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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 드 퐁파두르

나 그 네 2009. 1. 17. 22:00

 

마담 드 퐁파두르


몰리에르의 연극 <타르튀프>의 한 장면. 타르튀프가 오르곤의 가정부 도린을 유혹하며 말한다. “내가 보지 못하게 그 아름다운 가슴을 제발 가려주오!” 그 순간 관객들의 시선은 가정부 도린, 아니 도린 역을 맡은 마담 드 퐁파두르의 가슴으로 향한다. 퐁파두르의 아름다움에 새삼 매료된 관객들이 갈채를 보낸다.

 

 

1747년 1월 17일, 베르사유 궁전 안 루이 15세의 거처 가까운 곳에 지어진 ‘다락방 소극장’에서 벌어진 일이다. 몰리에르 희곡 <타르튀프>(1667)를 공연하면서 퐁파두르가 직접 배역을 맡았던 것. 퐁파두르는 공연할 작품과 배우들을 직접 선정했고 사실상 제작자와 프로듀서 구실을 했다. 루이 15세 는 독서를 싫어했지만, 연극 관람은 즐기는 편이었다. 루이 15세의 애첩 퐁파두르는 프로에 가까운 연기 실력을 쌓아놓은 터였다. ‘다락방 소극장’이라는 별칭답게 관객은 불과 14명. 국왕과 함께 객석에 앉는 영광을 누린 이 관객들은 국왕이 직접 선택했다. 티켓을 얻기 위한 경쟁은 치열해서 연줄을 동원하거나 뇌물을 주고 티켓을 차지하려는 이들이 많았다. 무척이나 다양한 레퍼토리를 올렸던 이 무대는 1750년까지 계속되다 중단됐다. 국왕으로서도 막대한 액수의 청구서가 날아드는 걸 감당하기 힘들었다. 퐁파두르로서도 젊고 아름다운 배우나 댄서들이 왕의 주목을 받게 될 가능성을 염려했다. 연기에 몰두한 나머지 공연 뒤 피를 쏟으며 쓰러지기까지 했던 퐁파두르. ‘루이 15세의 애첩’이라는 타이틀은 그녀의 모든 것을 말해줄 수 없다. 문화예술 및 학문 애호가이자 후원자, 당대의 유행을 이끈 최고의 스타일리스트, 외교에도 영향력을 행사한 막후 실력자, 그리고 한 사람의 연극배우이자 제작자. 

 

 

퐁파두르에 관한 ‘전설적인’ 이야기들 가운데 상당수는 그 진위가 의심스럽다. 예컨대 프랑스 샴페인 잔(Coupe de champagne)의 모양이 퐁파두르의 가슴 모양은 본 딴 것이라는 얘기가 그렇다.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그녀의 가슴이 아름다웠던 것은 분명해 보이나, 샴페인 잔 이야기는 호사가들이 꾸며낸 전설에 불과하다. 전설과 사실 사이를 떠도는 퐁파두르는 대체 어떤 여성이었을까?

 

 

1721년 12월 29일 잔-앙투아네트가 태어났다. 아버지는 프랑수아 푸아송, 어머니는 루이즈-마들랭 드 라 모트. 어머니는 고위직 귀족 남성들의 품을 전전하는 ‘직업’에 종사하는 전문적인 ‘작업녀’였다. 아버지는 가난한 직공 집안 출신으로 자수성가한 부르주아였다. 루이즈-마들랭은 결혼 후에도 직업을 이어나갔다. 당시 사회 분위기에서 이런 기묘한(?) 결혼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남편은 스캔들을 막아주거나 혹시 태어날지도 모르는 사생아를 정당화시켜주는 바람막이였던 것. 푸아송은 아내가 쌓은 연줄을 통해 돈을 벌고 출세할 기회를 넓히는 데 관심이 있었다.

 


이들의 딸인 잔-앙투아네트는 수녀원에서 상류층 여인들에게 필수적인 교육받은 뒤 푸아송 가문의 희망으로 떠올랐다. 잔-앙투아네트의 후원자는 어머니 루이즈-마들랭의 연인이자 잔-앙투아네트의 실제 아버지일지도 모르는 샤를-프랑수아 폴 르 노르망 드 투르넴이었다. 잔-앙투아네트는 그를 ‘삼촌’이라고 불렀는데 그의 적극적인 후원 속에 노래, 춤, 연극, 문학, 지적 교양 등을 수련했다. 그리고 1741년 3월 4일, 투르넴은 자신의 조카 샤를-기욤 르 노르망과 잔-앙투아네트를 결혼시켜 ‘바람막이 남편’을 만들어 주었다. 이로써 잔-앙투아네트는 마담 드 에티올르가 되었다.


