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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초월 라이벌열전] 불사조 박철순 VS 철완 최동원

나 그 네 2015. 7. 3. 12:40

[시공초월 라이벌열전] 불사조 박철순 VS 철완 최동원

 

 

 


짧고 굵게 살 것인가. 가늘지만 길게 살 것인가.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후자를 많이 선택할 것이다. 그러나 매일 승패가 갈리고 영웅과 패배자로 나뉘는 스포츠 세계에선 조금 다를 수 있다. 단 하루 동안 빛나더라도 자신을 활활 태우고 싶어 하는 이가 그 얼마나 많았던가. 22연승의 주인공인 ‘불사조’ 박철순과 한국시리즈 4승의 ‘무쇠팔’ 최동원은 꺼지지 않는 불꽃같은 삶을 그라운드에 남겼다. 더 오래 빛날 수 있었지만, 짧은 순간 혼신의 힘을 쏟아내며 야구역사의 한 페이지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전인미답의 정규시즌 22연승과 한국시리즈 4승
박철순은 국내프로야구에서 22연승을 거둔 최다연승의 주인공이다. 입단 첫 해 부터 박철순의 활약상은 눈부셨는데, 36경기에 등판해 15완투승 2완봉승 등 24승 4패 7세이브를 작성하며 정규리그 MVP에 등극했다. 방어율(1.84), 다승(24승), 승률(0.857) 부문에서 모두 1위였다. 최다연승기록을 포함해 한마디로 압도적이었다. 22연승은 한.미.일 프로야구를 합쳐 단일시즌 최다연승기록으로 향후 깨어지기 힘든 기록이다.

박철순은 1982년 9월 18일 대전에서 열린 롯데와의 경기에서 승리투수가 되며 22연승 기록을 세웠는데, 당시 그의 나이 26세 6개월 6일이었다. 메이저리그 100년 역사를 자랑하는 미국에서도 단일시즌 22연승 기록은 없다. 1937년 뉴욕 양키스의 칼 허벨이 두 시즌에 걸쳐 달성한 24연승이 최다연승기록이고, 한 시즌 최다는 1888년 뉴욕 양키스의 팀 키페가 기록한 19연승이다.

일본의 경우, 1952년 요미우리의 마쓰다가 두 시즌에 걸쳐 20승을 거뒀고 1957년 니시테쓰의 이나오가 20연승을 거뒀다. 프로야구 첫 해 부터 대기록을 달성한 박철순에게 두 시즌에 걸쳐 24연승을 기록한 미국 메이저리그 칼 허벨의 기록을 깨고 싶은 욕심이 당연히 생겼을 것이다. 그는 22연승을 달성하고 나흘 뒤인 9월 22일 잠실 롯데전 3-3으로 맞선 9회 구원 투수로 등판하며 23연승에 도전했다. 그러나 연장 10회 김용철에게 결승타를 맞으며 연승기록의 마침표를 찍게 됐다.

22연승 기록은 끝났지만, 사실 한 시즌에 걸려 22승을 거두는 것도 어렵다. 마지막 22승 투수는 2007년 두산에서 뛰었던 리오스가 마지막이다. 그의 연승기록의 막은 안타깝게 내렸지만, 소속팀 OB는 박철순의 호투에 힙 입어 전기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한국시리즈에 진출해 삼성을 4승 1무 1패로 꺾고 원년우승을 차지하는 영광을 누렸다. 그는 한국시리즈에서 진통제 투혼을 발휘하며 팀을 정상에 올렸다. 하지만 그게 불사조의 서막이었다.

