트로 서울대에 스카우트 되는 것도 유례없는 일이다.
"각자 진행된 사안이다. 총장께서 따로따로 제안하셨다. 융기원은 3월부터 맡을 신임 원장이 당장 필요했기 때문에 안 교수의 임용이 급했고, 나는 카이스트에서 봄학기를 끝내야 하는 상황이어서 서두르지 않았다."
―9월부터 어떤 분야를 강의하나.
"연구윤리와 고급분자 세포생물학이다. 내년부터는 카이스트에서도 진행했던 특허·상표·저작권 등 4가지 주요 지식재산에 관한 강의를 하게 될 거다. 바이오텍과 관련된 법과 정책, 발명에서 상용화, 회사설립에 이르는 과정도 강의한다."
―카이스트측에서 많이 서운해했겠다.
"죄송한 마음뿐이다. 학제간 교육연구의 모델을 만들 수 있게 도와주신 동료교수님들과 학생들에게 감사한다. 카이스트에 의대와 법대가 따로 존재했다면 어려웠을 거다. 뉴트럴(중성적)한 토양이라 가능했던 모델이다."
―지난 봄학기까지 몸담고 있었던 카이스트에서는 그 무렵 학생들의 자살 등 큰 혼란이 있었다.
"카이스트의 문제가 다른 대학들에 비해 더 심각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통계를 봐도 자살률이 타대학보다 높은 게 아니다. 문제가 없지는 않다. 카이스트 학생들이 과학중·과학고 출신이 많고, 2년 만에 조기졸업하는 경우도 많아서 생물학적으로 나이 어린 학생들이 많다. 머리가 아주 좋은 것도 비정상이라는 말이 있듯이, 실제로 지적인 능력은 뛰어난데 정서적으로 불안하거나 기복이 심한 아이들이 있었다. 사회성, 문화적 소양을 기르는 교육이 뒷받침돼야 한다."
- ▲ 나이 마흔에 떠난 미국 유학시절 남편 안철수(오른쪽) 교수, 딸과 함께 찍은 사진. / 안철수연구소 제공
◆슈바이처
부창부수(夫唱婦隨). 둘 다 의과대학을 나왔지만 전공과 다른 분야에서 제2의 인생을 펼치고 있어서다. 안철수는 서울의대에서 생리학을 공부하다 우연히 컴퓨터 바이러스를 발견하고 세계 최초로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을 개발한 인물이다. 이후 20년간 벤처사업가로, 공학 석사와 경영학 석사로 변신을 거듭하다 최근 서울대에 둥지를 틀었다. 책벌레에 말수 적고, 패션에 무심한 성향도 서로 같다. 김 교수는 "밋밋하기 짝이 없는 부부"라며 웃었다.
―나이 마흔에 의사를 관두고 유학을 갔다. 그것도 법학으로.
"결단 과정은 길었다. 막연히 40대엔 새로운 일 해야지, 하는 소망이 있었다. 레지던트 하면서 논문도 열심히 써서 81학번인데도 동료들 중 제일 먼저 부교수가 됐지만 이후로는 일상이 비슷해지더라. 새로운 공부를 시작해야 할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슈바이처가 오르간 연주자, 신학자로 원했던 공부 다한 뒤 남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결심한 나이가 마흔이었다는 전기가 생각났다."
―그걸 실천에 옮기는 건 또 다른 문제다.
"중1이었던 딸은 굉장히 싫어했다. 왜 자기가 엄마 때문에 친구들 다 버리고 학교를 떠나야 하냐며. 남편은 아이디어 자체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필요하다. 자신을 넓혀가는 일이다'고 하더라. 그래도 당장 자기가 불편해지는 일 많으니까 열광하진 않았다.(웃음)"
―경제적으로 뒷받침되니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남편이 회사를 경영할 때라 풍요롭진 않았다. 돈이 많다고 공부를 계속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왜 법학이었나.
"의사의 삶은 대중을 상대하는 것이고 여러 가지 법적인 문제, 윤리적인 딜레마가 뒤따른다. 그런데 의대 다닐 때 그런 공부를 전혀 한 적이 없다. 국사 하나 빼고는 내내 의학 과목만 들었다. 의료 분쟁, 법적 분쟁을 해결하는 방법을 배운 적이 없으니 사회에 나가 어떤 문제에 닥쳐도 그걸 판단할 기본적 도구가 없다."
―구체적인 계기가 있다고 들었다.
