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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아일랜드 작가 제임스 조이스

나 그 네 2009. 2. 2. 12:45

 

제임스 조이스


난해한 장편소설, 다 읽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은 소설, 읽는 내내 계속 읽을 것인지를 갈등하게 하는 소설… 제임스 조이스의 대표작 <율리시스>를 읽는 곤혹스러움을 요약한 서평들이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소설목록’에서 선두를 차지하는 <율리시스>는 출간 당시 음란성과 신성모독 등의 이유로 집필 내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1914년부터 씌어지기 시작한 <율리시스>는 4년 뒤인 1918년에 이르러서야 헤리엇 쇼 위버와 시인 에즈라 파운드의 도움으로 <리틀 리뷰>지에 연재할 수 있었다. 검열에 걸릴지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서 연재를 시작한 <율리시스>는 결국 1921년 2월 미국 뉴욕에서 재판 결과 음란 출판물로 판정 받았고 이 때문에 연재가 중단됐다. 미국에서는 1933년에 이르러서야 음란 출판물 판정이 해제됐다.

 

계속되는 검열과 재판, 음란물 판정 시비 속에서도 조이스는 1921년 친구인 프랭크 버젠에게 보낸 편지에서 <율리시스> 집필을 마쳤다고 밝히며 소설을 완성했다. <율리시스>는 1922년 2월 2일 프랑스 파리에서 실비아 비치가 자신의 서점인 ‘세익스피어 & 컴퍼니’ 이름으로 <율리시스>를 출간했다. 그의 조국 아일랜드는 물론, 영국, 미국 등 영어사용권 국가에서는 모두 외면 받은 이 ‘영어로 씌어진 소설’은 우여곡절 끝에 프랑스 파리에서 출간된 것이다. 이후 <율리시스>는 영국에서도 출간됐지만 1923년 영국 포크스톤 풍속협회에 의해 압수됐으며 출판이 금지됐다. 1936년 보들리헤드 출판사에서 한정판으로 출간될 때까지 출판금지는 계속됐다. 영국에서는 1970년대가 되어서야 공공도서관에서 <율리시스>를 비치할 수 있었다. 이것도 소설이 지나치게 자극적이란 이유로 일반 서가에는 비치되지 못하고 사서들만 작품을 열람할 수 있었다.

 

이런 ‘제도권 문학계’의 검열과 비판에도 불구하고 <율리시스>에 대한 학계와 독자들의 관심은 이 소설의 지나친 난해함과는 별개로 놀라울 정도로 높았다. 학계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많은 논문이 씌어진 소설로 <율리시스>를 꼽고 있고, <율리시스>가 만들어낸 문학박사가 <율리시스>를 읽은 독자보다 많을 것이란 농담까지 있을 정도다. 또 이른바 ‘조이스 산업'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아일랜드 더블린에는 조이스와 관련한 다양한 관광상품이 개발돼 있다. 더블린에 있는 제임스 조이스 센터는 조이스 문학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율리시스>에 등장하는 그 하루인 6월 16일에는 더블린 전역에서 ‘블룸즈데이(Bloomsday)’ 행사가 펼쳐진다. 전세계에서 온 <율리시스> 열성 팬들이 레오폴드 블룸의 발자취를 찾아 더블린에서 다양한 모임을 갖는다. 또 파리, 취리히, 더블린, 트리에스테 등 조이스가 거주했던 도시들에서 조이스 축제가 열리는 등 ‘조이스 산업’은 <율리시스>를 다양한 형식으로 소비하고 있다.

 

 

