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ving daily/조선왕조, 왕릉

남인의 영수 [미수 허목]의 글씨

나 그 네 2018. 10. 18. 17:41

남인의 영수 [미수 허목]의 글씨

 

 

1. 미인의 아름다운 눈과 같은 편액

 


우리나라 사찰이나 궁궐, 고택, 정자, 서원 등 대부분 전통 한옥의 전각에 걸려있는 편액이 답사객에게 중요한 이유는 명패와도 같아서 전각의 정체와 용도를 알려주는 많은 정보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했으므로 편액이 제공해주는 정보를 이해하고 전각에 대하여 대강이라도 알고 나서 두루 살펴보게 되면 더 많은 것을 보고 제대로 느낄 수 있게 된다.

 

편액이 중요한 또 다른 이유를 꼽으라면, 예술의 한 장르인 서예 작품을 공짜로 감상할 수 있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다. 한자(漢字)는 형상이나 의미를 상징하는 조형으로 구성된 상형문자에서 발전해온 것이므로 한자 서예도 엄연한 조형미술의 한 분야이다.

따라서, 한자 문화권인 우리나라도 삼국시대 한자가 도입된 이래 한자 서예를 예술로 승화시켜 아름다움을 추구해온 심미주의적 경향을 띄는 당대의 명필들을 지속적으로 배출해왔다. 그러나 아쉽게도 서예 작품은 대부분 종이를 재료로 이용하다 보니 오랜 세월 남아 있는 것이 많지 않으며, 남아 있다 하더라도 훼손을 방지하기 위하여 박물관 수장고나 소유주의 깊은 장롱 속에 보관되면서 소수에게만 감상의 기회가 주어져 일반 대중들은 접할 기회가 거의 없거나 설령 감상의 기회가 온다고 해도 어려운 한자에 짓눌려 재대로 감상할 엄두를 낼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전통 한옥의 전각에 달려 있는 편액은 비교적 쉬운 한자로 씌어져 있기 때문에 대하는데 부담이 적고, 뜻을 알 수 없는 한자라 하더라도 큼지막한 대자(大字)로 시원하게 적혀 있어 그림을 보듯 조형적 감상만으로도 서예미를 즐기기 충분하다.

각 전각의 전체적인 형상이나 특색에 맞추어 조화롭게 어울리는 크기와 필체로 전각의 이마 위치에 달려서 답사객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편액은 그래서 사람의 눈과 같다. 편액을 감상하지 않고 주변만 두리번거린다면 미인의 아름다운 눈을 보지 않고 몸매나 치장만 보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사람을 만나면 눈부터 맞추듯 전각을 보면 편액부터 눈여겨 보아야한다.


 

 

2. 불가(佛家)의 전각에 달린 편액이 담고 있는 정보

 

전각과 관련된 정보를 전해주는 기능에 가장 충실한 편액은 불가의 사찰에 있는 편액들이다. 사찰에 있는 많은 전각들에는 비슷비슷하게 생긴 불상들이 모셔져 있는데 전문적 식견이 없다면 어떤 용도의 전각인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이때 편액이 알려주는 전각의 의미를 안다면 어떤 불상이 무슨 목적으로 모셔져 참배를 받고 있는 전각인지 쉽게 알 수 있게 된다. (별도 부록 참조)

 

사찰의 편액이 암시해주고 있는 또 다른 중요한 정보는 사찰의 창건이나 중창 연대를 짐작하게 해준다. 초건이든 중건이든 사찰의 전각을 세우게 되면 정성이 깃든 장엄을 위하여 당대 이름 있는 명필의 글을 받아 전각의 문패이자 눈인 편액을 달고자 한다. 그러므로, 편액을 쓴 서예가의 활동 시기를 알게 되면 자연히 해당되는 전각이 대략 언제 세워졌는지 역사를 알 수 있다.

