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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술국치 100년 기획 ① 메이지 일본의 ‘한국병탄 프로젝트’

나 그 네 2013. 3. 2. 18:35

경술국치 100년 기획 - 망국의 뿌리를 찾아 ① 메이지 일본의 ‘한국병탄 프로젝트’

[중앙일보]입력 2010.08.24 01:01 / 수정 2010.08.24 02:11

일본서 37년간 ‘정한론’ 무르익을 때 조선은 뭐했나 …
이토·야마가타 뒤엔 ‘암흑의 권력’ 겐요샤가 있었다

100년 전 일본은 두 개의 흐름으로 조선을 공략해 왔다. 하나는 공식 라인, 다른 하나는 비공식 라인이다. 공식 라인은 눈에 보인다. 정한론(征韓論)의 정신적 지주 요시다 쇼인의 두 제자 이토 히로부미와 야마가타 아리토모. 동지이자 라이벌인 두 사람은 공식 라인을 대변한다. 이토는 초대 총리를 포함해 총리를 네 번이나 지냈고, 일본군을 근대화한 야마가타는 이토에 이어 두 번의 총리를 지내며 조선 침략의 발판을 다졌다. 이들의 출신지는 일본 서부 야마구치현이다. 비공식 라인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일본 특유의 대륙낭인들이다. 그들은 정한론이 대두된 1873년부터 조선을 병합한 1910년까지 공식 라인에 앞서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서구로부터 일본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지킨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 역사 속 현장을 찾아갔다.

정한론을 둘러싼 메이지 정부의 논쟁 현장을 그린 일본 그림. 한국을 침략할 ‘적절한 시기’가 언제인가를 놓고 갑론을박이 전개됐다. 정한론이 등장한1873년부터 1910년 한국병합조약 체결까지 일본은 한국 병합의 밑그림을 하나하나 구체화했다. 『일본, 만화로 제국을 그리다』(한상일 지음)에서
#1. 후쿠오카 ‘겐요샤’

일본의 우익 정치 결사 겐요샤 회원들의 묘지.
16일 오후 일본 후쿠오카시 ‘겐요샤(玄洋社) 묘지’. 8월 중순의 뙤약볕이 강렬했다. 조금만 움직여도 옷소매 사이로 땀이 줄줄 흘렀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묘지 앞에 향을 태우며 절을 하고 있었다.

“묘 주인이 꽤 높은 사무라이 가문인가 봅니다. 후손들이 아직도 참배를 하는 것을 보니….”

30년째 겐요샤를 연구해온 이시타키 도요미(60·후쿠오카인권문제연구소 이사)의 말이다. 겐요샤는 일본 학계에서 인기가 없다. 속칭 밥벌이가 안 되기 때문이다. 후쿠오카 인근 기타큐슈대학에서 외교사를 가르치는 김봉진 교수는 “겐요샤는 일본인도 잊고 싶어 하는, 과거 강력했던 우익의 상징물”이라고 했다.

겐요샤는 일본 근대 우익의 거두 도야마 미쓰루가 1881년 창설한 정치단체다. 묘지 복판에는 가장 큰 크기의 도야마 무덤이 자리 잡고 있다. “도야마는 제2차 세계대전 전만 해도 많은 일본인이 존경하던 인물이었는데 오늘날엔 거의 잊혀진 존재지요.” 이시타키의 설명이다.

도야마는 평생 어떤 공식 직함도 갖지 않았다. 주요 정치활동의 막후에서 활약했다. 우치다 료헤이도 있다. 1905년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조선통감으로 부임할 때 개인 참모로 함께 온 민간인이다. 그 역시 아무런 직함이 없다. 그런 민간인이 어떻게 당대 최고의 실세 이토와 동행할 수 있을까. 우치다는 도야마의 후계자였다. 우치다는 일진회(대표적 친일단체)가 한·일 병합을 순종에게 건의하게 하는 막후 조정 역할을 했다. 흥미로운 게 있다. 도야마가 조선 개화파의 리더 김옥균, 중국 신해혁명을 이끈 쑨원 등 아시아의 개혁세력과 두루 인연을 맺었고, 또 그들을 지원했다는 점이다. 김옥균-도야마 사이에는 일종의 공감대가 있었다. 둘 다 서구식 개혁을 지향했다. 동시에 서양에 맞서 아시아를 지킨다는 범아시아주의를 주창했다. 하지만 당시 한국과 일본 사이엔 분명한 차이점이 있었다. 우리는 왕실에 대한 관념이 상대적으로 강했다. 근대적 국가관이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일본의 지식인과 정치인은 1870년대에 이미 입만 열면 동양 평화를 들먹였다.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 상황에서 일본의 살길을 찾는 가운데 나온 방책이었다. 조선을 침략하는 정한론도 동양 평화를 명분으로 삼았다. 특히 겐요샤는 조선 병합 프로젝트를 물밑 지원한 대표적 민간단체였다. 지금도 후쿠오카 도심엔 겐요샤 건물터 표지석이 남아 있다. 겐요샤 출신 인물의 동상도 곳곳에 서 있다. 100년 전 일본의 한국 병탄이 제국주의 정권과 군부에 의해서만 자행된 것이 아니었음을 웅변한다. 관·군·민이 합심한 총체적 프로젝트였던 것이다. 그들의 성공과 결실이 우리에겐 망국이고 설움이다.

