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ving daily/오늘의 도서

온 삶을 먹다 - 웬델 베리 지음

나 그 네 2011. 10. 30. 12:23

늙은 농부의 경고 "스티브 잡스, 네가 꿈꾼 세상은…"

[변방의 사색] 웬델 베리의 <온 삶을 먹다>

 

컴퓨터의 사용이 새로운 생각이라면,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더욱 새로운 생각이다. (웬델 베리)

먼저, 스티브 잡스의 명복을 빈다. 그는 비범한 한 생애를 살다간 인물임에 분명하다. 무엇보다 나는 그가 췌장암을 발견했을 때 수술을 거부하고 혼자 힘으로 병을 다스리려 했던 그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 많은 이들은 이를 두고 이해할 수 없는 신비주의적 맹신이라고 깎아내린다. 그러나 나는 생각이 다르다.

제 몸을 열어 칼을 대고 거기에 기계적 화학적 처방으로 몸을 다스리려는 시도를 싫어했던 인간적 자존감, 예측 가능한 처방을 거절하고 스스로 불확실한 시도에 목숨을 내맡김으로써 찾아오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안고서 이어간 그의 노력들은 그가 일구어낸 기술적 혁신만큼이나 존중받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많은 이들은 그를 천재라고 떠받들지만, 실은 그를 하나의 '뛰어난 기계'로 보고 있는 것이다. 수술을 받고서 더 오래도록 살아남아서 새로운 물건을 만들어내도록 운명 지워진 그런 '창의적인 기계' 말이다. 이들은 스티브 잡스가 '천재'이기 이전에 병과 대화하며 서서히 죽어갈 권리를 가진 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무시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당연하게도 나는 잡스에게 바쳐지는 헌사들에 이의가 있다. 그는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 것이 아니다. 이번에 출간된 그의 공식 전기에서 스스로 고백하듯, 그의 작업은 "먼저 이루어진 성과들 위에서 몇 가지를 덧붙여 놓은"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산업 기술 문명의 최첨단의 자리에서 그 옷들을 갈아 입혀 온 디자이너인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는 이 먼저 이루어진 성과들과 거기에 뭔가를 덧붙이는 일들이 대체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이런 생각도 해 보았다. 스티브 잡스는 손가락으로 열고 닫는, 조그만 유리창 속의 세상을 가상이 아니라 실재로 여기게 만드는, 일종의 '환영(幻)影)'을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하는. 그 환영 속에서 열린 세상은 과연 어떤 곳인가. 만인이 만인을 네트워크로 긴박해 놓은 원형 감옥이 아닌가. 우리는 스티브 잡스가 내놓은 도구로 인하여 더 깊이 긴박될 테크놀로지에 대한 종속과 노동력의 착취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야 한다.

나는 가끔 중세의 교부(敎父)들이 스티브 잡스가 세상에 내놓은 물건들에 대해 어떻게 평가할지를 생각해본다. 엄지와 검지로 이미지를 그러모았다가 펼쳐 놓는, 미켈란젤로의 그림 <천지창조>를 떠올리게 하는 이 행위에 대해서 말이다. 그들은 이를 두고 인간이 신을 흉내 내는 것으로, 인간으로서는 해선 안 될 '교만(hubris)'의 행위로 해석하지 않을까.

요컨대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것이다. 잡스가 추구한 첨단의 기술은 인간은 먹는 존재라는 사실, 그 먹을거리가 끊어지면 한순간도 생존할 수 없다는 존재 조건을 한 치도 수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첨단의 기술 문명이란 실은 이렇게 허망한 것이 아니겠는가.

스티브 잡스의 정반대 편에 웬델 베리라는 미국의 농부가 있다. 팔순이 다 된 고령이지만, 여전히 농사와 문필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잡스가 실리콘밸리의 총아로 전 세계의 각광을 받으며 수십 년간 내달려오는 동안, 베리는 1960년대 이후로부터 고향 켄터키 주로 되돌아와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43세이던 1977년에는 대학 교수직까지 사임하고서 전통적 방식으로 지금껏 농사를 지어왔다. 그리고 근대 산업 기술 문명을 날카롭게 해부하는 에세이와 땅과 고향의 삶을 그린 문학 작품들을 발표해온 저명한 작가이기도 하다.