 

 


↑ 최동원

 

경남고 시절 최동원. 스포츠서울DB
 

 

 

 

↑ 최동원

 

롯데 최동원이 전매특허인 폭포수 커브를 던지고 있다. 1987-07-18 스포츠서울DB
 

 

최동원은 전무후무할 것 같은 한국시리즈 4승의 주인공이다. 박철순이 미국에서 귀국하며 프로야구 원년부터 활약 했다면, 최동원은 그 이듬해인 1983년에 롯데 유니폼을 입고 프로에 입문했다. 첫 해에는 38경기에 나와 16차례 완투를 해 9승(1완봉승) 16패 4세이브에 방어율 2.89를 기록했다. 이닝 수는 208.2이닝을 던졌다. 그리고 2년차에 그는 자신의 괴력을 만천하에 알렸다. 최동원은 이듬해인 1984년에 51경기에 나왔는데, 14경기에서 완투하며 27승 6세이브 13패를 기록했다.

284.2이닝을 소화하는 괴력을 보였는데, 223탈삼진으로 KBO 한 시즌 최다 탈삼진 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이 해 한국시리즈에서 홀로 4승을 따내는 전대미문의 대기록을 세우며 한국프로야구 역사를 관통하는 투혼의 상징이 됐다. 한국시리즈 1차전 완봉승(9월 30일), 3차전 완투승(10월 3일), 5차전 완투패(10월 6일), 6차전 구원승(10월 7일), 7차전 완투승(10월 9일)으로 4승(1패)을 기록하며 팀의 창단 첫 우승을 이끌었다.

아직까지 한 명의 투수가 한국시리즈에서 4승을 거둔 예는 없다. 투수 분업화가 이뤄진 현대야구에서 최동원의 기록은 앞으로 깨지기 힘들 것이라는 평가다. 더 놀라운 점은 4승과 함께 완투패를 한 기록도 있다는데 있다. 중간에 거둔 구원승도 1~2이닝을 던진게 아닌 무려 5이닝을 던져 수확했다. 최동원은 한국시리즈 기간 동안 열흘에 걸쳐 5경기에 등판해 40이닝을 던지는 괴력을 발휘하며 상대적으로 약했던 롯데에게 우승 트로피를 선물했다.

강병철 당시 롯데 감독이 한국시리즈를 앞두고 “(최)동원아, 우짜노 여기까지 왔는데…”라고 말하자 그가 “네, 알겠심더. 한번 해보입시더”라고 말한 건 유명한 일화다. 그러나 가을의 전설이 된 최동원의 야구 인생도 박철순과 마찬가지고 오래토록 빛나지 못했다. 짧은 순간 폭발하듯 빛을 뿌리고 사그라졌다.

 

 


↑ 박철순

 

자신의 영구결번식에 유니폼이 든 액자를 들고 관중에게 인사하는 박철순(전 야구선수) <잠실>2002-04-05  이주상기자 rainbow@sportsseoul.com
 

 

◇불사조와 무쇠팔, 짧지만 불꽃같은 야구인생
한국 프로야구사에서 가장 빛난, 그러나 영광의 순간이 길지 않아 더 여운이 남는 선수가 바로 박철순과 최동원이다. ‘불사조’ 박철순은 22연승을 거둔 이듬해인 1983년부터 은퇴한 1996년까지 단 한 차례도 두 자리 수 이상의 승수를 달성하지 못했다. 1982년 전후기 통 털어 36경기에서 15경기를 완투하며 224.2이닝을 던졌다. 시즌이 계속될수록 지친 몸을 이끌고 마운드에 올라 상대 타자 뿐 아니라 통증과도 사투를 해야 했다. 또한 중요한 경기에는 그가 등판해야 했다. 며칠 쉬면 통증이 잦아들었지만, 그의 허리는 조금씩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되고 있었다. 혹사에 장사는 없었다. 이후 그는 부상과 싸우는 불사조가 되었다. 마운드에서 죽지 않고 수차례 다시 부활했다.

