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의 신 디오니소스는 죽은 어머니의 몸에서 꺼내어져 아버지의 몸 속에서 산달을 채우고 태어난 비극의 주인공이었다. 남편 제우스가 세멜레라는 인간 여인과 바람을 피운다는 사실을 알아낸 헤라는 교활한 속임수를 통해 세멜레를 죽음으로 몰아갔다. 제우스는 한 줌 재가 되어 사그라진 세멜레의 몸에서 태아를 꺼내 자신의 넓적다리에 넣어 아기를 살려낸 뒤, 세멜레의 동생인 이노에게 양육을 부탁했다. 하지만 헤라의 분노는 세멜레를 죽인 것으로는 부족했다. 그녀는 이노를 미치게 해서 디오니소스를 키울 수 없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 사실을 재빨리 알아차린 제우스가 다시 디오니소스를 구해내 니사 산에 사는 님프들에게 맡겨 몰래 키우도록 했지만, 헤라는 다시 디오니소스에게까지 광기(狂氣)를 불어넣었다. 헤라의 저주로 디오니소스는 미쳐서 이곳 저곳을 떠돌 수 밖에 없었다. 디오니소스의 방랑은 그를 불쌍히 여긴 레아 여신-제우스와 헤라의 어머니-이 직접 나서 저주를 풀어준 뒤에야 겨우 끝이 날 수 있었다. - 그리스 신화 중 ‘디오니소스 이야기’ 중에서
술의 신, 디오니소스의 지난한 운명과 광기
대개의 영웅 설화에는 역경과 고난이 따르기 마련이지만, 디오니소스처럼 비극적인 신은 드뭅니다. 그는 태어나기도 전에 어머니를 잃었고, 그를 돌봐준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 자신조차도 저주로 인해 오랫동안 광기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디오니소스가 술의 신이라는 것을 감안해 볼 때, 그의 지난한 운명과 광기는 인류 역사에서 술의 함의를 보여주는 듯 싶어 의미심장합니다. | |
술의 신 디오니소스, 머리에 포도송이로 만든 관을 쓰고 있다. 로마신화에서는 바카스라고 한다. (왼쪽)
발효가 진행중인 와인을 일부 뽑아내고 있다. 부글부글 올라오는 거품은 발효과정에서 생기는 이산화탄소이다.
사진에서 보이는 스테인레스 설비가 발효통이다. 발효가 끝나면 참나무통으로 옮겨 숙성과정을 진행한다. (오른쪽)
<출처: (CC) Marie-Lan Nguyen(왼쪽)>
우리나라 주세법에 따르면 알코올이 1% 이상 함유된 음료를 '술(酒)'로 정의합니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디오니소스가 포도를 이용해 술을 만드는 방법을 알아내어 사람들에게 전파했다고 되어 있으나, 정작 주당들이 고마워해야 할 대상은 디오니소스가 아니라 포도에 함유된 당을 분해하여 에탄올을 만들어내는 미생물들입니다. 미생물이 유기물을 분해하는 과정 중 인간에게 유용한 과정을 '발효'라고 하는데, 알코올 역시 미생물들의 발효 과정을 통해 만들어집니다.
알코올을 만드는 미생물의 발효과정
알코올 발효를 수행하는 대표적인 미생물은 효모(yeast)입니다. 포도즙에 효모를 넣고 밀봉하면 효모는 포도즙 속에 포함된 당을 분해하여 살아가는데 필요한 에너지를 얻습니다. 포도당의 화학식은 C6H12O6입니다. 산소가 충분한 환경에서는 포도당이 완전히 분해되어 최종산물로 이산화탄소(CO2)와 물(H2O)이 생성되지만, 밀봉된 통 안에서는 산소가 부족하기 때문에 미생물은 포도당을 완전히 분해하지 못합니다. 이 경우에는 포도당 분해 산물로 이산화탄소와 함께 알코올의 일종인 에탄올(C2H5OH)이 생성되지요. 조금 복잡한가요? 그럼 예를 들어 이해해봅시다.
