旅行/아름다운 산하

[스크랩] 아름다운길 마장터

나 그 네 2012. 9. 28. 12:35

인제의 가보고 싶은 길... 샛령길 마장터

 



 

전국이 30도를 웃도는 폭염속에 물놀이를 가자고 보채는 아내와 아이들을 뒤로 하고 무언가 허전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길을 나섰다.


제주도의 올래길이나 문경의 문경세재길 처럼 지역을 상징하고 테마가 깃들어 있는 “누구나 한번쯤은 가보고 싶은 길”을 찾아서... 곰배령, 단목령, 조침령, 아침가리등등.  모두가 우리네 조상들의 삶과 애환이 녹아져 있는 좋은 소재이긴 하다. 오늘의 목적지는 안태희 선생이 일러주던 샛령길 마장터다.


최병헌 향토사 연구소장에게 전화를 걸어 마장터에 관한 자료를 부탁했으나 아직까지 관련자료가 없다고 한다. 하지만 가볼만한 곳이라고...


인터넷을 뒤져 마장터에 대한 기초자료를 수집했다.

신작로가 생겨나고 미시령길이 뚫리기 전, 영동과 영서를 잇는 최단거리 이동 통로이자  수백년, 수천년을 이어온 우리 조상들의 땀방울이 스며든 곳. 박정희 정권시절 무장공비 침투와 화전민 이주정책의 일환으로 30여 가구가 모여 살던 곳이 쑥대밭으로 변해버린 애환이 닮긴 곳. 지금은 백승혁씨와 정준기씨 만이 남아 마장터의 수백년 역사를 지켜내고 있다.


미시령 입구에서 펜션과 식당을 운영하며 살아가고 있는 김종선씨의 도움으로 마장터로 가는 들머리를 찾아냈다. 용대리에서 미시령 옛길을 오르다보면 왼쪽 편에 박달나무 쉼터가 나타난다.

 

 

▲ 창암

▲ 군부대 훈련장을 지나서

 

미시령 도적폭포에서 흘러내리는 계곡을 건너, 바위에 구멍이 뚫려있다고 해서 불리워진 창암이라는 바위를 오른편에 두고 군부대 유격장을 지나 말 그대로 샛길(샛령길)을 따라 오른다.

 

▲ 대간령~미시령구간의 출입금지 간판

 

그 옛날 우리네 조상들이 수 백년, 아니 수 천년 넘나들었을 샛령길.

계곡을 들어서기가 무섭게 쨍하던 하늘이 온통 숲으로 뒤덮이고 간간히 피고 진 들꽃들이 객을 맞이한다.

 

샛령길에 들어선지 얼마 후 하산하는 일행이 나타났다.

어디서 오셨소. 어디로 가십니까? 무얼 하러 마장터에 가려고 하십니까?

자기가 마장터의 주인인양 이것 저것 캐묻는다. 백승혁(54세) 씨다. 주인이 없어도 먼저 가서 기다리기로 하고 헤어졌다.

 

▲ 계곡주변으로 물봉선이 늘어서 있다.

 

자줏빛 물봉선이 계곡을 따라 소담스럽게 피어있고 골짜기마다 천년을 이어온 물줄기가 합수 되고 있다. 들꽃에 홀려 카메라 셔터를 정신없이 누르자니 이번에는 청설모 한 마리가 주인행세를 하려고 한다.


샛령길에 오른 지 30여분이 지났을 즈음, 누군가가 등짐을 지고 산에서 내려오고 있다. 짐작컨대 정준기(63세) 씨다.

 

▲ 정준기씨가 원통으로 향하고 있다.

 

며칠 동안 따놓은 싸리버섯, 밤버섯, 곰버섯등을 팔러 간다는 것이다. 정준기씨는 봄철에는 곰취와 고사리등 나물을, 여름에는 산약초, 가을에는 송이버섯, 능이버섯, 곰버섯, 싸리버섯등을 팔아 생계를 꾸려가고 있다고 했다. 정씨는 30분쯤 더 올라가면 마장터가 나온다고 일러주고, 원통 약초상회를 다녀 온다며 길을 재촉했다.

 

샛령길 정상에 다다르자 작은 돌무덤이 나타나고 곧이어 낙엽송 군락지가 펼쳐졌다. 한때 30여 가구가 넘게 살던 마장터에 정부가 화전민 이주시키고 그 자리에 낙엽송을 심었다고 한다. 

 

▲ 빽빽히 들어 선 낙엽송 길

 

낙엽송 군락지를 지나자 사방으로 오솔길이 나 있었다. 가장 많이 사람들의 흔적이 남을 길을 쫒아보니 지은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통나무집이 나타났다.