프로야구 원년의 영광을 재현하지는 못했지만, 오랜 세월 동안 최고령 승리투수, 최고령 완봉승, 최고령 세이브의 주인공으로 남으며 포기하지 않는 야구인생의 본보기가 되었다. 그는 1996년 9월 4일 대전 한화전에 선발 등판해 5이닝 5안타 무실점으로 최고령 승리투수가 됐다. 최고령 완봉승은 1994년 8월 12일 잠실 태평양 전에서 거두게 되는데 당시 나이가 38세 5개월이었다. 최고령 세이브는 1996년 7월 30일 잠실 LG전에서 기록하는데, 당시 40세 4개월 18일이었다. 이후 송진우에 의해 그의 최고령 기록은 하나씩 깨지게 되지만, 죽지 않는 불사조로 칭송되기에 충분했다. 짧은 영광에 후회하지는 않을까. 22연승과 프로야구 원년 우승. 26살 어린 나이에 거둔 성공이지만, 너무 한꺼번에 쏟아냈기 때문일까. 그는 프로데뷔 첫 해의 영광 이후 오랫동안 고통과 동반하게 된다.

그러나 박철순은 1982년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오늘 던져도 내일 급하면 나가야 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허리가 아파 못 일어났다. 약기운이 없으면 일어나지 못했다. 감독도 말리고 팬들도 말렸다”라고 했다. 한국시리즈를 앞두고 김영덕 감독은 그를 향해 “아직 젊은데 무리하지 마라. 야구장에도 오지마라”고 했다. 그러나 박철순은 “허리가 끊어져도 던지고 싶었다. 지더라도 한번 해보고 져야 후회하지 않을거 같았다. 감독은 당장 나가라고 노발대발 했지만, 내가 일단 마운드에 오르겠다고 고집을 부렸다”라고 했다.

박철순은 프로야구 원년 한국시리즈 3,4차전에 구원등판 했고 6차전에 선발 등판해 완투승으로 원년 우승신화의 대미를 장식했다. 김영덕 OB초대 감독은 그를 향해 “절대적”이라고 했고 1995년 OB사령탑이었던 김인식 감독은 “최고의 투수”라고 기억했다. 하일성 해설위원은 “불굴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고 프로야구 원년에 OB코치로 있던 이광한 전 감독은 “시대를 잘못 타고났다”고 아쉬워하며 그를 기억했다. 박철순은 1982년 불꽃같은 투구를 하며 이후 하락세를 걸었지만, 중요한 점은 나이 마흔까지 마운드에서 공을 던졌다는데 있다. 원년의 화려함을 다시 맛보진 못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불사조 정신은 더 빛났다.

 

 


↑ 선동열-(~2001)

 

야구선수 선동열(해태), 최동원, 김시진(앞부터) 2001-03-26. 스포츠서울DB
 

 

한국 야구를 대표하는 투수를 꼽는다면 승부사 최동원이 맨 앞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기록으로 보면 선동열 등 다른 투수에 비해 떨어지지만, 최동원은 야구선수의 범주를 벗어나는 문화적 아이콘 그 자체였다. 라이벌 선동열은 “최동원 같은 거대한 목표가 있어 나는 더 노력해고 지금의 자리에 설 수 있었다”라고 존경을 표현하기도 했다. 1984년 롯데와 삼성이 맞붙은 한국시리즈는 최동원을 위한 무대였다. 그는 1차전에 선발 출전해 9회까지 삼성타선을 무실점으로 막아내며 사상 첫 완봉승을 기록했다. 철완 신화의 시작을 알리는 팡파르와 같았다. 3차전에서는 2실점 완투승을 거뒀는데 12삼진을 솎아내며 선발전원 탈삼진이라는 첫 대기록까지 더했다. 5,6차전에 이어 마지막 7차전에서 4실점 완투승을 거두며 최동원은 그야말로 전설이 되었다.

