旅行/아름다운 산하

[스크랩]그가 지리산 암자로 향하는 까닭은?

나 그 네 2015. 7. 22. 21:50

그가 지리산 암자로 향하는 까닭은?


 

 

 

▲ 지리산 천은사의 암자인 상선암. 하루종일 해가 비치는 곳에 자리 잡고 있으며, 과거부터 이름난 수도승을 배출한 곳이다.

 


지리산, 그곳에는 우리나라의 모든 정체성이 깃들어 있다. 

종교, 역사, 문화, 생명, 

그중에서도 예로부터 삼신산(금강산·지리산·한라산), 삼대불토(금강산·묘향산·지리산)라 불리며 종교적 영향을 깊게 받았다. 

웅장한 산과 계곡으로 불교가 깊숙이 자리 잡은지 수 백년. 

번화하게 성장한 곳도, 

아직 때 묻지 않은 믿음이 심어진 곳도, 

터마저 사라진 곳도 수백 곳에 이른다. 

지리산 그 속의 숨은 암자를 찾아 떠나보자.


 

 

▲ 종석대 능선에서 바라본 우번대와 별채.



 

지리산 둘레길의 인기는 여전했다. 인월터미널 대합실은 연휴를 맞아 둥근 챙의 모자를 눌러 쓴 도보여행객으로 가득했고, 

탑승구나 택시정류장에는 둘레길로 이어지는 차편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제법 요란했다.

 시골의 작은 마을로만 생각했던 인월면. 주말이면 이렇게 북적댄다고 주변상인들은 말했다.

오전 10시경, 인월터미널 앞에서 오마이뉴스에 <지리산 오지암자기행>을 연재하고 있는 김종길씨를 만나 지리산 성삼재로 향한다.

 작년 <남도여행법>이란 책이 출간되고 인터뷰를 부탁했는데, 거리상 만나지 못해 아쉬움이 뒤따랐다. 

6월호 주제가 ‘지리산 사람들’로 잡히자마자 김종길씨에게 연락을 했고, 

마지막 지리산 오지암자기행에 동행할 수 있게 되었다.

 


성삼재, 지리산 암자 기행의 시작점 


뱀사골과 달궁계곡에는 연분홍빛 수달래가 만개해 계절을 알리고, 그 위로 쪽동백, 층층나무들이 하얗게 꽃을 피우며 맞이한다. 

이미 야영장은 만석에 가깝고, 때 이르지만 복장은 모두 한여름과 같다. 

후덥한 풍경을 바라보며 김종길씨와 대화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선생님, 암자는 왜 가시나요?”, “저긴 백장암인데…” 처음 만났지만 대화의 낯설음은 전혀 없다. 

어느덧 친해져 지리산 케이블카에 대한 내용도 오갔다. 

그는 서슴없이 “생겨도 됩니다. 하지만 이 노고단 도로부터 없애고 만들어야지요”라며 한술 더 뜨기도 했다. 

2006년 지리산생명연대와 국립공원을 지키는 시민의 모임에서는 “1988년 성삼재 관통도로가 개통된 이후 노고단의 경우는 도로가 개발되기 이전보다 탐방객이 7배나 집중되고 있고, 동물의 서식지가 도로로 인해 491조각으로 나눠져 있다”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2007년 5월에는 노고단으로 체험학습에 나섰던 순천 매산중 학생 5명이 사망하고 30명이 다치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리고 ‘도로를 폐쇄할 것이냐, 말것이냐’라는 문제를 두고 공방이 갈리기도 했다. 몇 해 전부터 남원시와 한국철도기술연구원은 정령치 부근에 산악철도를 놓자는 의견을 내세우고 있다.

넓은 몸뚱이를 가져 어느 하나 성할 날 없는 산이다.

지리산에 대한 생각에 빠지기도 잠시 어느덧 성삼재에 이르렀다. 차량에서 내리니 찬기운이 몸을 감는다. 