<녹색평론>의 독자라면 <녹색평론 선집>에 실린 '나는 왜 컴퓨터를 안 살 것인가'의 글쓴이로 웬델 베리를 기억할 것이다. 나는 그의 글이 담고 있는 명확하고도 근본적인 통찰에 반했고 <녹색평론>에 드문드문 발표되는 그의 에세이들을 지금껏 감탄하며 읽어왔다.

그리고 이번에 웬델 베리의 농업에 관한 에세이와 문학 작품을 발췌해서 모아 놓은 <온 삶을 먹다>(이한중 옮김, 낮은산 펴냄)를 골똘히 읽으며 나는 한국 사회에 대해서, 그리고 나 자신의 삶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이 책에 담긴 그의 목소리는 좌우를 막론하고 온 사회에 울려 퍼지는 창의와 혁신이 가지는 진정한 의미를 되물어야 할 시점에서, 후쿠시마 사고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 4대강 사업 완공과 1퍼센트의 독점에 대한 전 세계의 항의가 울려 퍼지는 이 시점에서, 뭔가 끄트머리를 향해서 그리고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향해서 움직여가는 이 시점에서 가장 중요하게 이야기되어야 할 진실을 담은, '경'(經)의 가치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 <온 삶을 먹다>(웬델 베리 지음, 이한중 옮김, 낮은산 펴냄). ⓒ낮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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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이 그럭저럭 잘 굴러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문제가 있으되 어떻게든 될 거라고 믿고 있는 이들과 웬델 베리를 이야기할 수는 없다. 뭔가 근본적인 데서부터 잘못되었다고 느끼고 있는 이들, 이 세상에 넘쳐나는 야만과 비참, 불의와 불공평에 분노하는 이들, 이들이 베리를 골똘하게 읽는다면, 그들에게 이 책은 복음이 될 것이다.

나 또한 어떤 시점까지는 노동에 대한 자본의 착취가 이 세상을 구성하는 가장 근본적인 모순이라고 배웠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웬델 베리는 생각이 다르다. 그는 인간이 농토에서 공장으로, 고향에서 타향으로, 시골에서 도시로 내몰리던, 그러면서도 그것을 '해방'이라고 불리기를 강요당했던 어떤 순간에서부터 우리의 삶이 근원적으로 뒤틀렸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예화가 있다. 웬델 베리가 열일곱 살이던 1950년 어느 날, 트랙터 위에서 느린 걸음으로 밭을 가는 두 마리의 노새를 보며 '왜 저리 느려 터졌을까'며 골을 내던 기억을 끄집어낸다.

할아버지의 사후 4년, 그의 손자가 노새가 '느리다'며 갑자기 골을 냈다는 사실은 역사가 어떻게 흘러갈지를, 즉 트랙터는 남고 노새는 가리라는 것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 나는 기계와 생명의 경쟁을 목격하고 있었고, 그 승자는 기계일 수밖에 없음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 아침 밭에 도착한 노새들이 농사의 역사에서, 그리고 그 농장 자체에서 왔다는 사실은 알아보지 못했다. 반면, 트랙터는 거의 정반대의 역사에서, 그리고 농장의 범위를 넘어서는 머나먼 과정을 거쳐 밭에 왔다는 사실은 알아보지 못했다.

노새는 결국 트랙터에 패배했다. 그리하여 기계와 기업만이 살아남게 되었다. 농민은 '땅의 청지기'이자 '신의 신비를 분배하는' 존재가 아니라 기업의 농식품 유통 시스템의 가장 말단에 자리 잡은 노동자가 되었다. 기계와 기업이 요구하는 규모와 획일화를 따르지 못하는 소농은 몰락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은 도시로 가서 노동자가 되거나 실업자로 도시 빈민으로 떠돌게 되었다. 이제 농업은 기계와 유독한 화학 물질이 지배하게 되었고, 이웃과 어머니 대지와 고향의 의미도 사라졌다.