그는 고교와 대학시절부터 최고 스타로 군림했는데 프로에 와서 위상이 높아졌다. 1983년 롯데 유니폼을 입은 최동원은 이듬해인 1984년 정규시즌 27승 13패 6세이브를 시작으로 1987년까지 맹활약 했다. 그러나 젊은 날의 혹사는 급속히 그의 몸을 갉아먹고 있었다. 1987년 14승을 마지막으로 이후 두 자릿수 승수를 기록하지 못했다. 불같은 강속구와 폭포수 커브로 프로무대를 평정한 그의 전성기는 3~4년에 불과했다. 1989년 삼성으로 트레이드 된 이후에는 정신적인 스트레스까지 더해지면 2년 만에 결국 조기 은퇴를 하고 말았다. 그의 통산 성적은 8시즌 동안 248경기 103승 74패 26세이브에 방어율 2.46이다.

그의 투구 역사를 살펴보면, 1975년 경남고 2학년 시절, 당시 최강 경북고 상대 노히트노런. 1976년엔 청룡기에서 한경기 20삼진 기록, 4연속경기 완투승, 연세대학교에 재학 할 때는 23연승의 기록을 세웠다. 1981년 실업야구에서는 최우수 선수상, 최우수 신인상, 최다승으로 3관왕에 올랐다. 1981년 캐나다에서 열린 대륙간컵 대회에서도 8이닝 퍼펙트 경기를 하는 등 최우수 선수, 최우수 투수로 선정됐다. 이 대회를 통해 최동원은 미국 메이저리그의 구애를 꾸준히 받게 되기도 한다.

1982년 세계 선수권대회 우승 멤버. 그리고 1984년 정규시즌 MVP, 다승왕, 탈삼진왕, 투수 골든글러브를 품에 안았다. 최동원은 1975년부터 국내최고의 고교투수라는 찬사를 한 몸에 받았고 그 후 20년간 ‘최고투수’라는 수식어는 그의 이름 앞에 놓이게 됐다. 프로에서 보여준 그의 열정어린 투구는 한국프로야구 발전의 거대한 원동력 그 자체였다. 그러나 1983년 프로데뷔 첫 해 부터 마지막 전성기인 1987년까지 매년 규정이닝 두 배 이상의 투구 수를 기록했고 결국 나이 서른이 되기 전에 단명했다.

그도 박철순처럼 후회가 없을까. 은퇴 후 최동원은 “84년 그때로 돌아간다면 다시 할 수 있을까”라며 스스로 반문했다. 그러나 무리를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고 회고했다. “우승은 나 혼자만의 영광이 아니다. 그 고생을 하면서 한국시리즈까지 올라갔는데 욕심이 났다. 목표가 있어 최선을 다했고 기회가 왔을 때 도전해서 잡고 싶었다. 내가 무리를 이유로 팀의 대열에서 빠졌다면 우리팀은, 팬들은 어땠을까. 공을 던질 때마다 선수생명이 짧아지는 이유가 되었지만, 잘했다는 생각이 앞선다. 후유증은 있었다. 사람의 몸은 계속 움직이면 강화되기도 하지만, 역시 닳는 쪽에 가깝다. 무리에 대한 대가는 있기 마련이더라”고 했다. 최동원의 유니폼은 우승확정 후 벌겋게 물들었다. 그동안의 피로 때문에 쌍코피가 터졌다. 돌아보면 1984년은 그가 프로에서 롱런 하지 못하게 한 단초가 되었다. 그러나 1984년의 최동원이 없었다면 국민스포츠로 성장한 오늘날의 프로야구도 없을 것이다. 불멸의 최동원이다.

 

 


↑ 박철순

 

OB 박철순. 스포츠서울 DB
 

 

◇평범함을 거부한 박철순과 최동원의 라이벌 열전
박철순은 1956년 3월 12일 부산에서 출생했다. 부산 동광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야구를 시작했고 배명고 시절부터 투수로 활약했다. 1975년 체육특기생으로 연세대에 입학한 그는 재학시절 공군에 입대해 군복무를 마쳤다. 제대 후에는 연세대 에이스로 자리를 잡고 있던 최동원과 조우하게 된다. 박철순이 해외진출을 하게 된 계기는 1979년 6월에 열린 제 2회 한미 대학야구 선수권 대회였다. 그는 이 대회에서 뛰어난 활약상을 펼쳤는데, 특히 볼티모어 실업 올스타전에서 6회까지 퍼펙트경기를 하며 스카우트를 매료시켰다.

