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tural science /scientist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Nicolaus Copernicus) 1473 ~ 1543

나 그 네 2012. 3. 1. 14:05

“지구는 우주의 중심점이라는 엄청난 특권을 포기해야 했다. 이제 인간은 엄청난 위기에 봉착했다. 낙원으로의 복귀, 종교적 믿음에 대한 확신, 거룩함, 죄 없는 세상, 이런 것들이 모두 일장춘몽으로 끝날 위기에 놓인 것이다. 새로운 우주관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사상 유례가 없는 사고의 자유과 감성의 위대함을 일깨워야 하는 일이다.” (지동설의 부각에 대한 괴테의 언급 중에서)

 

 

천문학자로서의 소양을 쌓은 크라쿠프 시절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는 1473년 폴란드 왕국의 프로이센 지방 토룬 시에서, 독일계 상인 아버지 슬하의 막내로 태어났다. 어머니도 부유한 상인 집안 출신이었다.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는 라틴어이며, 폴란드에서는 ‘미코와이 코페르니크’로 부른다. 코페르니쿠스는 폴란드어, 독일어, 라틴어에 능통했고 이탈리아어와 그리스어도 어려움 없이 구사했다.

 

현존하는 그의 문헌들 대부분은 당시 유럽의 학문 공용어인 라틴어로 쓴 것들이며, 독일어로 쓴 편지가 일부 있다. 그가 태어난 토룬이 독일어권이었기에 그의 모어(母語)가 독일어였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공식적으로 그는 ‘폴란드 출신의 천문학자’다. 코페르니쿠스가 10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고향에서 학교를 다닌 뒤 1491년 폴란드 남부 크라쿠프 대학에 입학하여 4년간 수학, 천문학, 고전학 등을 공부했다. 바르미아 주교였던 외삼촌의 도움 덕분이었다.


 

코페르니쿠스는 크라쿠프 대학 철학교수 알베르트 브루제브스키가 학교 바깥에서 개설한 천문학 강좌에 참여하고 다른 몇 명의 교수들에게도 천문학을 배웠다. 크라쿠프에서 그는 기하학, 대수학, 우주구조론, 천문 계산, 광학 등을 배우고 고대의 철학적 자연학을 익히면서 천문학자로서의 소양을 쌓았다. 또한 이 시기부터 그는 천문학 문헌을 수집하여 탐독하며 기존 천문이론들 사이의 모순점을 인식하게 되었다.

 

 

짧은 논문을 통해 지동설에 관한 구상 세워

코페르니쿠스가 4년간 공부한 크라쿠프대학
(오늘날 야기엘론스키 대학)에 있는 그의 동상


코페르니쿠스는 외삼촌의 도움으로 1496년 이탈리아로 가서 볼로냐 대학에서 신학, 법학, 고전학을 공부했지만 주된 관심은 천문학이었다. 파도바 대학, 페라라 대학 등에서도 공부한 그는 1500년 로마에 머무르며 수학과 천문학을 강의했다. 페라라 대학에서 교회법학 박사학위를 받고 의학도 공부한 뒤 귀국한 그는 1505년경부터 플라우엔부르크 성당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의학 지식을 바탕으로 병든 사람을 치료하고, 법학 지식으로 교구 행정에 참여했으며, 수학 지식으로 통화(通貨)와 경제 분야에서도 활동했다. 성당 참사회 입장에서 그는 매 우 쓸모가 많은 ‘준비된 인재’였다.

 

1513년 코페르니쿠스는 성당 참사회의 상회에서 800개의 돌과 석회를 구입했다. 천문 관측을 위한 지붕 없는 탑을 쌓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당시 천문 관측기술의 한계 탓에, 그의 관측이 새로운 천문이론을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1514년에는 교황의 비서관으로부터 교회력 개정을 위한 회의 참석을 요청 받았지만 거절했고, 다만 달력 개정을 위해서는 태양과 달의 관계를 정확히 밝혀야 한다는 의견만 제출했다.

