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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귀비

나 그 네 2009. 6. 15. 12:53

양귀비


서쪽으로 도성 문 백여 리를 나오더니. / 어찌 하리오! 호위하던 여섯 군대 모두 멈추어서네 / 아름다운 미녀 굴러 떨어져 말 앞에서 죽으니 / 꽃비녀 땅에 떨어져도 줍는 이 아무도 없고, / 비취깃털, 공작비녀, 옥비녀마저도. / 황제는 차마 보지 못해 얼굴을 가리고 / 돌아보니 피눈물이 흘러내리네. - 백거이 <장한가> 중에서

 

 

위는 당나라를 대표하는 시인 백거이가 당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노래한 서사시 <장한가>에서 묘사한 양귀비의 죽음이다. 시 속에서 양귀비를 총애하던 황제는 사랑하는 여자의 죽음을 외면하며 오로지 피눈물만 흘리는 소극적이고 비겁한 남자일 뿐이다. 안사의 난’을 피해 쓰촨으로 도망가던 당나라 6대 황제 현종의 가마가 마외파에 이르렀을 때였다. 호위하던 병사들이 소동을 일으켰다. 나라를 망친 양귀비와 그 일족을 죽이지 않으면 한 발짝도 나가지 않겠다고 주저앉은 것이다. 뒤에선 안록산의 군대가 쫓아오고 피난 가마는 조금도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자 다급해진 현종은 병사들의 요구를 들어 줄 수밖에 없었다. 양귀비의 일족은 병사들에게 내어주어 주살하게 했고 사랑해 마지않던 총비 양귀비는 내팽개쳤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고 자신의 목숨보다 더 귀하다고 했던 양귀비가 환관 고력사의 손에 이끌려 죽으러 가는 것을 그저 수수방관할 뿐이었다. 양귀비는 마외파 인근 불당 앞 배나무에 비단천으로 목을 매어 죽었다. 자결했다고도 하고 고력사가 죽였다고도 한다. 당시 양귀비의 나이 38세였다. 나라를 기울게 할 만큼 아름다웠다는 여인, 경국지색(傾國之色) 양귀비의 10여 년 권세는 이렇게 끝이 났다.

 

 

양귀비는 서시, 왕소군, 초선과 더불어 중국의 4대미인 중 한 사람이다. 사람의 마음을 미혹하고 중독시키는 아편 꽃에 양귀비란 이름을 붙인 걸 보면 그녀의 미모는 어지간히도 치명적이었던 것 같다. 본명은 양옥환이며 잠시 도가에 입문했을 때 법명은 태진(太眞)이다. 산시성 출신이지만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고 쓰촨성 관리이던 숙부 양립의 집에서 자랐다. 양옥환은 노래와 춤에 능하고 미모가 출중해 17세에 당 현종의 18번째 아들인 수왕 이모의 비가 되었다. 수왕 이모는 당 현종과 무혜비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로 황제계승권으로부터는 멀리 떨어진 수많은 왕자 중 한 명에 불과했다.

 

 

 

양옥환과 수왕의 사이가 어땠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별 풍파 없이 양옥환이 수왕과 6년간 결혼생활을 이어간 것을 보면 그다지 나쁜 사이는 아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당 현종의 눈에 띄지 않았다면 양옥환은 수왕 이모와 천수를 다하며 해로하였을지도 모르고, 당나라도 혼란에 휩싸여 자멸의 길로 걸어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인박명이라는 말이 있지 않던가.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타고난 자의 운명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았다.

 

