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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탕한 여왕? 사랑에 목마른 여인

나 그 네 2009. 11. 22. 09:56

음탕한 여왕? 사랑에 목마른 여인

함규진의 한국사를 움직인 만남 <3>진성여왕과 김위홍

 

마치 불꽃처럼 영혼을 태우는 만남이 있다. 반드시 남녀 간의 만남이 아니다. 스승과 제자, 주군과 신하, 동지나 친구 사이에서도 그런 만남이 이루어져 당사자들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기도 한다. 처음 만난 순간 심장이 같은 박자로 뛰는 소리를 듣는다. 서로의 눈빛에서 운명의 메시지를 읽는다. 물과 고기처럼 단지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수준을 넘어, 하나의 영혼으로 타오른다. 그러나 불이란 때와 장소를 가려야 환영받는 법. 두 사람의 열정이 세상의 눈에는 일탈로, 패륜으로 비칠 때도 있다. 시대가 허락하지 않기도 한다. 그러면 결국 그 만남의 끝은 한없는 미련, 또는 잔혹한 파멸일 뿐이다. 때로 그런 금지된 불꽃은 스스로를 소멸시킬 뿐 아니라, 자신을 핍박하는 세상까지 태워버리기도 한다.

“···어느 이른 가을날, 찬 바람에 여기 저기 떨어지는 잎과도 같이, 한 가지에서 함께 자랐건만 서로를 덧없이 보내야 하는가. 아, 극락에서 다시 만나리라. 도를 닦으며 그날 기다리리라.”
“월명 스님의 ‘제망매가’로군요···. 아름답습니다. 우리 신라의 향가는 정말 아름다워요.”
각간(角干) 김위홍은 이렇게 말하는 여왕의 얼굴에 미소를 보냈다. 그리고 속삭였다.
“이건 어떻습니까? ‘헌화가’입니다. ···저 자줏빛 바위 가에 암소를 묶어 두게 하소서.
저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면, 꽃을 꺾어 바치게 하소서.”
“아···.”

위홍은 손을 들어 궁궐의 화단에서 자줏빛 패랭이꽃 한 송이를 꺾었다. 그리고 그것을 여왕에게 내밀었다.
“아, 숙부님···.”
두 사람의 눈길이 마주쳤다. 그리고 얽혔다. 꽃 향기 자욱한 화원에서, 두 사람은 읽고 있던 책을 내던진 채 서로를 언제까지나 바라보았다.

신라 제51대 왕 진성여왕과 각간 위홍과의 사랑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녀가 유독 음란하고 방탕했기 때문에 신라가 망했다는 이야기 역시 상식에 속한다.
하지만 기록에서 드러나는 여왕의 모습은 그런 ‘팜므 파탈’과는 거리가 멀다. 진성여왕 김만(金曼)은 49대 왕 헌강왕의 누이였는데, 헌강왕의 남동생 정강왕이 즉위했다가 1년 만에 후사 없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정강왕은 그녀가 “천품이 명민하고 남자 못지않은 체격이다”고 했으며, 최치원이 쓴 ‘사사위표’에는 “욕심이 없고 말을 아껴 쓰며, 호젓함을 좋아한다”고 되어 있다. ‘고혹적인 요부’보다는 ‘수더분한 모범 여학생’ 같은 인상이다.

그녀와 사랑을 나눈 김위홍은 헌강왕 때 귀족의 최고 지위인 상대등을 지내고 당시는 은퇴해 있었던 듯한데, 진성여왕은 역대 향가를 총망라해 ‘삼대목’이라는 책을 엮는다는 명목으로 그를 궁궐에 자주 출입시켰다. 아마도 오붓한 시간을 보내려는 의도였으리라. 그런데 위홍은 그녀에게는 숙부뻘이었고, 그녀의 유모였던 부호 부인의 남편이기도 했다. 따라서 그들의 사랑은 ‘패륜, 불륜’이라고 후대에 손가락질당했다.

그러나 그것은 후대의 기준이며, 신라 귀족사회는 근친 간의 사랑과 자유연애에 상당히 관대했다. 김유신도 조카딸인 영모와 결혼했으며, ‘화랑세기’에 의하면 미실은 남편을 둔 상태에서 버젓이 다른 남자들과 사귀었다. 그리고 선덕여왕 역시 숙부 용춘을 남편으로 삼고 있었다. 그렇게 보면 진성여왕이 특별히 세상을 뒤흔들 스캔들을 저질렀다고는 하기 어렵다.

