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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스턴 처칠 - 세계2차대전을 승리로 이끈 지도자

나 그 네 2009. 2. 10. 12:58

 

윈스턴 처칠


시대가 영웅을 낳는다고도 하지만, 시대가 낳은 영웅이 시대의 진로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처칠이 바로 그러했다. 사납고 고집스런 불독에 비유되기도 하는 그의 불굴의 용기와 리더십이 아니었다면, 그가 영국민들을 하나로 결집시키지 못했다면, 오늘날 우리는 지금과 훨씬 다른 세상을 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 독재자들이 압도적으로 전진하는 동안 우리는 그들과 맞서 굳건히 버텼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홀로 그들과 맞설 수 있다는 걸 증명했습니다. 8월과 9월 우리의 전투기들이 독일 공군을 물리쳐낸 이후, 히틀러는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고 철저히 준비했으면서도 감히 이 섬을 침공하지 못했습니다. 당황한 히틀러는 처음엔 런던, 그리고 점차 다른 도시들까지 폭격하여 영국의 정신을 무너뜨리려 했습니다. 그러나 살인과 테러리즘의 공갈협박은 영국의 정신을 약화시키지 못했으며, 다만 현대의 그 어떤 공동체에서도 보지 못했던 강렬하고 광범위한 분노의 불길을 불러 일으켰을 뿐입니다. …… 대영제국 전체가 모국을 자랑스러워하며 우리와 함께 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광대한 대양(大洋)을 사이에 두고 우리에게 전해지는 그들의 사랑을 깊이 느낍니다. 우리는 그 사랑에 값 해야 합니다. 그 사랑을 보전해야 합니다. 이야말로 우리가 치르는 전쟁의 첫 번째 목표입니다. …… 런던을 비롯한 여러 도시의 시민들이 맹렬한 폭격을 견뎌내야 했습니다. 그들은 나에게 워털루에서의 위대한 승리를 떠올리게 합니다. 폭격을 견뎌낸 그들은 군복을 입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영국, 스코틀랜드, 웨일즈의 평범한 남성, 여성, 어린이들로 확고부동하게 함께 버티며 싸우는 보통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정신은 하나이며 영광도 하나입니다. 그들이 거둘 승리는 워털루에서의 승리보다 훨씬 더 위대할 것입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상대 후보였던 분(웬델 월키. 루스벨트는 그를 자신의 개인 특사로 영국과 중동 지역에 파견)을 통해 제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 편지에는 대통령이 자필로 쓴 롱펠로우의 시구(詩句)가 적혀 있었습니다. 대통령은 그 시구가 ‘우리에게 적용되는 것처럼 귀국 국민들에게도 적용되리라’ 말했습니다. 여기 그 시구가 있습니다.……

 

항진할지니, 공화국이여!
항진할지니, 합중국이여, 강하게 위대하게!
미래를 향한 모든 희망을 그러안으라,
그대의 운명 숨차도록 계속 나아가리라!


인구 1억3천만 국가의 수장으로 세 차례 선택된(대통령 선거 3선 성공) 이 위대한 사람에게 내가 건넬 답이 무엇이겠습니까? 여기 내가 건넬 답이 있습니다. 우리를 믿어주십시오. 우리에게 신뢰와 축복을 준다면 신의 섭리에 따라 만사형통할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실패하거나 꺾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약해지거나 지치지 않습니다. 전투의 급작스런 충격도, 눈 부릅뜨고 밤 지새워 전력을 다해야 하는 오랜 시련도 우리를 쓰러뜨리지 못합니다. 장비를 주면, 우리가 끝장내겠습니다.”

 

  

1941년 2월 9일 영국 BBC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처칠의 연설 일부다. “장비를 주면, 우리가 끝장내겠습니다”는 특히 유명한 구절이다. 전쟁으로 피폐해진 영국은 전쟁 물자를 구입할 돈도, 운송할 여력도 없었다. 그러나 당시 미국의 무기수출법은 대금 선불과 구입자 운송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다. 처칠의 호소는 ‘무기를 그냥 달라. 뿐만 아니라 운송까지 책임져 달라’는 뜻이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의회를 설득해 무기대여법(Lend-Lease Act)을 통과시키고 1941년 3월 11일에 서명했다. 미국 방위에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어떤 나라에도 무기를 대여할 수 있는 획기적 법안이었다. 이에 따라 영국은 310억 달러어치 무기를 공급받았다. 연설대로 ‘우리가(영국이)’ 끝장 낸 것은 아니었지만, 무기대여법 시행으로 전쟁의 ‘끝장’이 비교적 분명해진 셈이다. 이렇게 볼 때 2월 9일의 연설은 시의 적절했다. 전쟁 기간 BBC 방송연설을 통해 영국민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어 넣었던 처칠. 1940~41년 겨울은 영국민들 사이에서 처칠의 인기가 정점에 달한 시기다.

