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순간이다. 1873년 정한론(征韓論) 이후 37년 동안 진행된 일본의 조선 침탈이 완성됐다. 데라우치가 통감에 부임한 것은 1910년 7월 23일. 그는 8월 16일, 이완용을 통감 관저로 불러 병합의 뜻을 통보한다. 그의 통감 부임부터 조약 체결까지는 불과 한 달. 하지만 그 한 달 새 모든 게 이뤄진 건 아니다. 데라우치가 서울에 왔을 때 조선 병합의 모든 준비는 끝나 있었다. 당시 일본 정부의 책임자는 가쓰라 다로(桂太郞·1848~1913) 총리였고, 한국 병합을 주도한 실무 총책임자는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1855~1911) 외무대신이었다.
가쓰라는 야마구치현 하기(萩) 출신, 고무라는 미야자키현 오비(飫肥) 출신이다. 야마구치현 하기는 메이지 유신의 발상지다. 가쓰라의 후견인은 죠슈(長州)의 대부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1838~1922) 원수. 야마가타의 군부 인맥을 잇는 핵심 실세가 가쓰라다. 가쓰라는 총리로 재임하며 고무라 외무대신과 데라우치 육군대신을 양대 축으로 하여 병합을 완수해 나갔다.
가쓰라 총리와 고무라 외상은 호흡이 잘 맞았다. 한국 병합 관련 결정적인 외교문서에는 그들이 빠지지 않는다. 1905년 체결된 ‘망국을 이끈 3대 조약’(가쓰라·태프트 밀약-제2차 영·일동맹-포츠머스 조약)의 뒤에는 가쓰라-고무라가 있었다. 1902년 제1차 영·일동맹도 마찬가지다. 가쓰라는 총리에 부임하자마자 고무라를 외무대신에 앉혔다. 1908년 가쓰라가 두 번째로 총리에 부임할 때 역시 외무대신은 고무라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조선병탄의 알파와 오메가를 기획했다. 일본이 가장 신경을 많이 쓴 것은 미국·영국·러시아 등 강대국의 간섭. 이를 경술국치 이전에 마무리한 주역이 가쓰라-고무라 콤비였다.
하기에는 가쓰라의 생가와 동상이 보존돼 있다. 오비에는 역시 고무라의 생가·동상과 함께 기념관까지 설치돼 있다. 고무라의 활약상을 더 생생히 느껴볼 수 있게 했다. 고무라 기념관의 나가토모 데이지(52) 학예연구사는 “일본 외교를 이야기할 때 ‘고무라 시대’ ‘고무라 외교’라는 표현이 보통명사처럼 쓰인다”고 했다. 일본 외교에 미친 고무라의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일본이 강대국과 맺었던 각종 불평등조약을 개정하며 관세 자주권을 회복한 일과 러일전쟁을 적절한 시점에 끝내면서 일본에 유리하게 협상을 이끈 점이 높이 평가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가쓰라-고무라는 이미 오래전부터 손을 잡아왔다. 1894~1895년 청일전쟁 무렵 두 사람은 청나라 공사관에서 함께 근무하며 인연을 맺었다. 그때부터 가쓰라는 고무라의 능력을 눈여겨보았다. 1901년 총리에 오르자 고무라를 외무대신으로 발탁했다. 고무라는 영어에 능했고 국제법에 밝았다. 그가 외무성에 특채된 배경이다.
1m56㎝의 단신 고무라. 그는 16세 때 외국 문물 창구였던 나가사키에 가서 외국 선교사로부터 영어를 배웠다. 오늘날 도쿄대학의 전신인 ‘대학남교(大學南校)’에선 영어와 법률을 공부했다. 문부성 주최 제1회 해외 유학생에 선발돼 미국 하버드대 법대에 유학했다. 야마구치현과 가고시마현 출신들이 주요 관직을 거의 독식하는 상황에서 메이지 정부 탄생에 기여도가 비교적 적은 미야자키현의 작은 시골 출신인 그가 중용될 수 있던 배경이다.
고무라는 학맥과 실력을 적재적소에 써먹었다. 포츠머스 조약 체결 당시, 러시아와 협약을 중재한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하버드대 동문이었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그는 주요 강대국의 외교 업무를 섭렵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외교적 뒤처리를 한 것도 그였다.
1909년 4월 10일, 가쓰라와 고무라는 이토 히로부미를 방문한다. 한국 병합을 위한 ‘제1호 방침서 및 시설 대강서’를 추인받기 위해서였다. 요점은 “적당한 시기에 한국 병합을 실행할 것”이다. 이는 고무라가 외무성 정무국장 구라치 데스키치에게 지시해 작성했으며, 3월 30일 가쓰라 총리에게 제출했던 것이다. 이후 7월 6일 한국 병합에 관한 일본 정부의 공식 방침으로 결정됐다. 경술국치 1년도 더 전의 일이다. ‘시설 대강’은 병합의 시기가 도래할 때까지의 정책 목표였다. ▶질서유지를 위한 군대의 주둔, 헌병·경찰관의 증파 ▶외국 교섭 사무 장악 ▶한국 철도를 제국 철도원으로 이관하고 남만주철도와의 연락화 ▶일본인의 한국 이주와 한·일 경제의 긴밀화 등 구체적 정책 과제가 이미 준비돼 있었던 것이다.