그러나 역시 그들의 사랑은 해서는 안 될 사랑이었다. 두 사람 모두에게, 나아가 신라에 치명적이었다. 한국사에서 유일하게 여왕을 배출한 신라 왕조지만, 여성의 권리가 남성과 동등했거나 앞서 있었던 것은 아니다. 여왕은 대를 이을 장성한 남자 왕족이 하나도 없는 경우에만 할 수 없이 인정되었다. 그리고 대안이 될 남자가 생기면 교체의 압력을 받았다. 선덕, 진덕, 진성 세 여왕 중 친자식으로 대를 이은 경우는 하나도 없다.

이런 차별의식은 진성의 시대에 더욱 심해져 47대 헌안왕은 “과거 두 여왕이 있었으나 이는 잘못된 일이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더구나 당시는 지방 호족들이 중앙에 대항해 힘을 키우고, 왕위를 둘러싼 왕족들끼리의 골육상쟁과 체제의 부패는 백성들의 마음이 신라에서 멀어지게 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왕권을 튼튼히 하고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곧추 세울 시대적 사명이 요구되었고, 진성여왕은 그에 충실히 부응했다.

즉위 즉시 죄수를 사면하고 1년분의 조세를 면제하여 민심을 다잡는 한편, 최치원을 기용해 개혁정책을 추진하려 했다. 또 당시 장안의 화제가 된 효녀 지은과 그녀를 도운 효종랑의 미담을 듣자 두 사람에게 커다란 상을 내려, 미담을 더욱 부풀리고 효종랑의 명예를 드높였다. 친자식을 내세울 수 없던 진성여왕은 화랑과 백성 사이에 인기가 있는 효종랑을 후계자로 키우려 했던 것 같다. 마치 선덕여왕이 김춘추와 김유신을 키워 허약한 왕권을 강화했듯.

그러나 모든 것이 일순간에 무너졌다. 각간 위홍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 뒤의 진성여왕은 이성을 잃어버린 것 같다. “젊은 남자 여러 명과 놀아나면서 국정을 외면하여, 기강이 땅에 떨어졌다”는 것이다. 이는 그녀를 비방하는 여론이 만든 과장된 소문일 수도 있으나, 어차피 소문이든 실제든 상관없었다. 모두 ‘기회는 이때다’ 하고 그녀에게 비난을 퍼부었기 때문이다. 거인(巨仁)이라는 은퇴한 귀족은 여왕을 노골적으로 헐뜯는 대자보를 쓰고 구속되었다가, 풀려나서는 영웅 대접을 받았다.

지방 호족들은 “여왕은 음탕하며, 정부는 썩었다”는 명분으로 속속 반란을 일으켰다. 그중에는 궁예와 견훤도 있었다. 중앙 귀족들은 모든 문제의 책임을 여왕에게 돌리고, 물러날 것을 강요했다. 후계자는 그녀가 점 찍었던 효종랑이 아니라 별안간 나타난 ‘헌강왕이 숨겨뒀던 서자’ 요(嶢)였다. 정말 그가 선대왕의 핏줄이었는지 의심스럽다.

이미 정치에도 삶에도 뜻을 잃은 그녀의 떠나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그녀는 해인사에 들어갔다가 한 달 만에 숨을 거두었다. ‘극락에서 기다리고 있을’ 사람을 따라가듯이. 그녀 이후 신라는 다시는 개혁을 시도하지 못했고, ‘후삼국 시대’를 거쳐 멸망했다.

그 시대는 사랑할 때가 아니었을 것이다. 호젓하게 향가를 읊으며 사랑의 밀어를 나누기보다 개혁을 위해 온 힘을 다 쏟아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중대한 사명이라도 사랑의 위안 없이는 지탱하기 어렵다. 그 불길이 영혼을 태우고 나면, 삶과 권력을 위한 힘은 이미 없다. 시대는 비정한 길을 가지 못한 여왕을 잔인하게 벌했고, 그 결과 시대 스스로가 처벌받았다.

해인사에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목불이라는 쌍둥이 불상이 있다. 그런데 전설에 따르면 그것이 바로 진성여왕과 김위홍을 상징하는 불상이라 한다. 사실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사랑의 아픔과 슬픔을 아는 마음은 그 전설을 사실이라 믿도록 한다. 그렇다면 두 사람이 피운 불꽃의 잔재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던 시대를 아득히 넘어, 오늘날까지 아름다운 모습으로 반짝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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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 정치학 박사로 현재 성균관대 부설 국가경영전략연구소 연구원으로 있다. 『정약용 정치사상의 재조명』『왕의 투쟁』등의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