 
정점은 곧 내리막을 뜻한다. 라디오 청취자 가운데 80% 가까운 사람들이 처칠의 방송연설을 들었지만, 1941년 중반 이후 60%대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까닭이 뭘까? 1941년 하반기부터 독일의 영국 본토 침공 위협이 잦아들었다. 독일이 6월부터 소련을 침공함으로써 영국이 더 이상 홀로 싸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이에 따라 영국민들은 집단적 포위 심리상태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고, 도전적 자의식도 옅어졌다. 이 점은 우리가 처칠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시사해준다. 전쟁과 위기 때 리더십을 발휘한 지도자라는 것. 1945년 7월 5일 총선에서 일반의 예상과 달리 처칠의 보수당은 패했다. 유권자들은 전시 때 처칠의 리더십을 존경해마지 않았지만, 충분한 고용 기회, 보건 서비스 확충,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구호로 복지 국가를 약속하는 노동당의 선거운동 메시지, ‘우리 모두 미래와 마주하자’에 공감했다. 처칠은 노동당의 프로그램이 게슈타포적인 수단을 필요로 한다고 비판했지만, 다수 국민은 이에 공감하지 않았다. 이것은 전시 영국을 이끈 리더십이 평화 시기 영국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기도 했다.

 

 

처칠은 제7대 말보로 공작 존 스펜서 처칠의 삼남 랜돌프 헨리 스펜서 처칠과 미국의 부호 레너드 제롬의 딸 제니 제롬(결혼 전 이름) 사이에서 태어났다. 처칠은 학교에서 말썽꾸러기 낙제생이었다. 생활기록부에 따르면 그는 ‘품행이 나쁜 믿을 수 없는 학생으로, 의욕과 야심이 없고 다른 학생들과 자주 다투며, 상습적으로 지각하고 물건을 제대로 챙기지 못하며 야무지지 못하다.’ 성적도 하위권이었지만 역사 과목만은 뛰어났다. 저명 정치인의 이름을 따서 학교 이름을 짓는 전통은 거의 없는 영국임에도 오늘날 처칠의 이름을 딴 초등학교만 10개가 넘는다는 사실은, 적어도 처칠의 학창 시절만 놓고 보면 아이러니컬하다.


해로우 학교를 졸업하고 삼수 끝에 1893년 샌드허스트 사관학교에 입학했지만, 성적이 좋지 않아 보병이 아닌 기병을 지망할 수밖에 없었다. 기병 지망생에게는 처칠이 지독히도 싫어하는 수학 공부를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제 적성을 찾았기 때문인지 150명 중 8등의 성적으로 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처칠은 쿠바와 인도 등의 임지를 전전했지만 별다른 전공을 세우거나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다. 처칠은 승진보다는 종군기자로서의 경력에 더 관심이 있었다. 그는 기자로 활동하고 책도 쓰면서 대중적 관심을 끌었고, 특히 1899년 남아프리카 보어전쟁에서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하여 전쟁 영웅으로 각광 받았다. 이러한 인기를 바탕으로 1900년 보수당 후보로 출마, 하원의원에 당선됐다(25세). 보수당의 보호관세정책에 반대하여 1904년 자유당으로 옮겼고, 1906년부터는 자유당 내각의 통상장관, 식민장관, 해군장관 등을 역임하며 승승장구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작전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1915년 해군장관직에서 물러났지만, 1917년 군수장관으로 입각하여 육군장관 겸 공군장관, 식민장관 등을 역임했다. 소련과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과 노동 운동에 대한 의구심을 품은 처칠은, 분열로 지리멸렬해진 자유당을 떠나 보수당으로 복귀했다. 1924년 보수당 내각 재무장관이 되어 자유무역주의를 주장하고 1926년 총파업 때에는 강경한 탄압을 주장했다(그는 천상 보수우파였다). 1929년 내각 총사퇴 이후로는 10년 간 보수당 주류와 입장을 달리하며 내각에 참여하지 않았다. 바로 이 대목이, 처칠이 전시(戰時) 위기 극복의 리더가 된 이유이기도 했다. 보수당 주류는 대독일 유화 노선을 취했다. 파시즘 정권은 공산주의를 막기 위한 일종의 방파제라고 간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칠은 독일의 군사력이 영국의 안전에 중대한 위협이라고 주장하며 군비 증강을 역설했다. 불행하게도, 처칠의 관점이 정확한 것으로 드러나고 말았다. 1939년 9월 1일 폴란드 침공을 시작으로 파죽지세로 승승장구하는 나치 독일군. 영국은 고립무원이었다. 유화 정책으로 일관하다가 낭패를 본 네빌 체임벌린 총리가 사임하고 처칠이 1940년 5월 10일 총리에 취임했다.