"그 무렵 의약분업이 있었다. 그때 내가 성균관의대 삼성병원 교수였는데 분업에 반대하는 서명을 하라고 하더라. 운동장 같은 데 나가 앉아 있기도 했다. 사실 난 의약분업에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병리의사이니 정확한 진단만 내리지 약을 처방하는 건 아니니까. 뭣보다 판단이 잘 서질 않았다. 의사들이 환자를 버리고 이렇게 단체행동을 해도 되는 건가 싶고. 자연스럽게 사회적으로 의사라는 직업에 대해, 윤리에 대해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딸을 데리고 갔다.
"아이 데려다 주고 대학에 가면 첫 강의 시간에 겨우 도착했다. 아이 픽업하러 가야 하니까 또 수업 끝나자마자 학교를 나서야 하고. 도서관에서 밤샘하며 공부해도 모자란데 말이지. 그래서 아이를 데리고 동네 도서관에 다녔다. 살다시피 했다."
―외국어로 새로운 분야를 공부한다는 것이 꽤나 스트레스였을 것 같다.
"1학년을 무사히 보낼 수 있을까 걱정이 많았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하루하루 최대한 공부하는 것밖에는 없었다. 그래야 공포감이 사라졌다. 영어로 말하기가 힘들어서 1학년 땐 늘 가슴을 졸였다. 교수가 언제 발표를 시킬지 모르니. 그래서 2학년 때부터는 작전을 바꿔 먼저 손을 들어 발표했다. 한번은 내 발표에 교수가 이의를 제기하더라. 수업 후 교수를 붙들고 늘어졌다. 내 견해를 어떻게든 관철시켜보려고. 그랬더니 교수가 '걱정마, A학점이니까' 하더라.(웃음)"
―미국에서도 공부벌레란 별명을 얻었겠다.
"그렇지 않다. 미국 로스쿨 학생들 정말 열심히 공부한다. 어마어마한 등록금을 대출받아서 공부해야 하니 마음가짐이 절박하다. 로스쿨에서 좋은 성적을 받아야 좋은 로펌에 취업하고, 그 월급으로 빚을 갚을 수 있으니까. "
◆공부의 神
―혹자는 당신을 두고 '공부의 신(神)'이라고 한다. 공부 잘하는 비법 좀 알려달라.
"딸한테 '공부는 숨을 쉬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숨은 한꺼번에 쉬거나 멈추는 게 아닌 것처럼 공부도 마찬가지다. 어차피 공부의 길로 들어섰다면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한다. 나는 어릴 때부터 길고 오래 공부하는 것에 습관을 들였던 것 같다. 아파도 해야 하는 게 공부였다."
―공부가 제일 쉽다거나 즐거웠던 건가.
"그런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 공부라는 게 마지막에 기쁨을 주지, 그 과정은 얼마나 지루한가. 나 또한 책을 들면 바로 몰입한다거나 공부를 즐거워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모든 사람이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부모님은 어떤 분들이었나.
"아버지가 자영업을 하셨다. 기억나는 건, 초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사오신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이다. 두 살 위 오빠랑 백과사전 넘기면서 봤던 사진, 그림들이 지금도 기억난다. 무슨 사전이 이렇게 멋있나 싶더라.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세계문학전집도 즐겨 읽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상록수, 백치…. 도스토옙스키를 특히 좋아했다."
―어머니는 어떤 분이었나.
"애들 키우는 것은 화초 키우는 것과 같아서 계속 관찰해야 한다는 게 엄마의 지론이었다. 4형제가 말 안 듣고 공부 안 하는 경우 많았지만 참고 기다려주셨다."
―예체능 과목, 혹은 놀고 즐기는 일엔 관심이 없으신가.
"동경만 했다. 특히 등반하고 마라톤 하는 사람들. 히말라야에 올라가고 싶은데 공기가 희박하다고 하니 나는 도저히 가볼 수 없는 세계다. 이사를 많이 다녀서 그런가 여행하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한다. 결혼하고 나서 2~3년 만에 한 번씩 이사를 다녔다."
―왜 의사가 됐나.
"머리가 굉장히 좋았다면 천문학을 했을텐데 내겐 수학적 천재성이 없었다. 몸만 건강했으면 우주비행사를 지망했을지도 모른다. 인간이 처음 달나라에 갔을 때라 우주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의사는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엄마도, 이모도 직업을 가진 적이 없어 나는 반드시 전문직 여성이 되고 싶었다."