땔감으로 커다란 나무를 베었다고 생각해봅시다. 시간이 충분하다면 나무를 아궁이에 때기 쉽도록 작게 잘라서 창고에 보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무를 베었는데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처럼 날씨가 흐려지면 어떨까요? 나무는 젖으면 불이 잘 안 붙기 때문에 가능하면 빠른 시간 내에 창고에 넣어야 하겠지요. 이럴 경우에는 나무를 작게 자를 시간이 없습니다. 땔감으로 쓰기에는 너무 크지만 창고에는 들어갈 수 있을만한 크기로 큼직하게 잘라서 넣어둘 수 밖에 없지요. 이와 비슷하게 포도당을 분해하는 발효 과정에서 산소가 충분하면 포도당은 단순한 구조를 지닌 물과 이산화탄소로 완전히 분해되지만, 산소가 부족한 환경에서는 그보다는 좀더 복잡한 구조를 지닌 알코올이 만들어지는 것이지요. 반대로 산소가 충분하면 포도당이 완전히 분해되기 때문에 알코올 발효는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포도주를 빚을 때 포도즙을 나무통에 넣고 뚜껑을 꼭 닫아 두는 것은 산소와의 접촉을 막아 알코올이 생성되도록 하기 위함이랍니다. | |
포도당의 분자구조(왼쪽), 포도당이 분해되면 에탄올2개(오른쪽위)와 이산화탄소2개(오른쪽아래)가 생긴다.
구조 그림에서 흰색은 수소, 빨간색은 산소, 검은색은 탄소이다.
효모를 비롯해 알코올 발효를 하는 미생물들은 과일이나 곡식 등에 포함된 당을 분해해 알코올을 만듭니다. 이 때 곡식의 경우에는 다당류인 녹말의 형태로 당이 저장되어 있기 때문에 발효에 앞서 녹말을 단당류로 잘게 자르는 당화(糖化) 과정을 거쳐야 발효가 잘 일어납니다. 당화는 엿기름 속에 들어 있는 효소를 이용해 일으키기도 하고, 사람이 입으로 씹어서 일으키기도 합니다. 밥을 여러 번 꼭꼭 씹다 보면 단맛이 느껴지는 경험을 해보신 적이 있지요? 이는 쌀에 포함된 녹말이 침 속에 들어 있는 아밀라아제(amylase)에 의해 당화되어 포도당으로 분해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랍니다.
숙취의 원인은 알코올이 분해될 때 생기는 아세트알데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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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는 알코올을 인공적으로 합성하기도 하지만, 전통적인 양조주는 이처럼 미생물들의 알코올 발효를 통해 만들어집니다. 술을 마시게 되면 술 속에 포함되어 있던 알코올은 위와 장을 통해 흡수되어 혈액을 타고 간으로 옮겨집니다. 그러면 간세포 속에 들어 있는 ADH(알코올 탈수효소)가 알코올을 분해하여 아세트알데히드를 만들어냅니다. 그런데 아세트알데히드는 독성을 지니는 물질이기 때문에 다시 ALDH(아세트알데히드 분해효소)에 의해 최종적으로 아세트산과 물로 분해된 뒤 소변을 통해 배설됩니다.
특히나 술 마신 다음 날 숙취로 인한 불편함은 아세트알데히드가 제대로 분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에 술에 취하다, 술이 깨다, 술에 약하다, 숙취로 고생하다, 라는 말은 체내에 들어온 알코올이 아세트알데히드를 거쳐 아세트산과 물로 분해되는 과정이 얼마나 빨리, 얼마나 제대로 일어나고 있는지를 나타내는 말이지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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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취의 근원인 아세트알데히드의 구조 | |
알코올은 어떻게 뇌를 느슨하게 하게 만드나
사람들은 술을 빌어 평소에는 하지 못했던 것을 합니다. 술이 얼근히 들어가면 세상이 돈짝만하게 보이고 평소에는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이 술술 나옵니다. 사람마다 취한 뒤의 모습은 다르지만 어쨌든 평소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술에 취하면 왜 행동에 변화가 나타나는 걸까요?