 


 

3. 유가(儒家)의 편액이 담고 있는 정보


 

선비들의 자취가 남아 있는 유가의 전각에는 명패 기능을 하는 편액 이외에도 다양한 글귀의 현판들이 집안 곳곳에 장식처럼 달려 있다. 유가의 전각에 달린 편액이나 현판이 담고 있는 정보도 사찰의 편액과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조금 색다른 정보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누가 쓴 글을 달아 놓았는지 보면 그 집안은 어느 당파에 속했는지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주로 같은 당파에 속한 선비들끼리 교류하였으므로 같은 당인들 중에서 동시대거나 혹은 앞선 시기 존경하거나 혹은 서예에 뛰어난 사람의 글을 받아 편액으로 달거나 혹은 사랑채에 장식용으로 현판을 달아놓곤 하였다.

 

사색당파로 상징되는 조선시대 당쟁이 가장 치열하게 벌어진 때가 인조반정(1623)이후 집권한 노론과 남인(동인의 후예) 간의 백년전쟁이었다.

이때 양 당파의 영수였던 남인(南人)의 미수 허목(眉叟 許穆:1595~1682)과 노론(老論)의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1607~1689)은 학문적으로 정치적으로 치열하게 맞붙었을 뿐만 아니라 서예에도 일대를 풍미할 만큼 경지에 이르러 쌍벽을 이루었으니 이때 형성된 당파의 구성이 큰 맥락으로 조선 멸망 때까지 그대로 유지되었으므로 당대뿐만 아니라 조선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남인 집안에서는 미수의 글씨를 노론 집안에서는 우암의 글씨를 걸어 놓은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문화유적 답사에 나섰다가 우연히 만난 미수와 우암의 글씨를 감상해보면 서예적 관점으로도 뛰어난 작품인데다가 그 집안의 학맥과 학풍도 엿볼 수 있게 된다.

 

17세기 조선의 사상계와 정치계를 이끈 미수와 우암 간에 중앙정계에서 벌어진 당쟁의 여파는 [지리산 자락 사화의 흔적 - 남명] 편에서 살펴보고 나왔듯, 엉뚱하게도 한양에서 천리길 떨어진 지리산 자락 남명의 묘소에 세워진 신도비문을 둘러싸고 양 당파의 후대들이 이후 300년간 정신 사납게 쟁투를 벌였던 사례가 대표적이다.

 

 

4. 미수의 학문적 배경


 

미수는 경기도 연천이 고향으로, 이 지역은 인근 파주의 율곡 이이(栗谷 李珥:1536~1584)를 중심으로 형성된 기호학파(畿湖學派:경기도와 호서지방을 중심으로 한 학파)가 서인(西人)의 당파를 형성하고 있었으나, 미수의 집안은 소북계(小北)로서 엄격한 성리학파와 달리 다양한 학문과 사상을 절충하는 개방성과 포용성을 지닌 화담 서경덕(花潭 徐敬德:1489~1546)의 학맥에 연원을 둔 가학(家學)을 이어받는 한편으로, 전라도 나주 출신인 외조부 백호 임제(白湖 林悌:1549~1587)의 은자(隱者)적 처세의 영향을 받아 초야에 묻혀서 성리학뿐 아니라 도가(道家) 사상 등 보다 열린 자세로 다양한 학문적 편력을 했다.

 

젊은 시절 경상우도 지역의 현감을 두루 역임한 부친의 임지를 따라 남명의 영향력이 남아 있는 이 지역에서 유림들과 교유를 맺고 자라면서 남명학파의 학문도 수용하였으며, 인근 경북 성주의 회연서원(檜淵書院)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던 한강 정구(寒岡 鄭逑:1543~1620)의 문하에 들어가 한강의 학맥을 이어받은 수제자가 되었다. 한강은 남명과 퇴계 양쪽 학맥을 이어받았으나 남명의 제자 정인홍이 이끌던 북인(北人)정권의 횡포가 심해지자 이들과 인연을 끊고, 일찍이 정치적으로 퇴계학파의 남인(南人)계로 완전히 돌아섰으므로 미수도 정치적으로 남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미수는 비록 퇴계에서 한강을 거친 영남 성리학의 학통을 이었다고는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주자 성리학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학문을 섭렵하면서 오랜 세월의 수련과 자득을 통하여 육경(六經)으로 대표되는 요순(堯舜:태평성세를 이룬 중국의 이상적인 국가)과 공자(孔子) 시대의 원시유학을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학풍을 열어 다음 세대에 근기(近畿:경기도일원) 지방을 중심으로 성장하게 되는 실학파를 위한 초석을 마련하였다.