겐요샤는 조선 병합의 비공식 라인이었다. 흔히 ‘대륙 낭인’이라고 불린다. 대륙 낭인을 연구해온 한상일 국민대 명예교수는 “낭인이란 떠돌이 사무라이 집단을 가리키는 용어다. 나쁘게 보면 폭력집단일 수 있지만, 일본 입장에서 보면 국가를 위해 혼신을 다 바친 민간외교의 첨병이었다”고 설명했다.

일본의 한국 병합은 치밀했다. 외국의 시선을 의식, 조선인이 자발적으로 병합을 요청하는 모양새를 만들어냈다. 도야마와 우치다 같은 대륙 낭인이 그런 임무를 맡았다. 그들의 암행은 여전히 잘 보이지 않는다. 한국 병탄의 강제성·불법성을 은폐하는 요소로 지금도 작용하고 있다.

후쿠오카=글·사진 배영대 기자



#2. 야마구치 하기

요시다 쇼인의 사설 학교인 쇼카손주쿠.
한·일 병합의 뿌리는 19세기 중반 일본 메이지 유신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메이지 유신의 발원지는 야마구치현의 하기. 시모노세키로부터 100㎞ 정도 거리다. 하지만 길은 생각보다 멀었다. 기차나 국도를 이용해야 한다. 한적한 국도를 자동차로 달렸는데 3시간이 훌쩍 넘게 걸렸다. 우리는 동해, 일본은 일본해로 부르는 바다 풍경이 스쳐 지나갔다. 도착해 보니 고즈넉한 시골이다. 메이지 일본의 중심 권력이 태동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하기는 제국 일본의 힘을 탄생시킨 모태다. 메이지 정권의 최고 설계자인 이토 히로부미가 이곳에서 성장했다. 일본의 군사제도를 만든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고향도 여기다. 야마가타로부터 가쓰라 다로와 데라우치 마사다케로 이어지는 근대 초기 육군의 실세가 모두 동향이다. 이토, 야마가타, 가쓰라, 데라우치는 차례로 총리를 지냈다. 한국인에게는 병탄의 원흉들. 하지만 일본에서는 메이지 국가 건설의 공신들이다.

이토와 야마가타의 관계가 각별하다. 그들은 한국 병합의 공식라인을 대표한다. 경쟁적으로 일본 근대화와 조선 침략을 이끌었다. 요시다 쇼인이라는 메이지 유신의 정신적 리더가 그들을 키웠다. 그가 세운 쇼카손주쿠(松下村塾)에서 둘은 함께 공부했다. 동지이자 라이벌이다. 요시다 쇼인의 생가와 쇼카손주쿠 입구에 ‘메이지 유신의 태동지’라는 커다란 입석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입장 마감(오후 5시)이 다가오는데도 쇼카손주쿠를 찾는 발길이 이어졌다. 요시다 쇼인은 정한론의 기초를 닦은 인물이다.

쇼카손주쿠에서 5분 정도 걸으니 이토가 살던 집과 나중에 도쿄에 지었던 것을 옮겨온 이토의 별장이 나타났다. 관리인이 정원의 석등을 가리키며 “메이지 천황이 이토 총리에게 하사한 선물”이라고 했다. 묻지도 않았는데 친절하게 가르쳐 준다. 자랑스러운 모양이다.

이토는 문관으로서 메이지 헌법과 관료제의 기초를 세웠다. 야마가타는 징병제를 비롯해 근대적 군대를 육성했다. 이토가 문관을 대표한다면, 야마가타는 무관을 대표한다. 둘 다 유럽에 유학했고, 그 경험을 일본 근대화에 활용했다.

이토와 야마가타는 정권을 다투는 경쟁관계이기도 했지만 대외 팽창적 국익 앞에선 콤비를 이뤘다. 이토는 45세이던 1885년 초대 총리에 오르며 내각책임제를 확립한다. 이토에 이어 1890년 총리에 취임한 야마가타는 외교정략론을 발표하면서 “이익선(국가 이익)의 초점은 조선”임을 분명히 했다. 그 후 일본의 이익선은 한국에서 만주로, 만주에서 시베리아로, 시베리아에서 중국 대륙으로, 그리고 다시 동남아시아로 확대됐다.

