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인사(海印寺) ▶
▲ 해인사 백련암 경내에서...
【 일 정 표 】2008년 3월 11일(화)~12일(수) 1박2일
▷ 첫째날 : 2008년 3월 11일(화)
부천출발(15:30)-(도시외곽순환도로)→조남분기점-(영동고속도로)→여주휴게소/여주분기점-(중부내륙고속도로)→남성주휴게소-(88고속도로)→해인사I.C.→해인사입구(19:50)/저녁식사 후 취침
▷ 둘째날 : 2008년 3월 12일(수)
숙소출발-(TAXI이용)→백련암(09:50~10:17)→희랑대/독성전(10:30~10:35)→해인사(10:45~12:00)→홍제암+용탑선원+외나무다리(12:10~12:55)→해인사입구/중식(13:00~13:30)→길상암(13:35~13:40)→홍류동계곡+농산정(13:40~13:55)-(갈때의 역순으로 진행)→부천(19:00)
【 교 통 편 】승용차 이용
【 여 행 기 】
가야산국립공원 산행목적이 아닌 순수 관광목적으로 해인사를 1박2일간 찾았다. 새벽에 출발하여 당일코스로 진행을 해 볼 생각을 않한 것은 아니지만 이동거리가 길고 해인사 전체와 부속 암자까지 찾아 다니며 구경하기란 아직까지 해가 길지 않아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생각이 되어 전날 오후에 출발하여 해인사 입구에서 숙박을 하고 여유있게 다음 날 관광을 하기로 하였다.
계절적인 관계로 주변의 경관은 강한 인상을 주지 않았지만, 해인사 구석구석을 찾아 다니며 구경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라 남다른 의미가 있는 여행이 되었다.
▲ 백련암 전경(1)
▲ 백련암 전경(2)
▲ 백련암 전경(3)
▲ 백련암 전경(4)
▲ 백련암 전경(5)
▲ 백련암 전경(6)
09:50~10:35=>백련암
백련암으로 통하는 시멘트 포장도로는 차량통행이 가능한데 입구에서 차량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걸어서 백련암에 오르기에는 약간 먼 거리인지라 1차 승용차를 타고 통과를 시도를 해 보지만 입구에서 거절을 당하여, 식당에서 미리 수배를 해 놓은 택시를 이용(\7,000)하여 백련암으로 향한다. 겨우 승용차 1대가 지나 다닐 정도의 폭 좁은 도로를 약 10여분 달려 백련암 주차장에 도착하고 경내 구경을 시작한다.
▲ 백련암 장독대
▲ 백련암 돌담길
▲ 백련암 입구 돌계단
▲ 백련암 입구 돌계단에서...
♣ ♣ 백련암(白蓮庵)
백련암은 가야산내 암자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여 한가할 뿐만 아니라 경계 또한 탁 트여 시원하다. 특히 암자 주변에 우거진 노송과 한적대, 절상대, 용각대, 신선대와 같은 기암이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어 옛부터 백련암터를 가야산의 으뜸가는 절승지로 일컬어 왔다.
처음 창건한 연대는 알 수가 없고 다만 선조38년(1605)에 서산대사의 문하였던 소암스님이 중건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오래 전부터 고승들이 즐겨 수행처로 삼아 오던 이곳은 역대로 산중 어른들이 주석해 왔다. 소암대사를 비롯하여 환적, 풍계, 성봉, 인파대사와 같은 스님들이 일찍이 주석하였고, 몇해전 성철스님이 입적하기 전까지 주석하였다.
현재 이곳에는 원통전과 영자당을 위시한 요사채 몇 동이 조촐하게 서 있고, 축대를 새로 쌓고 기도처를 새로이 신축하여 도량이 일신되었다.
백련암을 뒤로 하고 잠시 도로따라 내려가면 우측으로 숲속 오솔길(스님들이 다니시는 길)이 보이는데, 이 길을 따라 희랑대와 지족암으로 통하고 해인사 경내까지 이어진다.
