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되시면 한번 다녀와 보세요.
성북동에 길상사
나들이 하시고
오시는길에 출출 하시면 성북동 오박사네 한번 드셔보세요
왕돈까스 6000냥 참맛있습니다*
법정 스님과 예쁜 진희 명복을
비옵니다..
좋은일만 있으시길 빕니다... 행복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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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북동에 자리 잡은.,사찰 길상사
1995년 송광사 서울분원으로 등록한.,길상사
원래 이곳에는 대원각이라는 요정이 있던 곳.
삼청각과 함께 성북동 요정 중 이름 날리던 곳.
대원각이 길상사로 다시 태어나게 된 데는 사연이 있다.
길상사가 있는 곳은 성북동에서도 중심지라고 할 요지다.
주위에 여러 나라 대사관저나 부잣집들이 연이어 있는 곳
위치로 본다면 서울 성곽 쪽에 치우친 삼청각보다 못하지 않다
1987년 땅과 건물을 법정스님에게 기증을 제의했던., 김영한 보살.
그리고 그 약속을 지켜 절이 들어선 자리는 원래.,대원각 요정이었다
요정이 절로 바뀌었지만 원래 모습을 상당부분 그대로 유지.
그래서, 길상사에 들어서면 번듯한 후원 대갓집에 간., 느낌
정문을 지나면 울긋불긋 채색된 전각 대신
나무의 결이 그대로 살아있는 기둥과 서까래
절의 중심인 극락전도 소박하다는 느낌이 든다.
극락전 뒤 길상선원이나 스님들이 거처하는 요사채는 더욱 수수하다.
특히 소나무나 벚나무 대나무 그늘에 방갈로처럼 자리 잡은 요사채들
겨우 비바람만 가릴 수 있을 정도로 단출해 마치 산사에 온듯 여겨진다.
절 뜰에 온갖 꽃나무나 산야초가 자라고 있어
마음을 정화하면서 자연공부까지 할 수 있다.
극락전 앞마당의 수양 회화나무
뒤편 석축을 장식하고 있는 영춘화.
수련원인 설법전 옆에 성모 마리아를 닮은 관세음보살
천주교 신자인 작가가 조각을 했다는 얘기가 들린다.
이 절의 행사에 신부나 수녀 등 천주교 성직자들이 자주 참석
종교적 갈등이 자주 표출되는 시대에 종교를 초월해 참선을 추구
한편 길상사는 <;침묵의 집>;이란 명상공간을 주간에 제공하고 있다.
삼청터널에서 성북동을 거쳐 정릉으로 이어지는 배밭길에 인접
삼선교(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에서 성북동 성당 옆 선잠단지길
주위엔 일제 때 만해 한용운 선생이 살던 심우장을 비롯한., 역사 유적지.
맛집 성북동에는 이름 있는 전통 한식집이 여럿 있다.
또 성북동메밀수제비를 비롯한 수제비나 칼국수 분식집,
갈비 닭요리 음식점들도 있어 취향에 따라서 고를 수 있다.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
범종각을 비켜서서 설법전이 위치.
법회가 있는지 댓돌에 신발들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여인들의 찬불가가 바람에 나는 풀씨처럼 낭랑하게
울려 퍼져 메마른 마음 한켠에 비집고 들어와 앉는다.
극락전 뒤로 길상선원과 적묵당이 위치.
적묵당에서 보살 여럿이 연등을 만든다.
되돌아 나오는 길 옆으로., <;침묵의 집>;.
<;길상사 극락전>;
당대 최고의 요정을 운영하던 김영한 할머니
예전에는 술자리 노랫소리가 질펀했던 대원각
이제는 바람소리, 풍경소리, 청아한 독경소리 뿐.
<;길상사 능소화>;
극락전과 스님들이 수도하는 거처 사이에 기와문
그 위로 탐스러운 능소화가 아름답게 피어나는 문
<;관세음 보살상>;
길상사를 기부한 김영한 할머니 법명은.,길상화(吉祥華)
젊은 시절 시인 백석(白石)과의 소설 같은., 러브 소토리.
서울에서 태어난 김영한은 열 여섯살에 집안이 몰락하자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스스로 한성 기생 ''眞香''이 되었다.
가곡과 궁중무를 배워 권번가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잡지에 수필을 발표하며 미모에 시와 글, 글씨, 그림,
춤, 노래 등 다재다능한 기생으로서 명성이 자자했다.