6년간 수왕 이모의 아내로 살던 스물세 살의 양옥환은 현종 처소의 환관인 고력사의 은밀한 방문을 받는다. 고력사는 총애했던 무혜비가 죽고 나서 외로워하는 현종을 위로하기 위해 중국전역의 미녀들을 백방으로 수소문하였다. 그 중에 수왕 이모의 아내 양옥환이 특히 아름답다고 들은 고력사는 그녀를 현종의 술자리로 불러낸다. 양옥환은 이 자리에서 음악 애호가였던 현종이 연주하는 가락에 맞춰 자신의 장기인 아름다운 춤을 선보였다. 춤이 끝나기 전에 남녀 간에 이루어질 수 있는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당시 예순을 바라보던 현종의 마음에 사랑의 불길이 당겨진 것이다. 현종은 양옥환이 아들의 아내라는 사실도 잊은 채 아름다운 그녀를 품기 위해 전전긍긍한다. 망설이는 양옥환을 고력사가 특별히 파견한 궁녀들이 설득하기 시작했고 물량공세와 구애가 이어졌다. 마침내 양옥환은 수왕을 버리고 그 아버지 현종의 여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아무리 황제라 하더라도 주위의 눈은 신경 쓰이는 법. 아들의 아내를 바로 빼앗을 수 없었던 현종은 일단 양옥환을 화산으로 보내 도교의 도사로 입문시킨다. 도가에서는 일단 입문을 하면 그 이전에 있었던 속세의 일들은 다 지워지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현종은 이런 도가사상을 자기의 몰염치한 사랑에 이용했다. 이때 양옥환은 태진이라는 도호를 얻었다. 그 사이 미안해진 아들 수왕에게는 위씨 성을 가진 여인과 재혼하도록 주선하였다. 마침내 모든 일이 매끄럽게 처리되고 현종은 꿈에도 그리던 여인을 맞을 수 있게 되었다. 일단 도사를 모셔와 가르침을 받는다는 핑계로 태진궁을 짓고 그곳에 양옥환을 살게 하였다. 이때부터 태진궁은 그들만의 사랑을 나누는 장소가 되었다. 이후 양옥환은 27세가 되던 해 귀비 책봉을 받아 양귀비가 되었다. 양귀비는 비록 비의 신분이었지만 현종이 황후의 자리를 비워둔 채 지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황후와 다름없는 귄력을 휘둘렀다. 현종이 양귀비를 맞으면서 당나라는 큰 변화를 맞이한다. 현종은 젊었을 때 꽤나 정치에 소질이 있는 황제였다. 치세 전반기는 현종의 연호를 따 <개원(開元)의 치(治)> 라는 칭송을 받으며 중국 역사상 몇 안 되는 태평성세를 구가하였다. 그러나 기나긴 태평성세에 마음이 해이해진 현종은 양귀비를 맞으면서 사랑에 눈이 멀어 정치는 관심 밖의 일이 되고 말았다. 양귀비를 낀 환관과 탐관오리가 득세하면서 부정부패가 만연했고 백성들의 삶은 급속히 몰락해 민심은 흉흉해졌다.

 

 

그러나 현종에게는 오로지 양귀비뿐이었다. 현종은 양귀비를 위해 누대로 유명한 온천, 화청지에 궁을 짓고 오로지 양귀비와 사랑하는 일에만 전념하였다. 양귀비를 자신의 말을 이해하는 꽃. 즉 해어화(解語花)라 부르며 양귀비의 아름다움 앞에는 꽃조차도 부끄러워한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양귀비가 즐겨 먹는다는 이유로 2천리 밖에서 열리는 과실 여주를 매일 공수해오도록 하였고 양귀비가 원하는 모든 사치를 다 누리도록 해주었다. 더불어 그녀의 친인척을 궁과 관직에 대거 등용하였다. 양귀비의 세 자매까지 한국(韓國)·괵국(虢國)·진국부인(秦國夫人)에 봉해졌다. 이때 등용된 양귀비의 6촌 오빠 양소는 건달출신의 부도덕한 간신배였지만 현종에게서 국충(國忠)이라는 이름까지 하사 받았다. 양국충은 당 현종 말기의 대표적 부패권력이었으며 종내는 안사의 난이 일어나는 빌미를 제공한 인물이다.

 

 

 

양귀비는 현종의 사랑을 영원히 붙잡아 두려고 매번 새로운 화장법을 개발하였고 또 목욕을 즐겨 늘 희고 매끄러운 피부를 유지하였다고 한다. 양귀비는 날씬하고 가녀린 미녀와는 거리가 멀었다. 역사서에는 그녀의 용모를 ‘자질풍염(資質豊艷)’이라 하였는데 이는 풍만하고 농염하다는 의미이다. 통통한 몸매에 희고 매끄러운 피부를 가졌던 양귀비는 매일 온천물에 몸을 닦고 새로운 화장법으로 미모를 가꾸어 밤이나 낮이나 당 현종을 자신의 침실로 이끌었다. 백거이는 <장한가>에서 양귀비와 현종의 사랑을 이렇게 노래하였다.