▲ 희랑대
10:30~10:35=>희랑대
바위 위에 지은 암자로 주변에 축대를 쌓아 보완을 해 두었다. 희랑대에 서면 주변이 시원하게 조망이 되는데 우측 산사면으로는 지족암이 보인다.
희랑대를 뒤로 하고 계단길을 내려서면 지족암삼거리에 이르게 되는데 우측의 시멘트 포장도로가 지족암 방향이고 좌측의 오솔길은 해인사로 향하는 길이다. 지족암은 희랑대에서 바라본 것 만으로 만족을 하고 해인사로 향한다.
♣ ♣ 희랑대
희랑대사는 그 암자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희랑대사가 머물던 곳으로서 자연이 이루어낸 기기묘묘한 지형과 빼어난 경치로 말미암아 일찌기 금강산의 보덕굴과 비유되곤 했다.
희랑대는 이곳의 삼성전에 모셔진 독성님은 그 영험이 불가사이하다고 해서 기도처로 꽤 유명한데, 이를테면 이곳에서 기도하면 부자가 되었다거나 하는 여러 영험설화를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이 암자는 특히 일반 신자들에게 친근한 나반존자 기도도량이다.
10:45~12:00=>해인사
▲ 해인사일주문을 배경으로...
▲ 해인사 경내 건물 배치도
▲ 희랑대에서 해인사로 넘어오는 오솔길과 이정표
▲ 해인사 봉황문
♣ 해인사 봉황문(鳳凰門)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54호
*소재지: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봉황문은 해인사 입구 삼문 중 첫째문인 일주문에서 80m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 문으로 사천왕상이 봉안되어 있으므로 천왕문으로도 불리며, 사찰의 대문 역활을 한다.
문의 창건연대는 알 수 없지만 1717년(숙종43년)에 중수하였고 1761년(영조37년)에 재건했다는 기록이 있다. 1817년(순조17년) 화재때 전소되고, 1821년(순조21년)에 중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지금의 봉황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익공계 단층 맞배지붕의 5량구조 건물이다. 1838년 색체의 훼손이 심한 문수, 보현보살상과 함께 가야, 제파 등 사위 탱화를 새로 조성하여 봉안하였으며, 1932년 화백 지송파가 사천왕탱화를 조성하여 이듬 해 접안하였다.
▲ 해인사 대적광전, 석탑과 석등
▲ 해인사 경내의 건물들
▲ 해인사 범종루
▲ 북 예불을 올리는 스님
▲ 타종 예불을 올리는 스님
♣ ♣ 해인사(海印寺)
해인사는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10번지에 위치한 삼보사찰(통도사, 송광사, 해인사) 중 법보종찰이며 대한줄교 조계종 최대의 총림(종합수도장)이다.
신라 제40대 애장왕3년(802) 순응스님과 이정스님이 가야산 토굴에서 정진중 왕후의 불치병을 법력으로 치료해 준 인연으로 국왕이 은혜에 보답하려는 뜻으로 해인사를 창건하였다. '해인'이란 대방광불화엄경의 해인삼매에서 유래된 말로서 바다에 온갖 사물의 그림자가 인영처럼 비치듯이 부처님의 지혜바다에는 온갖 만법이 나타난다는 뜻이니 화엄경의 진리에 의지해 수행하여 화엄의 사상을 온 누리에 천명하려는 원력으로 이루어진 사찰이므로 사명을 해인이라 했으며 화엄 10찰의 하나이다.
창건이래 희랑조사, 균여대사, 대각국사, 등 수 많은 고승 대덕을 배출한 해인사는 조선초(1398) 고려대장경판이 이운 봉안되면서부터 법보종찰이라 부르게 되었다.
