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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유리벽을 깼던 야구소년들
[박동희의 야구탐사] 30년 전 유리벽을 깼던 야구소년들
1985년 세계리틀야구선수권대회(리틀리그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한 한국 리틀야구 대표팀 |
“30년 전, 세계야구의 단단한 유리벽을 깼던 야구소년들이 있습니다. 12살의 어린 나이에 세계 무대에서 한국야구의 우수성을 온몸으로 플레이한 아이들이 있어요. 우린 전설이 돼야했던 그 소년들을 잊고 있었어요. 그 아이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리틀야구는…존재하지 못했을 겁니다."
- 1984, 1985년 한국 리틀야구 대표팀 단장 황기대 옹 -
한국 리틀야구가 29년 만에 세계리틀야구선수권대회(리틀리그 월드시리즈)에 출전한다.
7월 5일 필리핀 클락시 미모사 베이스볼파크에서 열린 ‘2014 세계리틀야구 아시아·태평양 지역 예선대회 12세 이하 디비전’ 결승전에서 한국 리틀야구 대표팀은 홍콩을 11대 0으로 꺾으며 6전 전승으로 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이로써 한국은 ‘아시아·태평양 대표팀’으로 8월 14일부터 미국 펜실베이니아 윌리엄즈포트에서 열리는 제68회 세계리틀야구대회에 참가해 세계 각국 리틀야구팀과 우승을 겨루게 됐다.
이뿐이 아니다. 같은 날 같은 곳에서 열린 ‘2014 세계리틀야구 아시아·태평양 지역 예선대회 13세 이하 디비전’ 결승전에서도 한국은 ‘라이벌’ 일본을 4대 2로 꺾고 7월 29일부터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는 세계리틀야구대회(13세 이하)에 참가하게 됐다.
한국리틀야구연맹 한영관 회장은 “12세 이하 대표팀의 세계리틀야구대회 본선 진출은 1985년 이후 29년 만에 처음이고, 13세 이하 대표팀의 세계대회 출전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12세·13세 이하 대표팀의 세계리틀야구대회 본선 진출은 한국리틀야구 사상 초유의 쾌거”라고 감격해 했다.
30년 전, 첫 세계리틀야구대회에서 우승했던 한국 리틀야구 대표팀 2014년 세계리틀야구선수권대회 본선 진출에 성공한 한국 리틀야구 대표팀
한 회장의 기쁨은 과장이 아니다. 한국리틀야구계는 축제 분위기다. 이유는 간명하다. 영원히 깨지지 않을 것처럼 단단했던 ‘세계리틀야구대회 본선 진출’이라는 유리벽을 한국 야구소년들이 단번에 깨뜨린 까닭이다.
한 회장은 “이날이 오기까지 얼마나 오래 기다렸는지 모른다”며 “장장 29년을 바위에 계란 치기식으로 도전하고 또 도전해왔다”고 회상했다.
틀린 말도 아니다. 그간 ‘세계리틀야구대회 본선 진출’은 한국 리틀야구계에겐 다시 재현하고 싶은 꿈이자 오랜 염원이었다.
한국 리틀야구계가 처음 세계 무대를 밟은 건 1984년이었다. 이해 한국 리틀야구 대표팀은 극동 지역예선에서 타이완, 일본을 꺾고 사상 처음으로 세계리틀야구대회 본선에 진출했다.
당시 보성중 1학년생으로 리틀 대표팀에서 내야수와 투수를 맡았던 김경원 전 OB 투수(현 두산 전력분석원)는 “미국령 괌에서 열린 세계리틀야구대회 극동예선에서 우리가 일본을 이기며 사상 처음으로 미국에서 열리는 본선 무대를 밟았다”며 “본선 무대를 밟은 것도 처음이었지만, ‘리틀야구 선진국’ 일본을 극동 예선에서 이긴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사실이다. 한국은 극동 예선에서 번번이 일본과 타이완에 패하며 본선 진출권을 따내지 못했다. 타이완에 이기면 일본에 패하고, 일본에 이기면 타이완에 지며 본선 진출권을 눈앞에서 놓치기 일쑤였다. 1983년 극동 예선에서도 한국은 최고의 유소년 선수들로 대표팀을 꾸렸지만, 일본에 1대 3으로 지며 세계리틀야구대회 본선 진출권을 거머쥐는 데 실패했다.