스물 세살. 영한은 흥사단과 조선어학회에서 활동했던
스승 신윤국의 도움으로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하지만 스승이 투옥됐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해
함흥감옥을 찾아가지만 면회를 거절당하게 된다.
하여 신지식 여성에서 다시 기생의 길을 택한.,그녀
함흥기생이 되면 지역유지의 도움으로
스승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이 때 시인 백석과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된다.
김영한 보다 네 살 더 많았던 백석은 일본 유학을 마치고
함흥 영생여고 영어교사로 있다 우연히 만난.,기생 김영한.
<;시인 백석>;
백석은 첫만남에서 그녀의 손을 잡고 다짐한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이별은 없을 것”
하지만 백석 집안에서 아들이 기생에게 빠져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다른 여자와 결혼을 시키게 된다.
그러나 결혼식날 밤 집을 빠져 나온 백석은
영한에게 달려와 만주로 달아나자고 설득하지만
영한이 거절하자 백석은 1939년 만주로 떠나게 된다.
이것이 두 사람 사이에 영원한 이별
백석은 만주를 유랑한 뒤에., 광복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이미 그녀가 떠난 후
그녀가 서울로 돌아간 뒤였기에
만날 수 없었고 그것이 영영 이별
백석은 그후 북한 체제 속에서 핍박을 받으면 기구한 삶을 살게된다.
늘 사랑과 고향 같은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에 관심이 있었던 그에게
정치이념은 의미가 없었고 당성이 부족하고 늘 사랑타령이나 하는 시인
백석은 북한 체제에서 어떤 대우를 받았을까?
백석은 1950년대 사망한 것으로 잘못 알려졌지만
최근에 1990년대 중반까지 살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백석을 평생 그리워한 영한은
백석의 생일인 7월 1일이 되면
하루동안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
<;김영한 기념비>;
그리고 성공해 당대의 요정인 대원각을 운영
1997년 2억원을 출연 <;백석문학상>;을 제정했다.
같은 해 7000여 평의 대원각 대지와 건물 40여 동 등
1천억원대 부동산을 법정 스님에게 시주해 길상사 설립
김영한 보살
성북동 길상사 <;침묵의 방>;은 하루 이용객 600 명
참선수행을 하는 <;시민선방>;은 1500 여 명이 찾는다.
수녀들도 즐겨 명상하는 길상사는 대체 어떤 절일까?
이곳은 삼청각 청운각과 더불어 3대 요정인 대원각 터.
우리나라 3대 요정이 위치한 곳은 공교롭게 청와대 인근.
우연의 일치일까? 아니면, 정치권력 심장부와 함수관계일까?
조선시대 왕이 민정시찰을 나갔다가 쉬어가던 기방.
조선시대 궁궐기생 소춘풍과 성종과의 몰래 한 사랑.
우리나라의 3대 요정은 베일에 가려진 안가와 같았다.
주지육림의 바다이고, 밀실정치의 총본산이었던 대원각,
부정과 협잡과 야합의 상징이었던 7000 여평 요정 대원각
드넓은 땅과 숲 속에 40동의 건물을 자랑하고 있었던 요정.
국내 최대 요정인 대원각의 주인은 김영한(金英韓) 할머니.
1987년 김영한 할머니는 설법차 LA에 온 법정 스님과 첫 만남.
이 자리에서 김영한 할머니는 대원각을 시주하려는 뜻을 밝힌다.
그러나, ''무소유''를 화두삼아 살아온 법정스님은 정중하게 사양.
이때부터 10 여년간 김영한 할머니와 법정스님 간 기이한 실랑이.
"제발 제 시주를 받아주십시오, 스님."
"나는 그 시주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싯가 천억원 대 재산을 조건 없이 시주하겠다는 김영한 할머니
''받을 수 없다.''는 법정스님의 끈질긴 실랑이는 10년간 되풀이
아마도 이런 기이한 실랑이는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 아닐까?
결국, 김영한 할머니가 10년 만에 두 손을 들며 실랑이는 끝났다.
대원각을 대한불교 조계종 송광사 분원으로 등록 후, 등기를 이전
1996년 5월 20일에 대원각은 송광사 재산일 뿐, 법정스님과는 무관.
여기에 법정스님을 따르는 불자들의 정성과 신심이 모아졌다.
하여, 기존 건물을 개보수, 새로운 사찰인 길상사가 태어났다.