 

연꽃 휘장 속에서 보낸 뜨거운 봄밤
봄밤에 너무 짧아 해가 높이 솟았구나.
황제는 이날 이후 조회에도 안 나오네
후궁에 미인들은 3천명이나 되었지만
3천명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네.
금으로 치장한 궁궐에서 화장을 끝내고 기다리는 밤
백옥누각에 잔치 끝나면 피어나는 봄

 

 

‘화무십일홍 권불십년(花無十日紅 權不十年 꽃은 열흘 붉은 것이 없고 권세는 10년을 가지 못 한다)’ 이란 말이 있듯이 양귀비의 권세도 오래가지 못했다. 양귀비의 몰락은 현종 외에 양귀비가 총애하던 두 남자 사이의 알력에서 시작되었다. 양귀비는 중국 변방 돌궐족 출신인 안록산을 가까이 하였다. 안록산은 일개 군졸에서 시작하여 용맹으로 공을 세워 일약 중앙정계로 진출한 인물이었다.

 


20대의 양귀비는 40대의 안록산을 수양아들로 삼고 그를 매우 가까이 하였다. 일설에는 양귀비가 안록산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현종은 안록산과 양귀비의 관계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양귀비가 안록산을 총애하는 것만큼 더욱 안록산을 높은 지위로 등용하였다. 그것이 양귀비의 6촌 오빠인 양국충과 안록산 사이에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양국충은 안록산의 성장에 위협을 느끼고 그를 제거하려 하였다. 이를 눈치 챈 안록산은 변방에서 난을 일으키고 곧이어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까지 쳐들어 왔다. 이것이 바로 안사의 난이다.

 

현종은 양귀비를 데리고 서쪽으로 피난을 떠났다. 장안에서 100여리쯤 가 섬서성 마외파에 도착했을 때였다. 성난 군중들과 현종을 호위하던 병사들은 나라꼴을 이렇게 만든 양귀비와 그 일족들을 처벌하기를 원했다.

 

현종은 사랑과 목숨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만 했다. 그는 양귀비와 함께 장렬히 죽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종은 양귀비를 보호하지 않고 그녀에 대한 백성의 분노를 수수방관함으로써 그녀에게 죽음을 종용하였다. 정치를 내팽개치고 나라를 몰락하게 만든 모든 책임을 양귀비에게 덮어씌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현종은 사랑보다는 자신의 목숨을 선택했다. 결국 현종의 뜻을 알아차린 환관 고력사가 그녀를 죽음으로 이끌었다. 양귀비가 자결 아닌 자결로 생을 마감하고 나자 현종은 그녀의 시체를 수습해 인근 조그마한 산에서 장사 지냈다.

 

양귀비가 죽고 간신히 피난길을 떠났던 현종은 황위를 아들 숙종에게 물려주고 태상황이 되었다. 이후 그는 숙종에게 안사의 난을 진압하도록 모든 것을 맡긴 채 자신은 양귀비만 그리워하면서 지냈다고 한다. 현종은 양귀비의 초상화를 앞에 두고 끝내 그녀를 지키지 못한 회한과 그리움 속에서 6년 세월을 보내다가 762년 78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양귀비의 죽음에 대해서는 또 다른 재미있는 전설이 하나 있다. 양귀비의 아름다움이 너무나 대단해 고력사나 따라간 군졸들이 차마 죽이지 못하여 그녀를 일본으로 탈출시켰다는 이야기이다. 일본으로 건너간 양귀비는 30여 년을 일본에서 더 살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유물과 사당, 무덤이 일본 야마구치현에 남아 있는데, 실제로 양귀비의 후손이라고 족보까지 들고 나선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동양을 대표하는 미인으로 회자되는 양귀비지만 의외로 그녀에 대한 책은 그다지 많지 않다. <후비 황제를 지배한 여인들> (샹관핑저 한정민역) 은 중국 전한왕조의 건립 후기부터 청나라까지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후비들을 선택하여 봉건사회의 특수한 신분에 속했던 그녀들을 통해 당시 사회를 연구한 책이다. 그 중 <강요에 못 이겨 자살한 후비> 편에서 안사의 난 속에서 희생된 양귀비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후비 황제를 지배한 여인들양귀비 사랑과 배반에 관한 보고서

<양귀비 사랑과 배반에 관한 보고서> (나재훈 저, 들마루)는 소설로 당나라 멸망사의 한 가운데 위치한 양귀비의 사랑과 배반을 다루었다. 남성들의 권력 다툼 속에서 희생될 수밖에 없었던 양귀비의 삶을 연민으로 그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