그는 메이저리그 밀워키 산하 마이너팀에 계약금 2만 달러에 월봉 1200 달러에 계약하며 미국으로 향했다. 박철순은 1980년 싱글A를 거쳐 1981년 더블A에서 텍사스리그 최다승 3위에 오르며 트리플A 진출을 약속받았다. 그러나 국내 프로야구가 출범하자 귀국해 OB유니폼을 입게 된다. 그는 국내복귀의 이유로 “괜히 가슴이 뛰었다. 마음은 이미 국내 프로야구에 가 있었던 것 같았다. 미국 쪽에서는 트리플A에서 실력을 인정받으면 메이저리그에 진출할 수 있다고 했지만, 내 마음을 굳혀진 상태였다. 나중에 전성이가 지난 다음에 돌아올 바에는 지금이 국내에서 던질 때라고 생각했다”라고 밝혔다.

박철순은 계약금 2000만원, 연봉 2400만원의 특급대우를 받으며 OB와 계약했다. OB는 미국 프로야구 마이너리그에서 2년간 뛴 경험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프로야구 원년에 격이 다른 투구를 보였다. 그의 속구 구속은 140㎞대 중반까지 나왔고 무엇보다 몸쪽 공에 대한 자신감, 그리고 국내타자들이 익숙하지 않은 변화구를 던지며 22연승 신화를 작성했다. 부상 이후에는 커브, 슬라이더, 팜볼을 섞어 던지며 한템포 빠른 승부를 가져갔다. 제구력도 좋았다.

구위만 놓고 보면 당시에 보기 힘들었던 150㎞대 불같은 강속구에 폭포수처럼 떨어지는 변화구를 보유한 최동원이 우위에 서 있었지만, 1982년은 박철순의 것이었다. 원년 우승팀이 가려진 한국시리즈 6차전을 앞두곤 귀신에 홀린 듯, 죽어도 좋다는 심정으로 주사를 맞고 역투했다. 우승의 기쁨을 만끽하며 찾은 병원에서 그는 요부추간판 헤르니아(제4요추와 제5요추 사이에 끼어 있는 물렁뼈가 삐져나온 상태)였다. 그는 은퇴 후 잠시 투수코치를 하기도 했지만, 지도자는 성격상 맞지 않고 야구인이 다른 분야에서도 성공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며 사업가의 길을 걸어갔다. 현재 스포츠 토털 용품업체인 알룩 스포츠 회장으로 있다.

 

 


↑ 2011 프로야구 롯데-두산

 

30일 부산 사직야구장에서 열린 롯데와 두산의 경기 전 故 <최동원> 선수 영구결번과 추모행사가 열렸다. 롯데선수들이 그라운드로 나와 도열해 있다. 2011-09-30 홍승한기자
 

 

최동원은 1958년 5월 24일 부산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5학년까지는 축구를 했다. 아버지 최윤식 씨도 축구선수 출신이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재직하던 사하 초등학교로 전학가면서 야구공을 잡게 됐다. 고교무대를 평정한 그는 연세대로 진학하게 되면서 박철순의 대학 2년 후배가 됐다. 최동원은 1학년 때부터 맹활약 하며 연세대가 전국대회 5개 중에 4개 대회를 석권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최동원의 대학 시절을 박찬호와 비교해 보면 제구, 스피드, 경기운영 능력, 배포 등 모든 면에서 뛰어났다는 평이다.

