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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여성 패션의 혁신가 가브리엘 샤넬( Gabrielle chanel)

나 그 네 2009. 2. 6. 06:47

가브리엘 샤넬


20세기 여성 패션에 커다란 혁신을 불러일으키면서 패션 제국 ‘샤넬’을 이룩한 가브리엘 샤넬. 코코라는 별칭으로 더욱 널리 알려져 있는 그녀의 일생은 ‘사랑하고 일했다’는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샤넬의 사랑과 일, 그리고 그 사이에 갈마들어 있는 영욕(榮辱)과 부침(浮沈)의 구구한 사연과 만나보자.

 

때는 1954년 2월 5일 이른 오후. 장소는 프랑스 파리, 뤼 캉봉 31에 있는 살롱. 계단 꼭대기 근처에서 아래를 유심히 살피는 한 여인이 있다. 실크 베스트와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회색 치마를 입은 여인은 초조한 기색이 역력하다. 손은 자꾸만 담배를 향한다. 프랑스, 미국, 영국 등 여러 나라에서 온 잡지 편집자, 사진가, 작가, 배우, 댄서 등 다양한 인물들이 모인 것은 계단 위에서 몸을 숨긴 가브리엘 샤넬, 아니 코코 샤넬의 전후(戰後) 첫 패션쇼를 보기 위해서다.

 

첫 모델이 통로 무대로 걸어 나왔을 때 손님들은 단번에 알아챘다. 자신들이 기대했던 디자인이 아니라는 걸 말이다. 바야흐로 크리스티앙 디올의 ‘뉴룩’의 시대였으니, 그날 샤넬이 선보인 디자인은 철 지난 진부함으로 다가왔다. 디오르가 1947년 선보인 ‘뉴룩’은 여성의 몸매를 더욱 아름답게 보여주는 의상이었다. 어깨가 자연스럽게 내려오고 허리가 잘록하며, 가슴이 풍만하게 강조되는 상의와 라인을 넣어 풍성하게 디자인된 스커트는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이에 반해 새로운 유행을 거스르는 듯한 코코 샤넬의 컬렉션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1920, 30년대의 유물이자 과거의 망령으로 간주했다. 과거에 대한 향수가 남다른 이들만이 감상에 젖을 뿐이었다.

 

이윽고 쇼가 막을 내리고 사람들이 돌아간 뒤 살롱을 메운 것은 다만 정적. 친구들은 2층으로 코코 샤넬을 만나러 올라갔다. 여성 패션에 일대 혁명을 불러일으키면서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자부심으로 전진하던 그녀가,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는 드문 순간이었다. 사람들이 자신을 받아들여 주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며 2층에서 내려오지 못한 그날의 샤넬은 그 이전의 샤넬과 분명 달랐다.


 

이 날의 패션쇼는 비록 컬렉션 그 자체로는 실패였지만, 코코 샤넬이 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로도 하나의 큰 사건이었다. 그 때 그녀 나이 70세. 그러나 <뉴요커>지는 그 무렵의 샤넬을 이렇게 묘사했다. “감각이 살아 있는 용모, 암갈색 눈, 빛나는 미소, 결코 막을 수 없이 뿜어져 나오는 생기. 그녀는 스무 살 여인이었다.” 코코 샤넬이라는 살아있는 전설이 부활하는 순간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독일군이 파리를 점령했을 때 샤넬의 나이는 57세. 그녀는 13살 연하의 독일군 장교 한스 귄터 폰 딩클라게, 본명보다 슈파츠라는 별칭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인물과 사실상 동거했다. 이들의 관계는 일종의 비밀 작전으로까지 이어졌다. 작전명이자 암호명은 ‘모자 견본’. 윈스턴 처칠이 1943년 11월 스페인 마드리드로 가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샤넬은, 스페인으로 가서 처칠이나 영국 대사를 만날 작정이었다(샤넬이 먼저 제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독일은 패전으로 치닫고 있었으니, 처칠과 루스벨트는 독일에 대해 무조건 항복을 수용할 것을 요구한 터였다. 독일 수뇌부 일부가 이 작전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패전이 분명해지는 상황에서 평화협상의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를 걸었기 때문이었다.

