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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경주 최부자댁 구경하기

나 그 네 2010. 3. 6. 19:00

경주 최부자댁 구경하기

경주 최부자댁 구경하기

경주 최 부자의 어리석은 듯 드러나지 않는 버금감- 둔차(鈍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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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불3대(富不三代) 권불십년(權不十年)이란 말이 있듯이 부와 권력은 고금을 통해서 오래도록 유지해 나가기가 어려운 법이다.아주 가끔 내가 하는 일이 계획대로 되지 않거나 목표에 미달 되었을 때, 또는 남과 비교하여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았을 때, 내 스스로를 위안하고자 다산(茶山) 정약용의 시(詩)를 떠 올린다. 글귀 하나하나 상세히 다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물 좋으면 되었지 정자(亭子)까지 좋을 수야 있나?" 하며 위안을 삼는 글이다.
          독소(獨笑, 홀로 웃다 ) --- 정약용(丁若鏞) 有粟無人食 --- 유율무인식
          양식 많은 집엔 자식이 귀하고 多男必患飢--- 다남필환기
          아들 많은 집엔 굶주림이 있으며, 達官必창愚 --- 달관필창우
          높은 벼슬아치는 꼭 멍청하고
          * 창(春-日+臼+心) 才者無所施 --- 재자무소시
          재주있는 인재는 재주 펼 길 없으며, 家室少完福 --- 가실소완복
          집안에 완전한 복을 갖춘 집 드물고 至道常陵遲--- 지도상릉지
          지극한 도는 늘상 쇠퇴하기 마련이며, 翁嗇子每蕩 --- 옹색자매탕
          아비가 절약하면 아들은 방탕하고 婦慧郎必癡 --- 부혜랑필치
          아내가 지혜로우면 남편은 바보이며, 月滿頻値雲 --- 월만빈치운
          보름달 뜨면 구름 자주 끼고 花開風誤之--- 화개풍오지
          꽃이 활짝 피면 바람이 불어대지. 物物盡如此 --- 물물진여차
          세상 일이란 모두 이런 거야 獨笑無人知 --- 독소무인지
          나홀로 웃는 까닭 아는 이 없을걸.
    경주 최 부자란 제목에 왠 사설이냐 하겠지만, 이 집안 역시 가실소완복(家室少完福 )이란 말처럼 완전한 복을 갖추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후손이 없어 양자를 들이기도 하였고 과거에 낙방하는 대 (代)도 있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집안이 오랜기간 부와 명예를 지키며 남들로 부터 칭송을 받 아온 연유는 무엇일까? 잘 살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잘 살았다고 하는가? 우리나라의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특권계층의 사회적 책임)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집안이 경주 최 부자다. 경주 최 부자 집안에 관한 이야기는 그동안 여러 매체를 통해 대략은 알고 있었지만, 그중 기억에 남는 것이 인상적인 그 집안의 가훈(家訓)이었다.집안을 다스리는 제가(齊家)의 가훈 '육훈'(六訓) 과 자신의 몸을 닦는 수신(修身)의 가훈 '육연'(六然)이 그것이다 '육훈(六訓)'은 진사 이상의 벼슬을 하지 마라, 만 석 이상의 재산을 모으지 말며 만 석이 넘으면 사회에 환원하라 흉년에는 남의 땅을 사지 마라, 과객(過客)은 후히 대접하라, 며느리들은 사집온 뒤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육연'은 스스로 초연하게 지내고 (자처초연:自處超然), 남에게는 온화하게 대하며 (대인애연: 對人靄然), 일이 없을 때는 마음을 맑게 가지고 (무사징연:無事澄然), 일을 당해서는 용감하게 대처하며 (유사감연:有事敢然), 성공했을 때는 담담하게 행동하고 (득의담연:得意淡然), 실의에 빠졌을 때는 태연히 행동하라 (실의태연:失意泰然)다. 내가 경주에 머무른지 2달여 동안 틈틈이 몇 곳을 둘러보면서도 최 부잣집을 방문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는데 햇살 고운 5월 어느 날 작정을 하고 길을 나섰다.일반적으로 " 경주 최 부잣집" 하면 세상에 널리 알려진대로 경주 교동에 소재해 있는 "교촌댁"을 일컫는다. 그러나 최 부잣집의 집안 내력을 사전에 인지하게 되면, 경주 내남면 이조리에 위치한 "충의당 (忠義堂)"을 먼저 찾아가는 일에 망설임이 없다. 경주 최 부자는 최치원의 17세 손인 최진립과 그 아들 최동량이 터전을 이루고 손자인 재경 최국 선으로부터 28세 손인 문파 최준에 이르는 10대 약 300년 동안 부를 누린 일가를 일컫는 말이다. 엄청난 재산을 오랫동안 간직해 온 경주 최 부자의 가문을 일으킨 사람은 바로 마지막 최 부자 최준의 11대조인 정무공 최진립장군이다. 경주 최씨 사성공파의 한 갈래인 가암파의 시조인 최진립은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왜적과 싸우고 나중에 무과에 급제한 뒤 정유재란 때 다시 참전했다. 그 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최전선에서 적 군과 싸우다가 순국하니 그의 나이 예순아홉이었다. 