쉽게 말하자면 ‘술에 취하는’ 현상은 뇌가 알코올에 의해 교란된 상태입니다. 체내로 흡수된 알코올이 간의 처리 용량을 넘어설 경우, 남아도는 혈액 속의 알코올은 온몸으로 퍼지는데 일부는 뇌에도 도달합니다. 알코올은 뇌의 신경세포에 존재하는 신경전달물질에 영향을 미치는 향정신성 약물입니다. 물론 우리의 뇌에는 알코올로부터 신경세포를 보호하기 위해 알코올을 분해하는 효소들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분해 속도보다 술을 마시는 속도가 빠르면 영향을 받기 마련입니다. | |
술을 많이 마시면 우리의 뇌는 커피가 쏟아진 키보드와 비슷하게 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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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적인 경우, 신경세포는 말단 부위에서 다양한 화학물질을 분비하여 인접한 세포에 정보를 전달하고 활성을 변화시킵니다. 이 과정은 매우 정확하고 정교하게 조절되어 있지요. 그런데 에탄올은 흥분성 신경전달물질인 글루타메이트에 대해서는 이를 억제시키는 길항제로 작용하고, 억제성 신경전달물질인 GABA에 대해서는 이와 비슷한 작용을 하는 효현제로 기능한다고 합니다.
혹 컴퓨터 키보드에 음료수를 엎지른 적이 있으신가요? 언젠가 컴퓨터로 작업을 하던 도중 커피잔을 엎질러 키보드에 커피를 쏟은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키보드가 이상하게 작동하더군요. A를 눌렀는데 S가 찍히고, ‘가’를 입력했는데 ‘5ㅣ’처럼 이상한 글자가 찍히는 것처럼 말이에요. 이는 자판 사이에 스며든 액체로 인해 자판 개개의 압력 감지 시스템과 컴퓨터 본체와의 정보 전달에 교란이 발생해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술을 많이 마시게 되면 우리의 뇌는 물을 뒤집어 쓴 키보드와 비슷한 현상이 발생합니다. | |
뇌로 침투한 알코올은 감정 조절 중추에 영향을 미쳐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만들기도 하고, 몸의 운동을 조절하는 소뇌로 흡수된 알코올은 몸을 비틀거리게 하고 똑바로 걷지 못하게 하며, 기억과 관련이 깊은 해마에 침투한 알코올은 술 마신 다음날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단기 기억상실증을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이 과정이 계속 반복되다 보면 알코올에 의해 신경세포가 완전히 손상되어서 술을 마시지 않아도 기억이 툭툭 끊기는 코르사코프 증후군에 걸릴 수도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것은 알코올이 호흡 중추까지 침범하는 경우로, 이는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디오니소스의 광기와 미덕, 술의 양면성
이처럼 과도한 음주는 분명 몸에 해롭습니다. 하지만 적은 양의 와인을 천천히 마시는 것은 혈액순환을 개선시키고 심장병을 일으킬 확률을 낮춰줄 수 있다는 보고도 있습니다. 또한 사회적으로도 음주를 적절히 즐기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평균 수입이 더 많고 사회에서도 더 인정받는 사람이라는 연구 보고도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에게 억지로 술을 끊게 하면 오히려 소득이 줄어들 뿐만 아니라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치도 축소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아마도 술이 혈액 순환을 자극하는 것처럼, 마음의 윤활유로 작용해 다른 사람들과의 어울림을 쉽게 해 주는 기능을 하기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음주’가 아니라 ‘적절한 음주’라는 문구입니다. 술은 잘 마시면 백약 중 으뜸이지만, 잘못 마시게 되면 백약을 무효로 만들 수도 있는 물질입니다. 절제할 줄 아는 디오니소스는 존경받는 올림포스의 12신 중 하나이지만, 광기에 사로잡힌 디오니소스는 키워준 은인들까지 해치는 무서운 존재이니까요. | |
- 글 이은희 / 과학저술가
- <하리하라의 생물학 카페>, <과학 읽어주는 여자>, <하리하라의 과학 블로그> 등 많은 과학 도서를 저술하였고, 2003년에 과학 기술도서상을 수상하였다. 연세대학교 생물학과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과학기술학 협동 과정에서 박사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발행일 2009.1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