문화재로는 국보 제32호 팔만대장경판과 국보 제52호 팔만대장경판전, 국보 제206호 고려각판의 국보 3점과 보물 제128호 반야사원경왕사비, 보물 제222호 중봉 마애석불, 고려각판 등 보물 13점과 중요민속자료 제3호인 광해군과 왕비의 옷 등 70여점의 유물 중 쌍탑향료, 옥화, 희당조사 자조상, 세조의 영정, 숙종의 어필병, 김홍도의 호조채병, 오백나한도 등은 국보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해인사의 역사를 말해 주고 있다.
♣ 해인사 대적광전(大寂光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6호
*소재지: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대적광전은 비로자나불을 본존불로 모시는 화엄종 사찰의 중심 법당이다. 부처가 설법한 진리가 태양처럼 우주에 가득 비추는 것을 형상화한 비로자나불은 불교의 진리자체를 상징하는 불상이다.
비로자나불을 모신 전각은 대적광전 이외에도 화엄전과 비로전이 있다. 이곳 대적광전은 802년(애장왕3년)에 순응, 이정 두스님이 창건하였다. 창건 당시의 명칭은 비로전이었으나, 1488년(성종19년)에 왕실의 지원에 의해 학조대사가 중창하면서 대적광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현재의 건물은 1817년(순조17년)에 불타버려 이듬해 중건한 것을 1971년에 지관스님이 다시 중수한 것이다. 큰 절의 중심 불전에 걸맞게 정면 5칸, 측면 4칸의 다포계 팔작지붕을 한 우람한 모습이다.
정선이 그린 해인사 그림에는 대적광전이 2층으로 그려졌는데, 1817년의 화재 이전에는 지금보다도 더 큰 건물이었을 것이다. 지금의 모습은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다포계 팔작집으로서 중수과정에서 많이 변형되었음을 알 수 있다.
법당 안에는 용기사에서 옮겨온 중앙의 큰 비로자나불을 비롯해 법단의 좌에서 우측으로 법기보살, 보현보살, 지장보살, 비로자나불(大), 비로자나불(小), 문수보살, 관세음보살 순으로 일곱분의 불보살님이 봉안되어 있는데 비로자나불과 지장보살이 함께 모셔진 곳은 매우 이례적이다. 이는 주변지역의 불타버린 법당에 있던 지장보살을 옮겨 놓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 해인사 석등(石燈)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5호
*소재지: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석등은 부처님이 계신 사찰에 어둠을 밝히기 위해 만든 것이다. 부처님에 대한 등 공양과 관계되는 것이므로 부처님을 상징하는 탑과 함께 법당 앞에 설치한다. 이 석등 역시 원래 석탑 앞에 있었지만 현재 위치로 옮겨놓았다. 옮겨진 이유와 시기에 대해서는 잘 알 수가 없다.
석등은 받침돌과 기둥돌, 등불을 놓는 화사석, 지붕돌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둥돌이 원래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에 전체의 크기는 알 수가 없다. 맨 아래 네모난 받침대에는 코끼리 눈 모양의 무늬를 새겨 넣었으며, 8각형의 아래 위 받침대에는 8장의 연꽃잎을 각각 땅과 하늘로 향하도록 새겨 넣었다. 화사석에는 4개의 창을 두었는데, 창 사이의 모서리 4면에 각각 사천왕상을 돋을새김(양각) 한 것이 이채롭다. 지붕돌은 역시 8각으로 처리하여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었으며 맨 위에는 둥근 구슬을 올렸다. 새겨진 눈 모양과 연꽃무늬의 우아한 조각 수법, 그리고 전체적인 양식을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볼 수 있다.
♣ 해인사 3층석탑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4호
*소재지: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이 탑은 2중 기단과 3층의 탑신 및 지붕돌로 이루어진 통일신라 후기의 전형적인 석탑 양식이다. 원래 이 탑의 받침은 신라 석탑 양식의 2중이었으나, 1926년에 탑을 수리하던시 받침을 확장하고 한 층을 더 올려 본래 지니고 있던 조화미를 상당 부분 상실하고 말았다.