 

1510~1514년 사이 코페르니쿠스는 태양 중심 천문체계에 관한 개략적인 생각을 발전시켜 나갔다. 그리고 그것을 짧은 논문으로 작성했다. ‘천체 운동에 관해 구성한 가설에 대한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의 소론(小論)’, 줄여서 [소론]이라 일컫는 논문이다. 논문 제목은 코페르니쿠스 자신이 아니라 그것을 필사하여 유포시킨 이들이 붙인 것이다. 코페르니쿠스는 이 논문을 소수의 지인들에게만 배포했다(정식 인쇄본 출간은 1878년). 이 논문에서 그는 본격적인 수학적 설명을 시도하지는 않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 천문학 체계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지구가 움직이는 태양 중심 체계를 가설로 제시했다.

 

 

점진적 혁명,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도는 별에 지나지 않는다.”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중심체계, 즉 지동설을 구상하게 된 것은 이탈리아 유학 시기 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아, 우주가 수학적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확신하게 된 것이 중요한 계기였다. 또한 고대 문헌을 조사하면서 이미 태양을 중심으로 하는 우주체계를 생각한 고대인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계기였다. 남은 문제는 새로운 우주체계에서 행성의 위치를 수학적으로 풀어나가는 것이었다. [소론]을 내놓은 이후 꾸준한 연구를 통해 코페르니쿠스는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를 1532년경 거의 마무리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책에서 그는 먼저 우주와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얘기한다. 또한 지구는 스스로 돌면서 태양 주위를 1년에 한 번 도는 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만물의 중심에는 태양이 있다. 전체를 동시에 밝혀주는 휘황찬란한 신전이 자리 잡기에 그보다 더 좋은 자리가 또 어디 있단 말인가. 혹자는 그것을 빛이라 불렀고, 혹자는 영혼이라 불렀고, 또 어떤 이는 세상의 길잡이라 불렀으니 그 얼마나 적절한 표현인가. 태양은 왕좌에서 자기 주위를 선회하는 별들의 무리를 내려다본다.”

 

코페르니쿠스의 새로운 체계는 전통적인 교회의 입장과 다른 것이었지만, 적어도 당대에는 탄압받지 않았다. 오히려 교황청의 일부 인사들은 그의 이론을 옹호하기까지 했다. 물론 비판이 없지는 않았다. 예컨대 그와 동시대인인 종교개혁가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하늘이나 하늘의 덮개, 해와 달이 아니라 지구가 회전한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발버둥치는 오만불손한 주장이 나왔다. 그 바보는 천문학 전체가 뒷걸음치는 걸 바라고 있다.” 코페르니쿠스의 새로운 체계가 우주에 대한 인간의 인식과 세계관을 바꾸어놓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요컨대 그것은 ‘점진적 혁명’이었다.

 

종교개혁이 많은 신자들로 하여금 교황청에 등 돌리게 만들었다면, 코페르니쿠스의 우주론은 신으로부터 등 돌리게 만들 수 있는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것이었다.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1543)에 실린 태양중심체계 그림

 

그것은 지구와 그곳에 사는 인간의 우주적 의미를 보잘것없는 차원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었다. 인간은 정말로 신의 사랑을 독자치하는 존재인가? 무한한 우주를 창조한 신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왜 굳이 지구로 보냈단 말인가?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는 서양 중세의 우주관, 인간관, 세계관의 뿌리를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교황청 금서가 된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

2005년에 발굴된 코페르니쿠스의 유골을 바탕으로
재현한 그의 말년의 얼굴


과학사가 토머스 S. 쿤은 코페르니쿠스가 “최초의 근대 천문학자이면서 마지막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자였다”고 평가한다. 사실 코페르니쿠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 체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고, 천문 계산에서도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모든 천체가 붙어 있는 투명한 수정구(水晶球)들이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또한 행성의 불규칙한 운동을 여러 원들의 결합을 통해 설명하려 했다는 점에서 프톨레마이오스 체계를 따랐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는 행성들을 각각 따로 다루었던 프톨레마이오스와 달리, 태양을 중심으로 한 행성 체계를 설정함으로써 ‘행성들의 관계’를 부여했다.

