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지리산 칠선계곡 산행기
칠선계곡!
말만 들어도 가슴이 울렁거릴 정도로 가보고 싶은 곳이다.
칠선계곡은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번 쯤 오르고 싶은 경외의 대상이기도 하다.
희귀한 산새들, 보기 드문 나무와 풀들, 살아서 백년 죽어서도 백년, 수백년 썩지 않는 고사목,
온갖 형태의 바위들, 넓고도 좁은 소沼, 굽이쳐 흐르는 수 많은 물줄기와 폭포들, 험준한 등산로,
7시간은 걸어야 오를 수 있는 칠선계곡-->천왕봉 코스가 우려내는 진풍경들이다.
그렇지만 오래 전부터 입산금지구역으로 지정이 되어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곳이다.
작년에 10년간 휴식년이 종결되어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일반인의 신청을 받아 정해진 기간과 구간
에 한해 산행이 가능하다고는 하지만, 자신의 내외부 전부를 훌훌 벗어던지고 나서는 게 산행일진대,
누군가에 이끌려서 오르내린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누구의 통제를 받아가며 정해진 시간에 일률적인 코스를 오른다는 자체가 얼마나 번거로운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28년 전에 얼떨결에 오르게 된 칠선계곡은 내가 산을 찾게되는 최초의 산행이었고, 산행병이 깊어진 시발이었다.
그 이후 내가 무의식적으로 산을 찾게 되기 시작했을 때, 마음 둘 곳 없어 이리저리 헤매고 다니는
방황인줄로만 알았고, 태생에서부터 여기저기 떠도는 핏줄을 흥건하게 타고난 방랑벽의 소산이려니 했다.
조화롭게 휘감겨 얽혀 만들어지는 물길과 바위의 이합집산, 자연自然이 흘려 돌과 나무에 남겨진
시간의 자태들, 썩어서라도 있어야 할 곳에 알맞게 버티고 서 있는 나무들, 그들과 더불어 영글어 흘러
세속의 시름을 잊게 하는 땀방울, 알지 못하는 어딘가에서 흡인하는 이러한 향기와 기운들이 주말이면
어김없이 나를 산으로 발길을 옮기게 하는 요인이 된 것일까?
벽송사碧松寺는 경남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에 있는 아담하고 소박한 절이다.
지리산 칠선계곡 천왕봉을 오르는 등산로와는 정 반대 방향 가파른 언덕에 있어 마음 먹고 들러야 마주
할 수 있는 곳이다.
마천읍내와 동떨어진 곳이라 신문은 하루 늦게서야 배달되던 곳이었고, 그나마 대로에서 절터까지는
30여분 가파른 길을 헉헉거리며 올라야 하므로 우체부가 신문과 편지를 절터 밑 민가에 놓아두고
가면 일부러 그곳에 내려가서야 가져오거나 볼 수 있었다.
벽송사는 부산 당감동에 소재한 선암사의 말사末寺로 내 기억에 남아있다.
원응元應스님이나 구한久閑스님은 법명이 같은 한분이신데, 입적하신 기원정사(훗날의 내원정사)의
석암스님 수좌이시기도 하다.
몸가짐과 수행이 무구하셨고, 웃는 모습이 참 맑은 분이셨는데, 살아가면서 언제나 내 마음의 멘토 역할로
남아계신 분이다.
벽송사
벽송사의 방장선원方丈禪院 전경이다.
문 열고 들어서면 공간이 매우 넓고 마루바닥은 두꺼운 나무로 이음새가 벌어졌다.
불교학생회나 스님들이 집단으로 수백명 들어가 앉아 참선하고도 남음이 있는 아주 잘 지어진 공간이다.
건물 좌측 난간 섬돌 옆에 아름드리 나무의 속을 후벼파내어 만든 벌통이 하나 놓여있었는데, 사진에는 없다.
주변에는 아카시아, 밤나무, 상수리나무, 대나무, 벚나무, 들꽃, 잡꽃들이 많아 꿀벌들이 꿀을 모으기에
더 없이 좋은 환경이다.
방장선원 마루에 걸터앉아 벌이 벌집 안으로 드나들며 일하는 장면이 하도 신기하여 손으로 나무통 벌집을
만졌더니 부리나케 달려들며 벌침을 쏘아댔다.
