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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프 히틀러

나 그 네 2009. 1. 30. 12:56

 

독일총리에 임명


1932년 히틀러는 대통령 결선 투표에서 36.8%의 득표율로 낙선했다. 아쉬운 패배였지만, 이듬해인 1933년 1월 30일 제 1당인 나치당의 당수로서 총리에 임명됐다. 이 날을 가리켜 비극의 탄생이라고 해도 될까? 히틀러의 나치 독일 시대가 비로소 도래한 것이다.

 

대통령 선거에서 히틀러를 누른 힌데부르크 대통령은 이미 86세의 고령이었다. 그는 젊고 강력한 독일의 지도자에게 총리라는 실질적인 권력을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히틀러는 1923년 뮌헨에서 권력 쟁취를 위해 쿠데타를 획책하다가 투옥된 적이 있는데, 10년 만에 다른 방식으로 권력을 얻은 것이다. 총리가 된지 수년 만에 독일 국민은 히틀러에게 열광하게 되었다. 히틀러는 분명한 목표를 정해두고 총리가 되었는데, 무너진 경제를 되살리고 1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잃어버린 조국 땅을 되찾고, 유럽을 포함한 러시아까지 무력으로 합병하는 것 등이었다. 거기에다 어려서부터 체질화된 광적인 반유대주의는 유대인 말살정책으로 현실화되었다.

 

히틀러는 글라이히샬퉁, 즉 획일화 정책을 통하여 독일 국민을 광장에 모았다. 1차 세계대전 이후 패닉 상태를 헤매던 독일 경제는 호전되고 있었다. 600만 명의 실업자들은 거리를 헤매다가 대부분 군대와 직장으로 돌아갔다. 국가 경쟁력이 높아지면서 아우토반이 건설되었고, 비틀 자동차가 생산되었다. 독일은 1차 세계대전 패전 결과 자국을 옥죄던 베르사유 조약을 능멸하면서 군비를 증강해나갔다. 그러나 이웃국가들은 항의하는 흉내만 냈다.


 

 

히틀러는 독일 뿐 아니라 전 세계 불행의 원인을 유대인에서 찾았다. 유대인은 마르크스주의자와 볼셰비즘을 전개했으며, 교활한 자본주의 힘까지 더해 지구상의 민족들을 정복하고 파멸시키려고 한다고 철썩 같이 믿었다. 이 믿음이 독일 전역으로 확산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총리에 취임한 날부터 질풍노도처럼 몰아쳐 2차 세계대전과 아우슈비츠까지 내달린 결과 오늘날까지도 히틀러는 상처로 남아 있다. 인생의 결정적인 한 시기에 우리의 운명은 급반전한다. 독일은 히틀러의 총리 취임으로 무시무시한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갔다. 히틀러는 젊은 시절부터 독일의 작곡가 바그너에게 열광했다. 바그너의 오페라 서곡을 나치당의 당원이었던 카라얀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 연주로 들으면서 히틀러의 평전을 읽는 금요일 저녁은 매우 어두웠다.

 

 

“모든 점에서 히틀러의 길은 모범적인 경우다. 어떻게 민주주의 제도들을 서서히 무력화시키고 항복하도록 강요할 수 있는지, 어떻게 국내에서나 국제무대에서 적들을 차례로 속여서 이길 수 있는지, 아무리 저항해도 소용이 없는 테러 체제를 선전과 폭력을 통해서 어떻게 건설하는지 모범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 어떤 폭력적인 지배자의 생애도 권력의 지점들을 거쳐서 마침내 진짜 파괴욕 속에서 퇴화하는 과정을 그처럼 완벽하게 보여주지는 못한다. 이런 과정은 히틀러의 상승과 몰락을 교과서적인 모범으로 만들고 있다.”

 


요아힘 페스트의 <히틀러 평전>의 한 대목이다. 히틀러는 1889년 4월 20일 오스트리아 국경지대의 소도시 브라우나우에서 태어났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세관 고위공무원인 아버지와 그의 세 번째 부인인 클라라 히틀러가 어머니이다. 현모양처의 전형인 어머니는 몇 명의 자녀를 유아기에 잃은 뒤 얻은 히틀러를 애지중지 키웠다. 불 같은 성격의 아버지 알로이스 히틀러는 낙제생인 아들을 엄하고 무섭게 다루었고, 어머니는 그러한 아버지로부터 귀한 아들을 보호했다. 어린 시절 히틀러는 ‘목적’ 없는 아이였지만, 바그너의 세계를 꿈꾸었다.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을 관람하고 그의 영혼에 강력한 천둥번개가 쳤다. 이러한 장면은 니체를 떠올리게 한다. 니체 역시 젊은 시절 바그너에 열광했다. 하지만 훗날 바그너의 음악은 단순한 음악과 예술이 아니며 무대 효과를 통해 사람들을 최면상태에 빠뜨리고 세뇌한다는 비판적인 예언을 했다.