 

1539년 5월 젊은 천문학자, 수학자 레티쿠스가 코페르니쿠스를 찾아왔다. 코페르니쿠스는 레티쿠스에게 자신의 노트를 보여주었다. 레티쿠스는 코페르니쿠스의 새로운 체계에 대한 확신을 굳게 지니게 되었다. 그는 코페르니쿠스의 체계에 관한 해설서를 집필해 1540년에 출간하고, 코페르니쿠스에게 노트를 책으로 출간하자고 강력히 권했다.

 

결국 1542년부터 레티쿠스는 뉘른베르크에서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 인쇄 작업을 감독했지만 루터파 신학자 안드레아 오시안더에게 감독 작업을 맡겨 이듬해 출간됐다. 오시안더는 교회와 마찰을 일으킬 것을 걱정하며 코페르니쿠스의 허락을 받지 않고 서문을 써넣었다. 그는 서문에서 코페르니쿠스의 체계가 ‘계산상의 편의를 위한 추상적인 가설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1543년 프라우엔부르크에서 세상을 떠난 코페르니쿠스는 그곳 성당에 묻힌 것으로 알려졌으나 2005년에 와서야 성당 지하에서 유골 일부가 발견됐다. 스웨덴 웁살라 대학 도서관에 있는 코페르니쿠스가 소장했던 책에서 찾은 머리카락과 유골의 DNA가 일치했다. 전설에 따르면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 첫 인쇄본을 그의 손에 쥐어주자, 뇌졸중으로 혼수상태에 빠져있던 그가 잠깐 깨어났다가 곧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코페르니쿠스는 생전에 천문학자로서 어느 정도 명성을 누렸지만, 그의 공적(公的) 생애는 어디까지나 교회 회계감사, 평의원, 교구장 등 충실한 교회 성직자였다.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는 1616년 교황청의 금서 목록에 올랐다가 19세기 초에 금서에서 풀려났다.

 

 

 

표정훈 / 저술가, 번역가
글쓴이 표정훈씨는 서강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뒤 번역, 저술, 칼럼과 서평 집필을 하고 있다. 이를 위해 2만 권의 장서를 갖춘 서가를 검색하는 데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다. 한국 예술종합학교에서 강의했으며 [중국의 자유 전통], [한 권으로 읽는 브리태니커] 등 여러 권의 책을 번역하고 [탐서주의자의 책], [책은 나름의 운명을 지닌다] 등 여러 권의 책을 썼다.

발행일  2010.03.09

 

 

 

인물사 연표

유럽, 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 한국
1517년

마르틴 루터 종교개혁 시작

15??년

황진이 송도 삼절로 불림

1519년

페르디난드 마젤란 세계일주 항해

1534년

헨리8세 영국국교회 성립

1545년

문정왕후 명종 수렴청정

1543년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지동설 발표

1559년

임꺽정 임꺽정의 난

1562년

카트린 드 메디치 프랑스 위그노 전쟁 발발

1565년

악바르 대제 인도 무굴제국 영토확장

1568년

이황 [성학십도] 저술

1575년

이이 [성학집요] 저술

1582년

마테오 리치 동서 문화교류에 기여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 일본 전국 통일

1585년

정철 [관동별곡] 지음

1589년

허난설헌 27세로 요절

1598년

앙리 4세 낭트칙령으로 신교 자유허용

1592년

선조 임진왜란 발발

1598년

이순신 노량해전에서 전사

1600년

엘리자베스 1세 동인도회사 설립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 에도 막부 수립

1608년

광해군 대동법 시행

1601년

윌리엄 셰익스피어 [햄릿] 발표

1610년

허준 [동의보감] 완성

1605년

미겔 데 세르반테스 [돈 키호테] 출간

1616년

청태조 누르하치 후금 건국

1612년

허균 [홍길동전] 저술

1623년

인조 인조반정

해당인물이 포함된 시대의 부분 연표가 기본적으로 보이며, 전체보기를 누르시면 전 시대의 연표를 볼 수 있습니다.
붉은색 표시가 있는 인물을 클릭하면 해당 인물의 스토리를 만날 수 있습니다.

인물사 연표 전체보기

관련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