지리산 자락 거림 도장골 입구에 하계 휴양소..길상사.
1997년 12월14일 길상사 개원식에 김수환 추기경이 참석
이날 길상사의 회주(會主) 법정스님은 개원 인사말로 다짐.
“저는 이 길상사가 가난한 절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절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안으로 수행하고 밖으로 교화하는 청정도량.
진정한 수행과 교화는 호사스러움과 흥청거림에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이날 법정스님은 김영한 할머니에게 길상화 법명을 주고
아울러, 108 염주 한 벌을 손수 할머니 목에 걸어주었다.
천억 재산을 시주한 보답으로 목에 걸린 108 염주 한 벌.
법정스님이 목에 걸어준 염주를 만지고 또 만지던 할머니.
“내가 평생 일군 터에 부처님을 모셔 한없이 기쁩니다”
1년 후인 1999년 11월13일 오후 길상사 경내를 마지막 산책.
"나 죽으면 화장해 길상사에 눈 많이 내리는 날 뿌려주세요.”
다음날인 11월14일 108 염주 한 벌을 목에 건 채 83세에 운명.
12월14일 거림 길상사에 눈 내리던 날, 스님들이 재를 뿌려준다.
그녀의 육신은 한줌의 재가 되어 사라졌지만 그 영혼은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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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향기롭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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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길상사의 수식어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주차장 거의 모든 자동차 유리창 위에 연꽃 스티커
따뜻한 차 한 잔, 부담스럽지 않은 침묵, 고요한 산책.
반나절 여행으로 서울 도심에서 세 가지를 즐길 만한 곳.
성북동의 조용하고 큼지한 주택 사이에 자리 잡은 길상사.
세속에 있으나 세속적이지 않은 사찰로 알려진 길상사.
일주문을 들어서는 순간 깊은 산사의 고요함이 있는 곳.
요정 대원각 시절의 낡은 소슬대문이 지금 길상사 일주문
건물의 서까래가 썩고 기왓장이 깨져 지붕을 뒤덮은 천막
사천왕문도 해탈문도 없지만, 설법전 앞에 가녀린 보살상
이 보살상은 가톨릭 신자인 조각가 최종태씨가 만든 작품.
울긋불긋한 단청도 없는 길상사는 언제 들어와도 편안하다.
그래서 그런지 길상사 경내에서는 수녀님들도 만날 수 있다.
수백년 된 느티나무 고목 아래 종각 옆 차 마실 수 있는 다원
''작은형제 수도회'' 수사님들이 길상사에 부할절달걀을 선물
12월 중순 길상사의 프랭카드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합니다.’
수녀님들은 경내만 산책하지않고 길상사 ''침묵의 방’도 애용.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명상에 잠길 수 있는 ''침묵의 방’
캐돌릭 수녀님들은 과연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느꼈을까? ‘
사랑의 씨튼 수녀회’의 한 수녀님은 그 소감을 이렇게 남겼다.
“님의 빛으로 빛을 봅니다.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는군요.
정말 편히 쉬다 갑니다. 감사해요.”
요정 대원각을 사찰로 바꾸는 개보수 작업에만 적지 않은 비용
그래서 길상사는 현재 개보수 비용을 빚으로 짊어진 가난한 절.
대웅전, 관음전, 사천왕문, 해탈문도 없고, 석탑 하나도 없는 절.
그런데도 개원 2년 6개월 만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는 절.
법정스님의 법문이 있는 짝수 달 셋째 일요일의 가족법회
천 명에서 이천명에 이르는 인파가 몰려 그야말로 인산인해.
길상사에 가면 유명인사들을 심심치 않게 만나게 된다.
요일 별로 당번을 정해 자원봉사하는 ''보현회'' 회원들.
기업체 사장 부인, 중학교 여교장, 공직자 부인에서 교사,
포장마차 주인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여성들이 봉사활동.
길상사 법회 날에는 길목 어귀에서부터 나이 지긋한 남자들
교통정리, 주차관리, 사찰 안내를 도맡아 하는 거사림회 회원
기업체 사장, 공직자, 의사, 교사, 전문직 종사자 등 각계각층.
특히 수련생들은 끼니때 먹기 전에 오관게(五觀偈)를 독송한다.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고
내 덕행으로는 받기가 부끄럽네
마음의 온갖 욕심을 버리고
몸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
도업을 이루고자 이 공양을 받습니다.”
