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와 나폴레옹
나폴레옹에 심취했던 이유는 그가 자기처럼 키가 작았고, 자기처럼 식민지에서 태어났다는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의 사전에 불가능이란 단어는 없다”면서 꿈을 펼쳐나간 나폴레옹을 그는 닮고 싶었던 것이다.
나폴레옹이라는 롤모델은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문경소학교 교사로 임용된 뒤에도 계속 그의 마음에 남았다. 당시 제자였던 정순옥(鄭順玉)은 이런 증언을 남겼다.
“어느 일요일 동무들 몇 명과 함께 새로 오신 선생님의 하숙집을 찾아갔다. 호기심을 가지고 선생님 방을 살펴봤더니 책상 위에 커다란 사진 액자가 걸려 있었는데 배가 불룩 나오고 앞가슴 양편에 단추가 죽 달려 있는 사람이었다. ‘저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선생님은 ‘영웅 나폴레옹’이라고 하시며 나폴레옹에 대하여 자세히 이야기해주셨다.”(이낙선 비망록, 1962)
그런 그가 교사 생활을 그만두고 갑자기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간 것은 1940년의 일이다. 이 돌연한 행위를 두고 “친일행위다” “아니다.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일부러 입대했다”는 등 상반된 해설이 있었다. 이 점과 관련해서는 문경소학교 시절의 제자 전도인(錢道寅)의 증언에 귀 기울일 내용이 들어 있다.
“하루는 박 선생님이 교무실에서 혼자 사무를 보고 있으면서 나를 불렀다. 그때 일본인 청부업자 한 명이 담배를 문 채 교무실 안으로 들어와 박 선생님에게 ‘어이! 교장 계신가?’ 하고 물었다. 선생님은 일본인을 한 번 힐끗 쳐다보고 아무 대꾸가 없었다. 그 사람이 재차 똑같이 묻자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
너희 일본인들이 부르짖는 내선일체(內鮮一體)가 진실이라면 당신이 내게 그런 언동을 할 수 있는가? 일등 국민으로 자처하고 싶거든 우선 교양 있는 국민이 돼야지. 담배를 물고 교무실에 들어온 것만 해도 무례하기 그지없는데 언동까지 몰상식한 인간이라면 나는 너 같은 사람을 상대할 수가 없다. 어서 나가봐!’ 하고 말한 적이 있다.”(정재경)
이를 다시 읽어보면 “상전이면 상전답게 굴어야지, 왜 내선일체라면서 조선인을 함부로 대하느냐?”는 뜻으로 민족감정이 내재된 발언이기는 했지만 그것이 상전인 일본을 부정하는 데까지 나아갔던 것은 아니다. 다만 민족을 차별하지 말고 정당히 대접해 달라는 것이 당시 그의 민족주의 콘텐츠였던 것 같다.
따라서 그가 만주군관학교에 간 것은 친일을 하기 위해서도,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사회적으로 무시당하지 않고 대접받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욕망이 그를 군대로 향하게 했던 것으로 분석된다. 이 욕망은 그가 보통학교 시절 80연대의 야외훈련을 목격하면서, 그리고 <나폴레옹 전기>를 읽은 이후 마음속에 키워온 장군에의 꿈이기도 했다.
긴 칼 차고 싶어서
그가 갑자기 군관학교로 간 이유에 대해 보다 선명한 답을 내놓은 것은 역설적으로 박정희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던 한 연구소였다. 2009년 말 <친일인명사전>을 출간한 민족문제연구소는 박정희의 ‘혈서지원’ 기사가 실린 1939년 3월 31일자 <만주신문> 사본을 공개하면서 박정희는 “만주국 군적이 없는 데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3차례의 시도 끝에 신경군관학교 예과과정에 입학, 일본군 장교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발표했다.(<경향신문> 2009년 11월 5일)
3차례(경향신문) 또는 2차례(만주신문)의 시도 끝이라면 박정희는 갑자기 만주군관학교에 갔던 것이 아니라 문경소학교에 부임한 1937∼1938년부터 계속 사관학교의 문을 두드리다가 1939년 10월에야 비로소 응시자격을 얻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1940년 1월 4일자 <만주국 공보>에 박정희는 15등의 합격자로 발표되었다.
문경소학교를 떠나던 날 그를 배웅하러 나온 제자들이 울며불며 가지 말라고 매달리자 박정희는 “너희는 모른다. 내가 긴 칼 차고 대장이 되어 돌아오면 군수보다도 더 높다”고 했다는데(박동성·심고령, <여명의 기수>, 1963), 이는 훗날 소년용 <박정희 전기>를 준비하던 당시 공보비서관 김종신(金鐘信)이 왜 만주에 가셨느냐고 물어보자 “긴 칼 차고 싶어서 갔지”라고 단순명쾌하게 대답했다는 내용과 일치한다.(<월간중앙> 2005년 3월호)
긴 칼은 권(權)의 상징이다. 권이 있으면 부도 따른다. 가난의 억눌림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그의 꿈이 긴 칼을 찬 군인의 모습으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1940년 4월 그는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교했다. 예과 2년의 군관학교 생활에서는 선배가 후배를 구타하는 일이 잦았다.
1기생이었던 방원철(方圓哲)은 군기를 잡는다며 주먹을 날렸다. 어려서부터 ‘대추방망이’라는 별명을 듣고 자란 박정희는 딱 버티고 서서 차돌같이 단단한 자세를 유지했는데 “맞아서 몸이 밀리면 금방 제자리로 와서 다음 주먹을 기다리는 것을 보고 독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고했다. 박정희에게는 그런 악바리 근성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모든 학과목에서 뛰어난 성적을 보였다. 이는 대구사범 시절의 꼴찌와는 판이한 결과였다. 하고 싶었던 공부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검도·유도·승마·교련 같은 육체적인 과목에서도 발군의 실력을 보였다.
그리하여 1942년 3월 그는 조선인이 포함된 만계(滿系) 240명 가운데 수석으로 졸업, 만주국 황제로부터 금시계를 부상으로 받는 동시에 일본육사 본과에 편입하는 특전을 누리게 된다.
이후 도쿄에 건너온 작은누나 박재희 부부의 뒷바라지를 받으며 공부에 전념한 박정희는 1944년 일본육사를 3등으로 졸업했다. 그리고 견습사관을 거쳐 소위로 임관한 그 해 7월에는 열하성(熱河省)에 있던 보병 제8단에 배속, 그곳에서 근무하다가 만군 중위로 해방을 맞았다.
-계속-
나머지 전문은 월간중앙 7월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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