 

샤넬은 마드리드로 갔지만 처칠을 만나지 못했다. 샤넬은 이미 영국 정보국의 요주의 대상이었다. 1944년 파리가 해방된 뒤 레지스탕스는 점령군에 협력한 이들을 색출하기 시작했다. 샤넬도 붙잡혀 구금되었지만 처칠이 영향력을 발휘해 석방됐다. 1944년 9월부터 샤넬은 스위스에서 슈파츠와 함께 호텔을 전전하며 생활했다. 무시로 찾아 드는 권태를 달래기 위해 매일 저녁 모르핀을 주사했다. 그녀는 권태롭게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더구나 고국에서는 크리스티앙 디올이라는 신예가 패션계에 선풍을 일으키고 있다지 않은가. 이것은 그녀가 귀국을 결심하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1895년 샤넬이 12살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는 샤넬을 포함한 세 자매를 수녀들이 운영하는 고아원에 맡겼다. 샤넬은 주위 사람들에게 이 시기에 관해 거의 말하지 않았다. 18살 때인 1901년 물랭의 기숙학교로 옮겨 졸업한 뒤, 보조양재사로 일하면서 밤에는 카바레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녀는 ‘코코가 트로카데로에서 누구를 만났던가?’라는 노래로 인기를 끌었다. 손님들은 “코코! 코코!”를 외쳤고, 이때부터 ‘코코’가 그의 이름처럼 불렸다(그녀 자신은 사실상 이름이 되어버린 이 별명을 별로 내켜 하지 않았다).

 

물랭에서 그녀는 부유한 집안 출신 젊은 장교 에티엔 발잔을 만나 연인 관계가 됐다. 가수로 성공하기 힘들다는 걸 깨달은 샤넬은 발잔의 집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샤넬은 남성용 승마복과 스웨터 등을 여성용으로 개량하는 솜씨를 발휘했다. 발잔과 나란히 말을 타는 모습의 샤넬은 이제 고아원 출신의 수줍은 촌뜨기 아가씨가 아니었다. 발잔은 샤넬이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게 도와준 셈이었고, 프랑스 상류 사회로 나가는 문을 터주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의 남성. 1910년 27살 때 샤넬은 피레네 산맥 북쪽 기슭에 있는 도시 포로 여행을 떠났다. 그곳에서 발잔의 친구인 영국인 폴로 선수 아서 카펠과 사랑에 빠졌다. 샤넬은 파리에 가게를 열고 싶다는 소망을 밝혔는데, 발잔과 달리 카펠은 샤넬의 소망에 진지하게 관심을 보였다. 어느 날 샤넬은 “카펠과 함께 떠납니다. 용서해줘요”라는 말을 남기고 발잔을 떠났다, 그렇지만 이후에 샤넬과 발잔은 친구 사이를 이어나갔다. 샤넬은 발잔이 선물한 반지를 목걸이 삼아 평생 걸었다.

 

1910년 샤넬은 파리에 여성용 모자 가게를 열었다. 1913년에는 카펠의 도움으로 더 큰 가게를 뤼 캉봉 31에 열었다. 이 해 여름 도빌에 첫 번째 패션 부티크를 열었고, 1915년에는 비아리츠에도 개점했다. 샤넬은 디자인할 때 스케치를 하지 않았고 예닐곱 시간 넘도록 모델에게 디자인 중인 옷을 입혀보고 고치고 하는 방식으로 작업했다. 모델들은 지쳐 쓰러지기 직전까지 가는 게 다반사였다.