 

미수의 입장에서는 당시 조선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국가적 위기에 봉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건국이념이었던 성리학이 아무런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했을 뿐더러, 국력이 피폐해진 상황에서도 당시 집권 세력인 송시열을 위시한 서인계 학자들은 공론적인 주자성리학만을 옹호하며 지나친 관념론에 빠져 민생은 외면한 채 북벌론(北伐論:중국 청나라 정벌을 주장) 등 비현실적인 주장을 내세우는 것에 대항하여 가장 이상적인 치세를 요순시대로 보고 이때의 치세학문인 원시유학에 몰두했던 것이다.

 


 

5. 미수전(眉叟篆)의 개척


 

미수가 활동하던 17세기 이전에는 서예에 있어서 아름다움 자체를 추구하여 명필 석봉 한호(石峯 韓濩:1543~1605)의 서체가 유행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17세기 첨예한 당쟁의 와중에 자신의 학문적 논리성 강화의 일환으로 미수는 도문일치(道文一致) 사상을 주창하였는데, 서예적으로 단순한 미적 추구의 경향을 벗어나서 이상정치 시대인 요순시대 통치의 법도()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문자조차도 그 당시 서체()와 일체하여 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수는 원시유학에 몰두하는 한편으로 도문일치 사상에 입각하여 태평성세였던 요순시대를 현세에 재현시키고자 그 시대의 고문을 전범으로 삼아 자신만의 독특한 서체인 미수전(眉叟篆)를 개척하였던 것이다.

진나라(기원전 210년경) 때 한자(漢字)가 최초로 공용문자가 되면서 초기에 사용한 서체가 전서체(篆書體)로써, 미수가 개척한 서체는 이보다 더 앞선 요순시대를 가시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고전(古篆), 즉 진나라 전서체 보다도 더 옛날 원시 전서체 연구에 몰두하여 만든 것이 미수(眉叟)의 전서()란 의미의 미수전(眉叟篆)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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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수전의 대표적인 걸작으로 꼽는 강원도 삼척의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

미수가 1차 예송논쟁에서 서인에 패한 이후 삼척부사로 좌천되어 있는 동안 심한 폭풍이 일어 바닷물이 삼척을 덮치면서 난리가 났는데 동해를 예찬하는 노래를 지어 바닷가에 비를 세우자 물난리가 가라앉았다. 그 뒤로는 아무리 거센 풍랑이 와도 이 비를 넘어오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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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주동해비 뒷면 비문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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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사 약사전 편액. 지리산 자락 편액 중에서 볼 수 있는 일반적인 전서체

 

 

미수전(眉叟篆)은 당시 조선은 물론 중국 역사에 유례로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독특한 서체로 인정을 받았다. 구름인 듯 귀신인 듯 기이한 문자는 그가 각종 고문과 비문을 섭렵하고 이를 통해 이상국가인 요순시대의 통치의 법도를 떠올리게 하는 독특한 형태미로 나타낸 것이다.

     

미수전을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곳이 미수의 스승인 한강 정구를 모신 성주의 회연서원이다. 강당 벽 곳곳에 미수전의 현판이 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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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성주 회연서원에 걸려 있는 望雲巖(망운암) 깨끗한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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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연서원에 걸려 있는 玉雪軒(옥설헌) 기상은 높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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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연서원에 걸려 있는 不槐寢(불괴침) 부끄럽지 않게 잠들다

전서체도 일반인들이 읽기 어려운데 하물며 미수전이라 옆에 읽기 쉬운 해서체로 병기해 놓았다.


 

6. 미수와 지리산


 

미수와 지리산의 인연을 살펴보기 전에, 이 시기 지리산 자락 유림들의 동향을 간략히 살펴보자.

 

앞서 [지리산 자락 사화의 흔적] 시리즈를 통하여 조선시대 중앙 정계를 주름잡았던 지리산 자락 출신의 걸출한 선비들이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어떻게 명멸해갔는지 살펴보고 나온 바 있다.

