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일보 강동욱 기자의 글을 퍼왔습니다.
남명의 자형집이 있었던 진주 금산 가방리
남명이 자주 들렀던 진주시 금산면 가방리
1558년 남명은 진주목사 김홍, 고령현감 이희안 등과 지리산을 유람하였다. 이해 4월 11일 합천의 계부당(현재 합천군 삼가면 토동 뇌룡정 근처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음)에서 식사를 하고 여정에 올라 저녁 무렵 진주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이때 남명이 하룻밤을 묵은 곳은 자형인 이공량의 집이었다.
남명의 자형 이공량은 현재 진주시 금산면 가방리에 살고 있었다. 금산면 가방리는 고려때부터 마을이 있었던 곳으로 조선조에는 진주대여촌면의 속리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대여촌면 기동 가방동 사곡동 각 일부를 합하여 가방리라고 하였다.
이공량은 가방리 관방(冠坊)에 살았는데, 예부터 선비들이 많이 배출되어 관방(또는 갓방)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관방에는 전의(全義) 이씨들이 대대로 살아왔는데, 지금은 거의 살고 있지 않다. 이공량의아들 이준민이 서울로 이주하게 되면서부터 전의이씨들이 서울로 이주하였다는 말이 전해 온다.
남명은 진주 금산의 자형집에서 13일까지 머물면서 진주목사를 지냈던 김홍이 소를 잡고 주악을 베풀어 마음껏 술을 마시며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기자는 남명의 자형 이공량이 살았던 진주시 금산면 가방리 관방을 찾았다. 남명이 묵었던 이공량의 집은 흔적이 없지만, 이 곳에서 남명의 숨결은 찾을 수가 있었다.
금산면 관방에는 임천서원(臨川書院)이 있다. 임천서원은 1702년(숙종 28년)에 창건되어 이 지역 선비들인 신암(新庵) 이준민(李俊民) 성재(誠齋) 강응태(姜應台) 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 창주(滄洲) 하징 조은(釣隱) 한몽삼(韓夢參)의 학덕을 기리고 있다.
임천서원에 배향된 이준민은 남명의 생질이며, 성여신은 제자이다. 하징과 한몽삼은 남명에게 직접 배우지는 않았지만 남명의 학문을 본받고자 한 사숙인이다.
현재 금산면 가방리 관방에 있는 임천서원은 본래 영모당(永慕堂) 자리에 지어진 것이다. 영모당이 바로 남명 자형 이공량이 부친인 진사 이정윤(李貞胤)의 뜻을 이어 지은 집이다.
이 영모당 자리에 임천서원을 세워 이준민 등을 향사했는데, 이때 영모당이 강당으로 쓰였다. 그러다가 고종때 서원 훼철령으로 임천서원이 헐리게 될 운명에 처하자 후손들이 당시 정현석 진주목사에게 영모당이 먼저 지어졌고, 서원이 뒤에 들어섰다는 이야기를 하여 영모당은 훼철을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는 영모당은 없다. 언제 없어졌는지도 모른다.
다만 영모당 터는 남아있다. 지금은 폐교된 가방초등학교 입구 남동쪽 임천서원오선생위패매안단비(臨川書院五先生位牌埋安壇碑)가 있는 곳이다. 임천서원 훼철 때 모셨던 위패를 묻은 장소이다.
지금은 대숲으로 둘러싸여 흔적조차 찾기 힘들게 되어있다. 금산에서 태어나고 자란 금산면 문병윤 총무계장은 “우리 어릴때만 해도 여기에 담장이 있었고, 앞 문으로 들어가게 되어있었는데 지금은 너무 황폐해졌다.” 고 하면서 “옛날 서원 터여서 그런건지 언덕처럼 넓은 공간이어서 많이 놀기도 했다”며 임천서원이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증언해 주었다.
“두류산 산골짜기 물이 타투어 흘러와 굽이틀어 남강이 되는 곳이 바로 진양의 촉석루가 있는 곳이다. 이 물이 다시 동남쪽으로 넓은 들판을 삼키기도 하고 토하기도 하면서 수십리쯤 달려 내려온 것이 바로 가방의 관개리이다. 마을 어구에는 검푸른 물이 거울처럼 펼쳐져 있고 푸른 산이 뼈를 드러낸 듯하다.”
남명이 지은 영모당 기문의 앞부분이다. 500년전의 금산면 가방리 모습을 남명이 묘사한 글이다.
남명의 자형 이공량의 집이 현재 폐교된 가방초등학교 인근에 있었던 것 같다. 남명은 영모당 기문에 “그 꼭대기에 훌륭한 집이 우뚝 솟아 있고 ‘읍벽’이라는 편액을 걸어두었는데, 이 집이 바로 이 진사 어른이 옛날 살던 집이다”라고 하였다. 영모당이 바로 이 읍벽당 밖 남쪽을 향한 사방 두어발 되는 터에 지어진 것이다. 남명이 자주 들렀을 금산면 가방리 영모당. 지금은 없어졌지만 그 흔적은 남아 남명의 숨결을 전한다.
남명선생이 지은 영모당 기문은 미천면 동향마을 전의 이씨 재실인 경모재에 걸려있다. 금산면 영모당 기문이 어떻게 해서 미천면 경모재에 걸려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 기문이 있어야 할 곳이 없어졌기 때문에 후손들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금산면은 퇴계 선생이 다녀간 곳으로 알려져 있다. 퇴계 선생이 청곡사를 지나가면서 지은 시는 지금 돌에 새겨 후대에 길이 전하고 있다. 남명 선생은 퇴계 선생보다 자주 금산면에 들렀다. 하지만 금산면에는 남명에 관한 그 어떤 기념물도 없다. 기자는 남명이 자주 들렀을 영모당 터를 내려오면서 안타까운 마음 금할 수 없었다. 강동욱/kdo@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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