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ving daily/조선왕조, 왕릉

조선시대 사림의 등장 배경과 사화

나 그 네 2012. 5. 18. 12:40

훈구와 사림

 

훈구(勳舊):

세조 집권 시기에 다섯차례의 공신 책봉으로 그의 가족 및 인척들이 대거 정계로 진출하였는데, 이들은 세조 대 이래로 정권을 독점하고 사회경제적 특권을 누리면서 지배 집단을 형성하였다. 이들을 흔히

`훈구파(勳舊派)`라고 부릅니다  훈구파 가운데에서도 한명회, 신숙주, 구치관 등은 당대 최고의 정치권력을 행사하였습니다 

 

사림(士林):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의리로써 배격하고 초야에 묻혀 성리학에 몰두했던 이들이 서서히 지방의 지주층으로

성장해 가면서 다시 일어설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길재의 학통을 이어받은 이들은  성종대에 이르러 먼저 영남 일대를 배경으로 크게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이들을 흔히 `사림파(士林派)`라고 부릅니다 .

 

 

간단히 말해  훈구란 정치 지배세력이며  사림은  야권또는 재야 세력이라 보면 됩니다

그 시작은  훈구는 세조(수양대군)의 왕위찬탈게획에 가담한  정치 세력이 조선조 오백년동안 지배계급으로 지탱해온 대규모 정치 집단 이며 사림은  정치 지배권에서 밀려난 지방  지식계층으로 이루어진집단 입니다   

 

사림이 한일

 

사림은 대부분이 조선의 건국에 협력하지 않고 지방에 내려간 학자들로, 중소지주층을 이루고 있었다. 이들은 대농장을 소유하고 있었던 훈구세력과는 달리 생업에 힘쓰면서 학문을 해야 했기 때문에, 훈구 세력에 비해 경제적 기반이 취약했다.

 

16세기이후로 농사직설과 같은 농서가 간행되고,

목화와 약초 등의 재배가 널리 퍼지면서, 농산물을 사고 파는 장시가 발달하여 전국적으로 형성되었다.

 

또한 저수지와 같은 농업 기반시설 확충으로 남부 일부 지역에만 보급 되었던 새로운 중국의 논농사 기술인 모내기법이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이모작이 널리 퍼지면서 농업생산성이 향상 

 

 

향촌에 살면서 중소 지주로서 학문과 교육에 힘쓰고 있었다.

유향소를 구성하여 지방의 백성들을 교화하고 수령의 자문에 응하는 등 향촌의 행정을 도왔다.

사림은 향약을 보급하는 데에도 힘썼다.

계의 운영방식을 향약 속에 흡수하여 가난한 농민들의 생활 안정에도 힘썼다.

 

 성향 비교

 

사림계보

 

조선 붕당정치의 시작은 세자책봉도 하지 못한채 서거한 명종 이후 선조가 급작스럽게 즉위하면서 외척에 의한 척신정치가 사라지고 사림(士林)이 정계에 대거 진출하면서 시작됩니다

 

처음에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진 붕당은 이후 여러가지 정치 사안에 대립하면서 동인은 북인과 남인, 북인은 다시 소북과 대북으로 나눠지게 되며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나눠지게 된다. 그러다 인조 반정 이후 대북이 완전 몰락하고 서인과 남인 소북의 3당 연립 정권이 유지된다.  붕당정치 초기에는 붕당간 적절한 견제와 조화가 이루어 졌으나 시간이 흐르고 광해군, 인조, 효종에 걸쳐 여러차레 판국이 바뀌는 환국(換局)이 일어나게 되면서( 이는 오늘날로 말하며 정당 정권의 교체라 할 수 있다.) 일당 독재의 형태로 굳어지게 되고 이로인해 붕당간 치열한 권력다툼이 일어나게 된다. 숙종때 이르러서는 이러한 폐단을 없애고자  탕평책이라 하여 붕당간의 정쟁을 타파하고자 하는 정책이 등장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영조 시대에 이르러서는 서인 즉 노론과 소론이 조선 정권의 중심이 된다.

