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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시아파 종교지도자 호메이니

나 그 네 2009. 1. 16. 17:13

 

호메이니


부패와 사치의 화신이었던 팔레비 국왕은 1979년 1월 16일 전 국민의 거센 저항에 밀려 이집트로 피신했다. 이후 팔레비는 모르코, 바하마, 멕시코, 미국으로 이어지는 망명의 삶을 누추하게 살았다. 팔레비의 망명은 호메이니 이슬람 정권의 출범을 의미한다. 호메이니는 2주 후 15년여 년의 망명생활을 마치고 이란에 입국했다. 

 

 

팔레비 왕조가 붕괴되고 2주 후인 1979년 2월1일, 15여 년의 망명생활을 마치고 테헤란으로 입국하는 호메이니. 입국 당시 비행기 안에서 촬영된 사진을 보면 창을 내려다보는 호메이니의 눈빛은 독수리처럼 날카로웠다. 옆자리에는 아들인 아마드가 역시 무거운 눈빛으로 창 밖을 응시하고 있다.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아수라장이 된 이란 재건의 희망으로 나타난 호메이니는 수백 만 명의 군중으로부터 환경을 받으며 이슬람 임시정부를 선포했고, 혁명위원회를 구성했다. 이어 이란의 밤하늘에는 피바람이 불었다. 정권을 장악한 호메이니는 혁명 재판소를 설치하고 밤에 비공개로 진행되는 약식재판을 통해 팔레비 정권의 고위관리들 600명 이상을 총살했다. 또한 호메이니는 이슬람의 율법에 의한 국가 통치를 시작하였다. 즉 서구의 모든 가치관을 전면적으로 부인하고 여성들에겐 차도르를 쓰게 하고, 마약, 술, 담배, 서양음악은 엄격하게 제한했다. 호메이니는 1300년 전에 계시된 ‘율법의 나라’를 만들고자 했다.

 

 

호메이니는 저명한 여성 저널리스트 오리아나 팔라치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슬람은 모든 것을 뜻한다. 그것은 당신네 세계에서 자유니 민주니 하는 것까지도 포함한다. 그렇다. 이슬람은 모든 것을 내포하고 있다. 이슬람은 모든 것을 포함한다. 이슬람은 모든 것이다.” 호메이니의 이 말은 공산주의, 자본주의, 불교,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비 이슬람문화에 대한 저항과 투쟁을 의미했다. 이슬람이 모든 것이라는 신념은 팔레비 정권의 부패와 억압에 대한 반동이기도 했다.

 

팔레비는 호메이니라는 사자를 키운 장본인이기도 하다.  팔레비는 겉으로는 이란의 현대화를 추진시켰지만, 수십억 달러의 사유재산을 가지고 흥청망청 써댔으며, 자신의 정권 유지를 위해 정치활동을 억압했으며, 고문, 암살, 정치적 위협을 자행하는 비밀경찰조직인 샤바크를 운영하여 이란을 통치했다. 이토록 극악한 지도자를 만난 이란은 1월 16일을 기점으로 또 다른 의미의 벽이 높은 나라를 만들었다. 기독교 국가에 대한 이슬람 국가의 뿌리 깊은 전면전이 벌어진 것이다.

 

어떠한 희생과 고통 속에서도 호메이니가 반드시 만들고자 했던 ‘이슬람의 새 국가’는 국제화 시대에 과연 가능한 나라일까? 기독교와 이슬람의 끊임없는 분쟁은 무얼 의미하는 것인가? 지구 온난화 문제만큼이나 심각한 이슬람과 기독교 국가와의 대립과 분쟁, 두 세력은 하느님이라는 유일신을 모시면서 극단으로 대립한다. 둘 다 ‘모든 것’ 이고, 그 중앙에 호메이니라는 영성이 뛰어난 지도자가 있었다.