음식을 먹을 적마다 이 게송을 외우면서
뼈저리게 자신을 되돌아보았다는 고백들.
길상사에는 오늘도 끊임없이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권력을 탐하지 않고 분에 넘치는 부를 넘보지도 않으며
허황한 영예를 쫓지도 않는 평범한 사람들, 착한 사람들.
누가 오라고 부르지도 않고, 누가 가라고 떠밀지도 않건만,
그들은 한결같이 하나 둘 ''맑고 향기로운'' 길상사를 찾는다.
예전에 고기 굽는 냄새 진동했던 대형 음식점 대원각(大苑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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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까지 주지육림 국내 3대 요정으로 알려진 대원각.
음주가무 풍류객들이 드나들던 출입문은 그대로 일주문
''금실''과 ''은실''이 들어 있던 중앙 신관은 법당(극락전)
대원각의 오른쪽 대연회장 ''송실''은 설법전으로 꾸며졌다.
경비실 겸 운전사 대기실로 쓰였던 출입문 옆 팔각정은 종각
대원각의 물레방아가 있는 계곡 옆 별채 「특실」은 스님 선방
김영한 할머니가 6·25전쟁 중 당시 6백 50만원에 터를 매입
건물들을 앉혔을 때 법정은 출가 3년 전, 전남대 철학과 학생.
대원각의 주차장과 테니스장 자리에 언젠가 대웅전이 들어설 곳.
지난 10년 갈비 굽는 연기가 피어올랐고 주지육림 터였던 대원각.
김영한 보살 장례식의 상주 호스티스만 2백명 넘었던 고급 사교장.
승속일체(僧俗一體)의 가람 대들보마다 아직도 배어있는 고기 냄새.
진흙탕에서 연꽃이 피어나듯 사찰로 뒤바뀐 옛 요정 대원각.
이 터가 오늘날 길상사를 있게 한 것은 믿기 어려운 과거지사
''길상화 보살''은 생전에 수십년 전을 이렇게 회고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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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이 부근을 지나치는 일이 있었지요.
지금처럼 주변에 저택들이 있던 때가 아니었어요.
그냥 산중이었지.
호랑이가 나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
전란 중에 켈로부대가 주둔할 때는
무슨 산적 소굴 처럼 으시시했지요.
나는 이 터가 첫 눈에 마음에 들었어요.
포근하고 마음이 턱 놓이고…
이런 곳에 내가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돈이 있고 없고를 떠나,
그냥 끌리는 거였어요.
말로는 참 표현하기 힘든 그런 마음의 조화였어요.
내 첫 남자를 만난 이래 처음으로 경험하는 이끌림.
신기한 일이라고 할 밖에요.
그로부터 몇년후 우연한 기회에
그 터의 주인이 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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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정(料亭)이란 ''요리집’이라는 뜻의 일본식 표현방식이다.
즉, 대원각은 우리나라에서 일본식 요정의 선두 주자였던 곳.
구한말 기생이 등록제에서 허가제로 바뀌며 기생청 대신 권번
권번에서 기생들을 교육시키고 관리하였으며 세금을 부과했다.
하여, 기생에게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직업화와 양성화를 유도.
그 후, 일제 강점기에도 존속되었다가 2차 대전 막바지에 폐지.
권번에서 운영하는 기생집들을 일본인들은 요정이라고 불렀고
그 이후 기생집 또는 방석집, 고급 술집의 대명사로 바뀌었다.
해방 후 6·25와 5·16을 거치면서 권번기생들은 없어지고
대신 접대부를 고용해서 고급상차림으로 유흥업을 하는 업소
요정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군사정권 시절의 요정정치.
과거 중앙정보부를 비롯한 고위관료들이 요정에서 국정을 논의
흔히, 밀실정치(요정정치)란 고위급 정부관료들의 연회장소이다.
비지니스를 위해 접대 공간인 룸싸롱도 현대사회 정경유착의 산실.
80년대 말 삼청각, 청운각과 더불어 3대 요정이던 대원각.
대원각이 사찰이 되기 전까지는 요정에서 음식점으로 탈바꿈.
그 때 이미 김영한 할머니는 대원각을 시주할 마음을 굳힌 듯.
가난한 탓에 부실한 신랑에게
몸 팔려 시집 간.. 15살의 미순.
그녀가 우물가에서 빨래하는 사이
우물에 빠져 죽었던 부실한 남편.