금발에 가까운 다갈색 머리카락, 보는 각도와 빛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환상적인’ 청록색 눈동자, 백옥 같다는 비유로도 모자란 피부, 적당한 키에 완벽한 몸매. 여기에 음악, 춤, 연기, 승마에 능하고 지적 교양도 웬만큼 쌓았으며 무슨 이야기든 극적으로 이끌어가는 말재주와 모든 의상과 치장에 독특한 개성을 부여할 줄 아는 탁월한 스타일 감각까지. 마담 드 에티올르는 곧 파리 사교계의 총아로 떠오르며 ‘완벽하게 왕을 위해 준비된 여자’가 되었다.

루이 15세는 정숙한 왕비 마리 레슈친스카(폴란드 왕의 막내딸)와의 결혼 생활이 10년을 넘게 되자 극심한 권태에 시달렸고, 사냥과 여성 편력에 탐닉했다. 귀족 출신이 아닌 여성도 루이 15세의 애첩이 되는 경우가 생겼다. 그 명성이 날로 높아져가는 마담 드 에티올르가 루이 15세의 안테나에 잡히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에티올르 자신과 주변 사람들은 의식적으로 소문을 내기 시작했다.

 

 

드디어 1745년 2월 24일. 황태자의 결혼을 축하하는 피로연 가면무도회에서 왕은 에티올르의 재치와 교태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이후 왕은 투르넴의 영지를 비롯한 여러 장소에서 에티올르와 밀회했고, 비밀리에 베르사유로 불러들이기도 했다. 같은 해 4월 중순부터 왕은 에티올르가 베르사유에 머물도록 허락했다. 그리고 남편과의 이혼. 에티올르는 왕의 허락을 받아 퐁파두르 후작부인의 칭호와 집안 문장(紋章)을 사들였다. 퐁파두르 부인의 탄생이었다. 퐁파두르 후작부인은 에티올르 집안의 이웃에 살다가 이미 세상을 떠난 이였다.

 

왕의 각별한 총애가 든든한 힘이기는 해도, 음모와 시기로 가득한 베르사유에서 퐁파두르는 스스로 살아남을 수 있어야 했다. 무엇보다도 귀족이 아니라는 출신 성분이 그녀에게는 커다란 핸디캡이었다. 황태자는 그녀를 대놓고 무시했으며 왕비의 태도도 결코 우호적이지 않았다. 퐁파두르가 정치적 영향력을 맘 놓고 행사했다고 보는 건 무리다. 그녀의 권력은 어디까지나 간접적으로 조심스럽게 행사되었고, 더구나 그 대부분은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 목적을 위해서라면 그녀는 단호했다.


1752년 마담 드 에스트라가 샤를로트-로잘리(슈와죌 보프레 백작 부인)를 왕의 새로운 애첩으로 만들고 퐁파두르를 몰아내려는 계획을 진행시켰다. 왕도 10대 후반의 나이 어린 백작 부인에 끌렸다. 퐁파두르는 야심이 지나친 이 소녀 백작 부인의 위험성을 왕에게 분명히 상기시켰고, 결국 왕은 백작 부인을 유배시켰다. 샤를로트-로잘리는 아이를 낳다가 19살에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젊고 아름다운 아가씨들과 어울리는 왕의 행각 자체를 막을 길은 없었다.

 

왕인 줄 모르고 루이 15세와 1753년부터 관계를 맺은 마리-루이즈 오머피라는 소녀는, 왕의 존재를 알게 되고도 그를 사랑하게 되는 비극에 빠졌다. 오머피는 정신병자 수용시설에 보내졌고, 나중에 퐁파두르 친구의 주선으로 귀족과 결혼했다. 이것이 퐁파두르 자신의 책략이었는지 여부는 불분명하지만, 그녀는 최소한 왕의 마음만은 자신에게 머물기를 원했다. 1750년 이후부터 퐁파두르는 루이 15세와 성적인 관계를 맺지 않았고, 연인이기보다는 사실상 친구 사이가 되었다.


 

 

퐁파두르는 유명한 세브르 도자기의 산파 구실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예술적 가치가 높은 장식품과 도자기를 유달리 좋아한 그녀는 프랑스가 다른 나라에서 그런 것을 수입해야 한다는 게 늘 아쉬웠다. 왕을 설득하여 도자기 사업 특권을 부여 받은 퐁파두르는 전문가들을 고용하고 직공들을 훈련시키면서 스스로 많은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그 결과, 지나치게 붉지 않으면서도 희미하거나 연하지도 않은 분홍빛 바탕 색깔(일명 ‘퐁파두르의 장밋빛’), 여기에 꽃 장식이나 전원 풍경, 우화적인 형상 등으로 장식한 특유의 세브르 도자기가 탄생했다.