최동원은 대학 3학년인 1979년 3월 야구부 합숙소를 이탈한다. 단체기합을 견디기 힘들다며 이적 동의서에 도장을 찍어달라고 밝힌 뒤 잠적했다. 단체기합은 그해 3월 21일 대통령기 쟁탈 야구대회 준결승에서 동국대에 2-4로 패한게 이유였다. 그날 단체 기합의 주동자는 바로 공군제대 후 복학한 박철순이었다. 당시 박철순은 최동원에 비해 한 수 아래로 평가받으며 미묘한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최동원은 부상을 당할 수 있는 체벌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팀을 이탈했다. 단체체벌로 허리, 어깨 등 온몸을 방망이로 때렸기 때문이다.

전국구 스타였던 최동원은 두 번에 걸쳐 해외진출 기회가 있었다. 고교 졸업 후 일본 프로야구 롯데 오리온스의 가네다 감독으로 부터 입단 제의를 받았다. 그러나 병역문제가 걸렸다. 가네다 감독은 최동원을 양자로 들이겠다는 제안까지 했다. 그러나 일본에 귀화까지 해서 가야한다는 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81년에는 미국프로야구 토론토의 입단제의가 집요했다. 이번에도 병역문제가 발목을 잡았지만, ‘선계약 후해결’에 합의하며 4년 연봉 61만 달러에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그러나 해결되지 않는 병역과 생각보다 낮았던 계약조건 때문에 해외진출은 무산됐다. 최동원은 1983년 2월 국내프로야구 롯데와 계약금 4000만원 연봉 3000만원에 보너스 등 총 1억 원에 부산행을 결정했다. 그는 훗날 “병역문제 때문에 진출을 못했지만 후회는 없다. 우리프로에서 열심히 했다. 즐겁고 행복했다”라고 했다. 당시 4000만원이면 압구정동 40평형대 현대 아파트를 구입할 수 있는 거금이었다.

 

 


↑ 스포츠서울 신문기사

 

 

 

혹자는 최동원이 돈을 밝힌다고 비난도 하지만, 그는 남들보다 조금 더 큰 목소리로 자신의 실력에 맞는 대우를 받기 위해 노력했다. 합당한 대우를 요구하는 그의 올곧은 성향은 프로야구 선수협의회 발족과 초대 회장 선출에서 드러난다. 구단 측에서는 선수협의회가 노동조합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판단해 강경하게 나섰다. 계속되는 강압과 회유에 의해 선수협의회는 1년이 안되어 해체됐다. 최동원은 시대를 앞서가는 선구자적인 리더십을 보였지만, 결과는 청천벽력 같은 트레이드였다.

가장 비싼 몸값을 자랑하는 선수가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동료의 권익향상에 힘쓰고, 작은 경조사라도 함께 하자는 인권운동에서 그의 또다른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은퇴를 결정하면서도 “돈보다 명예다. 이름 석자에 흠집이 나는 건 원치않는다”며 유니폼을 벗었다. 그를 스카우트 한 박영길 당시 감독은 최동원에 대해 “선수 간에는 친화적이었다. 외유내강이었다. 속으로는 지는 걸 죽기보다 싫어했고 투지가 정말 대단했다. 홈런을 맞으면 다시 그 코스로 던졌다. 지고는 못사는 성격이었고 지는 날에는 밥도 먹지 않았다. 불세출의 투수였다”라고 회고했다.

최동원은 은퇴 후 다양한 길을 걷게 되는데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부산의 아들로 불리던 최동원은 1991년 광역의회 선거에 출마 소식을 전했다. 대중체육 정책을 내세웠지만, 부산 서구 제1선거구에서 만자당 김영수 후배에게 6000여 표차로 석패했다. 정계를 은퇴한 이후엔 의류사업가로 변신했고 이어 드라마에 출연하는 등 방송계에도 진출했다. 그리고 1993년 야구 해설가로 데뷔하며 본업에 복귀했다. 이후 한화 투수코치와 2군 감독, KBO 경기감독 위원 등을 역임했다. 2011년 9월 14일 대장암이 악화되며 53세의 한창인 나이로 영면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