벌은 꽁무니에 있는 벌침으로 상대방을 공격하는데, 침입자를 향해 일격을 가한 벌은 꽁무니가 빠지면서
죽게 되더라.
자신을 죽이면서 집단을 보호하는 살신성인을 실행에 옮기는 곤충이더라.
광주사태가 일어났던 5월 이후 여름 내내 그야말로 억수같은 비가 쏟아부었다.
평생 맞이할 비를 그 때 다 맞이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지리산에 우기가 되면 내리는 비를 감당하기 어렵다고 일찌기 듣기는 들었어도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한달 내내 쏟아지는 비를 보면서 산 전체가 마천馬川으로 다 떠내려가는줄 알았다.
비가 내려도 그냥 내리지 않았다.
쏴아아~~~~소리를 내면서 집중타를 때리는 집중호우식이었다.
이제나 저제나 멈추려니 하는 짐작을 하게 할 수 없을 정도로 하루종일 쉬지 않고 내렸다.
경내와 절터 테두리에는 어리고 가녀렸어도 진홍의 줄장미꽃이 담장을 예쁘게 색칠하고 있었다.
꽃의 구성이 크고도 알찬 보랏빛 불도화佛桃花가 무더기 무더기로 여기저기 허드러졌었다.
순백색과 보라색 꽃잎이 알맞게 섞여 둥근 원을 그리며 피는 불도화를 보노라면 방장선원에 모셔진
부처님 머리를 닮았다.
불도화의 넓은 잎새와 꽃망울에 북소리 내듯이 후두둑 후두둑 내려앉는 비를 고스란히 온몸으로 맞이하는
꽃은 조건없이 주고 받는 비와 꽃의 조화調和요 조화造化요 일대 향연饗宴이자 자연의 섭리攝理였다.
방장선원, 종각, 간월루, 조사당이 둘러싸고 있는 앞마당은 발길에 걸리는 돌부리 하나 없이 유난히 넓다.
아침 예불이 끝난 새벽이나 저녁을 먹고난 아스라히 어두워지는 즈음에 걷노라면 마음이 맑아지곤 했다.
절간 돌보는 처사 한분이 잡초를 솎아내어도 너무 자주 돋아나 나도 틈틈이 뽑아내어야 저녁 산책
거니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 여름에 모기가 무성하게 활동을 하므로 앞마당에 모깃불을 자주 피웠다.
벽송사나 서암이나 가본지 30년이 되어가니 그 모습이 변해도 한참이나 변했을 것이다.
붓으로 불경 옮겨쓰기에 여념이 없으셨던 달성 배씨 구한스님은 간간이 TV에서라도 뵐 수 있어서
좋았는데, 젊은 학승 효성曉星스님은 어쩌다 가끔 제주도 어느 암자에 계신다는 소문만 들릴 뿐이다.
찾아다니는 그 자체로 누累가 될까.....
불가에서는 인연을 빌미로 찾아다니는 일을 번거롭게 여긴다고 하니 대처 사람들처럼 수소문하여 찾아
볼 수도 없다.
서암
서암은 벽송사의 서쪽에 있다 하여 구한久閑스님이 서암西庵이라 지으셨다.
위의 지도에는 서암이라고 명기되어 있지만, 그 당시에는 서암의 절터 일부와 건물의 뼈대만 서 있었을 뿐이다.
1970년도부터 서암을 짓기 시작했지만 지을 돈이 부족하여 중간 중간에 우여곡절의 공사 중단이 여러차례 있었다.
서암은 벽송사에서 우횡으로 나 있는 오솔길을 30여분 산책길 걷듯이 걸어가면 닿을 수 있는데,
칠선계곡에서 흘러내리는 계곡물은 서암에서 내려다 보면 물과 바위가 어우러진 탁 트인 웅장한 절경이
되면서 칠선폭포->선녀탕->두지터->용소->추성리->의탄리->추성다리->마천 본류와 합류한다.
그 시절에 산청->함양->마천 구간은 버스가 달리면 흙먼지가 뿌옇게 일어나는 울퉁불퉁 비포장길
이었는데, 산청에서 함양을 넘어오는 구절양장같은 산길 곳곳에 누런색 고령토 광산이 심심찮게 널려
진풍경을 이루고 있었다.