인조반정(1632)으로 남명의 수제자 정인홍이 이끌던 북인계열이 괴멸되면서 하루아침에 정인홍이 천하의 역적으로 몰리게 되자 남명학맥의 틀 속에서 정인홍과 연관될 수밖에 없었던 지리산 자락 유림들은 자신의 운명뿐만 아니라 남명학맥의 생존을 위하여 뿔뿔이 흩어져 당시 집권세력인 노론과 남인계열로 전향해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중에서 지역적으로 크게는 영남학파의 계열이므로 많은 경우 영남학파의 줄기인 남인에 속하게 되었다.

이 무렵 옥종 안계에 은거하며 남명학맥의 유지와 계승을 위하여 부단히 노력한 겸재 하홍도(謙齋 河弘度:1593~1666)도 정치적으로 속한 남인계에서 학문과 인품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미수가 56세의 이례적으로 늦은 나이에 처음으로 관직을 맡아 조정에 출사하기 전까지 고향과 지방을 두루 오가며 학문에 전념하였는데, 지방에서는 자연히 같은 남인계 인사들과 교류하며 가객이 되어 강론을 하면서 묵어가곤 했다.

미수는 젊은 시절 부친을 따라 지리산 인근의 거창 의령 산음 등지에서 살았기 때문에 자연 사림 선현들의 자취가 남아 있는 지리산을 그리고 있었을 것이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노모를 모시고 젊은 시절 살았던 경상우도로 내려와 의령에서 1645년까지 10년간 사는 동안 1640년 미수는 지리산행에 나서서 군자사에서 천왕봉에 오른 [지리산기(智異山記)]와 쌍계사와 불일암에 오른 [지리산청학동기(智異山靑鶴洞記)] 두 편의 유람록을 남겼다. 이 무렵 의령에서 가까운 지리산 자락 옥종에 있는 하홍도의 모한재(慕寒齋)를 방문하여 지내면서 두 점의 글씨를 남긴 덕분에 중국에서도 찬탄해마지않았던 미수전을 지리산 자락에서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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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종 안계마을에 있는 모한재(慕寒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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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한재에 걸려 있는 미수의 慕寒齋(모한재)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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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한재 입구에 있는 영귀대

겸재는 이 바위 위에 영귀대를 만들어 놓고 제자들과 강론하며 유유자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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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귀대 바위 상부에 새겨놓은 미수의 詠歸臺(영귀

겸재 하홍도는 미수와 이같은 친분 덕분에, 1660년경 남명의 신도비를 다시 세우기 위하여 남명 문중에서 백방으로 비문을 구하려 하였으나 여의치 않자 결국 하홍도가 미수에게 부탁하여 미수가 찬한 비문으로 세울 수 있었다.

 

 

7. 전국에 있는 미수전 편액들


 

지금부터 전국 유서 깊은 집안의 가옥에 걸려 있는 미수전을 감상해보며 미수가 미수전을 통하여 꿈꾸며 보여주고자 했던 요순시대의 대평성세를 그려보자.

미수가 남인이었으므로, 미수의 글씨는 미수의 고향인 연천에 있었던 고택에 몇편 있었으나 접경지역이라 한국전쟁 때 없어지고 자필로 쓴 자신의 묘비에 미수전을 볼 수 있지만 군사작전지역이라 쉽게 갈 수는 없다. 그 외 대전과 영동에 2점을 제외하고 대부분 남인의 본거지였던 경상도에 집중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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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도산서원 무락제이의.JPG 

*대전 도산서원(道山書院) 강당에 걸린 편액

昧事泌求是(매사필구시모든 일은 반드시 옳은 것을 구하고

無落第二義(무락제이의)  의롭지 않은 일에 빠지지 말라

 

도산서원은 1693년 만회 권득기(晩悔 權得己 :1570~1622)와 그의 아들 탄옹 권시(炭翁 權諰 :1604~1672)를 추모하기 위해 세웠다.

권시는 송시열과 같은 기호학파로서 서인이었으나 예론에 밝아 1차 예송논쟁(1659) 때 송시열과 대립하여 남인파를 지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서인의 규탄으로 파직된 인물로서 이때 미수와 인연을 맺어 탄옹이 낙향한 대전을 방문하여 글을 써 준 것으로 추정된다.