인구의 4퍼센트에 불과한 농민이 전체 인구를 먹이는 것이 가능해진 이 시스템은 겉으로는 꽤 효율적으로 보인다. 고되고, 성가신 농업 노동을 거세시켜버린 이 공장 시스템은 그래서 대단한 진보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웬델 베리는 이 공장이 겉보기엔 꽤 질서가 잡혀있는 것 같지만, "급속도로 확대되어가는 이 세계의 무질서를 대표"하며, 사실상 재앙이라 말한다.

베리는 농사가 아니라 "채굴"이라고 표현한다. 하나의 예만 들어보자. 땅의 영양분이 먹을거리와 함께 도시로 나가고, 하수와 음식물 쓰레기가 되어 결국 바다에 버려진다. 농토로 되돌려지는 것은 없다. 당연히 땅은 고갈된다. 이를 유예시키기 위해 화학비료로 지력을 붙들어두지만, 결국 사막화만 재촉할 뿐이다.

이제 우리의 먹을거리는, 삶은, '돈'과 '석유'와 '기계'와 '규모'가 지배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인간이 견뎌내야 하는 전례 없는 외로움이다. 햄버거 한 조각, 뜨내기 드난살이처럼 홀로 식당 구석에서 우걱우걱 씹어 넣는 밥 한 그릇, 어디서 왔는지, 누가 만들었는지 알 수 없는, 온갖 착색료와 향을 뒤집어 쓴, 유전자를 조작했는지 뭣으로 코팅을 했는지 알 수 없는, 자연의 모습은 하나도 담지 않는, 공산품에 다름없는 오늘날 우리의 먹을거리들.

먹을거리와 심신의 건강은 너무나 긴밀하다. 교사인 내가 보기에 확실히 오늘날 아이들의 정서는 안정되어 있지 않다. 거칠고 과한 행동들, 예민하게 폭발하는 정서들, 결핍된 주의력은 아이들의 생활환경뿐 아니라 상당 부분 아이들의 먹을거리와 관련이 있다고 본다. 포로 수용소, 혹은 지옥의 이미지를 차용한 공장식 사육으로 극심한 스트레스와 학대를 체험한 동물들도 영혼을 가진 존재들이다. 이들이 죽어가면서 인간을 얼마나 저주했겠는가. 그리고 이를 먹은 아이들의 영혼과 신체가 어떻게 건강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 우리가 바라는 것은 웬델 베리가 지적하듯, 사실상 '실업' 상태, 일을 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삶이다. 그 날을 위해서, 이를테면 은퇴를 위해서, 방학과 휴가를 위해서 우리는 회사를 다니고 학교를 다니며, 적금을 붓고, 주식을 한다. 그 날,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그 날을 위해서 말이다.

오늘날 우리의 집은 점점 모텔을 닮아 자연으로부터 격절되고, 오직 육신을 편리하게 쾌적하게 담아두는 보육기(保肉器)로 진화해간다. 인간과 집이 맺고 있던 영적 관계는 거의 사라졌다. 주방과 먹을 공간은 점점 주유소를 닮아 이미 조리된 음식물의 포장을 뜯어 몸에다 주입하는 공간으로 변해간다. 인생의 즐거움이란 별게 아니고, 무어든 먹는 일이든, 쉬는 일이든, 서둘러 경쟁적으로 해치워야하는 일이 되어버렸다.

마을은 사라졌고, 이웃은 사라졌다. 도시의 거리를 가는 이들에게 뒤에서 누군가가 '어이~'라고 부르면 열의 일고여덟은 성난 얼굴로 되돌아보는, 적의와 긴장에 찬 나날들이다. 웬델 베리는 농업이 사라진 사회가 겪어야 할 생태적 재앙을 말하기 이전에 우리가 이 세상을 산다는 것의 의미를 묻고 있다. 그것은, 나치의 수용소를 체험한 이탈리아의 화학자 프리모 레비를 흉내 내자면, '이것이 인생인가?'라고 표현할 수 있으리라.