여름에 차창을 내다보노라면 크고 작은 뱀들이 버스길을 횡단하다 바퀴에 밟혀 죽은 흔적들이 자주
눈에 띄기도 했다.
말이 직행버스이지, 손을 들면 아무 곳에서나 내려주고 태워주는 일이 많았다.
길가에 드문 드문 민가들이 있었지만, 산골에서 도시로 떠난 탓인지 찌그러져가는 빈집들이 대부분이었다.
바로 몇해 전에 가보니 그 당시 폐허였던 집터에는 굽이쳐 흐르는 강줄기를 바라보는 천혜의 별장, 펜션,
음식점들로 변모해 있었다.
1980년 5월 한국은 한치 앞을 예견할 수 없을 정도로 국운國運이 위태한 지경이었다.
어렵사리 산사를 찾아오는 이들이 드문드문 전해주는 부산, 마산, 광주의 움직임은 상상하기 쉽지 않은
일들로 가득했다.
계엄군이 무턱대고 마구잡이로 총질을 해서 가정집 담벼락, 창문 할 것없이 온통 총구멍 투성이라고도 했다.
그렇게도 어수선하던 광주사태 직후의 초여름 어느 날 야밤에 세무서 공무원이던 친구는 나를 찾아 깊숙
한 산사까지 왔다.
부산->산청->함양 마천을 덜컹거리며 네시간이나 달려왔을 시외버스 여독에 무척이나 몸이
무거웠겠지만, 친구는 늦은 밤에도 잠을 자지 않고 한사코 내일 새벽에 칠선계곡을 오르고 싶다며
졸라대기 시작했다.
그는 나를 보러온 게 아니라 지리산을 오르기 위해 온듯이 추성리->두지터->칠선계곡->천왕봉 라인을
눈에 넣고 싶어 했다.
그의 성화에 못이겨 산을 오르다 닥칠지 모를 허기나 면할 식은밥 덩어리라도 좀 뭉쳐달라고 스님 방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무식하면 용감하다 했던가?
지금이라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언감생심 등산에 필요한 물품은 무엇인지, 곳곳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는지, 지도나 간식과 물조차도
준비하지 않은 채 전문 산악인들에게도 한국에서 가장 위험하다고 정평이 나있는 칠선계곡을 산맹
둘이서 오르겠다고 마음을 먹었으니.....
요즘은 철따라 수십만원짜리 기능성 등산바지, 윈드재킷, 다양한 등산셔츠들을 취향에 맞게 소재와
컬러를 골라 입을 수 있지만, 그 당시 누군가 갖가지 기능을 갖춘 등산장비를 갖추고 산행을 할 수
있었다면 그는 필시 풍족한 부르조아 계급이었을 것이다.
28년 전에 외딴 산사에 기거하던 고시준비생에게 등산화와 베낭은 한낱 사치품에 지나지 않았고,
지금은 흔해빠진 생수 한병조차도 준비하지 못하고 맨몸으로 깜깜한 새벽의 산사를 나섰다.
지금은 어디에서 수양정진하고 계시는지, 소식끊긴 효성曉星이라는 법명을 지니신 학승도 한 분 동행을 하셨다.
185㎝ 정도의 신장에 나보다 두세살 많은듯 했고, 기골이 장대하여 불경보다는 무술을 닦는데 여념이 없는
분이었는데, 몇아름이나 되는 수십미터 높이의 나무를 순식간에 오르내리기도 하고, 주먹을 단련한답시고
나무의 몸통을 수십수백번 쳐대기가 예사였으며, 긴 다리로 하늘찌르기 하느라 허공에 들어올리면 자신의
머리 위를 휙휙 넘나드는 발끝의 움직임이 너무도 빨라 마치 날쌘 호랑이를 연상할 정도였다.
효성스님이 앞장을 서고 우리가 뒤를 따라 오르기로 했다.
추성마을에서 좌측으로 올라야 용소를 만나게 된다.
용소龍沼는 추성리에서 두지터로 곧장 오르게 되면 마주칠 수 없는 곳이다.
