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ving daily/그때 그시절

나체질주 한국상륙

나 그 네 2010. 3. 24. 10:28

'나체 질주' 한국 상륙

1974년은 정초부터 나라 안팎이 뒤숭숭했다. 국내에선 대통령 긴급조치가 발령돼 유신헌법 개헌의 ‘개’자도 못 꺼내게 국민의 입을 막았다. 미국에선 닉슨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진실을 밝히라는 요구와 탄핵위협에 직면해 있었다. 여기 더해 베트남전쟁은 끝없는 수렁에 빠져 애꿎은 젊은이들의 목숨을 앗아가고 있었다. 현실은 답답한데 표현하긴 마땅치 않고 가위눌린 듯 숨이 찬 형국이 짜증나게 지속되는 꼴이었다.

 

 

 

'나체 질주' 전세계 선풍적 유행

 

그러던 3월 첫 주. 동아일보에 짧은 해외토픽 기사가 실렸다. 미국 테네시대학 캠퍼스에서 스트리킹(발가벗고 질주하기)이라는 ‘새로운 유행병’이 번져 9명의 남학생이 구두와 양말만 신은 발가벗은 모습으로 여학생 기숙사 가까이를 질주했다는 것이다. 또 미국 프로농구 플로리다와 앨러버마 경기에서 한 젊은 관객이 옷을 홀딱 벗고 코트 위를 달려 "특히 여성 관중을 즐겁게 했다" 라며 그 사진을 게재했다.

 

사실 미국에서는 1월 말 경부터 나체질주 행위가 대학 중심으로 빠르게 번지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풍요로운 나머지 권태를 느낀 자들의 엉뚱한 짓거리" 정도로 사태를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다 3월 둘째 주. 봇물이 터진 듯, 들불이 번지 듯 세계 곳곳에서 발가벗고 질주하는 젊은이들이 늘어났다. 여학생까지 ‘알몸 달리기’에 동참했고 하늘에서 낙하하는 나체족도 등장했다. 어떤 노인은 달릴 힘은 없다며 나체로 천천히 걸어 '스네일링 (달팽이처럼 알몸으로 걷기)'이란 용어를 만들어냈다. 여기도 알몸, 저기도 나체, 가히 알몸질주 세상이었다.


 

3월9일 자 동아일보에는 3장의 스트리킹 사진이 실렸다. 맨 위는 미국 대학생 13명이 프랑스 파리 에펠탑 앞에서 나체 질주 후 환호하는 모습. 그 밑으로 조지아 대학 상공에서 알몸으로 낙하산을 타고 뛰어내리는 학생, 그리고 뉴올리언스 대학생 수십 명이 발가벗고 구경꾼 사이를 달리는 사진이 차례로 배치됐다. 기사는 프랑스 언론을 인용, "학교에서 섹스교육을 실시한 역효과인지 모른다. 어쨌든 저속한 풍경"이라고 지적하면서도 별다른 논평 없이 객관적 보도를 하는데 그쳤다.

 

 

 

초반에는 신나는 봄맞이 운동처럼 여겼지만

 


이틀 뒤인 3월11일. 선풍적으로 번지는 나체질주 현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석하는 외신기사가 실렸다. 기사의 톤은, 주로 미국인의 입을 통해 '스트리킹은 재미있고 신나는 봄맞이 의식과 같은 운동'이라는데 맞춰졌다. 크게 해로운 건 아니라는 말도 했다. 며칠 뒤 한국에도 나체질주가 '광풍'처럼 밀려오고, 차마 눈 뜨고 못 볼 망국풍토라며 개탄할 걸 미리 생각했더라면 쓰기 힘들었을 기사였다. 기사는 첫 문장부터 매우 낭만적으로 시작한다. "고대 그리스의 올림픽 나체 경주 이래 자취를 감추었던 알몸으로 달리는 신나는 운동(?)이 74년 미국의 젊은 세대 사이에 요원의 불길처럼 부활했다!" 그리고 바로 "아담과 이브 이전의 순간으로 돌아가는 이 순진한 해프닝은 재미있고 신나고 또 돈이 안 들어서 단연 대학생들 간에 인기 있는 경기종목이 됐다"고 소개하고 유명교수들의 코멘트를 따 알몸 질주를 괜찮은 스트레스 해소제인 양 제시했다.

 

미주리 대학 사회학자 에드 토미치 교수는 "에너지 위기로 길고 따분한 겨울을 보냈기 때문에 옷을 홀가분히 벗어 던지고 숨이 턱에 차도록 뛰고 싶은 '봄 처녀의 충동'이 미국에 퍼진 것"이라고 말했다. 같은 대학 윌리엄 볼드슨 교수는 "단숨에 달려 순간에 끝나는 이 체험은 그리스 이래 봄맞이 의식의 일종"이라고 정의했다. 또 환경론자 로버트 아드리는 한 대학연설에서 스트리킹은 인간의 기본적 욕구로 "망측하면서도 상상력을 자극하는 운동이기 때문에 대학가에서 꽤 오래 지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국에도 '나체 질주' 상륙

 

나체질주에 대해 그런대로 긍정적으로 보도한 건 그게 마지막이었다. 신문사 논설위원들이 칼럼을 통해 "스트리킹의 한국 상륙만은 제발 막자"고 호소한 13일, 고대 앞에서 한국 최초의 스트리킹이 일어난 것이다. 오전 8시15분 고대 앞 보성다방에서 20대 한 명이 발가벗은 채 뛰어나와 안암동 로터리 쪽으로 200m 가량을 달린 뒤 주유소 옆 골목으로 사라졌다. 그가 달리는 동안 뒤에서 친구 한 명이 카메라로 그 장면을 촬영했고 다른 한 명은 옷 꾸러미를 옆구리에 낀 채 뒤쫓았다.