해발고도가 1100m에 이르니 아랫마을보다 6~7도 이상은 낮은 셈이다. 

지리산의 주능선은 아직도 계절의 푸르름을 실감하기엔 부족했다. 노고단 방향으로 30분을 걸어 우번대로 향하는 길에 멈춰섰다. 

멀리 화엄사 계곡이 펼쳐진다. 산 중턱까지만 연녹빛으로 올라온 풍경이 새삼 산꾼의 눈을 놀랍게 만든다. 

그리고 계곡사이로 천년사찰이라 불리는 화엄사가 흐릿하게 보인다. 

능선 하나를 경계로 왼편에는 화엄사가 오른편에는 천은사가 자리 잡고 있다.

 

 

 ▲ 지리산 종석대. 깨우침을 얻은 사람에게 돌종소리가 울리는 전설을 품고 있다. 

 

우번대로 향하는 길, 그리고 마주친 종석대

천은사, 지리산 종주를 위해 올라온 사람이야 입장료를 받는다며 투덜댈할테지만, 천은사는 지리산 서쪽에 자리잡은 큰 사찰 중 하나이다.

천은사의 창건 시기는 여러 설이 존재하나 아직 정확히 알 수 없다. 신라 중기인 828년에 인도의 덕운스님이 지리사에 들어와 창건했다는 설, 조선시대 중건된 극락보전 상랑문에 의하면 도선국사에 의해 창건됐다는 설이 전해지지만 정확하지 않은 근거라는 말이다. 다만 천은사의 이전 명칭은 감로사(甘露寺)였는데 이슬처럼 맑고 차가운 샘이 있어 유래된 이름이다. 감로사에서 천은사로 이름이 바뀐 것은 조선시대이며, 이와 관련된 구렁이의 전설이 있다. 천은사에서 임진왜란 때의 화재로 인해 소실되었던 전각을 중건할 때, 샘에 큰 구렁이가 나타나 잡아 죽였더니 샘이 솟아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샘이 숨었다는 뜻으로 절 이름을 천은사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이런 큰 절에는 산중 깊숙이 숨은 암자도 곳곳에 있다. 천은사는 우번대를 포함해 7개의 암자가 있다고 알려졌다. 
삼일암, 도계암, 수도암, 상선암 등은 천은사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된 곳이다. 

천은사 내부의 안내판에도 위치만 표시되어 있지 가는 방법에 대해선 전혀 알 길 없다.

이번에 방문한 우번대 역시 천은사 소유의 암자이다. 

천은사가 거닐고 있는 암자를 둘러보면 김종길씨의 암자기행 연재기사도 끝에 이른다. 

지리산을 놓고 시계방향으로 돌아 마지막 종착지인 천은사에 닿았기 때문이다. 

 

“지리산 암자에 대한 자료는 많지 않아요. 대부분 조선시대 지리산 유람기의 내용을 바탕으로쓰는 것이죠. 

대표적으로 유명한 사람이 조선시대 김종직, 이륙, 김일손 같은 분이에요. 

현대적 암자기행은 명상적으로 접근하는 경우가 많아요. 이것을 인문학적으로 풀어쓰고 싶었어요. 

어떤 글은 자료수집만 하는데 2개월이 걸린 글도 있답니다.” 

 


이를 바탕으로 2014년 7월부터 써내려간 지리산 암자기행 연재기사는 벌써 20편이 넘었다.

조선시대 유람기는 역사 자료로 훌륭하게 쓰인다. 문학적인 면을 넘어 그 시대의 성격, 자연경관, 문화까지 모든 면을 두루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지리산을 유람하고 기록을 남긴 사람이 천 명이 넘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정하고 있다. 또 그들이 남긴 글 역시 수천 편에 이른다. 현존하는 지리산의 유산기 자료는 조선 초부터 약 500년에 걸쳐 있다. 당시 선비들은 지리산에 오면 암자에서 머무는 경우가 다수였고, 수십일 가량을 머물기도 했다. 당시 상황을 기록한 부분을 통해 학술지나 서적에 인용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코재에서 우번대 방향으로 발길을 돌린다. 그 위로 종석대라는 봉우리가 신기하게 서 있다. 지리산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바윗덩어리이기에 더욱 눈길을 끈다.

