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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실용주의의 대통령 조르주 퐁피두

나 그 네 2009. 1. 31. 15:20

 

조르주 퐁피두


1970년대 파리의 보부르에는 특별한 건물이 들어서고 있었다. 언제나 공사중인 것 같은 건물, 밖으로 창자를 내놓은 사람처럼 아슬아슬하게 마음을 졸이게 하는 건물, 핏줄이 툭툭 불거지는 탄력적인 근육질 남성을 연상케 하는 건물이었다. 그 건물은 완공된 뒤에도 미완성인 듯이 허전함을 드러낸 채 1977년 1월 31일 개관하였다.

 

그 건물의 이름은 퐁피두 센터(Centre Pompidou), 정식 명칭은 조르주 퐁피두 국립미술문화 센터(Centre National d'Art et de Culture Georges Pompidou)였다.1960년대 후반 프랑스의 조르주 퐁피두 대통령은 예술의 도시 파리의 이미지를 획기적으로 고양시킬 묘책을 생각하느라 밤잠을 설치고 있었다. 프랑스의 파리는 근대 이후 예술가의 도시로서 확고한 지위를 구축했음에도 불구하고 급속도로 부상하는 뉴욕이나 런던에 밀리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퐁피두는 1969년 12월 파리를 세계 최고의 예술 도시로 부상시킬 문화 센터를 설립하기 위해 국제 설계 공모를 실시했다. 퐁피두는 이 사업에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공모 결과 492개의 설계도가 제출되었고, 프랑스 국내에서도 186개의 설계도가 제출되었다. 퐁피두는 국제 공모를 직접 책임지고 지휘하면서도, 자유롭고 참신한 작품을 뽑기 위해 장 프루베를 비롯한 심사위원들에게 전권을 위임했다. 그 결과 국제 무대에서는 신인급이라 할 수 있는 이탈리아의 건축가 렌조 피아노와 영국의 건축가 리처드 로저스가 설계를 맡게 되었다. 퐁피두는 당혹스러웠다. 이 막중한 사업을 아직 경험이 부족한 건축가에게 맡기는 것이 내심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그러나 참신한 아이디어를 위해 모험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피아노와 로저스는 지금까지 한번도 시도되지 않은 특별한 형식의 건물을 기획했다. 배선, 냉난방, 배관 등의 기능적인 설비들은 건물의 기둥이나 벽 속에 숨기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 건물은 이 설비들을 밖으로 도드라지게 했다. 따라서 그 설비들 또한 건축물의 외양으로서 독특한 미를 창출해야 했다. 두 사람은 구조물에는 흰색, 승강기와 도관에는 붉은색, 물에는 파란색, 전기에는 노란색, 냉난방 설비에는 파란색과 흰색을 사용함으로써 독특한 미관을 연출했다. 새로운 미술관 건설은 1972년에 착공되어 착착 무리 없이 진행되었다. 이 건물은 주어진 예산(4억 7,600프랑)에 맞추어 정확한 일정에 따라 착공 5년 만에 개관하기로 했다. 그것이 국민과의 약속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퐁피두는 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미술관 완공을 보지 못하고 1974년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그의 열정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이 미술관에는 ‘퐁피두 센터’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개관 당시 상당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 내장을 드러낸 모습이 흉측하다는 평도 있었고, 주변 환경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그 진가가 높아져 세계 최고의 건축물 중 하나로 꼽히게 되었다. 건축평론가 함성호는 퐁피두 센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퐁피두 센터의 건설은 건축에 대한 관념을 획기적으로 뒤집은 일대 사건이었다. 안으로 들어가야 할 것들을 밖으로 내보내고 내부를 최대한으로 활용하는 발상은 의표를 찌르는 것이었다. 내부를 고스란히 활용할 수 있게 되니 전시장으로서는 그야말로 안성맞춤이었다. 퐁피두는 외양보다는 실용을 중시하는 극단적인 기능주의를 채택한 셈이었고, 그것이 바로 그의 정치 이념이기도 했다. 퐁피두 센터는 프랑스에서 건축예술과 정치 이념이 조화를 이룬 본보기가 되었다. 나중에 미테랑의 바스티유 오페라극장이 뒤를 이었다.”

