旅行/아름다운 산하

[스크랩]지리산의 옛모습 - 어제의 그들이 있기에 지리산이 있다

나 그 네 2015. 7. 20. 12:56

지리산의 옛모습 - 어제의 그들이 있기에  지리산이 있다

  

천왕봉 표지석


현재의 천왕봉 표지석은 1982년 권익현(산청·함양) 국회의원과 이규효 경남도지사가 세웠다. 표시석의 첫 글자는 원래 영남(嶺南)이었으나, 경남(慶南)으로 수정됐고, 현재는 ‘한국(韓國)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되다’는 문장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 표지석이 있기 전까지는 남명 선생의 ‘만고천왕봉 천명유불명(萬古天王峰 天嗚猶不嗚·하늘이 울어도 아니 우는 뫼)’이란 글귀를 새겨 논 표지석을 진주산악인들이 세우기도 했다.

2015년 3월, 표지석의 위치가 탐방객 실족 위험 등의 안전 문제가 되자 지리산국립공원사무소는 ‘천왕봉 표지석 이전 관련 대국민 의견공모’를 모으기도 했다.

 


 

 

선교사 수양관


지리산 노고단에 자리 잡고 있는 56채의 집. 1921년에 들어선 외국인 선교사들의 수양관이다. 기록에 따르면 선교사들은 1936년 이곳에서 구약성서를 우리말로 번역하고, 선교사들에 대한 한국어 교육을 위해 한글 문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했다고 전해진다. 수양관은 일제 강점기, 6·25 전쟁, 자연재해 등으로 인해 대부분 망가졌고, 예배당 1채의 흔적만 남아 있다.

지리산 왕시루봉 중턱에는 1962년 미국의 휴 린튼 선교사가 세운 12채(교회 1채, 집 10채, 창고 1채)의 수양관이 있다. 이 건물들은 린튼의 아들 인요한(연세대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소장)씨가 얼마 전까지 관리해왔다. 현재 수양관을 둘러싸고 불교계와 기독교(개신교)계가 수 년 전부터 ‘철거냐, 문화재 등록이냐’라는 문제로 팽팽히 맞서고 있다.

 





 

세석산장, 그리고 현판


지리산 세석산장의 옛 모습이다. 세석산장의 현판은 2010년 고인이 된 서예가 정필선씨가 남긴 것이다. 그는 노고단, 뱀사골, 장터목, 세석, 로터리 산장 등의 현판을 차례로 썼으며 8개 산장에 이름을 새겼다. 황해도 봉산 출신의 정필선씨는 해병대 초대 정훈감을 역임했고, 이후 경남대의 전신인 해인대학부학장과 해인농림고 교장을 지냈다. 지리산 종주기와 지리산을 소재로 한 

<지리산 종주길>이라는 책도 발간했다. 

현재 세석산장은 세석대피소가 준공되면서 취사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세석 대피소의 수용인원은 190명으로 전국에서 가장 큰 규모다.

 


 

 

제석봉의 고사목


지리산의 천왕봉과 중봉 다음으로 높은 봉우리인 제석봉(1806m)은 산신에게 제를 올리던 제석단과 샘터가 있던 곳이다. 한국전쟁 직후까지만 해도 침엽수로 울창했으나 자유당 말기 권력자의 친척이 제석단에 제재소를 차리고 거목들을 무단으로 베어냈다. 이 사건이 문제가 되자 증거를 없애려 불을 질러 모든 나무가 죽어 현재의 고사목 군락이 생겼다고 전해진다. 사진으로 보아 60~70년대 제석봉의 고사목 수는 지금보다 훨씬 많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연하반 지리산 종주대


1955년 4월 구례중학교 우종수 교사를 비롯하여 강기중, 이규종, 윤중섭, 안성문 등 교직원들이 중심이 되고 손재훈, 양한익, 성승준, 김용선, 김태준, 안기호씨 등이 참여해 구례 연하반(求澧 烟霞伴)이 탄생했다. 이는 지리산 최초의 산악회이자, 지리산악회의 전신이다.