이 글은 이후 권득기 후손 집안의 가훈으로 승계되어 미수의 글씨를 복각하여 달아놓은 곳을 볼 수 있는데, 서대전 유회당에 주련으로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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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영동 고백당에 걸린 孤栢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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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천 완귀정에 걸린 玩龜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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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청도 선암서원에 걸린 逍遙堂(소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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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팔공산 자락 농연서당에 걸린 溪亭幽樓(계정유루)

대구 백불고택으로 유명한 경주 최씨 집안의 대암 최동집(臺巖 崔東集:1586~1664)이 강학하던 곳인데, 한강 정구 문하에서 미수와 동문수학한 사이이다.

이 인연으로 백불고택에 있는 동계정에 미수전체로 東溪亭을 달아 놓았으나, 1918년대 주인의 호를 따서 정자의 이름을 지었으므로 미수가 직접 쓴 글씨는 아니다.


 

17삼가헌 예의염치효제충신.JPG 

*하엽정으로 유명한 대구 달성 삼가헌에 걸린 禮義廉恥孝悌忠信(예의염치효제충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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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상주 청간정에 걸린 세편의 편액 중 廳澗亭(청간정)

 

19청간정 익암서당.JPG

*청간정의 益巖書堂(익암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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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간정의 趙氏家塾(조씨가숙)

 

청간정은 미수와 학맥과 혼맥으로 얽혀 있는 가곡 조예(1608~1661)가 풍양조씨 자손들을 가르치던 학문의 장소이자 영남 유림들이 모여 시국을 논하고 시회를 열던 곳이다.

일부는 미수의 필체가 아니라는 논란이 있긴 하나 명확하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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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칠곡 감호당에 걸린 鑑湖堂

감호당을 지은 석담 이윤우는 한강의 문하에서 미수와 동문수학한 사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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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덕 덕후루에 걸린 德厚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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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의령에 있는 미연서원에 걸린 二宜亭(이의정)

그러나 이 글씨는 미수의 친필이 아니다.

의령은 미수가 병자호란을 피하여 모친을 모시고 피난 와서 살던 곳인데, 모친 별세 이후 미수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동생이 남아서 살았던 터에 후대에 미수를 배향하는 서원을 세웠으나, 달려 있는 미수전체로 쓴 편액 二宜亭(이의정)은 미수의 친필이라고 많이 알려져 있으나 후손이 쓴 것이다.

 

이밖에, 거창의 용암정, 합천의 호연정, 봉화의 영규헌 등에도 비슷한 글씨가 있기는 하나 미수의 친필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8. 남인의 본거지 안동지역에서 볼 수 있는 미수전

 

남인들은 주로 영남학파의 맥을 이었으므로 경상도 지역을 근거지로 하기 때문에 미수의 글씨도 이지역에 집중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영남학파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안동 지역의 고택을 답사하다 보면 미수 글씨 한 점씩은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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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안동 하회마을 충효당에 걸린 忠孝堂

미수의 글씨 중에서 백미로 꼽힌다. 충효당은 유성룡의 생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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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안동 백운정 白雲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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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농암고택 명농당에 걸린 明農堂

농암고택에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긍구당에 걸린 肯構堂도 미수전을 닮았지만 미수의 글씨가 아니고 조선초 명필인 신잠(申潛)의 글씨이다.

 


27학봉종택 문충고가.JPG 

*안동 학봉종택에 걸린 文忠古家(문충고가). 문충은 학봉 김성일의 시호. 

이외에도 光風霽月(광풍제월)이 있다고 하나, 내실에 있어서 볼 수 없다.