4면의 각 모서리에 기둥을 새긴 것 외에는 별다른 조각이 없다. 지붕돌받침은 신라 석탑의 전형인 5층으로 되어 있고, 지붕돌 추녀 끝은 살짝 들어올려져 완만하게 처리되었다. 지붕돌의 각 모서리에는 작은 종이 달려 있는데, 본래의 것은 없어지고 나중에 다시 매단 것이다. 탑의 꼭대기 역시 일부가 소실되어 꼭대기를 떠받치는 받침대와 위로 핀 연꽃, 바퀴만 남아 있다. 1926년 6월에 이 탑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상층 받침의 돌 함속에서 9기의 작은 불상이 발견되었는데, 석탑을 수리하고 나서 이들 불상을 다시 탑 안에 봉안하였다.
또 이 석탑 앞에는 코끼리의 눈 모양을 형상화했다는 안상과 연꽃무늬가 조각된 배례석이 있었으나 수리하는 과정에서 석등 앞으로 옮겨졌다.
'조선불교통사'에는 태조가 즉위하여 이 탑을 수리할 때, 대장경을 탑 안에 봉안하면서 나라의 번영과 백성의 평안을 빌었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다. 그러나 1926년에 탑을 수리할 때 대장경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태조가 수리한 탑이 이 탑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더욱이 근래의 사찰 보수 때 경학원 근처에서 신라 석탑의 재료가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또 다른 석탑이 있었을 가능성도 크다고 하겠다.
▲ 학사대 전나무
♣ 학사대 전나무
*경상남도 기념물 제215호
*소재지: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이 전나무는 높이 약30m, 둘레 약5.1m쯤 되는 수령이 1,000년 이상 된 고목이다. 나무의 줄기가 지상 10m 높이에서 두 개로 벌어져 있으며, 나뭇가지가 아래로 향해 뻗어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곳은 고운 최치원 선생이 만년에 벼슬을 버리고 가야산에 은거할 때 찾았던 곳이다. 학사대라는 이름은 고운 선생이 헌강왕때 29세 나이로 한림학사 벼슬을 하였는데 그 벼슬 이름을 따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고운 최치원 선생은 말년에 제자들 앞에서 이곳에 지팡이를 꽂으며 "내가 살아 있다면 이 지팡이도 또한 살아 있을 것이니 학문에 열중하거라"는 유언을 남기고 지금의 홍제암 뒤 진대밭골로 유유히 홀로 들어가신 전설로 유명하다. 그리고 이 전나무를 일러 고운 최치원 선생의 '지팡이 나무'라고 불리운다.
▲ 해인사 장경판전 입구 모습
▲ 해인사장경판전 전경(좌:수다라장/우:법보전/정면:사관판전)
▲ 해인사장경판전의 하나인 '법보전'
♣ 해인사장경판전(藏經板殿)
*국보 제52호
*소재지: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10
가야산 중턱에 자리잡은 해인사는 통일신라 애장왕3년(802년)에 지은 사찰로, 왕후의 병을 부처의 힘으로 치료해 준 것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지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3대 사찰 중 하나이며, 8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기 때문에 법보사찰이라고도 부른다.
장경판전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8만여장의 대장경판을 보관하는 건물로, 해인사에 남아 있는 건물 중 가장 오래되었다. 처음 지은 연대는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조선 세조3년(1457년)에 크게 다시 지었고, 성종19년(1488년)에 학조대사가 왕실의 후원으로 다시 지어 '보안당'이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산 속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어 임진왜란에도 피해를 입지 않아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광해군14년(1622년)과 인조2년(1624)에 수리가 있었다.
앞면 15컨, 옆면 2칸 크기의 두 건물을 나란히 배치하였는데 남쪽 건물은 '수다라장'이라 하고 북쪽 건물은 '법보전'이라 한다. 서쪽과 동쪽에는 앞면 2칸, 옆면 1칸 규모의 작은 서고가 있어서 전체적으로는 긴 네모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대장경판의 보관하는 건물의 기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장식 요소는 두지 않았으며, 통풍을 위하여 창의 크기를 남쪽과 북쪽 서로 다르게 하고 각 칸마다 창을 내었다. 또한 안쪽 흙바닥 속에 숯과 횟가루, 소금을 모래와 함께 차례로 넣음으로써 습도를 조절하도록 하였다.
