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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조선 최고의 복많은 공직자 송순의 면앙정

나 그 네 2012. 9. 1. 10:00

 

 

남도가사문화유적 답사의 마지막은 면앙정(俛仰亭)이다.

면앙정의 주인공 면앙정 송순(俛仰亭 宋純1493∼1583)

남도 가사문학을 설명하는데 빼놓은 수 없는 인물로

송강 정철의 스승이기도 하다.

 

면앙정가단(俛仰亭歌檀)의 창설자로 강호가도(江湖歌道)

의 선구자이며 자는 수초(遂初·守初)·성지(誠之), 호는

기촌(企村)·면앙정(俛仰亭). 아버지 태(泰)와 어머니 순창

조씨(淳昌趙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명문 양반가 출신으로 1519년(성종 14)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가 되었으며 사간원 정언, 홍문관직제학, 사간원 대사간을 거쳐 전주부윤, 나주목사 등을 지냈고 77세(선조 2)에 한성부윤, 의정부 우참찬 겸 춘추관사를 끝으로 벼슬을 사양하고 향리로 물러나 후학을 길렀다.

 

                                                         

                                                추천에 감사드립니다.

 

 

예전엔 면앙정 표지석이 있는 곳에 차량 대 여섯대 정도 주차할 공간이 있었지만 최근에 근처에 저렇게 멋진 주차장을 만들었다.

화장실을 겸한 버스 정류장이 있어 면앙정을 아끼는 담양군의 배려와 관심을 엿볼 수 있어 다행이다.

그간 담양 가사문학유적지에 대한 대대적인 주차장공사로 수 많은 사람들이 가사문학의 본고장 담양을 찾음에 불편함이 없도록

배려해 왔으나 작년 까지만 해도 주차장이 없던것을 올해 찾으니 멋지게 만들어 놓았다.

 

면앙정 입구에 차를 세워놓고 까마득히 올라가는 계단길을 바라보니 풀렸던 다리에 힘이 솟는 것은 왜일까?

기온도 높고 습도도 높아 불쾌지수 만땅이지만 면앙정이 오늘 탐방의 마지막 코스이며 이곳을 나오면 집까지 그대로 내 달려

목욕탕으로 풍덩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ㅎㅎ

하여간 정말 날 한 번 끝내주게 덥다...나중에 계단으로 내려서는데 예닐곱명의 처자들이 면앙정으로 오르며 아이고~아이고~를

외친다..

 

 

 

1528년 송강정철이 태어나기 8년전에 면앙정 송순은 담양골 지곡리의 한벽산 아래

옹정봉의 시원한 계곡물이 흐르는 초정의 건축현장에서 양산보와 더불어 지붕에 볏짚을 얹고 있었다.

송순은 36세로 자기보다 8살이나 어린 양산보와 이종간이었다.

즉 송순의 고모가 양산보의 어머니인 것이다.

그래서 양산보가 17세에 낙향하여 고향에 초정을 지은다 하니 만사를 제쳐놓고 달려와서 돕고 있었던 것이다.

 

5년후 41세가 된 송순은 양산보의 도움으로 1533년 무등산 자락이 흘러내려 멈춘 담양 봉산면 제월봉에 면앙정이란 초정을 짓는다.

이곳에서 지내면서 호남 제일의 면앙정가단(俛仰亭歌壇)을 만들었는데, 화담 서경덕(花潭 徐敬德 : 1489~1546),

석천 임억령(石川 林億齡 : 1496~1568),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 소쇄옹 양산보(瀟灑翁 梁山甫 : 1503~1557),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 1510~1560), 문인(文人) 사암 박순(思庵 朴淳 : 1523~1589), 서하당 김성원(棲霞堂 金成遠 : 1525~1597)․고봉 기대승(高峰 奇大升 : 1527~1572)․ 제봉 고경명(霽峰 高敬命 : 1533~1592), 송강 정철(松江 鄭澈 : 1536~1593),

백호 임제(白湖 林悌 : 1549~1587) 등 많은 시인 묵객, 문인들이 출입하며 송순과 교류를 하였다.

면앙정가단은 그 후에 나타난 호남의 성산가단(星山歌壇), 영남의경정산가단(敬亭山歌壇) ,노가재가단(老稼齋歌壇) 등의 선구이며,

영남의 가단이 전문 가객 중심이라면 면앙정가단은 사대부 출신의 문인 가객이 중심이었다고 한다. 

