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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2월 현재, 우리 사회의 풍경이다. - 세상이 두렵다

나 그 네 2009. 2. 14. 14:53

“세상이 두렵다” [조인스]

우울증에 시달리는 CEO, “희망 없다”는 대학생들
추락현장 르포

 

 

이코노미스트 총체적 난국이란 말이 있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 쓰는 말이다. 요즘 서민들이 느끼는 심정도 이 같을 것이다. 과연 우리에게 희망이 있느냐고 되묻는 서민들을 만나봤다. 2009년 2월 현재, 우리 사회의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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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피곤해도 잠들지 못하는 ‘불면의 밤’= 쌍용자동차의 법정관리가 시작됐다. 법정관리인이 선임되고 이제 쌍용자동차는 회생을 꿈꾼다. 하지만 협력업체의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이미 큰 타격을 받은 곳을 위주로 상당수가 곧 문을 닫게 될 것이라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 쌍용차 협력업체를 경영하는 A사장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하루 종일 돈 구하랴 일감 따오랴 몸이 파김치가 돼 자리에 누워도 도무지 잠이 오지 않는다고 하소연한다.

A사장 부인은 남편이 혹시 운전하다 졸까 봐 수면제를 구해 왔다. 약도 잘 듣지 않았다. 눈꺼풀은 내려오지만 1~2시간씩 눈만 붙이는 토막잠이고 아침에는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A사장은 최근 정신과병원을 찾았다. 상담이 몇 차례 진행되자 A사장은 의사에게 “솔직히 죽고 싶다”고 털어놓았다. “지금까지 함께 고생한 직원들인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제 앞날도 걱정이니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2. 앞길 막막하고 퇴로도 차단됐다 = 28세 미혼 여성 B씨. 그는 얼마 전 입원했다. 큰 병이 있어서가 아니다. 남들 부러워하는 명문대를 나왔다. 하지만 2년째 취업도 못하고 있다.

틈틈이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으로 가입한 펀드는 오히려 원금보다 줄어들었다. 그는 지난달 자살을 시도했다. B씨의 부모는 딸이 좀 우울한 것이라고 자위해 보지만, 사회가 원망스러울 뿐이다.

37세 미혼 여성 L씨는 매주 목요일 정신과를 찾는다. L씨는 2007년 말에 2년 동안 살던 강남구 청담동 원룸을 나와 양재동 오피스텔로 이사했다. 그는 이사 하면서 혼수 준비금으로 챙겨뒀던 전세금 1억1000만원에서 1억원을 부모님 몰래 뺐다. 오피스텔은 월세로 산다. 1억원 가운데 일부는 펀드에 넣고 나머지는 투자를 대신해 주겠다는 친구의 남편에게 맡겼다.

그런데 그 친구는 이제 “남편과 연락이 안 된다”며 그의 전화를 피하고 있다. 펀드는 일찌감치 큰 손실을 입어 뺐다. 집에만 있던 L씨를 고향 친구가 반강제로 끌고 병원에 왔다. “펀드도 문제지만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 당하고 돈까지 손해 보니 세상이 무서워졌어요.” 서울아산병원 정신과 홍진표 교수는 “최근 경제위기로 인한 우울증을 호소하는 환자가 늘었다”고 말했다.

“부도, 실직 등을 이유로 잠을 못 잔다든지 죽고 싶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는 환자도 있으며 안절부절못해 가족이 데려오는 경우도 늘고 있어요.”

3.“돈 못 버는 가장은 필요 없어”= 겉보기엔 평범한 김정은(가명·50)씨 부부. 그녀는 이번 금융위기로 이혼을 고려 중이다. 유명한 영어과외 강사인 김씨는 특목고 과외로만 한 달에 1000만원을 번다. 지난여름까지만 해도 건강상의 문제로 쉬고 있는 남편과 잘 지내왔다. 그러나 금융위기 발생 이전에 무리하게 재테크를 한 것이 화를 불렀다.