자연의 조건을 이용하여 설계한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점 등으로 인해 대장경판을 지금까지 잘 보존할 수 있었다고 평가 받고 있다.
해인사장경판전은 15세기 건축물로서 세계 유일의 대장경판 보관용 건물이며, 대장경판과 고려각판을 포함하여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 해인사대장경판(팔만대장경)
♣ 해인사대장경판(大藏經板)
*국보 제32호
*소재지: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10
대장경은 경(經), 율(律), 논(論)의 삼장을 말하며, 불교경전의 총서를 가리킨다. 이 대장경은 고려 고종24~35년(1237~1248년)에 걸쳐 간행되었다. 이것은 고려시대에 간행되었다고 해서 고려대장경이라고도 하고, 판수가 8만여 개에 달하고 8만4천 번뇌에 해당하는 8만 4천 법문을 실었다고 하여 8만대장경이라고도 부른다.
이것을 만들게 된 동기는 고려 현종 때 새긴 초조대장경이 고종19년(1232년) 몽고의 침입으로 불타 없어지자 다시 대장경을 만들었으며, 그래서 재조대장경이라고도 한다. 몽고군의 침입을 불교의 힘으로 막아보고자 하는 뜻으로 국가적인 차원에서 대장도감이라는 임시기구를 설치하여 새긴 것이다. 새긴 곳은 경상남도 남해에 설치한 분사대장도감에서 담당하였다.
원래 강화도 성 서문 밖의 대장경판당에 보관되었던 것을 선원사를 거쳐 태조7년(1398년) 5월에 해인사로 옮겨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현재 해인사 법보전과 수다라장에 보관되고 있는데 일제시대에 조사한 숫자를 보면 81,258장이지만 여기에는 조선시대에 다시 새긴 것도 포함되어 있다. 경판의 크기는 가로 70cm내외이고 두께는 2.6cm 내지 4cm이다. 무게는 3kg 내지 4kg이다.
구성을 보면 모두 1,496종 6,568권으로 되어있다. 이 대장경의 특징은 사업을 주관했던 개태사승통인 수기대사가 북송관판, 거란본, 초조대장경을 참고하여 내용의 오류를 바로잡아 대장경을 제작하였다고 한다.
이 대장경판은 현재 없어진 송나라 북송관판이나 거란의 대장경의 내용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이며, 수천만 개의 글자 하나 하나가 오자, 탈자없이 모두 고르고 정밀하다는 점에서 그 보존가치가 매우 크며, 현존 대장경 중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와 내용의 완벽함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지니고 있는 문화재이다.
▲ 해인사 고려각판을 보관하고 있는 장경판전내 '사관판전'
♣ 해인사고려각판(高麗刻板) : 25종 2,725판
*국보 제206호
*소재지: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10
경상남도 합천군 해인사에 소장되어 있는 고려시대의 불교경전, 고승의 저술, 시문집 등이 새겨진 목판이다. 이 목판은 국가기관인 대장도감에서 새긴 해인사대장경판(국보 제32호)과는 달리, 지방관청이나 절에서 새긴 것이다. 현재 해인사 대장경판전 사이에 있는 동,서 사간판전(寺刊板殿)에 보관하고 있다.
후박나무를 짠물에 담가 지방기를 빼고 나무결을 삭혀 잘 말린 다음 판각하였기 때문에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었다. 이 목판에는 '금강경' '화엄경' 등의 대승경전과 신라, 고려, 중국의 고승이나 개인의 시문집 및 저술들이 있는데, 경전류는 대부분 간행기록이 있어 고려시대 불교경전의 유통 등 불교신앙의 경향을 알 수 있다. 고승이나 개인의 시문집 및 저술 등은 비록 간행기록이 없고 전권을 갖추지 못한 것이 많으나, 그 내용이 전하지 않거나 역사적으로 희귀한 자료들이다.