1894∼95년은 한·중·일 3국의 질서가 재편되는 시기였다. 일본은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야마가타의 논리에 의하면, 일본이 이익선을 노골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간 내부적으로 다져온 힘을 외부로 돌린 첫 시도다. 청일전쟁의 결과로 체결된 시모노세키조약을 주도한 인물은 이토였다. 야마가타가 전쟁을 일으키고 이토가 수습하며 일본의 국익을 챙기는 호흡이 절묘하다. 청나라의 리훙장을 야마구치현으로 불러들여 조약을 체결했다. 그 조약의 현장은 요즘 관광지로 인기다.

이토는 조선을 중국에서 분리시키는 데 중점을 뒀다. 조선을 독립시킨다는 표현을 썼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국제정세가 복잡하게 얽혔던 시절, 조선의 독립은 외교적 수사에 불과했다. 1837년 정한론 대두로부터 시작된 조선 침략 프로젝트의 1단계가 성공하는 순간이었다.

이토와 야마가타는 1885~95년 총리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조선 침탈의 밑그림을 완성해갔다. 그 10년간, 조선은 일본과 정반대로 개화와 개혁의 동력을 상실했다. 당시 조선의 리더들도 전통적 유학 지식에 새로 습득한 서양 지식을 접목해 변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운도 따르지 않았다. 1884년 갑신정변의 실패는 치명적이었다. 김옥균·홍영식·박영효 등 몇몇 주도자가 사라진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변화를 주도할 힘을 전반적으로 상실했다.

“갑신정변 실패 이후 개화를 지지했던 수많은 젊은이들이 미처 꽃도 펴보지 못하고 사라진 것”(김봉진 교수)이다. “1884년 갑신정변으로 개화파가 몰락한 때부터 1895년 갑오경장까지 조선은 중국의 위안스카이에게 주요한 국가의 결정권을 빼앗긴 ‘잃어버린 10년’”(김현철 박사·동북아역사재단 연구원)이기도 했다.

부국강병과 총화단결, 그리고 대외침략. 메이지 유신과 한국 병합으로 이어지는 일본의 위세는 지난 100년간 우리에게 이중적으로 다가왔다. 한편으로 증오와 저항의 대상이면서 다른 한편으론 선망의 모델이었다. 그 밑엔 망국의 한이 서려 있다. 경술국치 100년을 맞는 오늘 우리는 무엇을 대비해야 하는가. 김봉진 교수는 “건국 이후 60여 년간 대한민국은 제국주의를 거치지 않고도 근대화에 성공한 첫 케이스를 세계에 알렸다”며 “그런 자랑스러운 근대화를 배경 삼아 상생과 협력의 국제질서를 제시할 때가 됐다”고 말했다. ‘망국의 한’은 벗어던지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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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글·사진 배영대 기자



정한론  메이지 유신 완성 위한 잔혹한 ‘생존술’

☞◆정한론=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의 최대 과제는 국민적 통합과 민족적 독립이었다. 정한론은 두 과제를 모두 이뤄내기 위한 일종의 묘수였다. 1873년 본격 정책과제로 부상했다. 일본이 살기 위해 무력으로 한반도를 침공하자는 것이었다. 이후 일본의 시대정신은 ‘정한’의 방법론으로 모아졌다.

정한론이 등장한 1873년부터 1910년 한국병합조약이 강제 조인될 때까지 37년간은 정한론의 실현 과정이었다. 그 과정은 치밀했다. 궁극 목표는 만주 대륙 진출이었고, 1차 관문이 한국 정복이었다. 관·군·민이 머리와 손발을 합쳤다. 때론 민간을 앞세워 은밀히, 때론 군부를 앞세워 노골적으로 진행됐고, 정치권과 외무성은 그 작업을 컨트롤하며 ‘적절한 시기’를 재고 또 쟀다. 청일전쟁-시모노세키조약-영일동맹-러일전쟁-가쓰라·태프트밀약-포츠머스조약-을사늑약 등을 거치며 한국병합이 구체화됐다. 일본 학계에선 그 시기 문제를 놓고 ‘정한론’ ‘반정한론’ 논쟁이 진행 중이지만 한국침략이란 대명제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가고시마현 출신 사이고 다카모리를 정한론의 주창자로 보기도 한다. 정한론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데 그가 총대를 멨기 때문이다. 하지만 1877년 메이지 정부군과 반군 사이의 내전에서 반군 편에 섰고, 결국 반군이 패하면서 역사의 큰 흐름에서 사라졌다. 그는 당시 인물 가운데 일본에서 가장 인기 있는 ‘최후의 사무라이’로 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