나는 스님들이나 신던 하얀 고무신과 남색 츄리닝 바람에, 친구는 딱딱한 구둣발로 추성리->용소->
두지터를 오르기 시작했다.
용소
서너 해 전인가 보다.
맷돼지떼가 자주 드나들어 애써 가꿔놓은 고구마밭을 송두리째 파뒤집어 놓기에 고라니, 맷돼지,산짐승을
막아볼 심산으로 밭두렁 1.5m 간격으로 말뚝을 박고 어망을 쳤는데, 나만 그렇게 어망을 친 게 아니라
주변의 농민들이 전부 그렇게 하고 있었다.
맷돼지는 쇠냄새, 쇳소리, 사람냄새를 싫어하고, 사람이 가져다 놓은 음식, 손길이 닿은 먹이는 절대
먹지 않는 습성이 있다.
고구마, 감자, 옥수수를 매우 좋아하더라도 인간이 길 곳곳에 뿌려놓은 포획용 먹이는 입을 대지 않고
자신이 손수 땅을 파서 찾아 먹든지 산속에서 열매를 따먹든지 하는 야행성 동물이다.
어느 날, 맷돼지 일가의 막내뻘 되는 어린 한 마리가 밭에 들어오다 밭두렁 바깥 그물에 발톱이 걸렸는지
헐떡거리고 있었다.
더운 여름날이었고, 밤새 그물코에서 빠져나와 달아나려고 발버둥을 쳤는지 기진맥진, 거의 숨이 넘어
가기 직전이었다.
맷돼지를 잡으려고 그물을 친 게 아니라 그들의 진입을 막을 심산이었으나 내 의도와는 다르게 포획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어린 맷돼지 발톱이 그물코에 걸려 얽힐 정도로 그렇게도 날카롭게 생겼는지 처음 목도하게 되었다.
만물은 반드시 있어야 할 곳에 있고, 있어야 하므로 인간이 인위로 조작하면 안 된다
간절하게 살려주고 싶었으나 너무 늦게 발견되어 도저히 손을 쓸 수가 없게 되어버린 상태였다.
부근의 지인에게 연락을 하여 가져가라고 했더니 오토바이를 타고 한달음에 달려와서는 마대에 넣어 갔다.
그 날 이후 열흘이나 지난 어느 날,
더워서 점심으로 콩국수 잘 하는 집이 있다고 안내하는 일행들이 있어 따라나섰더니 맷돼지를
수거해갔던 지인이 거기 앉아 있었다.
나를 보더니 내 자리로 와서 옆에 앉더니 잠시만 기다리라며 금새 다녀오겠다고 하면서 나갔다.
그의 말마따나 참말로 몇분 지나지 않아 손에 작은 생수병 하나를 들고서 되돌아 왔다.
지난 번 맷돼지 쓸개즙으로 담은 약술이라고하면서 내게 건네는 것이었다.
나를 보자 그는 혼자 좋은 약술을 먹기가 미안해서 건네주려는 마음이 발동했던가 보다.
맷돼지나 곰이나 짐승의 섭생이 같아서 곰의 쓸개나 맷돼지의 쓸개나 그게 그거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웅담은 귀하고 비싸니 맷돼지의 쓸개로 대신할 수 있다는 말인지, 맷돼지 쓸개도 곰 쓸개의 약효로
대체할 수 있다는 말인지.....
나는 질겁을 하며 싫다고 거절했더니 기다렸다는듯이 내 일행들이 서로 먹겠다고 야단 아우성을 부렸다.
용소의 물색깔이 맷돼지 쓸개로 담은 약술처럼 어찌 저리도 닮았을까 싶을 정도로 한결 같다.
오싹한 한기가 들 정도로 녹색 페인트 풀어놓은듯이 푸르디 푸르다.
저런 색깔을 어떤 말로 형용하면 보는 이로 하여금 제대로 된 용소의 색깔로 읽혀질 수 있을까?
빨치산 이현상 부대의 임시사령부가 있었다는 두지터는 쌀 뒤주라는 말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가락국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532년)이 신라에 쫓겨 두지터로부터 4㎞여 떨어진 국골로 피난을
와 생활하면서 마을이 처음으로 형성됐다고 하는데, 구형왕은 국골 인근 두지터에 창고를 짓고
군량미를 비축했다고 하여 뒤주-->두지터로 어휘 변천되었다고 한다.