1962년 지리산등반지도를 만든 연하반은 1962~1963년까지 

‘지리산종합개발연구조사단’을 안내하기도 했다. 또 1964년 정부에 ‘자연보호를 위한 자연국립공원 창설’을 건의하고, 1967년 지리산국립공원이 지정되기까지 큰 힘을 기울였다.

사진은 1965년 연하반 지리산종주등반대가 천왕봉에 올랐던 모습이다. 당시 이정표 90개를 설치하였으며, 천왕봉 정상에 도착해 주변까지 청소했다. 사진의 왼쪽 위가 우종수 선생, 좌측부터 황태식, 임현택, 김태준, 임재택 선생.


 

 

마애부인상과 성모석상


가부좌를 틀고 다소곳이 합장을 하고 있는 모습. 마애부인상과 성모석상이다. 큰 얼굴에서 품기는 다소곳한 미소가 사람의 마음까지 차분히 만든다. 예로부터 지리산 천왕봉에는 성모사를 세워 성모신을 모시고 숭상해왔다. 천 년전 신라 때부터 세워져 있었다는 성모석상은 박혁거세의 어머니로, 고려시대에는 태조 왕건의 어머니로 시대의 변천에 따라 

다르게 불려왔다. 또 삼신할미상, 마고할미상 등으로도 알려졌다.

1972년 누군가 성모사를 훼손하고 석상을 파손시키기도 했고, 숱한 세월에 몸통이 잘려나가는 아픔을 겪고 버려지기도 했다. 여러 번 수난을 당하고 사라졌던 석상은 1987년부터 혜범스님에 의해 지리산 천왕사로 옮겨졌다. 수많은 시련에도 성모석상은 여전히 온화한 미소를 띄고 있다.

 

 

 

장터목 대피소


1971년 지리산 최초로 세워진 ‘지리산 산장’은 지금의 장터목 산장자리였다. 1986년 재건축이후 1997년 큰 공사를 치러 11월 3일 다시 태어났다. 사진은 1997년 장터목 대피소의 공사모습이다. 옛날 산장과 연결해 통나무로 외부장식을 한 장터목 대피소는 165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으며, 지리산의 산장 중 사람들의 발길이 가장 많은 곳이다. 천왕봉의 일출을 꿈꾸는 이들에게 최고의 쉼터로 자리 잡고 있다.


 


 

산사태


2002년 8월 태풍 ‘루사’가 지나가면서 지리산 송전탑 작업로가 붕괴, 산청 반천리에 대규모 산사태가 발생되기도 했다. 이외에도 지리산은 기후변화와 지반 및 지질 상태로 대규모 산사태가 일어난 곳이 수십 여 곳에 이른다. 2013년에는 지리산 하봉 산사태로 인해 등산객 1명이 사망하고 1명이 부상을 입는 일도 발생했다. 

지리산에 산사태가 집중되는 이유는 강풍과 폭우를 동반한 태풍의 길목에 위치한 지리적 조건때문이며, 국가적 차원의 지속적인 관찰과 조사 연구가 필요하다.

 

 

 

 

세석평전


1981년 세석평전의 모습. 왼편에는 진주상봉산악회의 깃발이 보이고, 형형색색의 A형 텐트와 돔형 텐트가 보인다. 취사와 야영이 자유로웠던 70~80년대 지리산에서 흔히 볼 수 있던 모습이다. 많은 사람의 발길로 훼손된 세석평전은 90년대에 이르러 황토색 땅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후 국립공원 취사·야영금지 조항이 생겼고, 차츰 본래의 모습을 찾아가고 있지만 그 옛날의 모습으로 돌아가기란 어려운 일이다.

 

사진출처 - 지리산국립공원사무소, 월간마운틴

 

 

 

출처 :지리산의 옛모습 - 어제의 그들이 있기에 지리산이 있다 .

'旅行 > 아름다운 산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리산 삼신봉 순환회귀  (0) 2015.07.26
[스크랩]그가 지리산 암자로 향하는 까닭은?  (0) 2015.07.22
중산리 대원사방향  (0) 2015.07.19
지리산 무제치기폭포  (0) 2015.07.19
지리산 유평계곡  (0) 2015.0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