 

 


호메이니의 출생과 성장배경을 설명하기 전에 우리는 그의 사상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호메이니 사상의 기초는 이슬람 율법이다. 서기 7세기에 예언자 무하마드에게 계시된 하느님의 말씀에 근간을 이루고 있는 이슬람의 율법 속에 호메이니가 이룩한 이슬람 왕국 이란이 있다. 이슬람 정부는 율법에 의해서 통치되는 정부이다. 하느님이 내려주는 율법이 있기 때문에 정부엔 따로 입법부가 필요 없다. 정부는 다만 이 법을 올바르게 행사하면 된다. 그래서 호메이니는 이슬람 정부의 지도자로 율법학자를 내세웠다. 그리고 강력한 반 식민주의를 제창했다. 300여 년 간 지속된 유럽의 식민주의를 이란으로부터, 이슬람 세계로부터 몰아내고자 했다. 선교기관이나 서양인들이 세운 학교, 경제기관 등이 그에게는 식민주의의 앞잡이일 뿐이었다.

 

호메이니는 철저하게 금욕적인 정치인이었다. 이슬람 정부는 하느님의 율법 앞에 만인이 평등한 정부이며, 그 지도자는 소박한 생활을 영위하는 가난한 정부이다. 이슬람의 통치자는 통치라는 책임을 맡을 뿐이지 신분 상승이 되는 건 아니다. 권력 역시 세습되는 것이 아니라, 공부를 많이 하고 정직한 사람이 신의 뜻으로 받드는 것이다. 이슬람 통치자들의 소박한 생활은 구 팔레비 정권의 사치와 낭비에 지친 국민들에겐 희망이기도 했다. 그의 정부는 어쩌면 이상적인 나라를 꿈꾸는 집단일지도 모른다.

 

 

호메이니는 1900년 5월 17일 이란의 호메인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루훌라 무사위이다. 1930년경 그의 고향 이름인 호메인을 성으로 사용하기 시작해 호메이니가 되었다. 호메이니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시아파 종교지도자인 ‘물라’였다. 아버지는 호메이니가 걸음마도 하기 전에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지방 영주의 명령으로 살해되었다. 사막의 모래 바람 같은 환경 속에서도 호메이니는 어머니, 숙모, 형의 보살핌 속에서 성장했다. 이슬람 학교에서 교육을 받다가 1922년에 쿰 시에 정착했다. 쿰은 종교도시로서 호메이니가 이슬람 신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한 곳이기도 하다. 이후 그가 계속 거주하는 고향과 같은 곳이 되었다. 망명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서 그가 정착한 곳도 바로 이곳이다. 그는 자신의 젊은 시절을 회상하면서 젊은이들에게 말했다.

 

“이슬람의 성자이며 종교전문가인 척하면서 모슬렘을 크게 부패시키고 있는 자들의 머리에서 터번을 찢어 던져버릴 의무를 젊은이들은 갖고 있다. 그대들의 젊음이 아직도 살아 있는지 나는 모르겠다. 내 젊은 시절에는 결코 이렇지 않았다. 요즘 젊은이들은 왜 그자들의 터번을 찢어 던지지 않는가? 그자들을 죽여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그자들은 죽일 값어치도 없다. 그러나 우리의 용감한 젊은이들은 그 따위 스승들이 터번을 쓰고 공개석상에 나타나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자들을 지나치게 비난할 필요도 없지만 그 터번만은 벗겨야 한다.”