 

 

 

 

송강 정철과 같은 나이때인 27세(1519년)에 별시 문과(別試 文科)에 급제(及第)하여 벼슬길에 올랐지만,

33세 때 희락당 김안로(希樂堂 金安老 : 1481~1537) 일파가 세력을 잡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봉산으로 낙향하여

시(詩)를 읊으며 은거(隱居)하였으며, 37세 때 김안로 일파가 실각하고 사사되자 5일만에 홍문관부응교에 제수되고,

다시 사헌부집의에 올랐으며, 이어 홍문관부제학, 충청도어사, 39세때 승정원우부승지에 올라 초고속 승진가도를 달리다

4월 명나라의 요동도사(遼東都司)가 오자 선위사가 되어 서행(西行)하였다.

 

그 뒤 경상도관찰사·사간원대사간 등의 요직을 거쳐 50세 되던 해인 1542년(중종 37) 윤원형과 황헌 등에 의하여 전라도관찰사로

좌천되었다가, 55세 때인 1547년(명종 2)에는 동지중추부사가 되어 『중종실록』을 찬수하였다.

그해 5월에 주문사로 북경에 다녀와 개성부유수가 되었다.

 

58세 때인 1550년(명종 5)에 대사헌·이조참판이 되었으나, 진복창(陳福昌)과 이기(李芑) 등에 의하여 사론(邪論 : 도리에 어긋난 논설)

을 편다는 죄목으로 충청도 서천으로 귀양 갔지만, 이듬해에 풀려나 1552년(명종 7) 선산 도호부사가 되고, 이 해에 고향땅의 면앙정을 증축하였다.

 

그 후 다시 조정에 나아가 몇 차례의 부침을 겪으면서도 77세에 의정부우참찬(議政府右參贊)에 이르기까지 관직 생활)을 하였고,

50년 공직생활을 큰 과 없이 은퇴한 후에는 91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면앙정(俛仰亭)에 머물면서 후학들을 가르치고 여러 시인

묵객들과 교류를 하는 등 신선같이 살다가 학처럼 고고하게 운명을 한 조선 최고의 행복한 공직자 출신 문인이었다.

 

벼슬에서 물러나 강호생활을 하면서 자연예찬을 주제로 한 작품으로 강호가도의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으며, <면앙정삼언가>

<면앙정제영(俛仰亭題詠)> 등 수많은 한시(총 505수, 부1편)와 국문시가인 면앙정가 9수, 자상특사황국옥당가, 오륜가 등

단가(시조) 20여 수를 지어 조선 시가문학에 크게 기여하였다. 문집으로는 『면앙집(俛仰集)』이 있으며,

 담양 구산사(龜山祠)에 신주가 모셔져 있다고 한다.

 

 

송순의 대표적인 가사 면앙정가를 읊어보면,

 

서사 : 제월봉의 형세와 면양정의 모습

 

무등산 한 줄기 산이 동쪽으로 뻗어 있어, (무등산을)멀리 떼어 버리고 나와 제월봉이 되었거늘,

끝없는 넓은 들에 무슨 생각을 하느라고, 일곱 굽이가 한데 움츠려 무더기 무더기 벌여 놓은 듯하구나.

그 가운데 굽이는 구멍에 든 늙은 용이 선잠을 막 깨어 머리를 얹혀 놓은 듯하며, 넓고 편편한 바위 위에

소나무와 대나무를 헤치고 정자를 앉혀 놓았으니, 마치 구름을 탄 푸른 학이 천 리를 가려고 두 날개를 벌린 듯하다.