 

언론은 아연실색했다. 아니, 통곡했다. 그런 X는 때려죽여도 싸다는 식의 막말까지 썼다. 3월14일 자 경향신문 칼럼은 이렇게 시작한다. "설마가 사람 죽인다고 스트리킹 광태가 급기야 서울거리에 출현하고 말았다. 통곡할 일이다."


 

그리고는 이내 매서운 독설을 쏟아냈다. "창피하기 짝이 없고 나라 체면에 먹칠을 했다. 어느 집 아들인지 알 수 없으나 그 집 가문도 볼 장을 다 봤고 겨레가 입은 수치도 이만저만이 아니다…쓸개 빠진 일부 젊은 세대의 앞날이 암담할 뿐이다." 논설위원은 자기 친구의 말을 인용해 "'만약 (발가벗고 대로를 달리는) 놈이 있다면 광화문 네거리에서 포살을 하거나 그 이전에 시민들이 때려죽이고 말거야' 라고 했는데, 이런 겨레의 믿음이 허무하게 무너졌다"고 통분했다.

 

그리고 "이따위 얼간 망둥이는 전 수사력을 풀어서라도 잡아다 혼을 내라" "인간의 탈을 벗은 짐승, 세기말적 사이비인간, 인면수심의 망종들에겐 따끔한 맛을 보여주어야 한다."며 '임시조치법'이라도 만들어 엄중히 다스릴 것을 요구했다. 이런 개탄과 분노에도 한번 불길이 댕겨진 스트리킹은 전혀 꺼질 줄 몰랐다.

 

15일 하루 여학교 교정과 대로, 술집 등에서 4건의 스트리킹이 일어났다. 주한 미군들이 술 취해 벌이는 나체질주도 심심찮게 일어났다. 외신들은 여전히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스트리킹을 비중 있게 보도하고 있었다. 점보기 승객이 기내를 발가벗고 달린 이야기, 알몸으로 태연하게 TV에 나온 디스크자키, 교회 결혼식 중의 스트리킹과 미 육사 웨스트포인트 생도 스트리킹 등이 연일 화제였다.

 

 

 

유행 막고자 '나체 질주자 수사본부' 설립까지

 

이럴 즈음, 미국에서는 알몸질주의 정치색도 논쟁 전면에 부상했다. 몇몇 대학생들이 4월1일 만우절, 백악관 잔디밭에 모여 워터게이트 사건의 진상을 발가벗듯 낱낱이 밝히라는 의미에서 알몸시위를 하겠다고 공언하고 나선 것. 물론 나중에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학생회는 "그런 짓은 사태의 중대성을 모독하는 것"이라며 공식으로 사과하고 스트리킹 계획을 철회했다. 그러나 닉슨 탄핵국면과 묘하게 결합하면서 알몸질주는 정치적 요구의 한 변형이 아니냐는 시각이 우세해졌다.


이런 곡절 탓인지 국내에서도 스트리킹 엄벌론이 힘을 얻었다. 경찰은 애초 경범죄로 처리하던 나체 질주자에게 형법의 공연음란죄를 적용하는 등 처벌수위를 한층 높이겠다고 경고했다. 그리고 국내 첫 스트리킹 사례로 보고된 고대 앞 사건과 한남동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신용두 파출소와 한남 파출소에 각각 '나체질주자 수사본부'라는 희한한 이름의 간판을 내걸었다. 본서의 간부급 경찰관을 본부장으로 1백여 명의 정사복 형사를 투입해 총력 검거체제에 들어간 것이다.


 

당장 경찰은 일대 하숙집을 상대로 탐문수사를 벌이고 긴급반상회까지 소집해 나체질주자에 대한 제보를 독려했다. 또 그들이 장발이었다는 목격자 진술을 확보해 서울시내 일원에서 장발단속도 벌였다. 그러나 예의 나체질주자는 꽁꽁 숨어 나타나지 않았다. 아마 다른 사건 같았으면 수사본부까지 차려 검거에 나서고도 범인(?)을 잡지 못한 경찰을 언론이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달랐다. 잡힌다 해도 그의 질주 동기를 듣고 모방하는 젊은이가 생길지 모른다는 우려가 없지 않았다.

 

나체질주에 대해 미국에선 처음 개탄의 목소리가 높았으나 팽배한 물질주의와 획일적 교육, 인습과 가식적 삶에 대한 이유 있는 반발이란 이해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한국에선 그런 이해가 싹조차 키우지 못했다. 언론이 쓸데없이 흥미 위주 기사를 써 젊은이들의 모방을 부추긴다는 비판도 거셌다. 결국 언론사 스스로 나체질주 기사를 자제한다는 방침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보도가 사라지자 나체질주도 슬그머니 자취를 감췄다.

 

 

 

박준우
민병욱 / 전 한국간행물윤리위원장
1976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편집국 사회1부장, 정치부장, 부국장, 논설위원을 거쳤다.
2009년 7월까지 한국간행물윤리위원장을 지냈다. 저서로는 <들꽃 길 달빛에 젖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