 

젊은 시절 호메이니는 팔레비 국왕의 서구화 운동인 ‘백색 혁명’등에 강력하게 저항했다. 그는 ‘거짓된 터번을 쓴’ 정책에 대한 비판을 하기 시작했다. 뛰어난 이슬람의 지도자들 중에서 호메이니가 대중의 지지를 받기 시작한 것은 팔레비 정권과 이슬람의 사상을 위협하는 서구의 영향력에 대한 비판의 수위를 높이면서부터이다. 그는 이미 이슬람 시아파의 학자 교사로서 많은 글을 쓰면서 지도자로서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팔레비 정권의 공기를 마시고 있는 호메이니에게는 고통의 가시밭길을 의미했다. 1950년대에 들어서면 호메이니는 위대한 종교 지도자인 아야톨라(물라 중에서도 종교심과 학식이 뛰어난 사람에게 주는 존칭)로 찬양 받았고, 1960년대 초에는 대(大) 아야톨라로 이란 내 시아파 종교 공동체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백색혁명은 토지개혁으로 종교영지를 축소시키고, 여성을 정치적으로 해방하려는 조치를 취하게 된다. 이슬람의 율법과 반대되는 정치 행태에 호메이니는 분노하고 행동했다. 그 결과 1963년 7월 체포되기 직전에 호메이니는 콤 시에서 10만 명이 넘은 청중들에게 연설을 했다. 연설이라기보다는 절규였고, 외침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호메이니가 체포되자, 반정부 폭동이 일어났고 8 개월 간 감옥생활을 한 호메이니는 1964년 11월 4일 국외로 강제 추방되었다. 당시 호메이니는 말했다. “이란과 기타 이슬람 국가들이 당면하고 있는 모든 문제들은 미국인들로 인한 문제들이다.” 그의 반미 감정을 잘 드러낸 말이었다.

 

 

그의 일생은 미국과 식민주의에 대한 투쟁의 길이다. 그는 민주주의의 형법에 대해 불신했다. 이슬람 국가에서 형법은 단순하고 평범하기 때문이다. 복잡한 재판절차를 거치지 않고 판례에 따라 즉시 판결을 내린다. 그는 이슬람 형 집행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만약 이슬람의 행형법이 단 1년만 적용된다면 모든 파멸적 부정의와 부도덕은 뿌리 뽑힐 것이다. 범죄는 응보의 법칙으로 처벌되지 않으면 안 된다. 살인자는 투옥할 것이 아니라 죽여라. 간음한 남녀는 매질하라. 코란의 율법에 의하면 일곱 가지 구비조건을 갖춘 법관이라면 누구라도, 어떤 종류의 사건도 처결할 자격이 있다(일곱 가지 조건이란, 성인, 깊은 신앙심, 코란의 율법에 대한 완전한 이해, 공정타당, 건망증 환자가 아닐 것, 사생아가 아닐 것, 여성이 아닐 것이다). 서방의 재판은 사건을 둘러싸고 수 년 간이나 다투곤 하지만, 우리의 법관은 하루에 스무 가지 범죄라도 판결하고 집행할 수 있다.” 글쎄 간단명료하긴 한데, 왠지 좀 단순 무식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슬람 문화에 대한 필자의 이해가 일천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호메이니가 조목조목 신념을 가지고 설명한 글을 읽다 보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문장이 많다. 특히 당대의 상황을 생각하면, 우리의 형법제도를 생각하면 어느 정도는 참고를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제출국당한 그는 터키를 거쳐 이라크에서 투쟁을 계속했다. 그는 이라크에 있는 시아파 성지인 안나야프에 살면서 팔레비의 퇴임과 이란에 이슬람 공화국을 설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1970년대 중반부터 팔레비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이 거세지면서 이라크에 거주하고 있던 호메이니의 영향력이 늘어났다. 이에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은 1978년 10월 6일 호메이니를 국외로 추방했다. 호메이니는 터키를 거쳐 프랑스 파리의 교외 노플르샤토에 정착해서 테헤란으로 귀국할 때까지 이란의 반정부 세력을 진두 지휘했다. 호메이니는 프랑스의 한 시골마을에서 정치 지도자로서 육성을 녹음한 테이프를 제작해 이란으로 보냈다. 오로지 목소리만으로 그는 이란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리고 팔레비 정권은 몰락했다. 팔레비가 이란을 떠난 지 이틀 만에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지도자 야세르 아라파트가 프랑스의 망명지로 호메이니를 찾아갔다. 두 사람은 악수와 키스를 교환하면서 장래에 대한 상의를 했다.