 

 

카펠은 1918년 영국 귀족의 딸과 결혼했지만 샤넬과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이듬해 교통사고로 느닷없이 세상을 떠나게 되자, 샤넬은 “카펠을 잃었을 때 나는 모든 것을 잃었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채울 길 없는 공허를 남기고 카펠은 떠났다”라는 말로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1923년 마흔 살의 샤넬은 영국의 대부호 웨스트민스터 공작과 사랑에 빠지기도 했다. 둘이 결혼하리라는 소문이 파다했지만 그녀는 일을 포기하고 공작부인으로 살아갈 마음은 없었다. 공작도 ‘웨스트민스터 공작부인’이 비즈니스에 종사한다는 건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더구나 공작은 아이를 원했지만 샤넬은 아이를 가질 수 없었고, 그녀 자신도 이 사실에 크게 실망했다. “나의 부티크, 그것이 나의 아이였다. 나는 사랑을 원했다. 그러나 사랑하는 남성과 사랑하는 의상 가운데 선택해야 했다. 나는 의상을 택했다. 내 인생에서 남성들이 없었다면 나의 ‘샤넬’이 가능했을지 가끔 의문이 들기는 하지만 말이다.”


 

1930년대는 샤넬의 영욕이 교차하는 시기였다. MGM 창립자인 할리우드의 거물 새뮤얼 골드윈의 제의를 받아들여 1백만 달러를 받고 골드윈 휘하 배우들의 의상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정점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는 법. 1935년 결혼설까지 나돌게 된 동갑내기 연인 폴 이리브가 테니스를 하다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자 샤넬은 참담한 마음 가운데서도 더욱 일에 몰두했다. 그러나 직원들이 파업을 벌이면서 배신감을 느끼게 되고, 같은 시기에 다른 패션 디자이너들이 각광받기 시작했다. 아울러 히틀러가 일으킨 2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1939년에 결국 사업을 중단하게 됐다.

 

 

 

샤넬은 몸을 꽉 조여 억압했던 코르셋에서 여성들을 해방시켰다. 무릎 근처까지 올라 간 치마를 통해 여성들을 땅에 닿는 긴 치마로부터 해방시켰고 편하고 활동이 자유로운 여성용 바지를 만들었다. 또한 손가방에 끈을 달아 어깨에 멜 수 있게 해주었다. 지금은 당연시되는 여성 의상들이지만 당시로서는 혁명이자 해방이었다. 샤넬은 여성의 사회 활동이 확대되는 시대 분위기 속에서 단순하면서 편하고 실용적인, 그러면서도 우아하고 기품 있는 스타일을 선보였다. 그리고 그 옷들은 바느질과 마무리가 완벽해 입는 이들마다 극찬했다.

 

휴양지 도빌에 첫 부티크를 연 샤넬은 한가로운 해변에서 여가 활동에 몰두하는 사람들에게 영감을 받아 이른바 도빌룩을 선보여 1920년대 최고 유행 패션으로 선풍을 일으켰다. 1926년에는 리틀 블랙 드레스로 다시 한 번 패션의 신기원을 이룩했다. 별다른 장식은 물론 깃과 단추도 없는 이 검정 드레스는 오늘날까지도 하나의 전설이다. 여성의 풍만한 라인을 강조하는 것에서 벗어나 남성복 요소들을 도입, 단순한 편리성을 강조한 샤넬 정장도 또 하나의 혁명이었다. 장신구와 가방에서도 샤넬의 독창성은 유감없이 발휘됐다.

  

 