대출받아 산 땅값은 폭락하는데 이자는 계속 오르고 있다. 김정은씨 수입의 70%는 은행 빚으로 고스란히 나간다. 설상가상 과외를 원하는 학생은 줄고 건강마저 악화됐다. 김씨 남편은 안 팔리는 땅이니 차라리 태양열 패널을 설치해 정부 보조금이라도 받자며 빚을 더 내자고 우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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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직이 어려워지면서 졸업을 두려워 하는 대학생들도 크게 늘었다.

빚 갚기에 지친 김씨가 극구 반대하면서 부부간의 의까지 상했다. 남편은 아직도 고집을 꺾지 않고 있다. 2년 전 동갑내기 남편과 결혼한 이지민(가명·30)씨는 남편이 무턱대고 사표를 내는 바람에 이혼을 고려 중이다. 묻지마 지원으로 취업했다가 적성과 조건이 안 맞아 20대에 퇴사하는 ‘이퇴백’이 바로 이씨 남편이다.

“갑자기 사진을 찍겠다며 멀쩡한 직장을 관둔 남편이 야속하죠. 시부모님께 계속 생활비 받아 쓰는 것도 눈치 보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벌어서 철없는 남편을 먹여 살리자니 짜증부터 나네요.”

이씨는 “나를 이기적으로 볼지도 모르지만 경제위기가 심각한 때에 직장을 관두는 무책임한 사람과는 살 수 없다”고 항변했다.
가정법원에서 상담위원으로 활동하는 김혜숙 천안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최근 경제위기를 겪으며 이혼을 고려하는 부부가 크게 늘었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10년 전 경제위기 때도 이혼이 증가했지만 최근의 이혼 추세는 그때와는 다르다”고 강조했다. 10년 전에는 빚 청산 문제로 어쩔 수 없이 이혼을 선택했다면 지금은 이혼을 빚이나 경제적인 부담 등에 대한 돌파구로 선택한다는 것. 김 교수는 “특히 30대나 20대 후반의 신세대 부부의 경우, 경제적 위기를 함께 극복하려는 의지가 부족한 측면이 있다”며 “이들은 경제위기를 한 번 겪은 터라 불안감도 크며 가능성에 대한 기대가 적다”고 설명했다.

사회복지사들도 최근 부쩍 늘어난 상담 횟수가 부담스럽다. 사회복지사들은 경제적 어려움이 이혼 사유라면 자신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점검해 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를 통해 미래를 길게 내다보는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충고다. 김 교수는 “더 큰 문제는 상담을 고려조차 못하는 저소득층”이라며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경우가 많은 저소득층 가정은 상담 받으러 올 시간조차 없다”고 말했다.

또 “경제위기로 저소득층 가정은 더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며 “필요한 경우 찾아가는 상담서비스 등을 사회가 지원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4. IMF 때 기운 가세 8년 걸려 회복했는데… = 공무원 이정환(가명·36)씨는 요즘 TV를 보면서 놀라는 일이 잦아졌다. 이씨는 ‘계’란 말만 들어도 가슴부터 쓸어 내린다. 어머니가 계주를 맡아 관리해 오던 계가 외환위기 때 깨지면서 집안이 풍비박산 났기 때문이다. 송파구 풍납동에서 옷가게를 하던 이씨 어머니는 10년 이상 주변 상인들과 함께 낙찰계를 운영하고 있었다.

당시 20대 중반이던 이씨는 계가 깨졌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설마…’하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이씨 어머니는 계원들에게 수십 차례 멱살을 잡혔다. 낙찰 받지 못한 계원이 부은 돈을 물어줘야 했다. 이씨는 어머니와 함께 신용카드를 배달하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집 팔고 가게 팔고 갚아 나갔지만 전액을 갚는 데 무려 8년 이상 걸렸다.

지난해 말 강남 귀족계가 깨지더니 이제는 서민들이 근근이 돈을 모아 운영하던 소액 계도 판판이 깨져 나가고 있다. 불황기면 늘 일어나는 일이라지만 막상 당하는 사람은 오랜 시간이 지나야 다시 회복할 수 있다. 이씨는 “당시 건강을 잃으셨던 아버지가 몇 년 전 돌아가신 것도 다 계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잠도 오지 않는다”며 “TV에서 계가 깨졌다는 뉴스를 보면 남의 일 같지 않다”고 말했다.