 

1977년 퐁피두 센터의 개막은 파리의 사회와 문화에 크게 이바지했다. 하루 2만5천여 명의 방문객이 찾는 퐁피두는 현대 예술의 메카가 되었다. 사람들은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건물에 흥미를 느끼고 오르락내리락하기도 하고 옥상에서 파리의 풍광을 구경하기도 한다. 퐁피두 센터는 루브르와 오르세에 이어 파리의 3대 국립 미술관으로 꼽히는데,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품과 그 이전의 작품을 주로 소장한 루브르 박물관과 19세기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는 오르세 미술관과 달리 20세기 이후 현대미술 작품을 다루는 퐁피두 센터는 가장 활력 있는 예술 현장이 되었다. 파리에 가면 거리마다 넘쳐 흐르는 예술의 향기에 푹 취하게 되는데, 파리가 여전히 예술의 도시로서 세계 최고의 각광을 받는 데에는 일찍이 문화산업의 중요성을 깨달은 퐁피두 대통령의 혜안이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조르주 퐁피두는 1911년 7월 5일 프랑스의 몽부디에서 교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그도 교사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중위로 참전해 훈장을 받았고 평범한 시민으로 만족스런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44년 말 프랑스 임시정부의 수반이었던 샤를르 드 골을 만나면서 정치에 입문하게 된다. 퐁피두의 정치력은 생각보다 탁월해서 누구보다 설득력 있게 드골의 정책을 설명하고 소개했다. 그에 대한 드골의 신임은 날로 두터워졌다.

 

1946년까지 퐁피두는 드 골의 개인 참모로 일했으며, 드 골이 1946년 1월 갑자기 사임한 뒤에는 그의 ‘재야 내각’의 일원이 되었다. 그 후 관광청장 보좌관, 프랑스 최고행정재판소인 국참사원 청원의원으로 일했다. 1955년에는 파리의 로트실 은행에 들어갔는데, 은행에서도 그의 능력은 크게 인정받아 1959년 은행장이 되었다. 당시 퐁피두는 정치를 떠나 있으면서도 드골과의 인연은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다. 1958년 6월 드 골은 다시 권력을 잡고 퐁피두를 수석 보좌관으로 임명했다.

 

퐁피두는 제5공화국 헌법을 초안하고 프랑스의 경제개발계획을 세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59년 1월 드 골이 대통령에 취임하자 퐁피두는 다시 은행으로 돌아갔다. 1961년 그는 알제리 민족해방전선(FLN)과의 비밀협상을 위해 알제리로 파견되었다. 그의 활동 덕분에 프랑스군과 알제리 게릴라의 휴전이 이루어졌다. 알제리 사태가 해결되자 드 골은 퐁피두를 미셸 드브레의 뒤를 이어 총리에 임명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퐁피두는 1962년 4월 총리에 취임할 때까지 사실상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퐁피두는 1968년까지 총 6년 3개월을 총리로 재직했다.

 

 

1968년 5월 이른바 ‘68혁명’이 일어났을 때 퐁피두의 정치력이 다시 한번 놀라운 힘을 발휘했다. 그는 노동자와 사용자 간의 협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한편 드 골에게 적절한 개혁조치를 취할 것을 건의했다. 5월 27일 그레넬 협정이 체결됨으로써 마침내 파업이 종료되었다. 법과 질서의 회복을 요구하는 퐁피두의 선거운동 덕분에 드 골파는 1968년 6월 30일 국민의회 선거에서 압도적인 다수 의석을 차지할 수 있었다. 퐁피두는 1968년 7월 총리직에서 해임되었지만, 한번 끓어오른 그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다. 1969년 4월 드 골이 갑자기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자, 퐁피두는 1969년 6월 15일 제2차 투표에서 58% 이상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대통령에 취임한 퐁피두는 드 골이 착수했던 정책들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여 속속 성공을 거두었다. 대외관계는 난관에 부딪히기도 했지만, 내적으로는 매우 안정적인 태평성대를 구가하였다. 그의 재임 시절에 빛을 보지 못했지만, 퐁피두 센터의 건설 또한 보이지 않는 업적이었다.