조이스의 전 작품은 그의 조국 아일랜드 더블린 사람들의 삶을 그린 것이다. 장편소설 <더블린 사람들(1914)> <젊은 예술가의 초상(1916)>과 더불어 <율리시스>까지 이른바 ‘더블린 3부작’이라고 불리는 세 소설은 조이스가 겪었던 더블린 사람들의 실제 삶을 소재로 한 것이다. 조이스 문학은 19세기 영국의 사실주의 소설과 20세기 유럽의 실험주의 소설의 경계선 상에 있다. 내용적으로는 자서전과 소설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더블린 사람들의 내밀한 삶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소설은 연재하는 내내 연재중단과 소송 위협을 받았다. 이런 불화 때문에 조이스는 1915년 아일랜드를 떠나 취리히로 옮긴 뒤 죽을 때까지 다시는 아일랜드로 돌아가지 않았다. 더블린이 자신의 문학 전체를 지배하는 터전임과 동시에 끊임없는 비난과 위협의 진원지이기도 했다는 사실은 조이스 삶의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조국에서의 외면과 영어권 사용국가 전체의 매도와는 대조적으로 조이스 문학이 비영어권인 유럽 대륙에서 먼저 인정받고 공인되기 시작했다는 사실 또한 조이스의 삶이 순탄치 않았음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조이스는 1882년 2월 2일 더블린 중심에서 남쪽으로 약 4킬로미터 떨어진 라스가에 있는 브라이턴 서부 스퀘어 41번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존 스태니슬로스 조이스는 지방 정부의 세금징수원이었다. 어머니 메리 조이스는 조이스를 끔찍하게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여섯 살 되던 해 예수회 학교로 널리 알려졌던 클롱고스우드에 입학한 조이스는 남자 아이들만 가득한 이곳에서 엄격한 규율 속에 감수성이 예민한 아이로 자랐다. 이 곳 생활과 과보호 경향을 가진 어머니, 원칙적이고 남성적인 아버지의 모습은 그의 첫 창편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 잘 그려져 있다.  

 

1891년 아버지가 실직하게 되면서 조이스의 가계는 급격하게 기울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시작된 가난과 추락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버지의 음주과 폭력, 아일랜드 남성 특유의 체면치레와 남성우월주의적 태도 등은 소설 <더블린 사람들>에서 잘 읽을 수 있다. 결국 클롱고스우드를 자퇴한 조이스는 기독교 형제 학교에 입학했으며 그곳에서 폭넓은 독서를 시작했다. 작문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였던 조이스는 글쓰기 대회에서 여러 번 수상하는 등 문장력을 자랑하기 시작했다. 이후 조이스 가족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점점 나락으로 떨어졌지만 조이스는 탁월한 재능 덕분에 더블린에 있는 벨베디어 칼리지에 무료로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조이스는 파산지경에 이른 가정의 혼란과 불확실성, 아버지의 음주와 폭력, 이를 신앙심으로 극복하려는 어머니 등의 모습을 매일 지켜봐야 했다. 그리고 그는 내면에서 솟는 알 수 없는 성적 욕망과 싸워야 했다. 그는 14세이던 1896년에 처음으로 더블린 사창가를 드나들기 시작했다고 고백했다. 그 과정에서 일상에서 벗어나려는 해방감과 죄의식 사이에서 끊임없는 갈등에 빠지기도 했다. 이런 혼란 속에서 교회에 발을 끊게 되고 어머니와도 사이가 멀어지게 된다.

 

그는 주정과 폭력을 일삼는 아버지를 도리어 이해하게 되고, 아버지를 무한한 인내심으로 참아내는 어머니의 신앙심에 대한 반발감을 갖게 된다. 조이스는 아버지를 죄인으로서 자신과 동일시하고 어머니는 억압적인 교회와 동일시하면서 종교가 어머니를 희생자로 만들고 있다고 인식하게 된다. 이 과정은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 등장한 주인공의 내면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더블린에 있는 유니버시티 칼리지에 입학한 조이스는 영어와 이탈리아어, 불어를 공부하고 읽을 수 있게 되었다. 1902년 유니버시티 칼리지를 졸업한 조이스는 의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하고 프랑스 파리로 간다. 영어를 가르치면서 파리에서 지내던 조이스는 1903년 봄 어머니가 암 말기에 이르렀다는 전보를 받고 더블린으로 돌아오지만 어머니는 그해 8월 세상을 떠난다.

 

1903년부터 1904년까지의 기간은 조이스 삶에서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전환점이 되는 시기다. 첫째는 조이스가 이 기간 동안 자전소설 <스티븐 히어로(Stephen Hero)>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스티븐 히어로>는 <젊은 예술가의 초상>의 토대가 된 작품이다. 두 번째는 1904년 노라 바너클이란 여성을 만나게 된 것. 노라는 조이스가 평생을 함께 한 여인이다. 노라는 집에서 도망쳐 나와 더블린의 한 호텔에서 하녀로 일하던 스무 살 난 여성이었다. 조이스와 노라는 1904년 조이스의 천재성을 받아들이지도 후원하지도 못하는 아일랜드를 떠나 유럽 대륙으로 건너간다. 조이스는 취리히와 트리에스테를 옮겨 다니며 영어를 가르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1905년 아들 조지오가 태어났고 1906년 <더블린 사람들>이 완성됐다. 이어 <스티븐 히어로>를 <젊은 예술가의 초상>으로 개작하기 시작했으며 1907년 딸 루시아가 태어났다. 그 후 1909년과 1914년 사이에 조이스는 유럽 대륙과 더블린을 오가면서 집필활동을 계속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발표된 <더블린 사람들>은 실제 더블린 사람들로부터 많은 항의와 삭제요구를 받았다. 소설에 등장하는 당사자들로부터 끊임없는 소송제기 위협을 받은 <더블린 사람들>은 완성된 지 8년이나 지난 1914년에 이르러서야 온전하게 출판될 수 있었다.