한영관 연맹 회장은 “수십, 수백 개의 리틀야구 전용구장을 갖추고 있던 일본과 타이완에 비해 당시 한국에서 리틀야구 전용구장이라곤 장충리틀야구장밖에 없었다”며 “한국의 예선탈락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 몰랐다”고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1984년 한국 리틀 대표팀이 일본, 타이완을 꺾고 본선 진출에 성공한 건 일종의 기적이었다.
기적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미국의 동·서·남·중부 4개 대표팀, 캐나다, 벨기에, 파나마 등과 맞붙은 본선에서 한국은 기대 이상의 활약을 펼쳤다. 애초 한국은 최하위가 예상됐지만, 놀랍게도 파나마와 캐나다를 각각 4대 0, 10대 0으로 꺾고서 결승까지 진출했다.
김경원은 미국 남부 리틀 대표팀과의 치른 결승전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그날 결승전에 3만 명 이상의 관중이 몰렸다. 메이저리그 월드시리즈보다 더한 열기였다. 원체 관중이 많다 보니 우리끼리 이야기하는 것도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속으로 ‘여기서 집중하지 않으면 끝’이란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배짱 있는 선수가 많아 긴장 대신 경기를 즐기며 결승전을 치를 수 있었다.”
당시 한국 리틀야구 선수들은 많아야 수백 명, 보통 백 명 안팎의 관중 앞에서 플레이한 경험밖엔 없었다. 그것도 선수 학부모나 대회 관계자가 대부분이었고, 일반 리틀야구팬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3만 명 이상이 몰린 야구장에서 아이들이 느꼈을 극심한 부담감과 위압감은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을 터.
여기다 30년 전 한국은 아시아의 이름 모을 나라 취급을 받았다. 김경원은 “다른 선수들에게 ‘한국을 아느냐’고 물으면 하나같이 어깨를 으쓱하며 ‘모르겠다’고 대답했다”며 “그나마 한국을 안다는 외국 아이들도 ‘카네기홀에서 공연한 가수 조용필의 나라’ ‘프로스펙스를 만드는 나라’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한국 리틀야구 대표팀 선수들은 김경원의 말대로 긴장 대신 경기 자체를 즐겼고, 소외감 대신 자긍심을 가슴에 품고 뛰었다. 그 덕분인지 조대익(서울 우신중 1년)과 이명관(서울 학동초 6년)의 호투로 ‘강호’ 미국 남부 대표팀을 6대 2로 꺾는 파란을 연출했다.
1983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한국 성인 대표팀이 우승을 맛본 이후 정확히 1년 만에 리틀야구 대표팀이 세계대회에서 사상 첫 패권을 차지하자 한국야구계는 크게 고무됐다.
김경원은 “청와대에서 축전이 날아오고, 귀국했을 땐 카퍼레이드를 벌이는 등 모든 분이 우리의 우승을 축하해줬다. 그땐 어려서 ‘그런가 보다’ 했지만, 지금 돌아보면 ‘참 대견한 일을 했구나’ 싶어 나도 모르게 뿌듯한 감정을 느낀다”며 환하게 웃었다.
1985년 한국 리틀야구팀의 특명, ‘난적’ 타이완을 이겨라! 극동 예선에서 타이완(당시 국명 자유중국)을 꺾고 2년 연속 세계대회 진출에 성공한 한국 리틀야구 대표팀의 쾌거를 비중있게 보도한 1985년 소년 동아일보 기사. 소년 동아일보는 리틀야구 관련 기사를 가장 정확하고, 자주 소개한 매체였다.
물론 당시 한국의 우승을 ‘운’으로 보는 시각도 많았다. 하지만, 이듬해인 1985년에도 한국 리틀야구 대표팀은 극동지역예선에서 다시 결승까지 올랐다.
당시 대표팀 멤버였던 조경환 KIA 코치는 “1985년 8월 3일 타이완 타이베이에서 열린 세계리틀야구대회 극동 예선전을 잊을 수가 없다”며 “많은 분이 경기 전부터 타이완의 홈 텃세와 편파판정을 우려했다”고 회상했다.
그도 그럴 게 그즈음 타이완에서 대회가 열리면 타이완을 제외한 다른 참가국들은 극심한 홈 텃세와 편파 판정으로 곤욕을 치러야 했다. 한국 청소년·성인 대표팀이 타이완만 가면 힘을 내지 못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한 원로 야구인은 “타이완에서 경기를 치르면 심판의 공정한 판정은 애초부터 기대하기 어려웠다”며 “한국 투수가 투구하면 한가운데로 들어와도 볼이지만, 타이완 투수가 던지면 포수 미트에 채 공이 들어오기 전, 스트라이크가 선언되는 웃지 못할 일도 많았다”고 회고했다.