 

 


“이 정부에 참여한 장관들에게 이야기 했던 대로 의회에 말합니다. 내가 바칠 것은 피와 땀과 눈물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가장 호된 시련을 앞에 두고 있습니다. 기나긴 투쟁과 고난의 세월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우리의 정책이 무어냐 묻습니다. 나는 답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땅에서 바다에서 하늘에서 전쟁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신께서 우리에게 허락한 모든 힘과 우리의 모든 능력을 다하여, 인류가 저지른 개탄스런 죄악의 목록 가운데에서도 가장 극악한 폭정(暴政)과 맞서 싸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정책입니다. 여러분은 우리의 목적이 무엇이냐 묻습니다. 나는 한 마디로 답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승리입니다. 어떠한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반드시 승리합니다. 모든 공포를 이겨내고 반드시 승리합니다. 승리에 이르는 길이 아무리 길고 험난해도 반드시 승리합니다. 승리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습니다. 기필코 승리를 쟁취합시다. 승리하지 않으면 대영제국이 존속할 길이 없고, 대영제국이 지탱해 온 모든 것들이 존속할 수 없습니다. 승리하지 않으면 인류가 그 숭고한 목표를 향해 전진하게 만드는, 시대의 추동력도 존속할 수 없습니다. 나는 활기와 희망으로 나의 과업을 떠맡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우리의 대의(大義)와 소명은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나는 모든 이에게 도움을 호소해야겠습니다. 자! 단결된 힘으로 우리 함께 전진합시다!”

 

총리가 된 처칠은 5월 13일에 장관들을 만나 “내가 바칠 것은 피와 땀과 눈물밖에 없다”고 말했다. 같은 날 그는 새로 구성된 거국연립내각에 대한 신임을 요청하기 위해 의회를 방문하여 위와 같이 연설했다. 처질의 취임과 이 연설 이후 영국민들은 용기와 희망을 품기 시작했지만, 처칠은 이렇게 말했다. “불쌍한 국민들, 불쌍한 사람들. 그들은 나를 믿고 있어. 내가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건 오랜 재앙밖에 없는데도 말이야.” 바야흐로 한층 격화된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걸 처칠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처칠은 아마추어 수준을 뛰어넘는 화가이기도 했다. 1915년 해군장관직에서 사임한 뒤부터 그림 취미에 몰두하기 시작했는데, 이 취미를 통해 그는 스트레스와 우울에서 잠시라도 벗어날 수 있었다. 처칠은 특유의 활기차고 정력적인 분위기와는 달리, 실제로는 평생 우울증에 시달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림은 그런 그에게 하나의 천국과도 같았다. 그는 특히 인상파 풍의 풍경화로 유명했다. 전후에 처칠은 여러 나라에서 전시회를 열었고, 특히 그와 마찬가지로 그림 취미가 있는 아이젠하워(그는 백악관 직원들에게 직접 그린 그림을 선물하기도 했다.)의 주선으로 미국에서 회고전을 열고, 홀마크사(회고전 후원)의 카드에도 그림이 실린 것으로 유명하다.

 

처칠은 신문에 기고한 많은 에세이와 시사평론은 물론 소설, 전기, 회고록, 역사서 등을 집필한 정력적인 작가, 저술가였다. 대표작은 6권 분량의 회고록 <제2차 세계대전>과 카이사르의 영국 침공 시기부터 제1차 세계대전까지를 아우르는 <영어 사용민의 역사>다. 그는 ‘전기와 역사서에서 보여 준 탁월함과, 고양된 인간적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행한 훌륭한 연설’을 이유로 195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당시 문학상 후보였던 헤밍웨이는 “처칠은 구어(口語)의 대가이기 때문에 노벨문학상의 취지와 맞지 않다”고 지적했지만, 스웨덴 한림원 측은 처칠의 전시 연설도 문학적 가치가 있다고 평가했다.