추성리나 두지터 주민들은 담배를 재배하거나 토종벌꿀을 치거나 버섯, 오미자, 약초, 산나물을 뜯어다가
생활의 수입으로 삼았다.
곳곳에 자연 꿀벌들이 부지런히 들락날락거리는 꿀통들이 섬돌 주변이나 빗물이 비껴내리는 바위 아래
즐비하였다.
지금은 세월이 많이 흘러 어떤지 모르겠으나 내가 두지터를 처음 밟아 오를 때, 추성리와 두지터 산비탈
밭이란 밭에는 넓은 녹색의 담배 잎사귀들이 흐드러지게 많았고, 담뱃잎를 쪄서 말리는 헛간들도 곳곳에
움막으로, 집으로 지어져 있었다.
집집마다 산에서 칡넝쿨을 베어와서 야외에 걸어놓은 화덕 가마솥에 삶아서는 껍데기를 벗겨 파는
부업이 성행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옛날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에 첩첩산골, 두메산골에서나 볼 수 있었던 우리네 삶의 단면들
이어서 잊혀지지 않는다.
옥녀탕
그러나 저러나 두지터를 통과하면 본격적으로 칠선계곡을 들어서기 시작하는 초입이다.
나는 산의 경사가 심한 오르막을 잘 오르지 못한다.
오르막 경사가 심하면 심할수록 속도가 더뎌지고 발걸음이 무거워진다.
아침 6시가 넘어가는 여름에 두지터를 뒤로 하며 산길을 오르기 시작하자 목이 타고 가슴이 따가워지기 시작했다.
몇 해 전부터 정기검진을 받을 때 입에 기구를 물고 숨을 내쉬며 들이마시며 측정하는 호흡력 테스트를
할 때마다 건강한 사람들이 그리는 일정한 그래프가 잘 그려지지 않아서 병원 관계자가 몇번씩이나 또
해보라 또 해보라 했다.
남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숨을 잘 들이키기고 하고 내뱉기도 하더라만 나는 날숨과 들숨을 길게 할 수가 없었다.
천식이 있는 것인가? 폐에 문제가 있는가?
숨을 제대로 내뱉거나 들이쉬지 못하면 죽는다는 말이 되는데.....
오르막길에서 잘 오르지 못하는 이유는 폐의 저장용량 부족, 호흡력이 떨어져서 쉽게 숨이 차올라
그런 게 아닌가 한다.
늦었으나마 두서너해 전부터 불어나는 몸무게를 줄이고 폐활량을 늘리기 위하여 아침 조깅을 하고 있다.
500m 정도를 뛰면 숨이 차오르기는 해도 약간 숨을 고른 다음 매일 아침 5~10km 정도를 빠르지 않은
속력으로 뛰고 또 뛴다.
푸쉬 업, 몸통돌리기, 허리굽혀 땅바닥 양손짚기, 다리 쭉 펴고 머리를 무릎 위에 갖다대기를 달리기 쉬는
중간에 수십차례 반복을 하다보니 한결 몸이 유연해지면서 숨쉬기가 좀 나아졌지만, 산행길 오르막을
만나면 여전히 숨쉬기가 버거워지고 몸이 무거워져서 일행들 따라가기가 고통스러워 항상 뒤쳐지기 일쑤다.
그러나 아직 관절은 괜찮은지 어떤지 내리막이나 하산길에는 쏜살처럼 한달음에 내려와서는 앞서간
일행들과 무사히 합류한다.
시간과 공간이 공존하는 곳!
처음 맞이한 옥녀탕의 장관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무쇠보다 두껍고 단단한 바위에 억겁이나 지난 세월의 흔적을 물길로 남기며 내려오는 물!
푸르디 푸르게 우거진 숲과 조화롭게 자연 배치된 바위들을 배경으로 시간의 물이 흐른다.
그 새파란 물색에 한번 놀라고, 훌러덩 벗고 들어가자 오싹 한기를 느끼게 되는 물의 차가움에 두번 놀란다.
명경明鏡처럼 깨끗한 물을 만난 기쁨을 주체 못하여 선녀와 옥녀 흉내를 낸답시고 준비운동도 하지
않고 입욕하다가 익사하는 경우가 이따금 있다고 한다.