가뜩이나 타이완 야구계가 극동 예선 결승전에 사활을 걸던 터라, 한국 대표팀은 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타이완은 한국 리틀야구 대표팀과의 결승전에 올인했던 것일까. 이유는 분명했다. 먼저 자존심이었다.
1947년 세계리틀야구대회가 창설된 이후 1966년까지 대회 우승은 미국 주(州) 대표팀들과 멕시코 대표팀(1957, 1958년 우승) 차지였다.
그러다 1967년 일본 ‘니시도쿄’ 대표팀이 우승을 차지하며 처음으로 아시아 출전팀이 우승기를 안았다. 일본은 1968년에도 우승을 차지했는데, 1970년 미국 뉴저지주 대표팀이 우승기를 되찾으며 일본의 연속 우승은 ‘2’에서 멈췄다.
바로 이때 나타난 팀이 타이완이었다. 타이완 리틀야구 대표팀은 1969년 세계리틀야구대회에서 깜짝 우승을 차지한 뒤 1971부터 1975년까지 무려 4년 연속 우승컵을 안았다. 1961년부터 1963년까지 미 캘리포니아 대표팀이 3년 연속 우승을 거둔 바 있지만, 4년 연속 우승은 그때 타이완이 처음이었다.
타이완은 1971년부터 1974년까지 다시 4년 연속 우승을 기록했고, 1977년부터 1981년까진 사상 초유의 ‘5년 연속 우승’이란 대업을 달성하며 세계리틀야구계의 제왕으로 우뚝 섰다.
그러나 타이완은 1982년 결승전에서 미 워싱턴주 대표팀에 패하고, 1983년엔 결승 진출에 실패하며 기세가 꺾였다. 그리고 1984년엔 한국에 져 본선진출마저 좌절되며 3년 연속 ‘무관(無冠)의 제왕’ 신세가 됐다. 따라서 1985년 극동대회에서 한국에 또다시 패한다면 ‘세계리틀야구의 제왕’이란 타이틀을 내놓아야 할 판이었다.
세계리틀야구대회에서 우승한 타이완 리틀야구대표팀이 타이베이 시내를 카퍼레이드하는 장면. 한때 타이완에서 리틀야구팀은 나라의 자랑이자 기쁨이었다. 하지만, 선수단엔 이러한 국민적 기대가 부담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한때 타이완은 다른 나라들로부터 '리틀야구팀에 15세 이상의 부정선수를 넣는다'는 강력한 의심을 샀다. |
두 번째는 리틀야구의 상징성이었다. 1970년대 초반 타이완은 이른바 ‘타이완의 기적’이라 불리는 고도 경제발전에 성공했다. 그러나 정치와 외교는 정반대로 진행돼 ‘하나의 차이나’를 외치는 중국의 압력으로 ‘국제 미아’가 돼갔다.
급기야 1971년 UN(국제연합)에서 회원국 지위를 잃고, 중국의 압력을 이기지 못한 여러 나라가 국교 단절에 나서며 타이완의 국제적 위상은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리틀야구 대표팀의 세계대회 제패야말로 타이완인들에겐 실추된 자존심을 회복하고, 전국민이 하나가 되는 중요한 기회였다.
지난해 제3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취재 차, 타이완에 갔을 때 그곳 야구인들은 “타이완 성인이라면 1970, 80년대 세계리틀야구대회 생중계를 보며 다들 한 번쯤 환호했던 기억이 있을 것”이라며 “타이완 리틀야구 대표팀이 우승할 때마다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타이완 국기를 흔들거나 폭죽을 쏘아 올렸다”고 추억했다.
1969년 세계리틀야구대회에서 타이완 대표팀이 우승하자, 타이완 정부는 이를 기념하고자 500원(타이완 달러) 지폐 뒤에 우승 장면을 새겨넣었다. |
타이완 리틀야구 대표팀의 연이은 승전보가 원체 국민적 관심사였기에 타이완은 어떻게 해서든 한국을 꺾고 본선에 진출하는 게 절대 과제였다. 그러나 우려했던 지나친 홈 텃세와 편파판정은 나오지 않았다.
조경환은 “리틀야구 경기라 그랬는지 심판의 눈에 띄는 편파판정은 없었다”며 “비교적 공정한 분위기 속에서 경기를 치렀다”고 기억했다.