 

 

1974년 4월2일, 퐁피두 대통령은 예기치 않게 세상을 떠나게 된다. 희귀질환인 매크로글로불린혈증이 원인이었다. 퐁피두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빈자리가 된 대통령직은 상원의장인 알랭 포에르가 임시로 대행했다. 퐁피두는 큰 업적을 많이 남겼지만, 그가 앞으로도 큰일을 해주기를 바랬던 국민들에게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2008년 11월 퐁피두 센터의 주요 소장품들이 한국에 나들이를 왔다. 이 전시는 단순히 퐁피두 센터의 소장품을 옮겨온 것이 아니라 ‘천국의 이미지’라는 주제에 맞게 구성되었다. 실커튼에 투사되는 니콜라 푸생의 <아르카디아의 목자들>을 통과하여 사람들은 화가들이 그린 천국의 이미지 속으로 들어간다. 호앙 미로와 앙리 마티스와 에두아르 마네의 대작 앞에서 사람들은 쉬 자리를 뜨지 못한다. 제우제페 페노네의 <그늘을 들이마시다>가 풍기는 월계수 향기 속에 푹 빠져 오랫동안 눈을 감고 깊게 호흡하기도 한다.


 

페르낭 레제의 작품은 퐁피두 센터의 독특한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레제는 그림 속에 등장하는 대상들 모두에 굵고 검은 테두리를 만들어주었다. 그러고 보니 레제의 그림은 건축물의 구성요소에 일일이 테두리를 입힌 것 같은 퐁피두 센터의 강렬한 이미지와 연결된다. 퐁피두 센터 안에서  레제의 그림을 보면 현대미술의 꿈틀거리는 영혼과 육체를 황홀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퐁피두 센터의 낯선 이미지는 레제의 그림처럼 거부감도 주었지만 그보다 먼저 인간의 호기심을 강렬하게 자극했다. 그러면서도 실용적인 내부공간은 관람객의 마음을 편안하게 위무한다. 퐁피두 센터를 설계한 피아노는 이렇게 말한다. “이 건물은 박물관의 기존 개념을 야유하는 것입니다. 1970년대 초기, 우리들은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습니다. 하나는 제도적이며 심원하고 매우 조심스러운 것이며, 다른 하나는 형식을 갖추지 않은 개방적인 것으로 일반 시민에게도 친근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들은 후자를 선택한 것입니다.” 

 

위대한 탄생의 출발은 대체로 모험이었다. 퐁피두 센터에 전시된  걸작이 대부분 모험을 통해 탄생한 것임을 우리는 새삼 깨닫는다. 모험을 기꺼이 감행한 예술가와 건축가와 대통령 덕에 퐁피두 센터는 이렇게 프랑스만의 것이 아닌 세계 문화의 젖줄이 되었다.

 

 

<우리 세계의 70가지 경이로운 건축물>(닐 파킨 엮음, 오늘의책) “신이시여, 진정 우리 인간이 이 건물을 지었단 말입니까?” 인간이 자신의 불가사의한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한 영역이 바로 건축일 것이다. 건축은 예술 양식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는 점에서도 우리를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는다. 자, 여기 세계 최고의 건축물들이 책 속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 중에서 퐁피두 센터는 다른 건축물에 비해 이질적이다. 다른 위대한 건축물들이 첫인상부터 압도적인 힘을 발휘한다면, 퐁피두 센터는 보면 볼수록 재미있고 아기자기하며 실용적이면서 친근하다.


 

우리 세계의 70가지 경이로운 건출물화가들의 천국

 

프랑스 국립 퐁피두 센터 특별전 도록, <화가들의 천국>(지앤씨미디어)

이 도록에는 특별한 스토리가 있다. 현대 화가들이 그린 천국의 이미지를 드라마틱하게 재구성했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퐁피두 센터 특별전’은 20세기 화가들이 천국의 이미지를 어떻게 현대적인 방식으로 표현했는지 흥미롭게 보여준다. 회화, 설치, 영상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 80여 점이 나와있다. 기획자들은 천국의 이미지 속에서 황금시대, 전령사, 낙원, 되찾은 낙원, 풍요, 허무, 쾌락, 조화, 암흑, 그리고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 등 열 가지 주제를 끌어 냈다. 그 이미지들은 모두 먼 과거에 있었던 파라다이스에 대한 열망이요, 먼 미래에 도달할 유토피아에 대한 염원이다. 열망과 염원을 품고도 화가들이 때로는 캄캄한 암흑 속에서 절망했음을, 그 절망 속에 또한 어김없이 꿈이 자리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