시퍼렇다 못해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시커먼 물 속에서 뭔가가 사람의 다리를 잡아당겨서 옴짝 달싹도
못하고 죽게 된다고도 하는데, 물이 깊어서 익사한다기 보다는 몸이 더운 채로 헐떡거리며 산을
올라오다가 느닷없이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속에 들어서게 되어 심장마비가 와서 그렇다고 하는 게
더 설득력 있어 보이는 진단이다.
무명소
어느 날 후덥지근한 저녁에 스님은 손수 밀가루를 으깨어 국수가락을 만드셨다.
짜장을 볶아 그 위에 당근, 감자를 삶아 넣고 오이를 가늘게 썰어 얹어 국수를 비벼주셨다.
국수에 짜장을 비벼먹던 날,
풋고추를 밀가루에 버무려 가마밥솥에 찐 다음 양념장을 얹은 것과 엷고도 넓게 썰어 잘 말려 튀긴 감자도
반찬으로 먹었다.
조사당 아래, 샘터 옆에 있는 텃밭에서 몇년씩이나 자라 인삼인지 산삼인지 모를 정도로 씨알이 굵은 도라지.
도라지의 몸통이 밍크털보다도 더 희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고, 나무젓가락 쪼개듯 몇겹으로 찢어
고추장에 버무려 먹었던 날도 그 날 저녁이었다.
사랑하는 두 악남선녀가 있었다.
악남선녀 둘이서 지리산 칠선계곡을 오르던 시절이 있었다.
둘은 산이 좋아 산을 오가다 만나 너무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하루라도 안 보면 죽을 것처럼 사랑하게 되었다.
둘은 사랑에 취했을 뿐만 아니라 지리산의 꽃내음, 바람내음, 나무내음, 돌내음에 취했다.
선녀는 말했다.
"아, 여기 이런 곳에서는 내 몸 죽기조차 아까울 정도로 바람소리, 물소리, 새소리 맑고 깨끗하구나!!"
그렇게 끊임없이 사랑하던 두 사람이었으나 어느 날 악남이 변심을 하게 되었다.
선녀는 다시는 볼 수 없는 남자, 만나주지 않는 악남을 혹시나 혹시나 하며 만나게 될까 기다리고 또
기다리면서 이 산 저 산 둘이서 함께 다니던 산을 혼자서 미친듯이 오르내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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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집을 나간 선녀가 흔적이 없어졌다.
깨끗이 방을 치우고, 소지품을 태우고, 온다 간다 말도 없이 사라졌다.
엄마, 아버지는 애가 타들어가면서 갈 만한 곳을 다 뒤졌지만 안다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선녀의 친구 한 명이 가끔 산을 동행하곤 했다.
어렵사리 찾은 그녀에게 전화를 해서 자초지종을 말했더니 혹시나.....
바로 위의 사진, 지리산 칠선폭포 닿기 전, 바위가 굴러굴러 자연스러이 만들어진 소沼에 한번 가보라 일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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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녁 8시 경이나 되었나 보다.
초로의 부부가 절간 마당에 들어서면서 주지스님을 찾으신다.
딸이 산에서 죽어서 발견되었는데, 스님이 가셔서 망자의 극락왕생 인도를 구해달라고 하셨다.
선녀는 집을 나와 죽어서도 사랑했던 악남과 함께 올랐던, 여기서 죽어도 좋다던 맑고 깨끗한
칠선계곡 그곳, 무명소 부근 숲에서 생을 마감했다.
망자의 진혼을 위해 칠흙처럼 어두운 그 밤에 효성스님과 선녀의 가족들은 용소->두지터->옥녀탕->
칠선폭포를 거치는 칠선계곡을 타올라 가셨다.
아직도 그 날 스님이 흔들어대며 산을 향하던 요령소리가 귓전에 남아 맴돈다.
나를 위해 목숨까지도 바칠 사람이 있는지, 내가 죽어서까지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내 주위에 있는지,
그런 사람이 있기라도 한다면 행복할지, 있으나 없으나 무덤덤하고 밋밋한 사람이나마 있는 게 차라리
나을런지.......