▲ 갈대에 가려진 백승혁씨의 집

▲ 낡은 책과 통기타, 쥐포,밀집모자...

 

주인을 불러도 대답은 없고 부엌 문은 휑하니 열려져 있다.

찻상위에 놓여 진 낡은 책과 통기타.  주인이 누군지 궁금해져 온다.

집 앞으로 펼쳐진 수백평의 억새밭과 신선놀음을 했을 법한 수려한 계곡, 전기도 들어 오지않는 곳에 가당치도 않는 태양광 시설...

 

▲ 이 험준한 골짜기에 태양광이라니?

▲ 정준기 할아버지가 약초를 캐며 기거하는 집

▲ 이미 자연과 하나되어 버린 백씨의 집. 세평 남짓의 텃밭이 보인다.

 

집주변을 한참 둘러보다 보니 갑자기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달려가 보니 기인 행세를 한 집주인 백승혁씨 일행이다. 이 깊은 산속까지 파란눈을 가진 여인네 네 사람이 찾아왔다. 자연치유와 웰빙, EM(유용 미생물군)등 마장터를 통해 무언가를 도모(?)하고자 하는 손님들이다.

 

 

▲ 백승혁씨와 함께. 지인들과 2003년도에 지은 새집

 

백승혁씨는 암울했던 박통(박대통령 통치시절), 전통시절 대학생의 신분으로 민족학교를 만들겠다는 신념으로 마장터에 들어오게 되었지만, 결국에는 빨갱이로 몰려 미국으로 도피, 유학생활을 하다가 김대중 정권하에서 16년만에 다시금 돌아 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백씨는 기회가 주어지면 마장터를 자연치유의 공간으로 만들어 보고 싶다는 속내를 내비쳤다.

 

 

▲ 대간령으로부터 내려오는 이 계곡을 기준으로 건너편이 고성이라고 한다.

 

백씨와 나는 자연인(?)으로 계곡물에 몸을 담그고 세상사에 대해 이야기했다. 백씨는 6년전인가 샛령길을 포장해준다는 말을 듣고 극구 반대했다며, 아마도 그때 샛령길을 포장했다면  살기는 편해졌을지언정 마장터의 의미는 많이 퇴색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백씨는 더불어 살아갈수있는 사람들이 모인다면 이제는 세상밖으로 나가겠다고 말했다.

 

▲ 이틀동안  이곳에 머물것이라는 방문객들.

 

핸드폰도 작동되지 않는 산촌, 몇 시인지 시간은 알수 없지만 허기가 돈다. 라면 한 그릇에 참외 한 조각. 그것으로 한 끼는 충분했다. 썩지않는 라면봉지는 쓰레기 규격봉투에, 썩는 과일 껍질은 땅속으로..., 이 산속에서도 백씨의 삶에는 원칙이 있었다.


기회가 닿으면 다시한번 찾겠노라는 약속과 함께 하산 길에 올랐다.

 

계곡 저편에서 줄무늬도 선명한 멧돼지 새끼 한 마리가 인기척에 놀란 듯 줄행랑을 치고 있다. 아마도 커다란 어미였으면 내가 먼저 걸음아 나살려라 줄행랑을 쳤을 게다.


세상은 아는 만큼 보이고 , 아는 만큼 고개를 숙이는 것이 아닌지...

가을 단풍이 물들면 사랑하는 이들과 다시한번 샛령길을 찾아야겠다.

 

-인제 인터넷신문 기사 -

 

 