낭비

우리는 지금 석유를 먹고 있다. 먹을거리의 생산과 유통의 전 과정에, 우리의 물질적 삶의 과정 전체에 석유가 관여한다. 그리고 석유로 만들어진 값싼 먹을거리가 실은 굉장히 비싼 값을 치르고 있다는 것도, 미래 세대의 몫을 강탈한 것이라는 사실은 이제는 널리 유포된 생태학적 상식이 되었다. 이것은 웬델 베리를 비롯한 일군의 지식인들이 이미 1970년대부터 지적해 온 사실이기도 하다.

석유 농업은 모든 것이 낭비다. 기계화로 인한 대규모 영농은 1년에 한 가지 작물만 재배하는 단작으로 귀결된다. 그로 인하여 가을과 초봄의 햇빛은 식물에 붙들어두지 못한 채 버려지게 되었다. 인간의 육체노동으로 발산되어야 할 에너지는 도시인의 뱃살에 실업자의 육체에 가둬지게 되었다. 가만히 두면 알아서 풀을 뜯어 먹고 살 수 있을 동물을 감금하고 그래서 그들이 가진 천부의 노동력을 낭비하고 있다. 그들을 후딱 살찌우기 위해 풀 대신 곡물을 먹이고, 대신 다른 인간들이 굶는다. 감금과 집중, 분리로써 성립한 지옥 같은 동물공장이 있다. 당장 금지해야 할 야만의 극치이지만, 전 세계적 관행이 되어버렸다.

결국 우리에게 재앙의 부메랑으로 돌아올 이 어이없는 변화는 어떻게 가능했던가. 모든 것을 기계의 영역으로 환원시켰기 때문이다. 동물을 영양분만 투입하면 필요한 단백질과 지방을 생산해내는 기계로, 농토를 작물을 생산해내는 공장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지금 이미 우리가 충분히 지켜보고 있는 중이다.

실로 오늘날 산업의 논리는 단순 무식하다. 재미난 일화가 있다. 웬델 베리가 일생토록 되풀이하여 읽었던 영국의 선구적인 농학자인 앨버트 하워드 경이 남긴 일화다. 하워드 경 부부가 인도에서 연구하던 시절, 쪽마름병이 퍼졌다. 15년 동안 엄청난 돈을 들여 곤충학, 균류학, 세균학 전공자들이 모여 연구를 했지만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그런데, 하워드 경이 그 원인을 찾았다. 장마로 물이 차서 뿌리가 썩어서 양분 부족으로 죽었던 것이다. 그들 전공자가 하워드 경처럼 농민들과 함께 직접 농사를 짓는 사람이었다면, 그래서 농토에서 벌어진 일을 몇몇 분야로 쪼개어서 파고들지 않고 농사짓는 사람의 시선에서 하나의 맥락으로 바라보았더라면 대단히 쉬웠을 이 일에 그토록 긴 시간과 엄청난 낭비가 자행된 것이다. 참으로 지성적인 것은 흙과 농토, 산물과 인간까지 포괄하는 시선, 말하자면 농민의 시선이다.