 

“저긴 지리산을 사방으로 살필 수 있는 곳이야. 

예전 빨치산들이 저기에 올라 사방을 살폈고, 아직도 화엄사 골짜기에는 항아리며, 식량이 남아 있어” 

우번대 법종스님은 말 따라 종석대에 오르니 360도로 펼쳐지는 전경을 볼 수 있었다. 이 능선은 정령치, 세걸산, 바래봉을 잇는 백두대간 길이다.


지리산은 오래전부터 천왕봉에서 산신제를 지냈는데, 조선시대에는 오르기 번거로워지자 종석대에 세간짜리 사당을 지어 산신제를 치른 기록이 전해지며, 1737년 조선 영조 13년에는 남원 부사가 객사, 마굿간 등을 갖춘 큰 사당을 새로이 지어 제관들의 불편을 덜어주었다는 기록도 있다.

 

 

 

▲ 지리산 우번대의 모습. 지붕이 날아가지 않도록 줄로 연결해 땅에 고정했다.


 


8부 능선에서 만난 우번대


잘 닦인 길을 따라 30분 걸으니 우번대 바로 아래 자리 잡은 별채에 도착했다. 

우번대는 이곳에서 50미터 가량 위쪽에 있다. 

우번대를 지나기 전 만난 해우소에서 왠지 모를 정감이 흐른다. 

그리고 초록색 양철지붕이 보이고, 길 옆으로 ‘작동은 될까?’ 싶은 가로등이 서있다.

가로로 15m 가량의 길게 뻗은 암자, 

바람에 날아가지 않게 철판지붕은 일정한 간격으로 줄이 연결돼 땅에 고정되어 있다. 

암자를 중심으로 왼편에는 우물, 항아리, 텃밭, 산신각이 보인다. 사람의 온기가 묻어 있는 흔적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  산왕(山王)이라고 적힌 돌, 소박한 산신각의 모습이다.

 

 

▲ 원래 우번대 토굴이 있던 자리는 텃밭으로 쓰이고 있었다.  


 

우번대는 상무주대, 서산대, 묘향대, 무착대 등과 함께 지리산 10대 암자로 알려진 곳으로 우번대사 이후 용화스님, 수월스님 등이 머문 암자이다. 소박한 산신각을 바라보고, 주변을 둘러본다. 

산신각 바로 앞에 있는 텃밭이 원래 우번대 자리. 몇 걸음 되지 않는 곳이지만, 기운이 다르다. 바람도 적게 들고, 해가 종일 비추며, 비가 와도 금방 마른다.

 

갑자기 문이 열리며 신발을 끄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훽’하며 무엇인가를 던지고 다시 암자로 들어갔다. 

스님이였다. 

처음에는 아무 말도 걸지 않고 냉담한 모습이었으나 5분이 지나지 않아 스님은 다시 나와 말을 걸었다. 먼 길을 찾아온 이에게 그냥 보내서는 안될 것 같다는 눈치였다. 스님의 법명은 법종. 말을 건네면 활짝 웃는 인상이 어느 동네에서 본듯한 아저씨 같았고, 말투는 호기심 많은 10대 청년이었다. 

 

“어디서 온거요? 핫셀 카메라 아시는가? 그건 고치는데 왜 그렇게 비싼거여. 아니 요새는 핸드폰이 그렇게 사진이 잘 나온다매?” 

 

스님은 우리가 들고 있던 카메라를 쳐다보며 기종까지 묻기 시작했고, 핸드폰에도 관심을 보였다. 이곳은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전혀 알 수 없다. 찾아오는 사람도 드문드문하니 뭐든 궁금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법종스님은 이곳에서 40년을 수행했다. 한 장소에서 40년이라니. 스님은 부산의 범어사, 문경 희양산 봉암사를 거쳐 이곳에 오게 됐다.