―병리학을 전공했다.
"환자에 대한 정확한 진단을 내리는 게 병리의사의 역할이다. 진단이 틀리면 그걸 바탕으로 한 치료는 다 엉망이 된다. 내 진단을 토대로 임상의사가 치료를 하니 그들이 병리의사의 클라이언트인 셈이다. 진단이 한 번도 틀리지 않는 것만으로는 존경받지 못한다. 이를테면 내가 당뇨라고 진단했는데, 임상의사는 환자 혈당을 재보니 당뇨가 아니었다고 반발한다. 그런데 1주일 뒤 환자의 혈당을 다시 재보니 당뇨 초기 증세가 나타난다. 그래야 임상의사가 병리의사를 존경하게 된다. 판단 내리기 애매했던 슬라이드는 집에 와서도 생각날 만큼 사람을 초조하게 한다. 그만큼 책임이 큰일이었지만 즐겁고 보람 있었다."
―의학계는 남성적 문화가 강하고, 위계질서도 강하다. 여성으로 어떻게 견뎌냈나.
"우리 때 서울의대 여학생 비율이 10%였다. 여자 화장실이 한 건물에 한 개밖에 없었다. 결혼, 출산으로 여학생들이 전문의가 되지 못하고 중도탈락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출산휴가가 법적으로 60일이었는데 여성 전공의들은 4주, 그러니까 28일 만에 나와 근무했다. 남자 전공의들, 교수들에게 민폐를 끼치면 안 되니까. 남자와 비슷한 실력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잘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각오로 일했다. 여자라서 안된다는 말 듣기 싫더라."
- ▲ 서울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김미경 교수에게“학창 시절 1등만 하는 엄친딸(엄마 친구의 딸)이었겠다”고 하자“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많아 1등은 못했다. 처음엔 부진했다가 나중에 성적이 오른 걸로 보면 내게 끈기와 인내는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 이명원 기자 mwlee@chosun.com
◆밋밋한 철수씨
―서울대 재학시절 가톨릭 학생회 진료봉사서클에서 안철수를 만났다.
"진료 서클에서 1년 선배인 남편이 고혈압에 대해 특강을 하더라. 똑똑하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작전이었던 것 같은데, 내 공부를 많이 도와줬다. 도움될 만한 책을 추천해주고, 다 읽었다고 하면 질문을 막 던졌다. 전에는 기숙사에서 공부하던 사람이 언제부턴가 도서관, 내 옆자리에 앉아 있더라. 정말 옛날 얘기다."
―결혼 직후 안철수가 V3 백신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부산서 (시)부모님이 올라오셨는데 백신 프로그램 짜야 한다고 해서 모두 식당에도 못 가고 하염없이 기다렸던 기억이 난다. 군의관으로 군대 갈 때 송별회 같은 것도 못했다. 군대 가는 날 아침까지 백신 프로그램 업데이트하더니 허둥지둥 지하철 타고 서울역으로 달려가더라. 기차 태워 보내고 혼자 돌아오는데 무지 섭섭했다. 한번 몰두하기 시작하면 다른 생각을 못하는 사람이다. 멀티태스킹이 되지 않으니 내가 손해보는 일이 많았다.(웃음) 그래도 괜찮다."
―뭐가 괜찮은가. 당장 배우자의 몸이 힘들어지는데.
"내가 덜 바쁘니까. 나에게도 큰 희생은 아니었다.(웃음) 가족이란 서로의 성취를 위해 한발씩 양보하고 타협해야 한다."
―남편이 의사를 그만둘 때 크게 아쉬워했다고 들었다.
"남편이 남들 다 가는 임상의사의 길을 버리고 생리학을 선택할 때 '이 사람은 노벨상도 받을 수 있겠구나' 하는 확신이 있었다. 그 분야에서도 남편은 V3 같은 획기적인 업적을 이룰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컴퓨터 관련 일을 한다니까 안타깝더라. 크게 반대는 못했다. 그렇게 결심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안철수연구소'의 시작은 매우 작았다. 아내의 의사 월급으로 재정을 메웠다던데.
"신혼집에 사무실을 차렸다. 남편과 직원 1명이 4인용 식탁에서 시작한 셈이다. 내 월급 타서 직원 월급 줬다.(웃음) 직원이 7명 되니까 사무실 임대해 나가더라. 고생스러웠다는 기억은 없다. 그 정도야 다 하고 사는 거 아닐까."