평소의 생활도 청렴하였던 최진립은 이렇듯 일생을 장렬하게 마쳤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행정구역으로 울산광역시 두서면 활천리에 서 있는 경주최씨 사성공(司成公) 최예(崔汭)의 묘지안내석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에 소재해 있는 최 부잣집의 파시조(派始祖) 최진립이 살았던 "충의당(忠義堂)"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충의당(忠義堂)" 의 사랑채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사랑채 앞에는 장군의 6대조인 사성공(司成公) 최예(崔汭)의 사당 표지석으로 보이는 대형 석물 한 점이 출토 되어 놓여 있다. 이곳이 사당이 있었다는 사실과 아들 3형제의 이름자가 적혀 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행랑채에 걸려있는 멋진 글씨의 현판과 안뜰에 둘러쳐진 담장.현판의 글은 중용(中庸)의 신사명변(愼思明辨)을 인용하였다.;-"신중하게 생각하고 명확하게 판단하라"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기와담 사이의 문양들. 귀면(鬼面),천년(千年)의 미소.......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충의당의 사당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경주 교동의 최 부잣집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대문과 행랑채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100여명의 식객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었다는 경주 최부자 집의 사랑채.본래 최 부자집은 99칸의 대저택이었다.1970년에 화재로 소실된 사랑채는 근래에 새로 지어졌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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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안 구경을 해도 되겠느냐는 나에게 흔쾌히 승낙을 하시고는 무언가를 열심히 찾고 계시는 분께 "둔차(鈍次)"의 의미를 물었더니 "겸손을 나타내는 의미" 라며 답하신다. 이 집과 어떤 연관이 있는 분이신지 묻고 싶었으나 워낙 열중이시라 방해를 드리는 것 같아 그 질문은 드리지 못하고 인사만 나누고 돌아섰다. 아마도 집안의 관리를 맡아 하시는 분일 성 싶다. 현재 최 부잣집은 영남대학교의 소유로 되어있다.둔차(鈍次)........ 다음은 전진문 교수의 "경주 최 부잣집 300년 富의 비밀" 에 있는 "둔차(鈍次)"의 설명이다. 1등보다는 2등’, ‘어리석은 듯 드러나지 않고 버금감’은 하나의 역설이라고 할 수 있다.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1등주의’가 팽배해 있다. 특히 국경 없는 글로벌 시대에는‘ 세계 1등’만이 시장을 선점하고 우뚝 설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1등이란 그야말로 하나뿐이다. 1등 아니면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평생을 불만 속에서 불행하게 살 수밖에 없다. 또한 1등을 했더라도 만족은 잠시뿐 바로 그 순간부터 끝없는 도전에 시달리게 된다. 그에 비해 2등은 이러한 것들을 적게 받기에 유복하다. 그러나 2등도 결코 쉽지는 않다. 1등에 버금 가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2등을 하라’는 말은 ‘노력을 적당히 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1등이 못되어도 만족하라’는 의미다. 이것은 최씨 가문에서 추구하는 적정 만족의 원리 와 상통한다. 스스로 만족하며 겸양할 때 남을 배려하는 마음도 생기고 함께 사는 정신도 생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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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리 고개를 이야기하던 시절 쌀밥 한 번 실컷 먹어보고 죽고 싶다던 시절에 쌀이란 백성들에게 하늘이었다. '좋은 일을 한 집에는 반드시 경사가 있다'(積善之家 必有餘慶)는 표본인 800석이 들어간다는 최 부잣집 곳간. 이런 곳간이 7채가 있었다고 한다.“서기 1671년 현종 신해년 삼남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 경주 최부자 최국선 의 집 바깥마당에 큰 솥이 내걸렸다. 주인의 명으로 그 집의 곳간이 헐린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굶어죽을 형편인데 나 혼자 재물을 가지고 있어 무엇 하겠느냐. 모든 굶는 이들에게 죽을 끓여 먹이도록 하라. 그리고 헐벗은 이에게는 옷을 지어 입혀주도록 하라." 큰 솥에선 매일같이 죽을 끓였고, 인근은 물론 멀리서도 굶어 죽을 지경이 된 어려운 이들이 소문을 듣고 서로를 부축하며 최부잣집을 찾아 몰려들었다. … 흉년이 들면 한해 수천, 수만이 죽어나가는 참화 속에서도 경주 인근 에선 주린 자를 먹여살리는 한 부잣집 을 찾아가면 살길이 있었다. …그해 이후 이 집에는 가훈 한 가지가 덧붙여진다.;‘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경주를 중심으로 사방 백리라면 동(東)으로 동해바다를 접하는 감포일대, 서(西)로 영천, 남(南)으로 울산,북(北)으로는 포항을 포함하는 광대한 면적이다.이렇듯 최 부잣집은 한 해에 소비되는 쌀의 1/3은 자신들이, 1/3은 과객의 대접에, 나머지1/3은 빈민의 구휼에 힘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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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부잣집안채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교동법주의 담장길........ 