1755년에는 오스트리아의 유력 정치가이자 외교관 카우니츠가 퐁파두르에게 외교 협상에서 영향력을 발휘해줄 것을 부탁해왔다. 이는 프로이센을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가 제휴하는 동맹으로 이어졌고, 두 나라의 오랜 숙적 관계가 완화되는 ‘외교 혁명’으로 일컬어졌다. 그러나 이 ‘외교혁명’은 ‘7년 전쟁’에서의 실패로 이어졌다. 프로이센과 영국이 사실상 승리하면서, 프랑스는 해외 식민지를 잃고 재정 파탄 상태에 이르렀던 것이다. 퐁파두르에 대한 반감이 커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퐁파두르는 당시로서는 불온사상이라고 할 수 있던 계몽사상에 관심을 기울인 것으로도 유명하다. 높은 지적 교양 수준과, 권력의 핵심부에 살면서도 귀족 출신이 아니라는 일종의 주변인 의식이 작용한 것일까? 그는 장 자크 루소, 볼테르 등과도 인연을 맺었고 <백과전서>의 편찬도 보호했다. 그러나 이러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퐁파두르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엇갈린다. 특유의 고급 취향으로 공예품 제작을 지원하고 화가들을 후원함으로써 당대 최고의 예술 후원자 구실을 한 반면, 그 구실 자체가 거대한 사치였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루이 15세는 폐결핵으로 고통 받는 퐁파두르에게 끝까지 헌신적이었다. 1764년 4월 13일 루이 15세는 퐁파두르를 문병했고 이것이 마지막 만남이었다. 죽음을 앞둔 퐁파두르의 태도가 매우 당당하고 의연했기에, 그녀의 적들도 경의를 표했다. 그리고 4월 15일 저녁 7시 30분경, 퐁파두르는 4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볼테르는 그녀의 죽음을 두고 이렇게 소감을 밝혔다. “마담 드 퐁파두르의 죽음에 나는 매우 슬프다. 나는 그에게 빚을 졌다. 진심으로 애도한다. 겨우 걸어 다니는 늙은 글쟁이는 살아 있는데(당시 볼테르 나이 70세), 화려한 삶의 절정에 있는 아름다운 여인은 40대에 세상을 떠나다니.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있나.”


영국군 제56보병연대(1755-1881)는 “퐁파두르들”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연대 군복의 표식 색깔이 퐁파두르가 좋아하던 색깔과 비슷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연대 병사들은 그 색깔이 퐁파두르의 속옷 색깔이라는 야담(野談)을 자랑스레 내세우곤 했다. 퐁파두르는 당대에 이미 좋아하는 색깔만으로도 일종의 스타일 아이콘이었던 셈이다. 퐁파두르는 ‘퐁파두르 힐’ 또는 ‘루이 힐’에도 이름을 남겼다. 프랑스 루이 왕조 시대부터 귀족들 사이에 널리 유행하기 시작한 힐 패션에 퐁파두르의 취향이 큰 영향을 미쳤던 것. 이른바 ‘퐁파두르 헤어스타일’도 그녀의 이름을 딴 것이다. 1950년대 엘비스 프레슬리, 자니 케쉬, 말론 브랜도, 제임스 딘 등을 통해 유행하게 된 이 스타일은 1950년대 말 60년대 초의 복고 스타일을 추구하는 이들이 선호하기도 한다.

 

‘무관의 제왕’이라는 표현이 있다. 퐁파두르는 실로 ‘무관의 여왕’이었다. 그 여왕의 얼굴은 여럿이어서 그 가운데 어느 하나만을 진짜 얼굴이라 단정 짓기 힘들다. 바로 이 점이 퐁파두르를 훗날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하는 까닭일 것이다. 한 친구에게 그녀가 했다는 말이 짧지 않은 여운을 남긴다. “나의 삶은 끊임없는 투쟁의 연속이다.”

 

 

마거릿 크로스랜드의 <권력과 욕망>(랜덤하우스코리아)은 퐁파두르를 주제로 한 책으로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유일하다. 저자는 퐁파두르를 자기 시대의 한계 속에서나마 주체적이고 진취적인 태도로 스스로의 삶을 개척한 여성으로 평가하려 한다. 과도한 사치로 프랑스 재정 몰락을 재촉한 국왕의 노리개라는 부정적 평가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셈이다. 그러한 양극단의 평가 중간 어디쯤에 퐁파두르의 진실이 있는 게 아닐지.


권력과 욕망귀족의 은밀한 사생활

 

이지은의 <귀족의 은밀한 사생활>(지안)은 퐁파두르 시대 프랑스를 이해하는 데 웬만한 역사책보다 더 도움이 될 것이다. 프랑스 귀족들의 건축물, 실내 장식, 패션, 공예품을 통해 그들의 생활양식과 예술적 취향을 엿볼 수 있게 해주며, 흥미로운 역사적 일화들도 들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