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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기독교와 섹스의 불편한 관계

나 그 네 2021. 12. 4. 13:49

욕정 때문에 지옥에 떨어진 연인들

아리 셰퍼, '단테와 베르길리우스에게 나타난 파올로와 프란체스카의 영혼', 1855년, 캔버스에 유채, 171 x 239 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커다란 흰 천에 감싸인 남녀가 서로 부둥켜안은 채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어둡고 캄캄한 허공을 떠돌고 있다.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 화가 아리 셰퍼(Ary Scheffer)는 단테와 베르길리우스가 지옥에서 파올로와 프란체스카의 망령을 만나는 장면을 그렸다. 두 인물의 얽힌 몸이 만든 대각선 구성은 그림에 역동적인 운동감과 함께 불안정한 분위기를 부여한다. 두 눈을 감은 프란체스카는 연인의 어깨와 등을 두 팔로 꼭 붙들고 있고, 고뇌에 찬 표정의 파올로는 오른팔로 그녀의 팔을 잡은 채 왼팔은 이마에 대고 있다. 남자의 가슴과 여자의 등에 난 희미한 칼자국은 죽음에 이르게 된 사연을 암시한다. 두 연인의 유령은 왜 지옥의 암흑 속을 정처 없이 표류하는 것일까?

 
 

이 연인들의 이야기는 13세기 말 이탈리아에서 실제 있었던 일이다. 라벤다 시 영주의 딸 프란체스카와 라미니 영주의 장남 잔초토는 정략결혼을 하게 된다. 그러나 잔초토는 다리를 저는 데다 추한 외모를 가졌기 때문에 그의 잘생긴 동생 파올로를 대신 선보인 후 사기결혼을 하게 된다. 모든 사실을 알고 절망한 프란체스카는 파올로와 몰래 사랑을 나눈다. 결국 밀회 현장을 들킨 두 사람은 잔초토에게 칼에 찔려 죽는다. 이 애욕의 죄인들은 사후 지옥에 떨어져 혹독한 폭풍에 영원히 쓸려 다니는 벌을 받게 된다. 거세게 휘몰아치는 바람은 두 사람을 파멸로 이끈 강한 욕정을 상징한다.

중세교회는 간음을 가장 깊은 지옥에 가야 하는 무거운 죄로 여겼다. 그러나 단테는 파올로와 프란체스카의 안타까운 사랑에 연민을 느껴 '신곡'에서 비교적 가벼운 지옥에 배치한다. 그래도 어쨌든 지옥에 떨어트려 가혹한 고통을 겪게 한다. 이 점에서 단테는 최초의 르네상스 휴머니스트인 동시에, 기독교적 세계관에 머문 중세인이기도 했다. 현대인에게는 아무리 불륜이라도 남녀가 사랑 때문에 지옥에 간다는 것이 지나치게 느껴진다. 그러나 중세에는 정욕이 지옥으로 떨어지게 만드는 7죄 중 하나였고 단테 역시 이들을 지옥에 보내 교훈을 주려고 한 것이다.

기독교는 2000년간 성적 욕망, 피임, 낙태, 동성애 등 인간의 성문제에 대해 매우 부정적, 처벌적인 태도를 고수해왔다. 성적으로 자유로웠던 고대에 비해 중세시대의 성은 억압되었고, 금욕주의는 기독교인의 핵심 윤리가 되었다. 기독교는 왜 이렇게 인간의 섹슈얼리티를 부정하게 되었을까? 성을 죄로 보는 기독신학의 뿌리는 그리스 철학의 이원론이다. 플라톤은 육체는 죄, 욕망과 관련된 악한 것이고 영혼은 이성과 연결된 선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정신과 육체의 이원론적 사고 속에서 인간의 성은 철저히 금기시되었다.

무엇보다도, 서구인의 성 억압적 가치관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중세 기독교 신학의 뼈대를 세운 성 아우구스티누스다. 그는 육욕은 억제되어야 하며, 성관계는 쾌락이 아니라 오직 출산을 위한 수단으로만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중세사회를 장악한 교회는 성관계에 대한 세세한 규칙까지 정했다. 금식 기간, 일요일과 축일, 월경과 임신 혹은 수유 기간에는 금욕을 해야 했고 성행위의 체위는 정상위만 허용되었다. 또, 혼전, 혼외 관계나 자위행위, 동성애는 부도덕한 것으로 규정되고 금지되었다.

종교개혁자 루터와 칼뱅은 아우구스티누스나 토마스 아퀴나스 등 중세 교부신학자들과는 조금 달랐다. 루터는 사제들의 결혼을 허용했고, 칼뱅은 성을 하느님이 주신 축복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도 섹스는 자손을 잉태하기 위한 것이며, 욕정에 의한 성관계는 인간을 타락하게 하는 죄악이라고 설파했다. 종교적 금욕주의는 가톨릭 신앙이나 개신교에서나 일관된 윤리였다. 이런 관점은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엄격한 청교도적 성문화로 이어졌다. 이 시대의 많은 유럽인이 죄책감 속에서 성행위를 했으며 부부 간에도 가급적이면 성적 접촉을 하지 않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이들은 기독교가 성에 대해 억압적, 독단적이지 않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성경은 성을 소중한 것으로 다루고 있다. 창세기에는 성이 생육과 번성을 가져오는 하느님의 거룩한 선물이라고 쓰여 있다. 구약의 아가서는 남녀 간의 적나라한 성애를 은유적으로 노래한다. 그러나 그 에로틱한 묘사에 당황한 신학자들은 아가서가 하느님과 인간의 사랑, 혹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비유한 것이라고 해석하고, 애써 이 시의 노골적인 성애 묘사를 외면했다. 섹스는 지금도 교회에서는 함부로 입 밖에 낼 수 없는 금기어다. 성적 욕망은 여전히 죄책감을 느끼고 고백하고 용서받아야 하는 그런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가 성적으로 억압적이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다. 기독교가 원래 성에 대해 긍정적이었다 해도 수천 년을 통해 켜켜이 쌓인 금욕적 문화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인류사에서 인간의 성만큼 오랫동안 금기시되고 통제되어온 것도 없을 것이다. 20세기 중반에 등장한 킨제이 보고서는 청교도적 도덕관에 젖어 있던 미국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또한, 전 세계에 파장을 일으키며 1960년대 성혁명의 초석을 놓았다. 말하자면, 성문제에 관한 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나 다윈의 진화론에 버금가는 사고의 대전환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억압적인 성문화를 되돌아보게 되었고, 성욕과 성애, 오르가슴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물론 보수적인 성윤리를 지키려는 종교계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중세든 현대든,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기본적으로 인간에게는 성적 욕망이 있다. 성 자체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단지 가치 중립적인 생명 현상의 영역이다. 시대와 사회, 사상과 종교가 이를 어떻게 보고 규정하느냐에 따라 성에 대한 윤리와 규범이 달라질 뿐이다. 어쨌든 간에, 이제 현대인은 적어도 비련의 주인공 파올로와 프란체스카가 지옥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김선지 작가·'그림 속 천문학' '싸우는 여성들의 미술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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