그 덕분이었을까. 극동 예선 결승전에서 한국은 타이완을 2대 1로 꺾고, 2년 연속 세계리틀야구대회 본선 진출에 성공한다.
조경환은 “본선 경기보다 타이완, 일본이 참가한 극동 예선이 더 어려웠다”며 “타이완과의 결승전이 끝나고서 ‘타이완이 자국무대에서 한국에 패한 건 이번이 처음’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회상했다.
타이완을 꺾고, 2년 연속 세계리틀야구대회 본선 무대를 밟은 한국 대표팀은 전해보다 더 강력한 전력으로 승승장구했다. ‘난적’ 베네수엘라를 13대 2로 꺾고서 4강에 오른 한국은 캐나다를 16대 0으로 누른 뒤 미국 서부 대표팀과 결승전에서 만났다.
준결승 캐나다전에서 완투승을 거뒀던 조경환은 “국외팀들이 우리보다 덩치가 좋고, 더 빠른 공을 던지긴 했지만, 팀 워크와 개인 기량은 우리가 한 수 위였다”며 “미국 대표팀 전력도 생각보다 강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미국 서부 대표팀과의 결승전은 결코 쉽지 않은 일전이었다. 한국 리틀대표팀 선수들은 미국 전력은 둘째치고, 전해 결승전에 올랐던 선배들처럼 수많은 관중과 열기에 압도돼 있었다. 선수 중엔 극심한 긴장감을 호소하는 이도 있었다.
당시 대표팀에서 투수와 외야수를 맡았던 심재학 넥센 코치는 “그때 결승전을 앞두고 곽성렬 감독님께서 극도로 긴장한 우리에게 알약을 나눠주셨다”며 “감독님의 ‘이 약을 먹으면 심리적으로 안정되고, 몸에서도 힘이 난다’는 말에 모든 선수가 알약을 삼켰다”고 회상했다.
곽 감독의 알약이 효력을 발휘한 것일까. 한국 대표팀은 미국 서부 대표팀을 맞아 7대 1 대승을 거뒀다. 이로써 대회 2연패를 거둔 한국 대표팀은 타이완, 일본, 미국을 제치고 명실공히 ‘세계리틀야구의 중심’으로 우뚝 서게 됐다.
그렇다면 도대체 알약의 성분은 무엇이었을까. 심재학은 결승전이 끝나고서 곽 감독이 내민 약통을 보고 깜짝 놀랐다.
1984년에 이어 1985년에도 세계리틀야구대회 우승을 차지한 한국 리틀야구 대표팀 |
“감독님이 경기가 끝나고서 껄껄 웃으시면서 약통을 보여주셨다. 그 약통엔 우리가 먹었던 약들이 들어 있었다. 자세히 보니 유명 위장약의 약통이었고, 약들도 평범한 위장약이었다. 우리가 너무 긴장하고 있으니까 감독님께서 ‘긴장하지 마라’고 위장약을 마치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주신 거였다.”
리틀 대표팀은 윌리엄즈포트에서 한국행 비행기가 출발하는 뉴욕까지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뉴욕에서 내려 한인 식당으로 점심을 먹으러 갔을 때 한 노신사가 리틀 대표팀 아이들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이 노신사는 아이들이 곰탕을 맛나게 먹는 걸 보고는 흐뭇한 표정을 짓다가 심재학에게 “너희가 미국팀과 결승전을 치르는 걸 TV에서 봤다. ‘통’ 잊고 있던 한국인의 자부심을 일깨워줘 정말 고맙다”며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선수단의 밥값을 모두 내고 식당을 떠났다.
가난하고 엄혹했던 시절. 미국에 살던 교민들에게 한국 리틀야구 대표팀의 2년 연속 승전보는 월드컵 우승보다 감동적이고, 가슴 뿌듯한 쾌거였던 것이다.
하지만, 1985년 세계리틀야구대회에서 우승했을 때부터 한국야구계는 ‘2연패 신화’를 잊고 있었다. 전해 카퍼레이드로 대표팀의 기적을 환영했던 야구계는 1985년 우승을 차지했을 땐 카퍼레이드는 고사하고, 별도의 행사도 생략한 채 한국 리틀야구의 세계 제패를 당연한 듯 받아들였다. 하지만, 당연할 것 같던 세계 제패는 그뒤로 재현되지 못했다. 되레 쓰디쓴 패배와 좌절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2편 '29년 만에 유리벽에 도전하는 야구소년들'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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