 

 

1914년은 조이스 문학이 정점을 이룬 시기다. <더블린 사람들>이 출간되고,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연재를 시작하고, <율리시스> 집필을 시작한 해가 1914년이다. 이른바 ‘더블린 3부작’이 1914년에 모두 어떤 식으로든 결정되기 시작한 것이다. 1914년부터 <에고이스트>지에 연재되기 시작한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1916년 출간됐다. 그러나 조이스와 조국의 불화가 1914년 극점에 이르렀다. 계속되는 항의와 무시, 소송에 대한 두려움, 자신의 문학을 알아주지 않는다는 불만 때문에 조이스는 1915년 아일랜드를 떠나 스위스 취리히로 옮겼고 다시는 아일랜드로 돌아오지 않았다.

 


1914년부터 집필을 시작한 <율리시스>는 음란하다는 이유로 연재 중단의 시련을 겪으면서도 1921년 완성됐다. 이듬해인 1922년 프랑스 파리에서 출판됐다. 그러나 <율리시스>가 영어권 국가에서 출간되기까지는 12년 넘게 걸렸다. 미국에서 <율리시스>는 음란 출판물 판정 등의 소동을 겪으면서 1934년에야 출간될 수 있었고 영국에서는 1936년에 출간됐다.

 

조이스의 건강은 계속 악화되었다. 녹내장으로 시력이 점점 나빠지고 있었고 관절염으로 고생하기도 했다. 또 이가 모두 빠져 의치를 해 넣기도 했다. 그런 속에서 조이스는 <피네간의 경야(Finnegan's Wake)>를 쓰기 시작했다. 1931년 노라와 프랑스 파리에서 뒤늦은 결혼식을 올린 조이스는 이듬해인 1932년 딸 루시아가 정신분열증 판정을 받고 숨을 거두는 등 불행을 겪는다. 또 <피네간의 경야>는 1939년 출간됐으나 독자들로부터 외면 당하고 평단에서도 난해하다는 평가를 주로 받았다. 결국 59세의 일기로 1941년 1월 13일 십이지장 수술 후 생긴 합병증에 의해 스위스 취리히에서 사망했다.

 

 

조이스의 작품은 전체가 하나의 연작처럼 읽힌다. ‘더블린 3부작’이라고 평가 받는 <더블린 사람들> <젊은 예술가의 초상> <율리시스>는 같은 등장인물이 나오고 같은 장면이 계속되기도 한다. 특히 스티븐 디덜러스(<젊은 예술가의 초상>의 주인공)가 레오폴드 블룸을 만나는 과정은 <율리시스>의 중심 에피소드다.

<율리시스>는 더블린의 세 사람이 보낸 1904년 6월 16일 하루를 묘사한 작품이다. 젊은 지식인 스티븐 디덜러스와 신문광고 모집인 레오폴드 블룸, 블룸의 부인 마리언 블룸이 주인공이다.


더블린 사람들젊은 예술가의 초상율리시스

 

소설은 세 사람의 내면과 무의식의 흐름을 쫓아간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의 형식을 따라 배열된 18가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블룸의 비밀스러우면서도 관음증적인 성욕이 다양하게 묘사된 부분은, 이 소설이 발표 당시 왜 ‘음란 출판물’ 판정을 받았는 지 알게 한다. 한국에서는 김종건 교수가 번역한 <율리시스>(생각의나무)가 대표적이다. 김교수는 1968년 정음사에서 <율리시스> 번역본을 출간했으며 1988년 이를 범우사에서 개정본으로 냈다가 2007년 세 번째 개정판을 생각의나무에서 출간했다.<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민음사, 문학과지성사 등에서 출간된 다양한 판본이 있다. 그밖에 <더블린 사람들>(문예출판사), <피네간의 경야>(범우사) 등이 출간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