 

그의 예언이 가장 비극적으로 드러난 경우가 히틀러이다. 히틀러는 바그너의 음악을 통해 막연하게나마 정치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실업학교를 겨우 졸업한 히틀러는 화가가 되고 싶은 보헤미안으로 여기저기를 떠돌면서 시도 쓰고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신은 그에게 화가의 운명을 주지 않았다. 여러 차례 미술학교 입학시험에 떨어지고, 생계를 위해 그림엽서에 그림을 그려주었다. 순수화가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굴욕적인 삶을 살고 있던 몽환적인 청년인 히틀러에게 결정적인 인생의 전환점은 사랑하는 어머니의 죽음과 1차 세계 대전이었다.

 

 

“(어머니의 죽음 소식을 듣고) 침상에 몸을 던지고 뜨겁게 달아오른 머리를 이불과 베개에 묻었다. 어머니를 땅에 묻은 그날 이후로 나는 한 번도 운 적이 없다. 이런 일을 일으킨 원흉에 대한 증오가 자라났다. 그리고 날이 밝으면서 나의 운명을 점점 분명히 자각하게 되었다.” 히틀러의 자각은 유대인이 독일에 치명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히틀러는 1차 세계대전에서 바그너의 장엄한 악극처럼 독일이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몽환적으로 믿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전쟁에서의 패배로 국토의 일부를 내놓고, 막대한 전쟁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1919년 6월 28일 베르사유 조약으로 독일은 처참한 지경에 이르렀다. 히틀러는 이러한 현실을 직시했지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마치 자신이 화가로서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은 것과 비슷했다. 그는 한 시절, 자신은 순수 화가이며, 아카데미 화가, 혹은 문필가라고 자칭하고 다녔다. 그는 이루고자 하는 세상과 이룬 세상을 구분하지 못했다. 히틀러의 꿈이 화가나 예술가로 지속되었다면 에드거 앨런 포 같은 비극적인 개인의 운명에서 그쳤을 것이다. 그는 탁월한 대중 선동의 연설가이면서 냉철한 정치인이었다. 그 재능은 게르만 신화를 바탕으로 바그너가 추구한 ‘이루고자 한 세상’에 접목되었다. 그러자 한 개인이 인류를 얼마나 황당한 지경까지 몰고 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가 되었다.

 

 

당시 유럽에서 떠돌고 있던 반유대주의는 오스트리아 빈의 정치선동가 카를 뤼거에 의해 잘 드러난다. 그는 ‘대중에 대한 영향력이 유대인의 손에 있고 언론계의 상당 부분도 그들이 장악하고 있으며 자본, 특히 거대자본의 대부분이 유대인의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 나라에서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테러를 행하고 있다’고 연설했다. 히틀러는 뤼거의 대중선동에 공감했다. 그리고 소시민들이 전후 빈곤과 사회주의에 대해 불안해 하는 원인을 유대인들에게서 찾았다. 그는 병적인 상상력으로 유대인들이 세계를 정복하려 한다는 음모론에 집착하고 이 세상에서 유대인을 인종 청소해야 한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히틀러는 독일에 대한 열망으로 독일 군에 입대했으며, 무공을 올려 1급 철십자장을 받고 제대했다. 그는 탁월한 대중연설가로 변신하면서, 조금씩 자신의 추종자를 만들어나갔다. 연설은 대부분 유대인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유대인과 그들을 돕는 자들을 제거해야 한다는 연설은 전후 비참한 독일의 속죄양을 찾고 있던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는 뮌헨의 주요한 투사이자 선동가가 되어 작은 규모의 정치집단인 독일노동자당에 입당한다. 히틀러는 독일노동자당의 당기를 디자인했으며, 당명도 독일국가사회주의노동자당(NSDAP, 일명 나치)로 바꾸었다. 이 시절부터 히틀러는 술도 담배도 여자도 멀리하고 연설을 통해 자신의 분노와 꿈을 해소하고 실현시키고자 했다. 히틀러의 나치당은 광적인 반 유대주의자이면서 정치 깡패인 율리우스 슈트라이허의 노동협회와 통합하면서 2만 명이 넘는 세력으로 성장했다. 

 

 

1923년 11월 9일 히틀러는 쿠데타를 꾀했다. 무력으로 정부를 전복하고자 했지만, 결국 실패로 끝나고 방법을 바꾸었다. 일 년의 감금생활 동안 깊은 사색과 독서를 통해 자기가 걸어야 할 길을 잘 닦아놓았다. 그것은 대중 선동을 통한 집단 애국주의의 발현이었다. 그는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을 바탕으로 치욕적인 베르사유 조약을 넘어서 국토 확장과 경제 번영을 독일 국민에게 약속한다.

