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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구단주', 김택진과 허민

나 그 네 2013. 8. 30. 12:59

NC 구단주 김택진(사진 좌로부터)과 고양 원더스 구단주 허민(사진=NC/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1990년대 중반. <스포츠춘추>는 군 제대를 앞두고 있었다. 그러나 기쁘지 않았다. 반대였다. 신호등이 고장 난 사거리에 서있는 것처럼 미래는 혼란스러웠고, 2년이 넘는 군 생활로 머릿속은 진공관처럼 텅 비어 있었다.

그즈음 행정반 소속 후임병이 “컴퓨터와 인터넷을 배워보라”고 권유했다. “컴퓨터와 인터넷?” 하는 <스포츠춘추>를 보며 후임병은 비장한 표정으로 “앞으로 컴퓨터와 인터넷이 세상을 지배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정직하게 말해 그때만 해도 '인터넷'이 새로운 이데올로기인 줄 알았다. 컴퓨터도 마찬가지였다. '고가의 게임기' 혹은 '문서 작성용 기계' 그도 아니면 '공학도들의 전유물'로밖엔 보이지 않았다.

결국, 후임병의 예상이 맞았다. 오늘날 세상은 인터넷으로 연결됐고, 컴퓨터는 지식의 창조자가 됐다. 따지고 보면 당시 컴퓨터와 인터넷이 세상을 지배하리라 믿었던 건 후임병만이 아니었다. 서울대생 김택진(45)과 허민(37)도 같은 생각이었다.

1985년 서울대 전자공학과에 입학한 김택진은 컴퓨터에 빠졌다. 그는 컴퓨터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에 주목했고, 컴퓨터 프로그래밍 기술을 익혔다. 그의 첫 작품은 ‘아래아 한글’이었다.

서울대 선배 이찬진은 편리한 워드프로세서를 개발하려 애썼다. 이때 김택진은 천부적인 프로그래밍 실력으로 ‘아래아 한글’ 제작에 일조했다. 한발 나아가 김택진은 ‘한메 타자교실’이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아래아 한글’에 입문하는 초보자들이 쉽게 한글을 접하도록 도왔다. 이후, 김택진은 ‘NC소프트’라는 벤처회사를 창업해 1998년 온라인 게임 ‘리니지’를 출시했다.

1995년 서울대 응용화학부에 입학한 허민은 총학생회장이 됐다. 하지만, 그는 친구들과 인터넷 게임을 즐기는 평범한 청년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가 허민에게 “명색이 학생회장이니 인맥이 넓지 않겠느냐”며 소개팅을 부탁한다. 그때 문득 허민이 생각한 게 바로 ‘미팅과 게임을 동시에 접목하면 어떨까’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상상력을 행동으로 옮기는데 주저하는 이가 아니었다. 2001년 그는 미팅 게임 ‘캔디바’를 세상에 내놓았다.

‘감독형’ 김택진, ‘단장형’ 허민

 

김택진 NC 구단주가 투구동작을 취하고 있다. 모그룹의 지배구조와 상관없이 NC 야구단은 여전히 김 구단주가 이끌고 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사진=NC)

 

‘리니지’는 게임계의 비틀스였다. 짧은 시간 안에 폭발적 관심을 모았다. ‘스타크래프트’가 지배하던 게임계의 패러다임을 바꿨다. 출시 15개월 만에 100만 회원을 끌어모았고, 2007년 단일 게임으로는 최초로 누적 매출 1조 원을 돌파했다. 당시 김택진은 ‘리니지’ 제작을 진두지휘했다. 개발자 출신답게 서버분야를 직접 담당하기도 했다.

허민은 ‘캔디바’ 제작 노하우를 바탕으로 2005년 ‘던전앤파이터’라는 온라인 게임을 제작했다. 기존 게임이 3D였던 데 반해 ‘던전앤파이터’는 2D로 제작됐다. 일부에선 “시대에 역행하는 비주얼”이라고 비판했지만, 허민은 “과거 오락실의 느낌을 그대로 살려 유저에게 편안한 감정을 주고 싶다”며 2D를 고집했다.

결과는 대박이었다. ‘던전앤파이터’는 한국 PC방을 휩쓸고서 중국에 소개되며 2억 명에 가까운 이용자를 모았다.

같은 서울대 출신에 컴퓨터와 인터넷에 조예가 깊고, 게임으로 공전의 히트를 하기까지 두 이의 인생은 쌍둥이처럼 닮았다. 그러나 게임 제작 방식은 달랐다. 김택진이 ‘감독형’이었다면 허민은 ‘단장형’이었다.

한 게임회사 중역은 김택진을 이렇게 평가했다. “CEO라고 뒷짐을 지는 법이 없다. 개발자 출신답게 게임에 무엇이 필요하고,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가에 많은 고민을 한다. 게임 제작 구성원들에게 일을 분담하고, 얼마나 진행되는지 꼼꼼히 챙기는 스타일이다. 출시될 게임의 홍보 동영상 엔딩 크레디트까지 챙긴다면 믿겠는가. 야구로 치면 감독 그 이상이다.”

이에 반해 허민은 게임보다 게임을 만드는 사람에 관한 관심이 높다. ‘던전앤파이터’ 제작 당시에도 그는 세세한 프로그래밍에 참여하기보다 인재를 모으고, 그들을 적재적소에 투입하는 일을 도맡았다. 게임 제작자들을 ‘현장’으로 칠 때 그는 현장이 무엇을 필요로 하고, 현장의 창의력을 어떻게 하면 극대화할지 고민했다. 그래서일까. 허민은 지금도 ‘던전앤파이터’를 만들었던 제작 인력들을 ‘직원’으로 호칭하지 않고 ‘동반자’로 부른다.