고려시대 판화 및 판각기술은 물론이고, 한국 불교사상 및 문화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 해인사고려각판(高麗刻板) : 26종 110판
*보물 제734호
*소재지: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10
경상남도 합천군 해인사에서 보관하고 있는 고려시대의 불교경전과 유명한 승려들의 저술, 시문집 등이 새겨진 목판이다. 해인사에 있는 목판은 모두 54종 2,835판인데 이 중 2,725판이 국보 제206호로 지정되어 있고, 26종 110판이 보물 제734호로 지정되어 있다.
해인사 고려각판은 국가기관인 대장도감에서 새긴 해인사 대장경판과는 달리 사찰이나 지방관청에서 새긴 것이며, 현재 해인사 대장경판전 사이에 있는 동,서 사간판전에 보관되어 있다.
이 목판들은 금강경, 화엄경 등의 대승불교 경전과 신라, 고려, 중국의 유명한 승려, 개인의 시문집 및 저술들이다. 이곳의 불교경전들에는 대부분 간행한 연대와 목적 등이 남아 있어서 고려시대 불교경전의 간행과 유통 등 불교신앙의 경향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고승 및 개인의 시문집과 저술 등에는 간행기록이 남아있지 않고 일부분이 훼손된 것들이 많다. 하지만 그 내용이 전하지 않거나 역사적으로 희귀한 자료들로서 당시의 불교사상과 문화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해인사 고려각판은 자체가 우리나라가 목판인쇄술의 실증적 자료이며 그 시대의 문화를 상징하는 예술품으로 주목된다.
12:10~12:55=>홍제암+용탑선원+외나무다리
▲ 홍제암 전경
▲ 홍제암의 불전
▲ 홍제암 경내
▲ 홍제암 입구 전경
♣ 해인사 홍제암(弘濟庵)
*보물 제1300호
*소재지: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해인사의 산내 암자로 창건연대와 역사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사명대사가 입적한 곳으로 유명하다. 홍제암이란 암자명은 광해군이 사명대사에게 내린 시호인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에서 연유한 것이다.
인법당, 영자각 등이 있고 사명대사를 비롯한 16분의 고승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새로 복원된 사명대사비는 1612년 허균이 쓴 것으로 사명대사에 관한 기록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정확한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암자 뒷산에 사명대사의 부도라고 전하는 석종형 부도가 있다.
▲ 사명대사 부도 및 석장비
♣ 사명대사 부도 및 석장비(四溟大師 浮屠 및 石藏碑)
*보물 제1301호
*소재지: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임진왜란 때 승장으로 나라를 지킨 사명대사의 일대기를 기록한 비석과 사리를 봉안한 부도이다. 해인사의 부속 암자인 홍제암 경내에 있다.
홍제암은 사명대사가 1608년에 선조의 하사로 창건하여 말년까지 수도하다 입적한 곳이다. 부도는 사명대사가 입적한 1610년에 만들어졌고, 비석은 1612년에 건립되었다가 1943년에 일본인이 깨트린 것을 1958년네 복원한 것이다.
부도는 고려의 승탑 형식을 계승하여 3단의 연화대좌와 종 모양의 탑신, 둔중한 지붕돌을 갖추고 있다.
▲ 용탑선원 표석
▲ 용탑선원
♣ 용탑선원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이었던 용성스님을 위하여 창건된 이 암자는 스님의 사리탑을 수호 관리하기 위하여 1945년에 창건되었으며, 용탑전이라 불리기도 한다.
▲ 해인사의 명물 '외나무다리'
13:35~13:40=>길상암
해인사 관람을 마치고 88고속도로 해인사I.C.로 향하는 지방도를 따르다 우측으로 계류 건너편으로 커다란 불상과 석탑이 보이는데 그곳이 길상암 입구이다.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다리를 건너면 석탑과 불상이 위치해 있고 산사면에 위치한 길상암 오름길이 좌측으로 보인다.