탐욕의 바깥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런 세상을 받아들였던가.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고만은 말할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이끌려 들어온 측면이 있다. 그러나 또 한편 육체노동, 시골살이, 가사 노동에서 해방되려는 선망 또한 강하게 작용했다. 강제와 자발성이 함께 작용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편입된 오늘날 산업 경제가 바깥에 있는 모든 기준과 윤리적 이상과 결별해버렸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내부에 있는 욕망들, 탐욕, 정욕, 식탐, 시기심, 어느 종교든 죄악으로 지목하는 이 덕목들이 오늘날 경제를 이끌어가는 가장 근본적인 힘으로 작동한다. 이것이 부추기는 생산과 시장의 확장이 진화를 거듭하여 환율, 유가, 주식 시장 지수 같은, 웬델 베리가 '종이 경제(paper economy)'라고 표현한, 그 가짜들이 실체를 함부로 농락하고 세상을 망가뜨려왔고 지금 세상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다. 그러면서도 몇 년마다 한 번씩 선거는 하고, 자신들이 뽑은 바대로 정치 지도자가 바뀌어가니 자신들은 꽤 괜찮은 민주 사회에 살고 있다고 착각들을 하며 산다. 모든 것이 이 종이 경제에 의해 식민화되어버려 제 힘으로는 옴짝달싹 못하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욕구란 그런 것이어서 그 안에 스스로를 제어할 힘을 갖고 있지 못하다. 결국 어머니의 회초리가 아이를 일깨우듯 외부에서 부과된 윤리와 도덕, 혹은 인간적 상식의 힘이 오늘날 경제를 새롭게 규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웬델 베리의 답은 간단하다. 우리들 각자가 '산업 경제, 석유 경제, 종이 경제'라고 부르는 이 사기 도박장을 떠나는 길밖에 없다는 것이다.

구체성과 민주주의

그러므로 웬델 베리의 제안은 먹을거리를 스스로 거두어 먹자는 것이다. 그랬을 때 우리가 자유로워진다는 것이다. 오늘날 일반적인 통념이란 경제 성장을 통하여 중산층이 두터워질 때 민주주의가 안정적인 궤도에 오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베리는 단호하다. 소농이 민주주의의 기반이라는 것이다.

중산층이란 우리가 지금 지켜보고 있듯이 세계 경제의 추이에 따라 끊임없이 등락을 거듭할 수밖에 없는, 그러면서 서서히 옅어지고 몰락하도록 구조화된 운명에 놓여 있다. 그러면서 부와 권력은 소수에게 집중된다. 땅과 자본이 소수에 집중되면 민주주의는 다만 정부의 형태에 불과하다는 베리의 진단은 정확하다.

지금 20대 80을 넘어 1대 99의 사회가 되어버린 오늘의 세계가 이를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웬델 베리가 존경해마지 않는 미국의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은 부유한 상공업자를 대표한 알렉시스 해밀턴이 연방은행을 창설하려할 때, 은행은 군대보다 더 위험하다면서 격렬하게 반대했다. 제퍼슨에게 민주주의의 참된 기반은 자립적 소농이었고, 그래서 그는 미국을 분권형 국가로 소농이 중심이 된 농업 국가가 되길 바랐지만, 좌절당했다.

토머스 제퍼슨이 옳았다. 해밀턴의 주장대로 경제 성장과 부국강병으로 온 세계의 참혹한 독재와 전쟁의 주역으로 내달려온 미국이 바로 지금 겪고 있는 모습을 보라.

이행의 가교

이런 이야기, 처음 듣는 소리는 아닐 것이다. 많은 이들의 답은 '그래서, 어쩌라고?'이다. 그러고는 '나는 농사 지을 생각이 없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겪은 바도, 배운 바도 없기 때문이다. 농업적 삶은 이미 이 세대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결국 소농 사회로의 전환을 강제하지 않으면 안 될 시기가 되었다.

조만간 도시 거주민이 세계의 절반을 넘어서게 된다. 누군가는 농사를 지어 이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만 놓고 봐도, 앞으로 최대 10년만 흐른다면 이제 농사를 짓는 인구는 사라지고 만다. 석유가, 소수의 농기업이 농사를 대신 지어줄 수 있을 기반도, 그 먹을거리를 수입해서 먹을 수 있을 여지도 점점 옅어지고 있다. 석유가 한계에 다다랐고, 표토 고갈 문제도 심각하다. 세계 경제의 추이가 또한 그렇다. 기후 변화 문제도 심각하다.

이제는 농업에 대한 지식도 농경적 삶에 대한 기억도 없는 세대가 버려진 땅에서 뭔가를 시작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살림을 되살리는 문제, 농업에 대한 만인의 책임 의식을 일깨워야 할 필요는 대단히 긴급하다. 정치 운동도 언론의 노력도 책임 있는 지식인의 노력도 교육자들의 노력도 모두 절실하다. 진보 정당은 농업적 의제를 중심에 걸어야 한다. 아이들이 농사를 배우고 농민의 삶을 당연으로 받아들이는 학교가 곳곳에서 만들어져야 한다. 그러나 이런 노력들은, 이 노력을 향한 기초적인 차원의 사실 관계를 점검해보려는 노력도 정말 놀라우리만치 찾아보기 어렵다.