원나잇 스탠드가 비일비재한 지금, 바람직한 일은 아닐지라도 남자의 변심에
세상만사 전부, 훌훌 자신의 목숨까지도 불살라버릴 여자가 얼마나 될런지......
비록 혼자만의 아름다운 사랑이었지만, 마음에 곱게 간직한 채 짧은 생을 마감한 선녀의 명복을 빈다.
칠선폭포
벌꿀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기억에 아스라히 남아있으나 못다한 이야기 있다.
추성리나 두지터 마을 어느 집 할 것없이 처마 밑에는 토종 꿀벌통 한 두개는 놓여져 있었다.
이따금 벌을 키우는 어느 집에서는 남의 집 벌들이 집단으로 이주해 오는 횡재가 벌어진다고도 한다.
높지 않은 산, 언덕배기의 커다란 바위 밑에나 비가 들지 않는 알맞은 자리에 평평한 바닥돌을 놓은 다음,
속을 후벼파고 앞부분에 출입구를 낸 벌통나무를 놓아두면 집단의 벌떼들이 몰려들어오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1980년 여름 내내 너무 많이 내린 비로 인하여 꿀벌들은 하루종일 벌통에서 바깥나들이는 고사하고
일조량 부족으로 개화가 되지 않아 도저히 당분을 담아올 꽃들을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었다.
방장선원 마루 바로 아래 섬돌 주위에 벌통 몇개가 있었는데, 날씨 맑은 4월에는 만개한 아카시아,
밤나무에 떼를 지어 날아가 부지런히 꿀의 원료를 져다날랐지만, 6월 초순부터 시작한 긴 장마에 저장용
꿀을 비축하기는 커녕 당장 끼니를 이어갈 식량조차도 부족하여 굶어죽는 벌의 주검들이 마당에 건포도
처럼 따닥따닥 늘어만 갔다.
그래도 스님은 벌통 주위에 설탕을 뿌려주는 보시를 하지 않으셨다.
벌은 매우 미묘하고도 예민한 생물이라 약간만 심사가 뒤틀리면 살던 곳에서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기는
습성이 있다고 하는데도 용케 벽송사의 벌들은 긴 장마로 인한 기근과 주인의 무관심에도 변심하지
않고 가을까지 잘 견디며 살아남았다.
수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에도 나는 굶어죽는 벌들을 보고도 인간이 만든 먹이를 끝끝내 주지 않으신
스님의 속뜻을 알지 못하겠다.
그 해 가을이 되었다.
어느날 오후 서너시쯤에 보살님이 넓적한 대야를 가져오셨고,
효성스님이 벌통을 덮고 있는 솥뚜껑처럼 생긴 지붕돌을 걷어내고 벌통 속의 밀랍을 뜯어 대야에 수북히 담았다.
밀랍을 옮기는 중에 밀랍 갈레갈레에서 꿀줄기가 끊어지지 않고 주루룩 주루룩 흘러내렸다.
이거 드셔보시게나!
스님께서 손수 칸칸마다 꿀을 한가득 머금고 있는 손바닥만한 밀랍 덩어리를 건네주셨다.
밀랍을 골라내지 않고 통째로 한잎 베어물고 가볍게 씹었더니 밀랍 사이사이에서 꿀이 흘러나오며 금새
달디 단 벌꿀이 입안에 가득히 쌓였는데, 목으로 삼킨 양이 숟가락으로 치면 대충 스무스푼은 족히 넘었겠다.
나는 지금도 자연 그대로, 인간이 뿌려댄 설탕이나 이물질이 전혀 가미되지 않은 그 때 그 토종꿀맛을
잊을 수가 없다.
살면서 두번 다시 그 꿀맛과 같은 꿀을 어디에서도 만날 수가 없었다.
그 시절 그 청정무구한 자연에서 익은 꿀이 존재할 수 없으므로 먹을 수가 없었다.
지금도 나는 누군가가 어떤 음식을 먹고난 뒤에 "그 음식 맛 정말 꿀맛이네" 하면,
"진짜 꿀을 먹어보셨나요?" "토종꿀맛을 정말 아신다는 말씀인가요?" 하고 정색을 하며 반문을 한다.
대륙폭포
삼층폭포
두지터,옥녀탕, 칠선폭포, 대륙폭포를 지나 삼층폭포에 닿았다.