‘멈추지 않는 도전가’ 김택진, ‘행복한 우주인’ 허민

 

프로야구 1군 팀으로 떠나는 선수에게 이적료를 요구하는 대신 축하 격려금을 주는 독립구단. 지구상에 이런 독립구단은 고양 원더스밖에 없다(사진=원더스)

 

리니지 성공 이후, NC소프트의 외형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 NC소프트는 2009년 4분기 매출만 1천973억 원을 기록하며 세계 게임사 10위 안에 들었고, 17명의 직원은 어느새 3천 명으로 늘었다.

한 게임 전문기자는 “NC소프트의 극적인 성장 배경엔 김택진의 도전과 탁월한 경영능력이 숨어 있었다”며 “김택진이 NC소프트 보유 주식을 넥슨에 넘기며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것처럼 오해를 받지만, 그는 게임 현장에 오랫동안 남아 새로운 도전을 시도할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김택진이 여전히 게임계에 남아 새로운 도전을 꿈꾸고 있다면 허민은 야심과는 거리가 멀다. 지난해 처음 허민을 취재했을 때 모 게임사 대표는 그를 ‘우주인’이라고 불렀다. 이유가 궁금했다. 상대의 대답은 간명했다.

“잘 나가는 게임사를 갑자기 팔고, 미국으로 음악공부를 떠나 전직 메이저리그 투수에게 너클볼을 배웠다면 세속적으로 봤을 때 허 대표는 지구인보단 우주인에 가깝습니다.”

사실이었다. 2008년 허민은 자신이 대표로 있던 게임사를 팔고, 1천억 원의 큰돈을 손에 쥐었다. 이 돈 가운데 상당액을 그는 자신이 ‘동반자’라고 부르던 제작 인력들에 나눠줬다. 그리고 홀연히 미국 버클리 음대로 유학을 떠났다. 그곳에서 허민은 작곡 공부와 함께 ‘너클볼의 대가’ 필 니크로로부터 너클볼 투구법을 배웠다. 세속적 관점에서 본다면 ‘우주인’으로 불려도 무방한 인생이었다.

하지만, 허민은 처음부터 돈과 명예엔 관심이 없었다. 허민은 말한다. “저는 행복해지고 싶어 사업을 했고, 더 행복해지고 싶어 미국으로 떠나 작곡과 너클볼을 배웠을 뿐입니다. 행복해지고 싶다는 것, 그게 제겐 가장 큰 야심입니다.”

그들이 야구단을 운영하는 이유, 정의와 기회

 

내년 시즌부터 1군 리그에 참여하는 NC(사진=NC)

 

2008년을 기점으로 김택진과 허민의 인생 항로는 달라지는가 싶었다. 하지만, 지난해 두 이의 인생은 묘한 지점에서 만났다. 바로 야구였다.

김택진은 지난해 프로야구 9구단 NC 다이노스를 창단하며 프로야구계에 뛰어들었다. 한해 200억 원 이상이 드는 프로야구팀 창단은 CEO의 개인적 취향으로 결정될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김택진은 어째서 프로야구팀을 만들었을까. 단순한 기업의 사회환원 차원이었을까.

NC 다이노스 이태일 사장은 김택진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스포츠는 규칙을 만들어서 경쟁하는 과정을 관중, 팬, 선수들이 공유함으로써 그 가치를 나누는 행위입니다. 그러한 일반적인 행위를 결국 스포츠팬과 국민이 보면서 ‘공정해야 한다. 규칙을 지켜야 한다, 땀의 가치는 이런 거다’하고 깨닫는 겁니다. 김택진 대표는 매일 경기가 진행되는 야구를 통해 우리 사회가 ‘정의’의 참뜻과 의미를 되새기길 바랐습니다. 그래서 프로야구팀을 만들었고, 지금도 그러한 생각엔 변함이 없으신 것으로 압니다.”

프로야구의 든든한 젖줄로 성정한 원더스(사진=원더스)

그해 허민 역시 야구단을 창단했다. 프로야구팀은 아니었다. 독립야구단이었다. 국내 최초의 독립구단 ‘고양 원더스’가 그것이었다. 그러나 말이 독립구단이지, 허민은 원더스에 한해 50억 원을 지원하고 있다. 프로야구 2군팀 운영비를 훌쩍 뛰어넘는 거금이다. 그럼에도 허민은 바라는 게 없다. 창단 때부터 감독, 코치, 선수, 프런트 누구 할 것 없이 프로야구팀에서 좋은 제의가 오면 조건없이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실제로 약속을 지켰다. 올 시즌 원더스 선수 5명이 프로야구팀에 입단했다. 그러나 허민은 이적료를 한푼도 요구하지 않았다. 되레 떠나는 선수에게 격려금을 줬다. 그는 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의 독립구단을 지원하는 것일까.

“제가 성공하기까지 이면엔 18번의 실패가 숨어 있습니다.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제게 기회를 준 건 바로 이 사회였습니다. 전 야구선수로서 실패한 이들이 마지막 기회를 독립구단을 통해 잡길 바랄 뿐입니다. 그 선수들이 성공해서 우리 사회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회’가 되고, 사람들이 절망 대신 기회를 노래할 수 있다면 50억 원은 제겐 5천억 원의 가치로 찾아올 겁니다.”

컴퓨터와 인터넷은 세상을 변화시켰다. 그 최대 수혜자들인 김택진과 허민은 이제 야구를 통해 사회와 사람들을 변화시키려 한다. 어쩌면 그것이 '진짜 구단주' 김택진과 허민의 가장 큰 공통점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