스티브 잡스 같은 이들에 대한 한없는 숭모의 반대편에 정작 없어서는 단 한시도 지탱할 수 없는 것들을 실제로 '만들어내는', 인간에게서 가장 중요한 일에 종사하는 농민에 대한 모멸만 하늘을 찌른다. 이제는 다들 늙었고, 숫자로도 얼마 되지 않는 그들이기에 그렇게 함부로들 말하는 것이겠지만, 도가 너무 지나치다. 한미 FTA를 앞두고서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은 농민들을 두고 "다방에서 노닥거리면서 보조금이나 챙긴다"며 힐난하였고, 국회 외교통상위원장 남경필은 미국 대사 앞에서 "이제는 국회가 농민에게 저항할 용기를 내야 한다"고 용감하게 말한다.

예외적인 소수만이 성공하는 그 정도만큼 그 시스템은 실패한다는 베리의 금언을 새겨보자. 이제 99퍼센트가 실패하는 체제가 되었다. 말기적 상황이라는 뜻이다. 이 세상의 뼈대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거품을 걷어내고 화려한 옷을 벗었을 때 드러나는 구조, 그것은 우리 삶의 큰 졸가리이다. 먹고 사는 일, 먹을거리를 짓는 일에 주의 집중해야 하는 것이다. 결국 답은 농업과 농민에게 있다.

대안

웬델 베리가 상정하는 가장 이상적인 모델이 있다면 미국에 여전히 번성하고 있는 아미쉬 공동체이다. 개신교 재침례파의 일원으로 박해를 피해 신대륙에 정착한 이들의 후손인 이들은 여전히 공동체와 전통적 방식의 농사를 지키고 있다.

몇 년 전 그곳 학교에서 광기에 사로잡힌 한 외부인 남성이 끔찍한 총기 사고를 일으키고 자살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 사고로 죽은 아이들의 부모들이 그 남성의 부모를 찾아가 위로했다는 감동적인 일화를 전해주기도 했던 그 공동체이다. 그들이 지키고 있는 원칙을 함께 읽어보자.

1.가족과 공동체를 지킨다.
2. 이웃과 함께 농사짓는다.
3. 요리와 농사, 가사와 주택에 관한 기술을 이어간다.
4. 기술 이용을 제한하여, 이용 가능한 인력이나 태양광, 풍력, 수력 같은 무료 에너지원을 배제하지 않는다.
5. 농장을 작은 규모로 제한하여, 이웃과 의좋게 농사를 짓고 저출력 기술을 최적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한다.
6. 앞서 말한 방식들로, 비용이 일정 수준을 넘지 않도록 한다.
7. 자녀가 가족을 떠나지 않고 공동체를 지키며 살도록 교육한다.
8. 농사짓기를 실용적 기술이자 영적 수단으로 존중한다.


그는 말한다. 이런 사회로 전환해야 한다고. 그랬을 때 우리는 경영자, 주주 전문가, 정치가들에게 착취당하는 사회가 아니라 인간이 사는 사회가 될 것이라고.

잃어버린 것을 찾아서

나에게 성서를 가르쳐준 목사님은 윤동주의 시를 말씀하시며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라는 구절을 감동적으로 가르쳐주셨다. 우리들 인생의 의미 또한 실은 그러하다는 것이다. 거기에 이 시대의 의미를 덧붙여보면 어떨까. 우리의 시대 또한 잃어버린 것을 찾아야 하는 시대라고 말이다.

이 책 3부에는 웬델 베리의 작품에 등장하는 먹을거리와 관련한 몇몇 대목들이 발췌되어 실려 있다. 그의 소설 <그 먼 땅>에 나오는 앤트니 가족의 식탁 묘사를 보자.

