旅行/아름다운 산하

천왕봉으로 소풍가는 6학년

나 그 네 2022. 11. 25. 13:57

 

 

지리산 천왕봉 표지석. 국립공원공단 지리산경남사무소 제공, 연합뉴스 © 제공: 한겨레
 
천왕봉으로 소풍가는 6학년 © 제공: 한겨레
 

[삶의 창] 이광이 | 잡글 쓰는 작가

 

지리산의 그리운 이름들, 운봉 인월 달궁 뱀사골 마천 백무동….

이정표에 그런 이름들이 스쳐 지나가면 얼마나 반가운지, 어릴 적 떠났던 고향어귀에 들어서고 있는 듯한 생각이 든다.

사는 일이 곤궁할 때 사람들이 지리산을 찾는 까닭이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거기서 한 사나흘, 다리에 힘을 기르고 산이 일러주는 한 소식을 듣고 내려오면 ‘밥벌이의 지겨움’ 속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한결 가볍다.

 

남원 산내면 실상사 가는 길, 지리산의 북쪽 갈래다.

볕이 잘 드는 구례 하동의 남사면을 ‘겉 지리’라 하고, 해가 짧은 남원 함양의 북사면을 ‘속 지리’라 한다.

겉 지리는 양명하여 중이 사는 절집이 많았고, 속 지리는 음영이 짙어 당집(巫堂)이 많았다고 한다.

백무(白武)동이라는 이름도 무당 백사람이 나온 곳이라 해서 원래 이름이 ‘백무(白巫)’마을이다. 몇해 전 일이다.

극락전 토방에 앉아 차를 마시는데 보살님 한분이 스님께 알은 척을 하더니 “아들이 천왕봉에 소풍을 갔는데 내려올 때가 돼서 먼저 간다”고 손인사를 한다.

천왕봉으로 소풍을 가다니, 몇살이냐고 물었더니 초등학교 6학년이란다. “여기 초등학교는 그래”하면서 스님이 말을 얹는다.

 
 

산내초등학교, 서편 반야봉에서 동쪽 멀리 천왕봉까지 지리산 주능선이 한눈에 들어오는 삼정능선 골짜기에, 100년이 넘은 학교다.

실상사에서 일찍이 귀농학교를 열어 호구도 많고 학생수가 90여명에 이르니, 산골학교라고 시피볼 일은 아니다.

여기 아이들은 봄 가을 소풍을 전부 산으로 간다. 1, 2학년은 가까운 휴양림에 가거나 둘레길을 돌고, 3학년은 노고단까지 차로 가서 만복대나 정령치를 다녀온다. 4학년은 칠선계곡을 타고 바래봉에 오른다. 5학년은 지리산의 제2봉, 일몰이 아름다운 반야봉에 간다. 그리고 6학년이 되면, 아스라한 운무에 덮여 얼굴을 보여주지도 않고, 보고 싶으면 와서 보라는 지리산 최고봉에 오른다.

 

6학년 아이들은 그해 봄부터 체력을 기른다. 일찍 등교해 운동장을 몇바퀴 뛰고, 줄넘기도 하고, 파할 때도 떼지어 경주하며 집에 간다.

그러다가 6월 그날이 오면, 버스 타고 백무동으로 가서 계곡을 오른다. 아이들이 17명, 선생님과 부모님 합쳐 30여명이 3조로 나눠 출발한다.

아침 6시, 하동바위 지나 참샘에서 물 한잔 마시고, 아랫 소지봉, 웃 소지봉 넘어 망바위 지나니 장터목이다. 대피소에 배낭을 풀어놓고 김밥으로 허기를 달랜 뒤 가벼운 차림으로 천왕봉에 다녀온다. 그러면 오후 2시, 서둘러 내려가야 한다.

여름해도 산에서는 금방 저문다. 다시 내려가면 저녁 7시, 바위 많고 비탈이 심해 장정들도 쉽지 않은 백무동 코스를 13시간 만에 주파했다.

 

야영장에 도착하면 산에 못따라간 부모들이 ‘우리 아들, 우리 딸, 고생했다! 장하다!’고 쓴 펼침막을 들고 마중 나와 있다.

극락전 보살님도 거기 서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긴 종주를 마치고 인가가 보이는 마을로 접어들 때 밥집 어매들이 박수를 쳐줄 것만 같은 으쓱함, 그런 맛이 있다. 그때 우는 아이들이 많다고 한다.

 

다리 아프고 힘든 것을 참고 또 참다가 눈물이 툭 터지면서 부모 품에 안기는 아이들. 6학년 담임 이순태 선생님은 그제야 무사히 다녀왔다는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고 했다.

산에 다녀오면 교실에서 못 가르쳐주는 것들을 배우는지, 아이들이 부쩍 큰다고 한다.

산에서 무엇을 배웠을까? 험한 세상을 살아갈 뚝심, 혹은 홀로서기 같은 것은 아닐까 싶다. 화두 한대목을 기대하며 스님께 말을 건넸더니 “잘 안넘어지겠지. 넘어져도 금방 일어날 테고…”라고 한다. 절의 말이 이토록 싱겁다.

 

산내초등학교는 천왕봉에 소풍을 다녀오는 이 ‘사습(私習)’ 같은 전통을 20여년째 이어오고 있다.

 

천왕봉으로 소풍가는 6학년 (ms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