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ving daily/조선왕조, 왕릉

위화도 회군

나 그 네 2012. 4. 8. 11:36

 

위화도회군이란 1388년(우왕 14)5월 요동정벌에 나선 우군도통사 이성계가 압록강 하류 위화도에서 군사를 회군한 사건을 말합니다.

 

  우왕 즉위 뒤 고려의 외교는 친명에서 친원으로 바뀌어 고려 명나라 관계가 상당히 악화되었습니다. 1388년 3월 명나라가 쌍성총관부 관하지역을 여유하기 위해 철령위 설치를 통고하자, 고려에서 최영이 중심이 되어 명나라 대 고려가 전진기지인 요동정벌론이 제기 되었습니다. 이에 우왕은 최영을 팔도도통사로 삼아 평양에 나아가 독전하게 하고 조민수를 좌군도통사,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삼아 정벌군이 이끌고 출정하게 하였습니다.

 

  이성계는 우왕과 최영이 요동을 정벌하기로 결정하자, 4가지 근거를 들며 반대하였습니다.

첫째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에 거역할 수 없다.

둘째 여름에 군사를 동원할 수 없다.

셋째 온 나라 군사를 동원하여 멀리 정벌하면, 왜적이 그 허술한 틈을 탈 것이다.

넷째 지금 한창 장마철이므로 활욘 아교가 풀어지고, 많은 군사들은 역병을 앓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요동 출정은 본래 이성계의 본의와 소원은 아니지만 출정군은 음력 4월 18일 평야을 출발하여 음력 5월 7일 압록강 하류 위화도에 진주하였습니다. 때마침 큰비를 만나 강물이 범람하고 사졸 중 환자가 발생하게 되자 이성계는 군사를 더 이상 진군시키지 않고 좌군 도통사 조민수와 상의, 요동까지는 많은 강은 건너야 하는데 장마철이라 군량의 운반이 곤란하다는 등 우왕에게 회군을 청하지만 평양에 있는 팔도 도통사 최영과 우왕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도리어 속히 진군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래도 이성계 등은 또 한번 평양에 사람을 보내어 회군시킬 것을 청하고 허락을 구하였으나 평양에서는 역시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일이 이에 이르자 이성계는 마침내 회군의 뜻을 결심하고 드디어 음력 5월 22일 회군하였습니다.

 

이 돌연한 회군에 왕과 최영은 당황하여 평양에서 송도로 급히 귀경하여, 이성계군에 급히 반격하였습니다. 그러나 최영은 회군 9일 만인 음력 6월 1일에 개경에 당도한 이성계에게 잡혀 고봉현(고양)에 귀양 보내졌으며, 우왕도 강화도로 추방당하였습니다.

 

  이성계의 이러한 거사는 신.구 세력의 교체를 의미하는 동시에, 후일 조선 왕조 창건의 기초적 계단이 확립 되었습니다. 이를 말미암아 14세기 말엽에 있었던 홍건적과 왜구들의 침탈을 격퇴시킨 이성계 등의 무장들을 주축으로 하는 신흥 무인 세력들은 친원 권문세족에 대항하기 위해 성리학 신유학을 수입하여 학식을 연마해 중앙 정계로 진출한 친명 신진 사대부들과 연계하여 기정의 정치 세력(최영 등)을 숙청하였습니다.

 

  그들은 정치적인 기반을 공고히 한 이후에 1392영 공양왕에게 강제로 선위를 요구하여 조선을 개국하게 되는 대사건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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