―안철수연구소가 성장일로에 있던 90년대 초반 남편이 급성간염으로 쓰러졌다. 두 번째는 3개월간 입원했을 만큼 심각한 상태였다더라.
"남편이 미국에서 유학하며 서울의 안철수연구소도 꾸려가야 했던 상황이라 미국 서울을 한 달에 한 번씩 오갔다. 아플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쓰러졌을 땐 상태가 너무 나빠져서 신약 임상시험에 가담해야 하나, 하는 논의까지 나왔다. 명색이 의사지만 나도 겁나더라. 다행히 바닥을 치고 조금씩 좋아졌다. 생로병사를 겪다 보면 사람이 겸손해지는 것 같다."
◆나는 '파쇼엄마'
―안철수는 국무총리 후보에 오르내릴 만큼 인지도가 높고, 젊은이들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으로 선정되기도 한다. 질투심을 느껴본 적 없나.
"처음부터 남편이 나보다 우수했기 때문에 그런 거 없다.(웃음)"
―정치권의 안철수 영입 경쟁이 치열하다. 남편의 정치 진출을 어떻게 생각하나.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본다. 내가 아는 남편의 성향이 그렇고, 지금 대학원장으로 해결하고 키워가야 할 업무만으로도 너무나 바쁜 사람이다."
―정치권의 러브콜을 두고 서로 의논 안 하시나?
"나도 신문 보고 아는 경우가 많다. 워낙 바빠서 만나기도 힘들다. 남편이 어디 가 있는지 모르면 인터넷을 검색한다.(웃음)"
―딸이 미국 아이비 리그에 속한 대학에 다닌다고 들었다.
"화학과 수학 석사 과정에 있다. 남편과 국화빵으로 생겼고 성격도 비슷하다. 전자제품 만지는 거 좋아하고 게임도 둘이 같이 하고. 부자간인지, 부녀간인지 모를 만큼 성격도 남자 같다."
―딸과 의견충돌이 있을 땐 어떻게 하나.
"대부분 내 고집을 관철시켰던 것 같다. 파쇼엄마!(웃음) 딸을 너무 엄격하게 대한 것 같아 미안하다. 갈수록 딸이 중요한 존재가 되어간다. 딸과 말이 통해야 하니, 수학 못하는 내가 요즘 수학책을 들여다보고 있다."
―일과 육아를 병행하며 전쟁하듯 자신의 커리어를 쌓아가는 여성들이 많다.
"밤새 공부하다가 12층짜리 서울대 병원 건물을 올려다보면서 나도 저기 가서 의사 가운 입고 일할 수 있을까, 했던 시절이 있었다. 쉽고 즐거웠던 기억보다 춥고 배고팠던 기억이 더 오래 남는다. 아이를 낳으면 분명 고생스럽고 힘들지만 굉장히 값진 경험,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때는 언제인가.
"법학 공부하고 미국에서 돌아왔을 때. 융합을 강조하는 시대이긴 하지만 실제로 나 같은 사람을 한국 사회가 받아들이는 게 쉬운 일이 아니더라. 학제간 융합이 필요하다면서도 법대에서는 법학 연구에 올인할 사람을 찾고, 의대에서는 의학에 올인할 사람을 찾으니까. 카이스트로 가기까지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쓸모없는 사람 될까 봐…. 남편이 위로가 많이 됐다. 남들이 안 하던 일, 남들이 알아주지 않은 일 했지만 그걸 완성하는 모습을 봤기 때문에 자신감을 얻었다."
―끝까지 남편 자랑이시다. 의학, 법학을 둘 다 공부한 당신은 '사랑'을 어떻게 정의할지 궁금하다.
"아, 어렵다. 글쎄, 파트너십 아닐까. 미국 판례에 파트너십에 대한 정의가 있다. 파트너와 파트너의 관계는 최상의 믿음, 신뢰의 관계다. 심지어 파트너십이 해제된 다음에도 지속되는 것이 파트너 관계다. 파트너는 두 개 이상의 개체이지만 실제로는 한몸으로 여겨져서, 한 명이 빚을 지면 공동으로 책임지고, 수익을 내면 공동으로 누린다. 부부도 그와 같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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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1일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9월부터 모교인 서울대 강단에 서는 김미경 교수가 자신의 유학생활을 이야기하고 있다. 의사였던 김 교수는 40대에 미국 유학길에 올라 법학을 공부한 화재의 인물로 안철수의 부인이다. /이명원 기자 mwl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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