최 부자집과 담하나를 사이에 두고 가주(家酒)를 빚는 교동법주가 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집안 구경을 해도 되겠느냐는 나에게 흔쾌히 승낙을 하시고는 무언가를 열심히 찾고 계시는 분께 "둔차(鈍次)"의 의미를 물었더니 "겸손을 나타내는 의미" 라며 답하신다. 이 집과 어떤 연관이 있는 분이신지 묻고 싶었으나 워낙 열중이시라 방해를 드리는 것 같아 그 질 문은 드리지 못하고 인사만 나누고 돌아섰다. 아마도 집안의 관리를 맡아 하시는 분일 성 싶다. 현재 최 부잣집은 영남대학교 의 소유로 되어있다.둔차(鈍次)........ 다음은 전진문 교수의 "경주 최 부잣집 300년 富의 비밀" 에 있는 "둔차(鈍次)"의 설명이다. 1등보다 는 2등’, ‘어리석은 듯 드러나지 않고 버금감’은 하나의 역설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1등주의’가 팽배해 있다. 특히 국경 없는 글로벌 시대에는‘ 세계 1등’만이 시장을 선점하고 우뚝 설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1등이란 그야말로 하나뿐이다. 1등 아니면 만족 하지 못하는 사람은 평생을 불만 속에서 불행하게 살 수밖에 없다. 또한 1등을 했더라도 만족은 잠시뿐 바로 그 순간부터 끝없는 도전에 시달리게 된다.그에 비해 2등은 이러한 것들을 적게 받기에 유복하다. 그러나 2등도 결코 쉽지는 않다. 1등에 버금가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2등을 하라’는 말은 ‘노력을 적당히 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1등이 못되어도 만족하라’는 의미다. 이것은 최씨 가문에서 추구하는 적정 만족의 원리 와 상통한다. 스스로 만족하며 겸양할 때 남을 배려하는 마음도 생기고 함께 사는 정신도 생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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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동법주 안채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마지막 최부자 최준(崔浚)은 호(號)가 문파(汶坡)다.호(號)는 의친왕 이강이 이 집에 며칠 머물면서 지어준 것이라한다. 1884년 경주에서 태어난 마지막 최부자인 최준은 단순한 부자가 아니라 상해 임시정부에 평생 자금을 지원한 독립운동가였다. 1947년에는 대구에 대구대학을 설립하여 재단이 사장으로서 현대교육에도 큰 족적을 남겼다 독립운동 사실이 왜경에게 발각되어 만석꾼 재산을 거의 날려버린 최준은 남은 전 재산과 살고 있던 경주 및 대구의 집까지 처분하여 대구대학과 계림학숙을 세웠는데 이 두 학교가 합해져서 후일 영남대학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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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의 최 부잣집 자손들은 옛날 만큼의 부(富)를 가지고 있지않다.최 부잣집으로 들어서는 입구에 걸려있는 한정식집 '요석궁' 의 플랭카드는 보는 이에 따라 많은 생각을 갖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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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식집 " 요석궁 "우측 길 끝 너머가 경주월성이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마지막 최부자 최준의 자형이 국내 항일운동사에 큰 획을 그은 독립운동가 (固軒)박상진 (朴尙鎭)이다. 그는 1915년 대구 달성공원에서 비밀결사대인 대한 광복회를 조직, 총사령관으로써 주권회복 및 광복을 위해 눈부신 활동을 전개 하였다. 김좌진 장군이 그의 휘하인 부사령에 있기도하였다 두 차례에 걸쳐 구속된 박상진은 결국 3년6개월의 옥살이 끝에 1921년 대구감옥에서 사형이 집행돼 37살의 젊은 나이에 순국했다. 교동 최 부잣집을 다녀온 며칠 후 이른 아침에 그의 묘소를 찾아 나섰다.묘소는 경주 내남면에서 외동읍 사이를 잇는 도로를 약 2km 따라가다가 우측에 서 있는"울산청년회" 에서 세운 안내간판을 따라 농로와 산길을 500m쯤오르면 참나무와 소나무가 양쪽으로 도열해 있는 돌계단이 끝나는 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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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상진의사의 묘소를 참배하고 내려오면서 최 부잣집 구성원 당사자들은 물론 그들과 인연이 된 사람들도 사회 지도층으로서 지켜나갈 도덕적,사회적 책임을 다 했음은 물론 구국의 영웅으로서의 역활도 높이 평가받고 추앙되어야 함에 인색함이 없어야 될 것이란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널리 알려진 최 부잣집의 금언(金言)을 되 뇌어 본다. “재물은 분뇨(똥거름)와 같아서 한 곳에 모아 두면 악취가 나 견딜 수 없고 골고루 사방에 흩뿌리면 거름이 되는 법이다.”

출처 : -OTTUGI-
글쓴이 : 오뚝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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