5. 생활이 불가능했던 해외취업 = 안민호(가명·31)씨는 미국에 갔다가 1주일 만에 다시 돌아왔다. 항공료와 소개비 명목의 300만원을 합쳐 모두 500만원 이상 든 비싼 여행이었지만 정작 집 밖으로 나가본 건 손을 꼽을 정도다. 밖에 나가려면 회사 동료들의 차를 얻어 타야 했기 때문이다. 안씨는 해외 취업에 성공해 주변 사람들과 출국 기념파티까지 했지만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꼬였다. 안씨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회사가 있는 미국 남부 대도시에 도착하자마자 사장에게서 차를 사라는 얘기를 들었다. 대도시 외곽에 있는 이 회사에는 대중교통 편이 전혀 없었다. 한화 기준 140만원을 받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인사부장은 “수당 액수가 잘못 전달됐다”며 “우리는 100만원 조금 넘는 돈밖에 못 주겠다”고 통보했다.

이 돈으로 매월 룸메이트와 함께 쓰는 방값


이 돈으로 매월 룸메이트와 함께 쓰는 방값 50만원, 자동차보험료 등을 내고 나면 당장 먹을 것 살 돈도 없을 게 뻔했다. 해외취업 알선업체 사장은 “우리는 연결만 시켜줬는데 당신 때문에 우리 평판이 떨어지게 됐다.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며 오히려 안씨를 몰아세웠다. 친구들이 자신이 미국에 있는 줄로 알고 있기 때문에 안씨는 한국에서도 외출을 삼가고 있다.

그는 미국에서 신세를 진 회사 동료에게 얼마 전 e-메일을 보냈다. “한국에 돌아오지 말고 미국에서 잘 견디세요. 여기는 정말 사정이 좋지 않아요. 살 만한 곳이 못됩니다.”

6. 학비 내주던 친지 부도에 망연자실 = 서울의 한 사립대 산업디자인학과 2학년인 윤지은(가명·23)씨는 휴학을 결정했다. 윤씨 학자금은 ‘키다리 아저씨’를 자청하셨던 큰아버지 몫이었다. 그런데 탄탄하다던 큰아버지 회사가 부도를 맞았다. 윤씨는 10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렸다. 윤씨 아버지는 문구용품 사업을 하다가

외환위기를 맞았다. 사업을 접은 아버지는 1998년 결국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어머니는 그 뒤 대형 할인마트 계산원으로 일하며 윤씨를 키웠다. 주변 성화에 재혼을 결심하기도 수차례였지만 결과는 늘 실패였다. 윤씨가 대학 진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작은 집이나마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윤씨는 친지의 도움으로 지금 다니는 학교에 적을 올렸다.

그래도 학기당 500만원에 육박하는 등록금은 늘 부담이었다. 다행히 잘나가는 큰아버지 덕에 1년은 학비 걱정을 덜었다. 그런데 큰아버지가 이번 경제위기에 무너지신 것이다. 그는 지금 어머니가 일하는 백화점의 판매원으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어려서 잘 몰랐는데, 경제적 부담이 크게 다가오네요. 중학생인 동생의 학원을 끊은 게 제가 휴학하는 것보다 더 가슴이 아픕니다. 비싸게 돈 내고 대학 다녔는데 취직이나 잘 돼야 할 텐데 그것도 걱정이고요.”

서울대 학생생활문화원에서 운영하는 심리상담센터의 김지은 선생은 “상담자가 매년 30% 정도 증가하고 있다”며 “무엇보다 진로에 대한 불안감을 호소하는 경우가 가장 많다”고 밝혔다. “고시 준비하는 학생이 많은데, 이 친구들이 ‘안 되면 취업이나 하지’라고 생각하다가 취업도 갈수록 어려워지니 희망이 없다고 호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정연 기자 jayha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