 

 

 

드높은 사회적 명성과 귀족 가문 상류층이라는 신분적 지위, 여기에 하원의원, 장관, 총리라는 위치에도 불구하고 처칠은 개인적 재정 상태의 수지를 맞추느라 급급했다. 하원의원 시절에는 급료가 쥐꼬리만 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1946년 이전까지 영국 하원의원은 거의 무보수 봉사직에 가까웠다), 무엇보다도 그의 낭비벽 때문이었다. 처칠은 신문과 잡지 기고 원고료와 저서의 인세 수입으로 낭비벽을 충족시킬 수 있었다. 그는 직업적 정치인이었지만 적어도 수입 측면에서는 전업 작가 비슷했던 셈이다.


처칠이 학교 시절 대부분의 학과목에서 뒤쳐졌지만 역사와 영어 과목만은 뛰어났던 것에서 작가와 연설가로서의 자질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전쟁 중에도 보고서의 부적절한 문법이나 표현을 자주 지적했다. 예컨대 그는 군 정보책임자에게 “intense(강렬한)를 쓰지 않고 intensive(집중적인)를 쓴 건 왜인가? 단어의 적절한 용법을 공부해보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그가 독서광이었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장교로 임관하여 여러 임지를 전전하면서 처칠은 독서에 몰두했다. 특히 역사와 정치 관련 도서를 집중적으로 탐독했는데,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흥망사>가 애독서였다. 급박하게 전개되는 역사의 흐름을 읽어내고 격조 높은 문장과 연설문을 쓸 수 있었던 것도, 역사서 탐독 덕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1932년에 출간한 산문집에 실린 ‘취미’라는 글에서 이렇게 독서를 권한다. “설령 책이 당신의 친구가 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당신과 일면식이 있는 관계로 묶어둘 수는 있지 않은가. 설혹 책이 당신의 삶에서 친교의 범위 안으로 들어오지는 못한다 해도, 아는 체하며 가벼운 인사 정도는 반드시 하고 지낼 일이다.”

 

 

처칠은 1945년 총선 패배 뒤 1951년 다시 총리에 취임하고 경(卿)의 칭호를 받았지만, 1955년 당수 자리를 R. A. 이든에게 물려주고 하원 평의원으로 머무르다가 1964년에 의원직에서 물러났다. 기력이 쇠하면서 우울 증세가 심해져 “나는 많은 걸 이루었지만, 결국 이룬 건 없다”는 탄식을 자주 했다. 90세를 일기로 1965년 1월 24일(처칠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날짜와 같다) 일요일 아침 세상을 떠났다. 세계대제국으로 ‘해가 지지 않는’ 빅토리아 시대에 태어나 청년 시절을 보내고, 대영제국의 최전성기에 장년과 노년 초기를 살았으며, 제2차 세계대전 승리의 주역이었지만, 세계 패권이 미국에 넘어가 영욕이 교차하는 시대를 겪고 동서 냉전이 심화되는 시기까지 살았던 윈스턴 처칠. 어떤 의미에서는 그의 삶이 곧 영국이었다. 2002년 BBC가 영국인 1백만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위대한 영국인 100명’ 가운데 아이작 뉴턴과 셰익스피어를 제치고 처칠이 1위를 차지한 것이 이를 잘 말해준다.

 

 

<폭풍의 한가운데>(윈스턴 처칠 지음, 아침이슬)
처칠이 신문과 잡지에 기고한 글 모음집이다. 주로 자신의 삶을 회고하는 성격의 글들이지만, 정치 역정이나 전쟁에서의 결단과 용기의 순간들도 펼쳐진다. 책 제목대로 그의 삶은 어떤 의미에서 늘 ‘폭풍 한가운데’ 있었다. 그가 솔직하면서 생생하고 위트도 넘치는 문장을 구사한다는 걸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다.

 

<처칠을 읽는 40가지 방법>(그레첸 루빈 지음, 고즈윈)
전승을 이끈 영웅, 실패한 정치인, 포악한 제국주의자, 관대한 휴머


 

폭풍의 한가운데처칠을 읽는 40가지 방법처칠: 세기의 영웅

니스트, 부하들에게 가차 없는 자기우월주의자, 명연설가이자 작가, 술꾼에 울보. 처칠의 다양한 면모에 관한 40가지 질문을 던지면서 답을 해나가는 흥미로운 형식의 인물도서다.

 

<처칠: 세기의 영웅>(존 램스덴 지음, 을유문화사)
처칠의 생애를 시기 순으로 살펴보는 일반적인 전기가 아니다. 자연인이자 역사적 인물 처칠보다는 일종의 ‘처칠 현상’ 혹은 처칠이 영어사용권 국가들에 미친(처칠을 평가하고 수용하는 방식) 영향에 주안점을 둔다. 새로운 각도에서 처칠을 조명한다고 볼 수 있으나, 일반적인 전기를 기대하는 독자는 아쉬움을 느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