시어머니의 고된 시집살이.
눈물이 마를 날 없었던 미순
그녀 스스로 선택한 ''기생의 길''.
바람에 달 가듯 떠돌던 김삿갓 같은 백석.
기생이 된 여인 가련과 운명적인 첫 만남.
22 나이에 첫 사랑을 느낀 가련
사랑에 빠져들고 백석은 떠난다.
그후, ''백석''과는 남북 분단으로 이룰 수 없는 사랑.
통일이 되어 그가 돌아올 날만 기다리며 혼자 산 그녀.
백석이 돌아올 날 고대하며 모은 전재산을 시주하고 운명.
김영한 보살은 가난때문에 기생이 되어 22살에 운명적인 사랑,
그녀가 사랑했던 남자는 오직 한 사람, 월북 시인 백석(白石) 뿐.
하지만, 남북의 벽에 가로막혀, 이룰 수 없는 사랑으로.. 가슴앓이.
''사랑의 슬픔을 잊으려 평생 재산 모우는 일에 전념.''
혹시, 백석 그가 돌아올 날만 손꼽아 기다렸던 그녀
다시 만날 그와 함께 행복한 여생을 보내려 했던 그녀.
''인생사 공수레 공수거''를 실천후 빈손으로 돌아간 그녀.
1987년 대원각을 법정스님 통해 기증할 뜻을 밝혔던 그녀.
1997년 12월 개원법회에 김수환 추기경 外 4천 인사 참석.
1999년 석가모니불 완공 즈음 그녀는 1999년 11월 14일 별세.
김영한 보살에게 ''길상화''라는 법명을 내리고
108 염주를 김영환 보살 목에 걸어준 법정스님.
“내가 일군 터에 부처님을 모셔 기쁩니다”
그말을 하면서 소녀처럼 좋아하던 김영한 보살.
1년 후인 1999년 11월13일 길상사 경내에서 유언.
“나 죽으면 화장해서
눈이 많이 내리는 날에
길상사에 뿌려 주세요”
삼장면 거림 도장골 입구 지리산 자락.
거림은 세석평전으로 오르는., 지름길
''자빠진 골(엎어진 뜰)''에 있는.,길상사
1999년 11월14일 108 염주 한벌 목에 걸고 83세로 운명.
200 명의 호스테스 상주들의 애끓는 통곡 속에 장례 절차.
1999년 12월14일 오전, 눈내리는 길상사에 뿌려진 그녀 유골.
...............법정 스님(66)은 수필집 <;무소유>;에서 ....................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얽혀 있다는 것"임을 깨닫고,
"나는 하루 한가지씩 버려야겠다"고 다짐했다.
버리는 것은 그만큼 어렵다.
버린다는 것은 포기하는 것과 달리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갖지 않게 되는 순간이 바로 온 세상을 갖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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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 당신은 누구십니까? - 도 종환.
강으로 오라 하셔서 강으로 나갔습니다
처음엔 수천개 햇살을 불러내어 찬란하게 하시더니
산그늘로 모조리 거두시고 바람이 가리키는
아무도 없는 강 끝으로 따라오라 하시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숲으로 오라 하셔서 숲속으로 당신을 만나러 갔습니다
만나자 하시던 자리엔 일렁이는 나무 그림자를 대신 보내곤
몇날 몇밤을 붉은 나뭇잎과 함께 새우게 하시는..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
고개를 넘으라 하셔서 고개를 넘었습니다.
고갯마루에 한 무리 기러기떼를 먼저 보내시곤
그 중 한 마리 자꾸만 뒤돌아보게 하시며
하늘 저편으로 보내시는 뜻은 무엇입니까?
저를 오솔길에서 세상속으로 불러내시곤
세상의 거리 가득 물밀듯 밀려오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났단 사라지고 떠오르다간 잠겨가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상처와 고통을 더 먼저 주셨습니다 당신은
상처를 씻을 한 접시의 소금과 빈 갯벌 앞에 놓고
당신은 어둠속에서 이 세상에 의미 없는 고통은 없다고
그렇게 써놓고 말이 없으셨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저는 지금 풀벌레 울음으로도 흔들리는 여린 촛불입니다.
당신이 붙이신 불이라 온몸을 태우고 있으나
제 작은 영혼의 일만팔천 갑절 더 많은 어둠을 함께 보내신
당신은 누구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