 

히틀러의 최측근인 요제프 괴벨스는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썼다. “우리가 권력을 쥐게 되면 결코 그것을 놓지 않을 것이며… 사람들은 시체가 된 후에만 우리를 그 자리에서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한 이 글은 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결과를 미리 써놓은 듯 하다. 정권을 장악한 히틀러는 각종 긴급조치와 법률개정을 통해 독일을 광란의 도가니로 몰고 갔다. 그를 견제하는 세력들은 총살당하거나 비참하게 일선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1923년 히틀러와 함께 쿠데타를 일으켰던 루덴도르프 장군은 힌데부르크 대통령에게 ‘이 광적인 사내는 우리나라를 나락에 빠트리고 국민들에게 무한한 비극을 몰고 올 것’ 이라는 편지를 썼다. 하지만, 가속도가 붙은 눈 덩어리처럼 점점 크게 굴러 떨어지는 히틀러를 견제할 세력은 존재할 수 없었다. 유대인에 대한 정책도 날이 갈수록 가혹해지다가 1935년 9월 5일에 통과된 ‘뉘른베르크 법’에 의해 독일 내 유대인들을 독일인들과 격리시켰다. 즉 유대인들에게 정치적 사안에 대한 모든 투표권을 박탈하고, 관직에서 배제시켰으며 심지어 유대인과 아리아인의 결혼과 성관계마저 금지시켰다. 독일에 있던 많은 유대인들은 떠나기 시작했다.

 

 

1937년 가을부터 히틀러는 자신의 정치적 공세를 군사적 공세로 바꾸었다.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를 향한 총구는 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 독일에서도 학생과 지식인 정치인들이 광적인 독재자 히틀러를 제거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독일의 양심을 보여주었던 백장미단의 활동, 쾨르델르가 주동이 되었던 1944년의 히틀러 정권 전복 기도와 군 내부에서 일어난 히틀러 암살 기도 등이다. 전쟁 영웅이었던 롬멜 장군은 히틀러 암살 실패 사건으로 히틀러로부터 자살을 강요 받아 죽었으나 히틀러는 오히려 최대한 호화로운 국장을 치름으로써 왼손으로 오른손에 묻은 피를 닦는 정치적인 역량을 보여주었다.

 


이어서 히틀러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참극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그는 자서전 <나의 투쟁>에 이렇게 쓴다. ‘독가스로 그 타락한 히브리 민족을 1만 2천명 내지 1만 5천명 정도만 죽일 수 있다면, 전선에서 수백만 명이 희생된다고 해도 헛된 일은 아니다.’ 아우슈비츠는 유대인들의 무덤이었지만, 그것은 너무나 참혹하였기에 결국 히틀러의 거대한 무덤이었다.

 

그가 전쟁을 도발하면서 세웠던 목표는 거의 다 실패로 돌아갔다. 폐허가 된 독일. 세계의 주도권을 확보하는 대신 전 영토와 경제적 기반, 국력, 독립, 도덕성마저도 잃어버렸다. 단 하나만이 성공적이었다. 대서양에서 볼가 강 사이의 유대인들을 거의 완전하게 말살한 일이었다. 그는 자살하는 순간까지도 독일 패전 책임을 유대인에게 돌렸다. 후손들에게 인종법을 ‘철저하게’ 준수하라고 당부했다. 1945년 4월 30일 나치와 히틀러는 죽었다. 하지만 죽은 자의 영혼은 산 자의 몸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이 날은 독일인과 전 세계인이 ‘타 문화에 대한 소통’을 거부한 댓가로 얼마나 비참한 결과를 얻게 됐는지 다시금 깨닫게 된 날이다.  

 

 

<집단애국의 탄생 히틀러>(라파엘 젤리히만 지음, 생각의 나무)
‘독일국민과 히틀러의 공모, 집단 애국주의의 광기에 대한 르포르타주.’ 이 책의 부제가 설명하듯, 히틀러가 탄생하게 된 배경을 집단애국주의의 시각에서 분석했다. 히틀러의 전 생애를 조목조목 설명하면서 한 독재자의 탄생과 충성심에 열광한 국민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한 개인이 광적인 전체가 되는 과정을 독일 작가 특유의 냉철한 시각으로 분석했다. 히틀러 개인에게 초점을 맞춘 기존의 평전들에 대한 지적도 날카롭다. 현대 다원성의 존중과 통합이 필요한 우리 사회에 개인과 집단의 관계를 조명하는데도 도움이 된다. 더불어 히틀러의 저서인 <나의 투쟁>도 읽어야 할 것이다.

 

<히틀러 평전>(요하임 C 페스트 지음, 푸른숲)
기념비적인 히틀러 평전이다. 이 분야에서 정전으로 인정받고 있다. “저자는 히틀러를 시대의 반대자로 보지 않고 자기 시대의 표현으로 보았다. 또한 히틀러의 행동방식을 권력 획득과 유지에만 전적으로 고착시키지 않았다. 생존공간의 확보와 유대인 말살이라는 합목적적인 행동으로 보았다.” 이 같은 외국의 한 서평에 공감한다. 히틀러를 중심으로 20세기 전반부 유럽사와 세계사를 다루었기 때문에 매우 두꺼운 분량이다. 정치, 사상, 역사적 맥락에서 히틀러의 탄생 배경과 활동, 그리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매우 상세하게 다루었다. 그리고 이 책의 번역자인 안인희의 책 <게르만 신화 바그너 히틀러>도 함께 권한다. 2003년 올해의 논픽션 상을 수여한 이 책은 히틀러를 다른 각도로 조명한 탁월한 저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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