영조 초기에는 소론이 정권을 잡고 있지만 영조 후기에는 노론이 정국을 주도하게 된다. 영조는 탕평책을 썼으나 노론 중심의 외척을 중신에 배치함으로 척신정치의 재도입을 유발하고 이 들은 사도세자를 중심으로 다시 북당 남당으로 나뉘어 대치하게 된다. 이 들은 정조의 즉위까지 끝없이 대립하며 사도세자의 사사를 일으킨 남당은 정조를 세손때부터 끝없이 위협하게 된다. 

 

 

 

 
 

사화(士禍)

선비들이 정치적 반대파에게 화를 입는 일을 가리키며, 한국사에서는 특히 조선중기에 사림 세력이 화를 당한 연산군때부터 명종즉위년까지 발생한 4차례의 옥사를 말한다. 이들 사화는 1498년(연산군 4년)의 무오사화, 1504년(연산군 10년)의 갑자사화, 1519년(중종 14년)의 기묘사화, 1545년(명종 즉위년)의 을사사화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를 ‘4대 사화’라고 부른다.

 

성종때부터 중앙 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한 사림 세력은 훈구 세력의 비리를 규탄하면서 점차 정치적 영향력이 커져갔다. 그러던 중 연산군이 즉위하면서 훈구 세력의 불만이 폭발하였고, 양 세력간의 갈등으로 사화가 발생하게 된다. 사화는 사림 세력의 역사적 성장이라는 추세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이를 통해서 사림들은 많은 피해를 입기는 하였으나 지방의 서원이 향약을 기반으로 지지기반을 확산하는 등 성장을 계속하여 명종 말기 선조초기에 이르면서 중앙 정계의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며, 이후 사림 정치를 주도하였다.

 

 

배경

성종 때에는 훈구 대신과 사림이 정치적 입장은 달랐어도 서로간의 직접적인 충돌은 없었다. 오히려 두 세력은 서로 협력하여 《경국대전》을 비롯하여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등 기념비적인 편찬사업을 마무리하였다. 여기에는 훈신 중에도 서거정·노사신·최항·양성지 같은 이들은 원성을 듣던 인물이 아니었고, 또 양파의 균형과 조화를 추구한 성종의 뛰어난 정치적 역량과도 관계가 깊었다.

세조 때 현직자와 퇴직자에게 아울러 주던 과전법을 폐지하고 현직자에게만 주는 직전법으로 개편한 것은 조선시대의 토지제도가 가지는 한계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조차 실시할 수 없어서 직전법도 폐지되고, 이제는 새로이 관리가 되더라도 국가로부터 아무런 땅도 받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가 가질 수 있는 것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뿐이었다. 신진관료는 여기에 불만을 가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불건전한 토지 제도를 개혁하자는 주장이 그들 사이에 점차로 일어나게 되었다. 이 토지 문제를 에워싼 신·구의 대립이 귀족간의 분열과 파쟁을 일으킨 또 하나의 원인이었다. 토지 문제를 에워싼 신·구파의 대립은 다른 면에서 볼 때에는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이었다.

비록 음성적인 대립이었다고 하더라도 명군(名君) 성종이 있는 동안은 그것이 노골화하지는 않았으나 폭군 연산군이 즉위하면서 드디어 폭발하게 되었다.

 

 

4대 사화

사화 발생 연도 발생 원인 가해자 피해자
무오사화 1498년 김종직의 〈조의제문〉 사건 유자광, 연산군 김종직, 김일손, 김굉필, 권경우, 이목, 허반, 임희재(임사홍아들), 표연말, 정여창
갑자사화 1504년 폐비 윤씨사건, 연산군 왕권 강화 계획 연산군 윤필상, 이극균, 김굉필
이세좌, 한명회, 엄숙의, 정소용, 인수대비, 정찬손, 심회, 정안지, 한치형, 이극균, 성준, 조자서, 정성근, 정인인, 이승건, 홍한, 김천령
기묘사화 1519년 조광조의 개혁 정치 반발 남곤, 심정, 홍경주, 중종 조광조와 그의 추종자들
을사사화 1545년 소윤 대윤의 권력 싸움 소윤 윤임,유관, 유인숙, 계림군, 봉선군, 이덕응, 정희, 정욱, 나식


 

 

무오사화(戊午士禍)는 1498년(연산군 4년)에 일어났으며, 사초(史草) 때문에 일어났다고 하여 무오사화(戊午史禍)라고도 부른다.