마장터는 미시령 초입에서 시작되는 서쪽 들머리에서 한시간 거리인 작은 샛령 너머에 있다.    70년대 초반 화전민 이주 정책으로 정리사업 때 사람들을 내보내고 심었다는 낙엽송이 빽빽하게 시야를 가리는 곳부터가 마장터다. “여기가 마장터요.    저기는 주막이 있던 자리라고 하고 마방은 저쯤에 있었대요.  ” 샛령에 들어와 산 지 햇수로 8년이 됐다는 이천만(48)씨는 오가는 약초꾼들에게 들었노라며 약간의 내력을 들려준다.    마장(馬場)터란 이름도 원통장으로 향하던 마꾼들이 쉬는 주막이 있던 데서 연유된 것이다.  인근 산골 사람들이 그들에게 물건을 구하려고 모여들다 보니 자연스레 장이 서게 돼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땅이 비옥하여 농사가 잘돼 봄이면 종자를 구하기 위해 인근 농부들이 몰리던 곳이기도 했다고 한다.    “한 밭에 같은 종자를 몇 년 심으면 병도 많아지고 소출도 줄어요.   ” 도원리 전 이장도 종자를 구하러 이른 봄 녹지 않은 눈에 다리가 푹푹 빠지는 고갯길을 넘던 기억들을 끄집어 내놓는다.    마장터 종자는 소출도 많아 인근 농부들에겐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마장터에는 아직도 사람이 살고 있다.  지은 지 70∼80년이 됐다는 귀틀집은 굴피지붕 위로 비닐 천막이 얹어지고 그 위는 억새로 이은 초가가 또 얹혀 있다.  이런 집 세 채가 샛령으로 난 길에서 살짝 빗겨난 골짜기에 그림처럼 놓여 있다.    속초 사람인 전중기씨가 산다는 귀틀집에는 소나무를 깎아 만든 문패까지 걸려 있다.  겨울에는 이천만씨 혼자 집을 지키고 있지만 여름에는 개울가 움집에까지 나물꾼이며 약초꾼이 들어와 제법 사람 냄새가 나는 곳이라 한다.    미시령 길가 천막집에서 살며 버섯이며 약초를 직접 캐어 팔며 가끔 마장터로 넘어오는 영봉섭씨, 어쩌다 오가는 등산객들만이 이씨의 유일한 친구이다. 마장터를 지나 샛령 마루로 가는 길 곳곳에 널려 있는 집터들에는 흔한 깨진 기왓장 하나 보이지 않는다.    돌담의 흔적만이 이곳이 집터였다는 것을 말해줄 뿐이다.    “남을 게 뭐 있우, 기껏해야 굴피 아니면 너와였을 테고 벽이야 흙이 고작인데 벌써 바람에 다 날려갔거나 썩어 버렸지.   ” 옛 사람들의 집은 사람들이 떠나면 이내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해방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샛령 정상 성황당에서는 매년 인제군수와 양양군수가 성황제를 올렸더래요.   소까지 한 마리 잡고 크게 지냈어요.” 전 이장의 말마따나 마루에는 커다란 돌로 이뤄진 성황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옛 모습은 간데 없고 돌무더기는 여기저기 돌담을 짓느라 흩어져 있었다.    대간을 남북으로 이어 걷는 종주 산행에 나선 이들이 하룻밤을 머무느라 그랬을 것이다.    나뭇가지에는 온통 빨갛고 노란 표지기들이 바람에 춤을 추고 있다. 샛령 동쪽 사면은 지난 12월에 내렸던 눈이 그대로 쌓여 있었다.    경사가 급하고 오가는 이가 없는 탓에 길은 여기저기 끊어지기도 하고 갈지(之)자 굽이가 일자로 이어지기도 했다.    폐결핵 환자가 3년 동안 머물면서 병을 고쳤다는 찬샘은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는 일이 없다고 했는데…. 도원리 전 이장은 자신이 동행했으면 찬샘을 찾아 물 맛을 보여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간밤의 심한 바람에 쓰러지거나 부러진 가지들이 가뜩이나 스산한 겨울풍경을 더욱 을씨년스럽게 만들고 있다.    계곡은 온통 이끼가 뒤덮여 있고 낙엽은 무릎까지 쌓여 있다.   “봄이 오면 좀 나은데 요즘 누가 산에 올라가나.   ”불과 50여년 전만 해도 사람들이 빈번하게 오가고 인공 때는 공산당이, 전쟁이 끝난 뒤에는 국군이 후생사업을 한다고 나무를 베어냈다는 말을 믿기 어려울 정도로 숲은 우거져 있었다

 

용대 3거리와 알프스리조트 사이에 있는 물굽이골은 소간령의 줄기다.   미시령 북쪽의 신선봉과 마산 사이에 있는 계곡.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려 설피를 신고 다닌다는 흘리마을이 바로 옆에 붙어있다.  신선봉으로 이어지는 계곡을 따라 활엽수림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어 가을이면 단풍잔치가 벌어진다.  계곡에 들어서면 유리처럼 투명한 물길이 끝없이 이어진다.    산 정상과 계곡 초입의 표고차가 겨우 200m.  신선봉 등산로를 제외하고는 가는 길이 힘들지 않다.  마장터에 들어서면 억새지붕을 이은 귀틀집이 아름답다. 대간령에는 옛 주막터의 자취도 볼 수 있다. 단풍철에도 사람이 붐비지 않아 호젓하다.

출처 : 쪽빛하늘 그리고...
글쓴이 : 생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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