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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향교

나 그 네 2008. 7. 23. 12:38

진주향교

1000년간 인재 배출

 

 

진주 향교는 고려 성종 6년(987년)에 창건된 경남 최초의 향교로 지난 1000여년 동안 진주의 인물을 배출한 유서깊은 곳이다.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문효공 하연이 지은 진주향교 사교당기(四敎堂記)에 의하면, 고려 병부상서 은열공(殷烈公) 강민첨(姜民瞻), 문경공(文敬公) 강군보(姜君寶), 원정공(元正公) 하즙(河楫), 어사대부(御史大夫) 하윤원(河允源), 청천군(菁川君) 하을지(河乙沚), 참찬(參贊) 정을보(鄭乙輔), 문충공(文忠公) 하륜(河崙), 문정공(文定公) 정이오(鄭以吾), 양정공(襄靖公) 하경복(河敬復) 등 기라성 같은 진주의 인물들이 이 향교에서 공부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진주 향교는 1000년의 역사를 간직해오면서 ‘반조정(半朝廷)’이라 불렸던 진주 인재의 산실로서 그 역할을 다해왔으며, 지금도 그 전통을 계승해 진주향교에서는 글읽는 소리가 끊지지 않고 있다. 


진주시 옥봉동 232-1번지에 있는 진주향교는 1011년(고려 현종 2년)에 중수(重修) 및 서재가 중건되었고, 수학원(修學院)·학사(學舍)·서재(西齋)·사교학당(四敎學堂) 등으로 개칭되었다. 1398년(태조 7년) 문묘가 창건되어 향교의 틀이 갖추어졌다. 1558년(명종 13년) 지금의 위치로 이건(移建)하고 대대적인 중수가 있었다.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자 1603년(선조 36년) 문묘(文廟)를 중건하였고,1607년에 명륜당·동재·서재를 중건하는 등 수 차례 중수하다가, 1962년 명륜당(明倫堂)·동재(東齋)·서재(西齋)를 지금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1986년에는 사교당(四敎堂)이 중건되었다.


대성전·명륜당·동무·서무·내삼문·동재·서재·사교당·풍화루 등 9동의 건물이 전학후묘(前學後廟) 형태로 배치되어 있다. 문묘는 대성전을 중심으로 양쪽에 동무·서무가 있고, 내삼문이 대성전 중심축에 배치되어 있다. 사교당은 명륜당이 중심에서 동쪽으로 치우쳐 있고 동재와 서재는 대성전을 중심으로 마주보고 있다.


대성전은 정면 3칸의 팔작지붕 5량 구조로 전퇴(前退)를 두고 개방하였다. 동무·서무는 각각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5량 구조로 되어 있으며, 정면 3칸이 쌍여닫이 띠살문이다. 내삼문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솟을삼문이다. 명륜당은 정면 4칸의 맞배지붕 5량 구조이며, 동재, 서재는 각각 정면 3칸, 측면 1.5칸의 맞배지붕 3량 구조이다. 풍화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누각으로 누마루에 계자난간을 둘렀다. 사교당은 정면 4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3량 구조로 바닥은 마루를 깔았고 벽면 없이 전부 개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