 

 

 

본사1 : 면양정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와 기러기의 교태

 

옥천산, 용천산에서 흘러 내린 물이 정자 앞 넓은 들에 끊임없이(잇달아) 퍼져 있으니, 넓거든 길지나 말지,

푸르거든 희지나 말지, 쌍룡이 몸을 뒤트는 듯, 긴 비단을 가득하게 펼쳐놓은 듯, 어디를 가려고 무슨 일이 바빠서 달려가는 듯,

따라가는 듯, 밤낮으로 흐르는 듯하다. 물 따라 펼쳐진 물기의 모래밭은 눈같이 하얗게 펼쳐졌는데, 어지러운 기러기는 무엇을

통정하려고 앉았다가 내렸다가, 모였다 흩어졌다 하며 갈대꽃을 사이에 두고 울면서 서로 따라 다니는고

 

 

 

본사2 :면양정을 둘러선 산봉우리들의 승경

 

넓은 길 밖, 긴 하늘 아래 두르고 꽂은 것은 산인가, 병풍인가, 그림인가, 아닌가. 높은 듯 낮은 듯, 끊어지는 듯 이어지는 듯,

숨기도 하고 보이기도 하며, 가기도 하고 머물기도 하며, 어지러운 가운데 유명한 체하여 하늘도 두려워하지 않고 우뚝 서 있는

여러 산봉우리 가운데, 추월산 머리 삼고, 용구산, 몽선산, 불대산, 어등산, 용진산, 금성산이 허공에 벌어져 있는데, 멀리 가까이

푸른 언덕에 머문 것(펼쳐진 모양)도 많기도 많구나

 

 

 

본사3 : 면양정의 사계절풍경

 

흰구름과 뿌연 안개와 놀, 푸른 것은 산 아지랑이로구나. 수많은 바위와 골짜기를 제 집을 삼아 두고, 나며들며 아양도 떠는구나,

오르기도 하며, 내리기도 하며 넓고 먼 하늘에 떠나기도 하고 넓은 들판으로 건너가기도 하여, 푸르락 붉으락, 옅으락 짙으락 석양에

지는 해와 섞이어 보슴비마저 뿌리는구나. 뚜껑 없는 가마를 재촉해 타고 소나무 아래 굽은 길로 오며가며 하는 때에, 푸른 버들에서

지저귀는 꾀꼬리는 흥에 겨워 아앙을 떠는구나. 나무 사이가 가득하여(우거져) 녹음이 엉긴 때에 긴 난간에서 긴졸음을 내여 펴니,

물 위의 서늘한 바람이야 그칠 줄 모르는구나.

 

된서리 걷힌 후에 산빛이 수놓은 비단 물결 같구나. 누렇게 익은 곡신은 또 어찌 넓은 들에 퍼져 있는고? 고기잡이 하며 부는 피리도

흥을 이기지 못하여 달을 따라 부는 것인가? 초목이 다 떨어진 후에 강과 산이 묻혀 있거늘 조물주가 야단스러워 얼음과 눈으로 자연을 꾸며 내니, 경궁요대와 옥해은산 같은 눈에 덮힌 아름다운 대자연이 눈 아래 펼쳐 있구나. 하늘과 땅도 풍성하구나. 가는 곳마다 아름

다운 경치로다.

 

 

 

본사4 : 자연을 즐기는 풍류생활

 

인간세상을 떠나와도 내 몸이 한가로울 겨를이 없다. 이것도 보려하고, 저것도 들으려 하고, 바람도 쏘이려 하고,

달도 맞으려고 하니, 밤은 언제줍고, 고기는 언제 낚으며, 사립문은 누가 닫으며, 떨어진 꽃은 누가 쓸 것인가.

아침나절 시간이 부족한데 저녁이라고 싫을소냐.

오늘도 시간이 부족한데 내일이라고 넉넉하랴. 이 산에 앉아 보고, 저 산에 걸어보니 번거로운 마음이면서도 아름다운 자연은

버릴것이 전혀 없다.

쉴 사이가 없는데 길이나마 전할 틈이 있으랴. 다만 하나의 푸른 명아주 지팡이가 다 못쓰게 되어 가는 구나.

 

 

 

결사 : 취흥에 젖어 태평성대 구가(謳歌), 호연지지와 임금의 은혜

 

술이 익었거니 벗이 없을 것인가. 노래를 부르게 하며, 악기를 타게 하며, 악기를 끌어 당기게 하며,

흔들며 온갖 아름다운 소리로 취흥을 재촉하니, 근심이라 있으며 시름이라 붙었으랴. 누웠다가 앉았다가, 구부렸다 젖혔다가,

시를 읊었다가 휘파람을 불었다가 하며 마음놓고 노니, 천지도 넓고 넓으며 세월도 한가하다.