고무라는 용의주도했다. 경술국치 조약 체결이 끝난 후, 그는 신문사 대표들을 외무대신 관저로 초청해 그간의 경위를 설명하며 언론의 협조를 당부했다. 일본이 1905년 동양 화란(禍亂)의 뿌리를 단절하기 위해 한국에 대한 보호통치를 시작했다는 것, 그러나 보호통치만으로는 화란의 근원을 단절하는 책임을 다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됐고, 그래서 1909년 7월 조선 병합의 방침을 확정하고 필요한 시기에 이를 결행하기로 결정했다는 사정을 설명했다.
당시 조선에서 고무라에 비견할 수 있는 인물은 『서유견문』의 저자 유길준(1856~1914) 정도를 꼽을 수 있다. 26세 때인 1881년 한국인 최초로 일본 유학, 1883년 한국인 최초로 미국에 유학해 서양의 정치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1885년 귀국해서 1892년까지 무려 7년을 포도대장 한규설의 집에서 연금상태로 지내야 했다. 개화당과 관련 있다는 혐의를 받았기 때문이다. 김현철(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외교사) 박사는 “1884년 갑신정변 실패 이후 수많은 개화파 인재들이 그 능력을 제대로 발휘해보지도 못하고 몰락해간 점이 100년 전을 회고할 때 아쉬운 대목”이라고 말했다.
경술국치 ‘치욕의 장소’ - 남산 통감 관저
을사늑약→정미 7조약에 이은 1910년의 강제병합조약은 최후의 절차였다. 이날을 우리는 경술국치(庚戌國恥)라고 부른다. 경술년에 일어난 나라의 부끄러움.
강제병합조약이 체결된 곳은 남산 기슭의 통감 관저(사진)다. 식민 통치의 모든 정책 결정이 이뤄진 이곳은 지금은 잊혀진 현장이다. 표지석 하나 남겨놓지 않았다. 그 자리가 어디였으며, 언제 사라졌는지조차 정확히 모른다. 퇴계로 중부세무서 옆에서 남산 쪽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서울시 소방방재본부’가 나오는데, 소방방재본부에서 ‘서울유스호스텔’로 이어지는 진입로 주변의 제법 너른 공터가 통감 관저 자리로 추정되고 있다. 1907년 10월 일본 황태자가 방한했을 때 머문 숙소도 이곳이었다.
당초 일본 공사관으로 쓰이던 2층 건물이었다. 을사늑약에 따라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1906년 2월부터는 통감 관저로 바뀌었다. 1910년 강제병합조약이 발표되면서 다시 총독 관저로 이름이 바뀐다.
한·일 강제병합조약 어떤 내용 담았나
1910년 강제병합조약의 대한제국 측 원문. |
1907년 10월 경회루 … 볼모로 잡힌 황태자, 강압 … 매국의 한 장면
사진은 침탈의 위세를 담고 있다. 매국의 굴욕이 넘쳐난다. 망국으로 가던 길의 씁쓸한 현장이다. 사진의 사연은 이렇다.
메이지(明治) 일왕은 난색을 표시했다. 조선의 의병활동과 정세 불안 때문이었다. 이토가 설득했다. 왕족인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케히토(有栖川宮 威仁) 친왕의 수행을 조건으로 4박5일의 서울 방문을 허락했다. 러·일 해전의 승자인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제독, 을사늑약 때 총리 가쓰라 다로(桂太郞)도 함께 왔다. 그 일행은 10월 16일 인천을 거쳐 서울로 들어왔다. 그리고 경복궁 경회루에서 연회를 가졌다. 조선의 대신들과 기념사진(왼쪽 사진)도 찍었다. 친일매국의 정미칠적(丁未七賊)들이다. 이토의 표정에는 조선을 호령하는 으스댐이 드러난다.
두 달 뒤 12월 5일 조선 황태자는 이토에 이끌려 일본으로 갔다. 열 살 때였다. 영친왕(英親王)의 비운의 삶이 시작됐다. 이토는 태자태사(太子太師)의 직책을 받았다.
박보균 기자 (편집인) (bgpark@joongang.co.kr)
망국의 뿌리를 찾아 ① 메이지 일본의 ‘한국병탄 프로젝트’
망국의 뿌리를 찾아 ② 망국으로 이끈 3대 조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