가파른 오르막을 올라갔다 되돌아 오는 것이 귀잖아 먼 발치서 올려다 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입구에서 커다란 불상과 석탑을 구경하는 것으로 길상암 경내 구경을 대체하기로 한다.
▲ 길상암 입구의 커다란 불상과 석탑들
♣ 길상암
해인사 동구에서 약 1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으며 백화담을 위시하여 자연경관이 아름답기로 이름난 곳이다.
1972년 영암대종사가 창건한 이 암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이 있다.
13:40~13:55=>홍류동계곡+농산정
지방도를 따라 계속 진행하면 도로에 거대하게 만들어진 '홍류문' 직전 우측으로 흐르는 '홍류동계곡' 계류에 전망대 등 쉼터가 설치되어 있고 다리를 이용해 계류를 건너면 '농산정' 정자가 있다.
▷ 합천팔경
제1경 : 가야산
제2경 : 해인사
제3경 : 홍류동계곡
제4경 : 남산제일봉
제5경 : 함벽루
제6경 : 합천호와 백리벚꽃길
제7경 : 황계폭포
제8경 : 황매산 모산재
▲ 합천팔경 중 제3경인 홍류동계곡
▲ 농산정으로 가는 홍류동게곡을 가로지르는 다리에서 기념촬영
▲ 쉼터 전망대에서 홍류동계곡을 배경으로...
♣ 홍류동계곡/합천팔경 중 제3경
가야산국립공원에서 해인사입구까지 이르는 약 4km 계곡으로 가을 단풍이 너무 붉어서 흐르는 물에 붉게 투명되어 보인다하여 홍류동계곡이라 한다.
주위 송림사이로 흐르는 계류가 기암괴석에 부딪히는 소리는 고운 최치원 선생의 귀를 먹게 했다하여 선생이 갓과 신발만 남겨두고 신선이 되어 사라졌다는 전설을 말해 주듯 농산정과 시구를 새겨 놓은 큰 바위가 있다.
홍류동에는 주요 문화재자료인 농산정과 낙화담, 분옥폭포 등 19명소가 있으며, 특히 농산정 맞은 편에는 암각된 최치원 선생의 친필을 볼 수 있어 더욱 유명하다.
▲ 농산정
♣ 농산정(籠山亭)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72호
*소재지:경상남도 합천군 가아면 구원리
이곳은 신라말의 거유 고운 최치원 선생이 은둔하여 수도하던 곳이다. 원 정자의 창건시기는 알 수 없으며, 지금의 것은 고운선생의 후손과 유림에 의해 1936년에 중건된 것이다. 이후 1990년에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정자의 건너편에는 치원대 혹은 제시석이라 불리는 석벽이 있고 거기에는 고운의 칠언절구 둔세시가 새겨져 있다. 정자의 이름도 그 시의 한 구절을 빌어 농산이라 하게 되었다.
정자는 정면 2칸, 측면 2칸 규모의 단아한 정방형 목조와가 건물이다. 정자 현판에는 김영환이 쓴 농산정기와 찬양사 4수가 기록되어 있고, 고운 선생의 둔세시를 차운 한 시 8수가 있다. 시 중에는 점필제 김종직 선생의 차운시도 들어 있다.
▲ 홍류문
농산정을 마지막으로 1박2일간의 관광일정을 마치고 홍류문을 뒤로 하며 귀가길을 시작하였다. 1박2일이었지만 실제 관광에 소요된 시간은 약 6시간 정도여서 제대로 공부를 하며 깊이 있게 여행을 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았다. 그러나 미리 자료를 준비하여 여행을 하였더라면 짧은 시간의 관광일지라도 더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웠을텐데 사전 준비 소홀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이번 여행을 계기로 다음 여행에서는 충분한 자료 수집과 명소에 관한 볼거리 정리 등 준비를 철저히 하여 효과적인 여행이 되도록 해야겠다고 다짐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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