 

법종스님은 수십 년 전부터 사진을 찍었다고 했다. 온 신경을 집중해 카메라 셔터를 누르면, 마치 참선할 때의 마음과 똑같다고. 행여, 다른 사찰에 가도 항상 카메라를 들고 다녔다. 충무로에 사진을 현상하러 가면 그곳 사람들은 기이한 자연경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사진에 대한 궁금증은 커지자 김종길씨가 “그 사진 한번 볼 수 없을까요?”라고 물었다.

 

 

 

▲ 우번대에서 40년을 머문 법종스님과 오마이뉴스에서 지리산 오지암자기행을 연재하고 있는 김종길씨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 그거 사람 죽이는 거더라고. 가끔 보살님들 와서 보여주면 좋아하고, 
나도 좋아서 전국을 돌때마다 찍었지. 그런데 몇 년전 암자가 비었을 때 누가 와서 사진이랑 필름을 다 털어가더라고. 


요즘은 불전함도 털어가. 

누군지 알 것 같은데 그냥 모른척 하고 있는겨. 

그래서 이제 사진 안 찍어.”

산에 다니는 사람들이 착하다는 속설도 이제 통용되지 않는 듯하다. 이 높은 곳에 올라 재물을 탐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있으니 말이다.

 

고운 햇살 머무는 상선암에서

아쉬운 법종스님과의 대화를 뒤로하고 다음 암자를 찾아 나선다. 

성삼재에서 차를 타고 천은사 방향으로 향한다. 

울창하게 우거진 나무를 따라 상선암으로 오르는 길은 신비의 숲에 들어온 기분이다. 

마치 원시림 같은 형태. 절터 담벼락에 심어졌을만한 전나무 몇 그루와 활엽수가 가득하다. 

하루종일 해가 들어오는 지역이라 나무들은 수령에 비해 더 건강해보였고, 키도 컸다. 

절터에는 바위에서 기이하게 자라는 나무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몇 갈래의 시원한 계곡이 흐른다. 

작은 나무다리를 건너고, 15분을 오르니 절 건물이 하나 보인다. 우번대와는 조금은 다른, 소박하지만 기품있는 암자다.

상선암에 이르기전 앞뜰에는 한평 남짓의 텃밭이 가지런히 다듬어져 있다. 

 

스님이 머무는 절간 문은 반쯤 열려 있고, 암자에 도착하니 “여긴 어떻게 오셨습니까?”라는 질문이 이어졌다.


“지리산 암자를 찾아다니고 있습니다”라는 기자의 말에 “지리산 자락에 좀 조용한 암자 하나는 남겨두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스님은 답했다.

 

스님의 법명은 진명이었다. 이곳에 온지 얼마되지 않아, 수행할 공간을 수리중이라고 했다. 

공부방으로 쓰일 안채는 직접 황토를 바르고, 굴뚝까지 쌓아올렸다. 

 

 

 

▲ 상선암의 바위, 벽에는 희미하게 글자가 새겨져 있다. 그 아래로 우물이 있다.

해발 800미터에 자리한 상선암은 산신각을 비롯해 4채의 건물이 있다. 

 

 

 

▲ 상선암은 산신각을 비롯한 4채의 건물이 있다. 기품이 느껴지는 암자다.

 

왼쪽으로 큰 느티나무 한그루가 서 있는데, 제법 수령이 오래된 듯 했다. 

더군다나 아침부터 해가 질때까지 빛이 들어오니 나이보다 더 크고 튼튼해 보였다. 

아마 처음 암자를 지을 때 심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 오른편에는 큰 바위와 우물이 있다. 

암자들은 대부분 큰 바위를 뒤에 세워진 곳이 많은 편이다. 지리산의 어떤 암자는 절벽에 있는 것도 있다. 