호메이니가 기도와 명상을 하는 사진은 이슬람 지도자로서의 영성이 빛나 보인다. 그는 철저하게 율법에 따른 정치 지도자였다. 즉 신이 이미 만들어준 인간의 법으로 선출된 지도자들은 신의 지시대로 하기만 하면 된다. 이란의 종신 지도자로서 그의 신념은 이렇다. “우리는 색욕 등 어떤 유혹에도 빠지지 않는 정부의 우두머리를 가져야 한다. 모두를 평등하게 대하고 국민에게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부여하는 통치자가 필요하다. 편애에 빠지지 않고 자신의 가족을 다른 가족들과 같이 가볍게 보며, 그의 아들이 절도죄를 범했을 때는 그 아들의 손목을 자를 수 있고 그의 형제자매가 헤로인을 팔았을 때는 그들 역시 처단할 수 있는 그러한 사람을 통치자로 가져야 한다.” 호메이니는 이슬람의 율법이 현대 민주주의와 입헌주의, 법률제도보다도 우월하고, 삶의 질을 높인다고 그의 저서 <나의 투쟁>을 통해 강조했다. 이란의 초대 대통령은 아볼하산 바니사드이지만 호메이니는 이슬람의 지도자로 종신 최고지도자가 된다. 대통령 역시 이슬람 최고 지도자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 바니사드는 결국 호메이니의 반미 투쟁이 너무 지나치다는 판단을 하고 훗날 사임을 하게 된다.

 

나는 호메이니를 읽으면서 이베리아 반도에 남아 있던 그라나다 왕국을 떠올렸다. 그라나다 왕국의 알함브라 궁전처럼 그의 이상과 정치적인 행동은 아름다웠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을 따르지 않고, 완고하게 무하마드의 말씀으로만 세상을 움직여야 한다는 그의 신념은 이젠 그 왕궁의 모습처럼 남게 되지는 않을까? 어쩌면 나의 이런 생각은 철저하게 미국화 되어있는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한 사람의 생각인지도 모르겠다. 세상은 넓고, 사상은 다양하며, 인종 또한 다양하다. 타 문화를 인정하고 교류하고, 서로 소통하면서 평화롭게 사는 방법은 과연 없는 것인가? 호메이니의 사상은 내가 이해하기 힘든, 그러나 반드시 깊게 생각해야 할 숙제와 같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호메이니의 <나의 투쟁>(동광출판사) 이 책은 미국에서 출판된 <아야톨라 호메이니의 정치 철학 사회 종교에 관한 어록>과 <아야톨라 호메이니의 메인켐프 - 이슬람 정부>의 주요 부분만 편집 번역한 책이다. 호메이니의 육성을 듣는 기분이 들 정도로 그의 신념과 정신이 잘 정리되어 있다.  1부는 호메이니의 어록을 정리했고, 2부는 이슬람 정부와 정치에 관한 신념을 피력했다. 불행하게도 이 책은 절판이 되어 도서관에서 구해 봐야 될 것 같다. 호메이니에 관한 서적은 빈약했고, 그나마 거의 절판 상태이다.

 

<현대 이란정치>(한국외국어대학출판부)는 이란어과 교수이며 중동문제 전문가인 장병옥 교수의 책이다. 독재정치, 외세의 내정간섭, 민족주의, 혁명, 그리고 세속적 왕정주의자와 종교적 이슬람주의자간의 갈등과 정치로 구분되는 이란. 이란 정치의 이러한 특성은 카자르 및 팔레비 군주시대뿐만 아니라 오늘날 이란 이슬람 공화국 신정체제하에서도 강화되고 있다. 국내 필자의 시선으로 현대 이란정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책이다. 한 시대를 풍미한 호메이니에 대한 이야기도 한 장으로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현대 이란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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