두지터에서 옥녀탕을 지나면 오솔길로 변하면서 위험해지기 시작하는 구간이다.
물살에 굴러 곳곳에 버티고 있는 바위를 기어올라가기도 하고, 쓰러져 자연스레 외나무 다리 역할을 하고
있는 고사목을 타거나 계곡의 물길을 몇번 가로질러 건너야 하는 구간이 나오는데, 자칫 호우로 물이
불어나기라도 한다면 길이 끊기게 된다.
급물살의 물길이 등산길을 끊어버리면 진퇴양난이 되어 등산객들이 억지로 물을 건너다 조난을 당하기도 한다.
물살이 쓸고 내려간 낭떠러지를 아슬아슬 진땀흘리며 걸어가다 주변의 아름다운 꽃, 나무, 바위, 폭포, 소,
울창한 숲의 비경에 반하여 넋 잃고 구경하다 순식간에 실족하기도 한다.
지난 해 설악산 신흥사-->설악동-->천불동-->희운각 대피소-->중봉-->대청봉 코스를 두세차례 오른 적이 있었다.
계곡과 폭포, 낭떠러지와 등산로를 잇는 나무계단들이 너무 정교하게 잘 설치되어 있어서 등산이 아니라
차라리 산보하듯이 오르내렸는데, 칠선계곡에는 긴 시간동안 산짐승들이나 타고다녀서 난 길 같은
자연의 길 외에는 길이 없다.
자연이란 인간의 인위적인 손길이 닿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상태이다.
아무리 위대한 화가라 하더라도 자연상태보다 뛰어난 걸작을 그릴 수 없다.
대륙폭포와 삼층폭포는 물, 바위, 풀, 나무, 하늘, 계절의 시간, 자연의 색깔이 그려낸 한폭의 그림이다.
사진만 보고 있어도 떨어지는 물소리에 귀가 간지럽고, 맑디 맑게 비춰지는 하늘과 물빛에 눈이 어지럽다.
아쉬움 한 가지는 용소는 물론이고 칠선계곡 등산로 흐르는 물 어디에서도 노니는 물고기를 볼 수
없었다는 점이다.
사람이나 물이나 너무 맑거나 차거나 하면 사람이 모이지 않거나 고기가 노닐 수 없나 보다.
마폭포(마주본다 하여 마폭포, 마지막 폭포라 하여 마폭포)
마폭포에 이르러서야 칠선계곡의 물줄기가 마무리된다.
말없는 바위에 흔적만 남기며 세월이 흐른만큼 물도 흘렀을 것이고, 물이 흘러 깊숙히 패인 물자국만큼
시간이 지나갔겠다.
마폭포의 물줄기를 두갈레로 흐르게 하는 돌과 나무가 마르고 닳아서 한줄기로 합쳐진다면 나의
산병도 끝마무리 할 수 있게 될까?
이제부터는 가파른 오르막을 걸어올라서 더 가파른 철계단도 넘어서야 천왕봉 정상에 다다를 수 있다.
05시에 길을 나섰는데 11시30분이 되어서야 오른쪽으로는 노고단, 왼쪽으로는 대원사, 발 아래로는
법계사 라인을 보았다.
정상 언덕 여기 저기엔 아직도 6월의 찬서리가 가득했고, 모질게 남은 잔설殘雪이 군데군데 꽃으로 피어있었다.
허기가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우리에겐 굶주림을 면할 요기꺼리 한조각 남아있지 않았다.
젊어서 그랬는지, 일찍 닿아서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그랬는지 하산길은 산악구보하듯 달려서 내려왔다.
어둑어둑한 즈음에 들어선 경내에선 다람쥐 한 마리 줄장미 덮힌 담장을 넘나들고 있었고, 저녁 공양
으로 만들어진 감자 섞인 수제비, 때가 좀 지나 불어터진 수제비였으나 반찬 없이 꿀맛처럼 먹었다.
지리산에 핀 진달래....
한 나무에서 수천갈래 가지와 꽃이 뻗고 피고 돋아 장관을 이룬다.
또 다가올 수십백년 세월의 모진 추위와 비바람을 의연히 맞이하면서 수만갈래 가지와 꽃을 일궈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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