프라우드풋 집안의 가족 모임은 유명했다. 그 즈음이면 충분히 오래 저장한 햄과 닭튀김과 그레이비, 두레종류의 생선, 뜨거운 비스킷 빵과 세 종류의 옥수수 빵, 감자와 콩과 구운 옥수수와 당근과 사탕무와 양파, 옥수수 푸딩과 익혀서 저민 토마토, 식초에 막 절인 싱싱한 오이, 서너 종류의 피클이 있고, 늦여름일 경우 멜론과 수박도 있으며, 각종 케이크와 파이, 과일 푸딩도 있고 우유와 커피도 넉넉했던 것이다. 그 시절, 냇가에 있는 너른 옥수수밭을 가진 프라우트풋 부부의 집은 위스키 맛이 일품이기로 유명했던 것이다.

백석의 시가 문득 떠오르기도 한다. 먹는다는 것은 먹을거리의 윤리학, 미학, 정치학을 합친 것보다 더 높은 자리에 있다. 우리가 잃어버린, 이 풍성한 전근대의 식탁들.

이야기를 조금 더 이어가보자. 이 연작 소설은 <엄숙한 소년>이라는 단편으로 이어진다. 이 프라우드풋 집안의 아들 톨은 노년임에도 아직 자식이 없다. 톨은 1934년 대공황기의 추운 겨울, 굶주린 부자를 마차에 태워주는데, 그들이 딱해서 식사라도 대접하고자 집으로 데려온다. 톨의 부인 미스미니는 이들을 환대한다.

"아이구, 어서 들어와요! 점심 함께 먹을 동무들이 생겼나보네! 얘, 어서 들어와서 몸 좀 데우렴!"

그리고 농가의 전통대로 성찬을 대접한다. 그러나 그들 부자는 전혀 웃지 않는다. 아직 몸과 마음이 얼어붙어 있다. 이 엄숙하고 잘생긴, 그러나 곤궁한 한 소년은 조금의 감정도 내비치지 않는다. 프라우드풋 집안의 아들 톨은 농민의 낙천성과 환대의 마음을 간직한 훈훈한 농민이다. 그는 소년을 억지로 웃겨보려고 버터밀크를 앞섶으로 쏟는 퍼포먼스를 한다. 그제야 얼어붙은 소년에게서 웃음이 터져 나온다.

소년은 목을 스토브 연통만큼이나 넓게 틔우려는 듯 크게 마음껏 웃기 시작했다. 누구한테 지독히도 간지럽힘을 당하는 소년의 웃음소리였다. 그 소리가 모든 걸 바꿔 버렸다. 미스 미니는 방긋 웃었다. 그러자 톨은 크고 호탕하게 웃었다. 미스 미니도 깔깔 웃었다. 다들 웃고 있었고, 미스 미니는 앞치마 자락으로 눈물을 훔쳐야 했다.

단숨에 이들은 친구가 된다. 농민들의 너그러움, 환대의 문화가 대공황기의 빈궁 속을 헤매는 두 부자에게 삶의 의욕을 불어넣어준다. 우리가 잃어버린, 언젠가 우리도 간직하고 있었던, 가장 아름다운 인간의 한 모습이다.

마무리

웬델 베리는 이렇게 말한다. "장소를 안다는 것,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삶, 인간과 동물에 자애롭고 훈훈한 기억과 유머, 흙에 뿌리박힌 삶과 그 장소를 알고 겪는 다는 것은 굉장한 인간적 힘이자 역량이 된다"고. 어쩌다가 우리는 이런 삶으로부터 멀어져버렸는지.

대안은 자발적인 것이다. 스스로 걸어 들어갔으니, 나오는 것도 자발적이어야 한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수없이 생각했다. 나는 농민의 삶을 살 수 있을까.

웬델 베리의 책을 덮으며 나는 가느다란 한숨을 쉰다. 가능할 것이다, 가능할 것이다, 라고 나는 스스로에게 암시를 준다. 그렇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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