연산군(1494~1506)이 즉위하면서 서로 협력하던 훈구파와 사림파의 사정은 달라졌다. 원래 시재(詩才)와 감성이 뛰어난 그의 어머니(성종의 비, 폐비 윤씨)가 신하들의 충돌로 죽게 된 것을 알고 훈구 대신과 사림을 모두 누름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려 하였다. 학덕 있는 훈구 대신들은 대부분 사망하고, 사림 세력은 더욱 커져서 그들의 분방한 언론(言論) 활동이 왕의 노여움을 사는 일이 많았다. 이런 분위기를 이용하여 평소 사림의 공격을 받아 수세에 몰려 있던 훈구 대신의 잔류 세력인 유자광 등은 1498년(연산군 4년) 김일손이 지은 사초를 문제 삼아 왕을 충동하여 김종직(金宗直)과 관련이 있는 김일손·표연말(表沿末)·정여창(鄭汝昌)·최부(崔溥) 등 수십 명의 사림을 사형·유배 혹은 파직케 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김종직 문인으로 구성된 영남 사림이 대부분 몰락하고 말았다.

 

 

갑자사화(甲子士禍)는 1504년(연산군 10년)에 일어난 사화이다.

사림을 정계에서 몰아낸 후 연산군은 훈구 대신마저 제거하여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려 했다. 그러던 중 연산군을 싸고도는 척신(戚臣)들이 연산군의 생모인 윤씨(尹氏)의 폐비사사(廢妃賜死) 사건에 윤필상(尹弼商) 등 훈신이 관여했음을 폭로하여 이 사건에 관련된 훈신과 아직 남아 있던 사림까지 몰아냈다.

 

기묘사화(己卯士禍)는 1519년(중종 14년)에 조광조 일파를 견제하기 위해 일어난 사화이다.

두 차례의 사화로 쓸 만한 인재들을 처단하고 난 뒤 연산군의 음탕과 사치는 심해지고, 관리들에게 ‘신언패(愼言牌)’라는 패쪽을 차고 다니게 하여 말조심을 하도록 억눌렀으며, 자신의 행동을 비난하는 글이 국문으로 쓰였다 하여 국문학습을 탄압하고 국문서적을 불사르기도 했다.

연산군의 학정에 견디다 못한 박원종(朴元宗)·성희안(成希顔)·유순정(柳順汀) 등 훈구 대신들은 군대를 동원해 연산군을 추방하고 그의 이복동생을 왕으로 추대했다. 이것이 ‘중종반정’(中宗反正, 1506년)이다.

 

 

을사사화

기묘사화가 있은 지 10년 뒤에 중종은 훈구 대신들을 견제하기 위하여 다시 사림을 등용했으나, 1545년에 명종(明宗)이 즉위하면서 일어난 소위 을사사화(乙巳士禍)에 또다시 밀려나는 네 번째 화를 입었다.

이 사건은 외척(外戚)간의 권력싸움에서 빚어진 것이 다른 사화와 다르다. 즉 중종이 돌아가자, 첫째 계비(莊敬王后)의 소생인 인종(仁宗)이 즉위하고 왕비의 동생인 윤임(尹任, 大尹)이 세력을 떨쳤으나,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타계하자 둘째 계비인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소생인 명종(明宗)이 왕위에 올랐다. 명종 역시 어린 관계로 왕후가 수렴청정하고 동생인 윤원형(尹元衡, 小尹) 일파가 실권을 장악했는데, 집권하자마자 전 왕의 외척인 윤임(尹任) 일파를 몰아낸 것이다.

 

 

사화

옥사

환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