한편 향수의 대명사 ‘샤넬 넘버5’는 1921년 5월 5일에 처음 선보였다. 샤넬은 당시 연인이었던 러시아 망명 귀족 파블로비치의 소개를 받아 향수 전문가 에르네스트 보에게 첫 향수 제작을 의뢰했다. 보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샤넬은 1부터 5까지의 숫자가 붙은 샘플과, 20부터 24까지의 숫자가 붙은 샘플을 요구했다고 한다. 샤넬은 이 가운데 5번 샘플을 선택했고, 보가 향수의 이름을 무엇으로 할지 묻자 샤넬은 “넘버 5”라고 말했다 한다. 사넬은 진작부터 숫자 5를 자신에게 행운을 주는 숫자로 여기고 있었는데, 나중에 이 향수를 대대적으로 선보인 날도 5월 5일이었다. 샤넬은 피카소, 달리, 장 콕토, 스트라빈스키, 헤밍웨이, 콜레트, 그레타 가르보, 마를레네 디트리히, 그 밖에도 수많은 문화예술계 인사들과 어울리며 때로는 그들을 후원했다. 예컨대 그녀는 장 콕토의 알코올 중독 치료비를 부담하는가 하면, 스트라빈스키가 <봄의 제전>을 작곡할 수 있도록 후원했다. 샤넬은 자신에게 도움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도움을 주려 하지 않았고, 대신 샤넬 자신이 도와야겠다고 마음먹은 이들을 드러나지 않게 도왔다. 전쟁 전 유럽 문화의 수도였던 파리에서 샤넬은 단연 문화예술계의 허브였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가 되려면, 늘 달라야 한다.”
“남자들이란 모름지기 어린아이와 같다는 걸 안다면, 당신은 모든 것을 안 것이다.”
“패션은 복장에만 있는 그 무엇이 아니다. 패션은 하늘에도 거리에도 있으며,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 그 자체이자 늘 새롭게 일어나는 그 무엇이다.”
“진정으로 럭셔리 한 스타일이라면 편해야 한다. 편하지 않다면 럭셔리 한 것이 아니다.”
“일할 시간과 사랑할 시간. 그밖에 또 다른 어떤 시간이 필요하단 말인가.”
“돈이 많은 사람들이 있다. 부유한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이 둘은 다르다.”
“우아한 기품은 새 옷을 입는 것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패션은 건축이다. 그것은 균형과 비율의 문제인 것이다.”

“나는 럭셔리한 것을 사랑한다. 럭셔리한 것은 부유함이나 화려한 꾸밈에 있지 않다. 그것은 비속(卑俗)한 것이 없을 때 비로소 생겨난다. 비속함은 인간의 언어에서 가장 흉한 말이다. 나는 그것과 늘 싸우고 있다.”

 

 


샤넬을 형용하는 말로 가장 적합한 것은 ‘지칠 줄 모르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지울 길 없는 아픈 기억 탓이었을까? 여러 차례 사랑에 빠졌고 주위에 늘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녀는 늘 외로웠다. 그리고 늘 일에 몰두했다. 일하지 않는 일요일이 그녀에게는 가장 견디기 힘든 날이었다. 그녀는 언젠가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의 친구들! 사실 친구란 없어.”

 

1971년 1월 10일 일요일이었다. 산책을 하고 평소보다 훨씬 더 심한 피로를 느끼며 침대로 향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외쳤다. “숨을 쉴 수가 없어! 창문을 열어줘!” 놀란 가정부가 샤넬의 방으로 뛰어갔다. “이것 봐, 이렇게 죽는 거야.” 그녀의 마지막 말이었다. 발렌시아가, 입 생 로랑, 피에르 발맹, 살바도르 달리 등이 애도하는 가운데 샤넬은 스위스 로잔에 묻혔다. 그녀의 육신은 묻혔으되 그녀가 창조한 스타일은 불멸의 이름을 획득했다. “사람들이 샤넬 패션에 관해 얘기하는 것을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샤넬은 다른 그 무엇도 아니라 하나의 스타일이다. 패션은 철 지난 것이 되어버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스타일은 결코 그렇지 않다. 패션은 사라지지만 스타일은 영원하다.”

 

 

<코코 샤넬. 내가 곧 스타일이다>

(카타리나 칠코프스키 지음, 유영미 옮김, 솔출판사)

샤넬의 내면 풍경을 그려내는 공감적 서술이 돋보이는 책이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샤넬은 일평생 어렵고 힘들었던 유년 시절을 결코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녀는 세상에 환멸을 느낀 고집 센 어린아이였다. 샤넬은 세상에 복수하기를 원했고 결국 해냈다. 유명해지기를 원했고, 성공의 값비싼 대가도 치렀다. 샤넬은 고독했다.’


<코코 샤넬>(앙리 지델 지음, 이원희 옮김, 작가정신)

우리나라에 출간돼 있는 몇 안 되는 코코 샤넬 전기들 가운데 가장 자세하다. 광범위한 조사와 증언을 바탕으로 집필되었기 때문에, 전설로서의 샤넬이 아니라 살아 있는 한 사람으로서의 샤넬과 만나기에 가장 좋은 책이다.

 

 

 

코코 샤넬, 내가 곧 스타일이다코코 샤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