복희씨의 태평성대를 모르고 지내더니, 이때야말로 그것이로구나. 신선이 어떻던가, 이 몸이야말로 그것이로 구나.

강산풍월 거느리고 내평생을 다 누리면 악양루 위에 이백이 살아온다 한들 넓고 끝없는 정다운 회포야 말로 이보다 더 할 것인가.

이 몸이 이렇게 지내는 것도 역시 임금의 은혜이시도다.

 

 

이 작품은 면앙정이 세워진 제월봉의 근원과 형세를 노래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면앙정의 아름다운 모습(기)과,

면앙정에서 바라본 주위의 아름다운 경치를 근경(近景)에서 원경(遠景)으로 묘사(승1)한 후, 면앙정의 아름다운 사계절의 변화(승2)

로 이어져서 강호에서의 풍류 생활(전)과 아름다운 자연 속에 노니는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노래(결)하며 끝난다.

 

면앙정가는 정극인(丁克仁)의 '상춘곡(賞春曲)'에서 자연 친화의 사상을 이어받고 후에 정철(鄭澈)의 '성산별곡(星山別曲)'과

'관동별곡' 의 탄생에도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등 후세 문인들의 작품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면앙정(俛仰亭) 현판은 소쇄옹 양산보가 15세에 조광조 밑에서 수학할 때 같이 공부한 당대의 명필 성수침(1493-1564)썼다 한다

 

곡조문<哭鳥文>

 

나는 사람이고 너는 새이니
새의 죽음을 사람이 곡하는 것은 맞지 않으나
네가 나 때문에 죽었으니 그를 슬퍼하노라

송순이 9세때 지었다고 하느 곡조문을 보면 그가 왜 신동인지를 알 수 있다.

 

면앙정 삼언가<俛仰亭三言歌>

俛有地 仰有天   굽어보면 땅이요, 우러러보면 하늘이라
亭其中 興浩然   그 가운데 정자를 짓고 흥취가 호연하다.
招風月 揖山川   바람과 달을 불러들이고, 산천을 끌어 들여
扶藜杖 送百年   청려장 지팡이 짚고 백년을 보내네.

 

 

하늘에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고 사람에게 굽어보아 부끄러움이 없는 곳에 정자를 짓고 말년에 세상과 적극적으로 소통한

당대 최고의 가객 면앙정 송순. 그 면앙정을 나서며 나 또한 나의 블친들과 소통에 부끄러움은 없는지 되돌아 보는 시간이 되었다.

 

면앙정을 마지막으로 이번 남도문화유적 답사는 1차로 끝났다.

1년 전 부터 기획하고 취재하고 자료를 찾아보고 틈날 때 마다 미공개 포스팅에 덧 붙혀 놓은 것을 최근 사진촬영을 다시 한 다음

포스팅을 완성하여 9편까지 view로 발행하고 보니 꼭 구속된 의무감에서 해방된 느낌이다.

 

이제 또 다른 답사를 기획한다면 아마 옆지기는 '제발 그만 하세요' 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프로야구 시즌이 돌아오면 프로야구 리뷰를 위해 밤잠을 설치고, 주말이면 산으로 올라가 산행기를 쓰고, 각종 문화유적 탐방으로

또 다른 답사기를 쓰며 궁시렁 떠는 모습에 가족들이랑 멀어진다고 볼맨소리를 할 만하다.

 

하지만 어쩔 것인가..좋아하는 야구보고 리뷰쓰고, 좋아하는 산을 다니며 산행기를 쓰는 것은 내가 자야할 잠을 줄이고 친구들과

술마실 시간을 줄이고 다른데 한 눈 팔지 않고(특히 여색에^^)내 좋아하는 것 죽을때까지 하려니 말리지 말소..ㅎㅎ

그러니 여보 애들아 나좀 아빠좀 도와줘~~~ 이?

 

(광주기행)남도의 환벽당과 취가정으로 가는 아름다운 길(남도문화유적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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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남 담양군 봉산면 제월리 402번지

먹거리 : 봉산면소재지에 있기에 식사에 애로사항 없음

대중교통 : 담양 농어촌버스

 

(글 : 포토뉴스 코리아 simpro) 트위터 ☞ http://twitter.com/huhas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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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4]

 

출처 : simpro의 반 백년 이야기
글쓴이 : simpro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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