 


 

9. 미수전체가 아닌 글씨로 미수가 남긴 유일한 편액


 

미수가 남긴 편액과 각자는 초지일관 미수전체로만 써서 꼿꼿한 미수의 성품을 말해주고 있는데, 유일하게 미수전이 아닌 행초체로 남긴 편액이 삼척 부사 시절 삼척에 있는 죽서루에 남긴 第一溪亭(제일계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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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삼척 죽서루에 달린 第一溪亭(제일계정)

 


 

10. 미수가 남긴 생애 마지막 글씨


 

미수는 산림만 떠돌다가 아주 늦은 나이인 57세 때 비로소 조정에 출사하여 곧바로 남인의 영수로써 노론과 사상적 정치적 투쟁을 치열하게 벌이다가 16591차 예송논쟁(禮訟:왕가의 장례예법을 두고 벌인 남인과 노론 간에 벌어진 정치투쟁)에서 남인이 패하여 정치적 숙청을 당할 때 미수는 삼척으로 좌천된 후 낙향하였다가, 16742차 예송논쟁이 벌어지자 다시 전면에 등장하여 논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모처럼 남인 정권을 수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패배한 노론의 영수 송시열의 처벌 문제를 두고 남인은 곧바로 강경파인 청남((淸南)과 온건파인 탁남(濁南)으로 분열하였는데, 미수는 꼿꼿한 성품답게 청남의 선두에 서서 탁남과 정치투쟁을 벌였으나 여의치 않자 167985세 때 고향 연천으로 낙향해버렸다.

미수가 낙향의 즐거움도 채 누리기 전인 1680년 중앙 정계는 노론의 반격으로 다시 소용돌이 치면서 탁남의 영수 허적(許積:1610~1680)이 실각하고 노론이 재집권하자, 그 여파로 청남도

유탄을 맞고 세력을 잃게 되었다.

 

 

 

고향에서 조용히 만년을 보내던 미수는 경북 봉화에 있는 청암정이 아름답다는 소문을 여러번 듣고는 젊은 시절 전국을 돌아다녔지만 이곳은 가보지 못한 아쉬움이 남아 한번 찾아가보려 하였다.


 

29 봉화 청암정.JPG 

*경북 봉화에 있는 청암정(靑巖亭)

조선중기의 정치가로 강직한 성품과 직언을 한 충절지사로 이름이 높은 충재 권벌(冲齋 權橃:1478~1548)가 조성한 정자

 

마침 미수가 기력이 쇠약해져 별세를 앞두고 있던 1682년 충재의 종가에서 사람을 보내 청암정기문을 써주길 간청했다. 그러나 기문은 방문하고 나서 감상을 쓰는 것이니 대신 청암정 편액을 써 주기로 하고, 풍광이 좋다고 소문난 청암정을 직접 가보지 못하는 아쉬움을 달래면서 미수전체로 靑巖水石(청암수석)을 휘호하고 좌측에 행서체로 이 작품을 만든 배경을 적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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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암정에 달린 미수의 靑巖水石(청암수석)

미수가 별세하기 3일 전 쓴 마지막 글씨. 원본은 청암정 옆 충재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다.

靑巖水石 좌측에 행서로 (:글을 쓰고 나서 글을 적은 연유 등을 기록)을 적어 놓았는데 풀면 다음과 같다.

 

청암정은 청암(靑巖) 권충정공(權忠定公: 權橃)이 산수간에 마련한 고향집이다. 골짜기의 물과 돌들이 아주 아름다워 '절경(絶景)'으로 불린다. 나의 나이가 많고 길이 멀어 그 산수 사이에서 한번 노닐지 못하였기에 늘 그 가운데에서 지내는 것을 마음으로 그려왔다. (그러나) 다만 '청암수석(靑巖水石)'의 네 글자를 쓴 것은 선현의 마음을 사모한 것이다. 이와 같음을 기록한다. (숙종) 8년 맹하(孟夏: 음력 4) 상순에 태령노인(台嶺老人)이 쓰다.’

 

힘을 모아 대자 휘호를 마치고는 자리에 누워 얼마 뒤, 요순시대의 태평성세를 이땅에서도 이루어보고자 하는 꿈을 미수전(眉叟篆)에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향년 88세이다.

 

 


*이 글은 아래의 참고문헌을 발췌, 편집하여 작성하였습니다.

 

1. 심현섭 [미수 허목의 서예미학 정초]

2. 김현숙 [허목 전체의 미학적 접근]

*그 외, 인터넷상 많은 자료 참조.

출 처 : http://blog.daum.net/ajr3308/3864397 , http://jiri99.com/bbs/board2.php?bo_table=jiri31&wr_id=5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