스님에게 상선암에 건립배경이나 유래에 대해 물었지만 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진명스님과 차를 마시며, 불교철학에 대해 1시간 가량 대화가 이어졌다. 유난히 햇볕 좋은 날의 지리산 유람이다.

 

 

▲ 상선암으로 가는 길. 때묻지 않은 원시림 같은 곳이다.

 

가끔은 조선시대 선비가 되어 산을 유람하는 것도 산으로 다가갈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 지리산 칠암자 순례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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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암자 순례


지리산 대표적인 암자 순례길은 지리산의 삼정산 능선을 따라 이어진 암자를 찾아 가는 길이다.

도솔암, 영원사, 상무주암, 문수암, 삼불사, 약수암, 실상사까지 이어지는 길로 칠암자 순례길이라는 불리지만, 칠암자 중 도솔암은 비법정탐방로이기에 출입을 금하고 있다.

나머지 6개 암자만을 하루만에 걷는 것도 벅차니 욕심내지마시라. 

이 길에서는 지리산의 주능선인 형제봉, 벽소령, 칠선봉 등을 바라보며 걸을 수 있기에 호젓한 산행을 할 수 있다.

함양군 마천면 삼정마을에서 영원사까지는 구불구불한 도로가 있다. 길이 거칠어 조심히 운전하는 것이 좋으며, 암자순례는 원점회귀가 불가하므로 남원으로 빠지게 된다. 반대로 실상사에서 출발해도 된다. 

그 외에도 지리산에는 동서남북(대원사·화엄사·쌍계사·실상사)의 큰 사찰을 중심으로 많은 암자가 있다.

 

지리산과 불교


지리산의 이름은 지리산(智異山), 두류산(頭流山), 방장산(方丈山), 덕산(德山) 등으로 불려왔다. 

지리산이 어떤 의미를 가진지는 정확한 자료가 없으나, 신라시대부터 크게 불려오던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두류산은 백두산에서 뻗어 내려온 줄기라는 것을 뜻하며, 고려시대 중반이후 쓰이기 시작했다. 

조선시대에는 지리산보다 많이 쓰였다. 방장산 역시 그 의미를 알기 어려우나 이규경은 신라, 고려시대부터 불렸다고 했다.

조선시대 여러 문인들의 지리산유람기를 살펴보면 지리산 일대에는 수백 개의 사찰과 암자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불교계에서는 지리산 곳곳의 지명이 불가에서 비롯된 의미가 대부분이라 말한다.

과거의 사람들은 이 산이 중국의 오대산과 같아 문수보살이 있다고 생각했다.

문수보살은 부처님이 돌아가신 뒤 인도에서 태어나 반야(般若)의 도리를 선양한 이다. 

항상 지혜의 상징으로 표현됐는데, <반야경>을 만들이다.

화엄사 진응스님(1873~1941)은 지리산 반야봉이란 이름도 여기서 따온 것이며, 구례군 토지면에 있는 문수동도 문수보살에서 전해진 것이라고 했다.


구례군 광의면 구만리 역시 문수보살이 만 명의 문수로 몸을 바꾸어 팔만명의 권속들에게 설법하는 땅이라는 뜻으로 지어졌고, 

반야봉 서쪽의 길상봉 역시 문수보살의 묘길상이라 해서 붙여졌다고. 

또 문수보살은 중생의 교화를 위해 이 세상에 늙은 여자로 몸을 바꾸어 나타나기 때문에 노고라는 이름도 생겨났다고 전한다.

칠불암은 모든 부처의 스승이고 어머니이며 칠불의 으뜸인 문수보살과 관련 있다.

이밖에도 방광리, 제석봉, 연하봉, 불일폭포 등 수많은 이름이 불교의 용어에서 따왔다고 전해진다.


 

출처 : 지리산 암자 순례 - 그가 지리산 암자로 향하는 까닭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