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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터게이트 사건

나 그 네 2010. 5. 27. 12:54
워터게이트 사건 (미국 역사)  [── 事件, Watergate Scandal]
 
1972년의 미국 대통령 선거전에서 닉슨 대통령의 공화당 행정부의 불법 활동이 폭로되어 발생한 미국의 정치 스캔들(1972~75).
이 문제가 세인들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72년 6월 17일 워싱턴 D. C.에 있는, 사무실·아파트·호텔로 사용되는 다용도 건물인 워터게이트 빌딩의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에 침입한 5명의 남자가 체포되면서부터이다. 그들이 체포된 지 며칠 만에 이 5명과 전 백악관 보좌관 E. 하워드 헌트 2세, 그리고 닉슨 대통령 재선위원회 법률고문인 G. 고든 리디는 가택침입죄와 도청죄로 고발되었다. 1973년 1월에 컬럼비아 특별구 미국 지방법원 수석판사인 존 J. 시리카 판사가 이 7명 모두를 심리했다. 이들이 체포된 때부터 재판받을 때까지의 몇 개월 동안 닉슨 대통령과 그의 보좌관들은 행정부의 어느 누구도 이 사건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워싱턴 포스트 Washington Post〉를 비롯한 언론에서는 집요하게 행정부가 이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기사를 발표했다.
7명 중에서 5명은 유죄를 인정했고 2명은 배심원들에 의해 유죄를 선고받았다. 1973년 3월 23일 선고공판에서 시리카 판사는 피고들 가운데 1명인 제임스 W. 매코드 2세의 편지를 읽었는데, 그 내용은 백악관이 워터게이트 침입사건과의 관련을 감추기 위해 '은폐'를 지휘했다고 고발하는 것이었다. 매코드 자신도 7명의 피고인들이 백악관으로부터 유죄를 인정하고 묵비권을 행사하라는 압력을 받았다고 고발했다. 또한 매코드는 재판중에 증인들이 위증을 했다고 주장했다. 다시 소집된 대배심원들 앞에서 젭 스튜어트 매그루더(전 연방정부 법무장관으로 재선위원회 위원장인 존 N. 미첼의 보좌관)는 자신의 이전 증언, 즉 가택침입은 위원회의 승인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는 등의 발언을 번복해 자신은 미첼과 대통령 법률고문 존 W. 딘 3세의 회유에 넘어가 위증했다고 말했다.
백악관이 연루된 것이 명백해지자 1973년 4월 17일 닉슨 대통령은 자신이 새로운 조사를 시작했다고 발표했다. 로널드 L. 지글러는 워터게이트 사건과 관련해 정부 부처가 그때까지 발표한 것은 모두 무효라고 말했다. 4월 30일 닉슨은 공식적으로 워터게이트 사건에 연루된 참모들의 행동에 대해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고문인 H. R. 홀더먼, 존 에일리크먼, 딘, 법무장관 리처드 G. 클라인딘스트의 사표를 수리했다. 그러나 닉슨은 정치적 정보 공작이나 범행을 은폐하려는 시도에 관해서는 개인적으로 아는 바가 없다고 주장했다. 같은 날 엘리엇 L. 리처드슨은 클라인딘스트 대신에 법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후 리처드슨은 하버드대학교의 법학교수 아치볼드 콕스를 워터게이트 사건 담당 특별검사로 지명했다. 그러나 5월 들어서 조사의 중심은 상원으로 옮겨졌다. 1973년 2월 상원의원인 노스캐롤라이나 출신 민주당 의원 샘 J. 어빈 2세를 의장으로 한 상원 대통령 선거운동조사 특별위원회(어번 위원회)는 텔레비전 공청회를 시작했다.
어빈 위원회는 백악관과 선거위원회 요원들의 유죄를 입증하는 증언을 끌어냈다. 그러나 닉슨 대통령이 은폐 과정에 직접 연루되었다고 고발한 증인은 딘뿐이었다. 1973년 7월 16일 전 백악관 직원 알렉산더 P. 버터필드는 대통령 집무실에서 한 대화내용들이 비밀리에 테이프에 녹음되어 있다고 폭로했다. 콕스와 어빈 위원회는 7월 23일 즉각 문제의 테이프들을 증거물로 제시할 것을 요청했으나 닉슨은 행정상의 특권과 국가안보를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시리카 판사가 그 테이프들을 넘겨달라는 영장을 닉슨에게 보내고 10월 미국 상소법원이 그 영장을 확인하자, 닉슨은 더이상 대통령의 다른 문서를 요구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조건으로 문제가 된 테이프의 서면 요약을 제출할 것을 제안했다. 콕스가 그 제안을 거부하자 닉슨 대통령은 10월 20일 법무장관 리처드슨에게 그 특별검사를 해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리처드슨과 법무차관 윌리엄 D. 럭켈샤우스는 그 명령을 이행하는 대신 사임했고, 콕스는 그후 새로 임명된 법무차관 로버트 보크에 의해 해임되었다(→ 토요일 밤의 대학살). 빗발치는 여론에 밀려 닉슨은 12월 8일 테이프를 내주었으나 시리카의 영장에 명시된 9개의 테이프 중에서 7개만을 내주었다. 백악관측은 다른 2개는 애당초부터 없었다고 주장했다. 7개 중의 하나에는 지워진 부분이 있었는데, 나중에 전문가들의 보고서에 따르면 우연한 사고로는 결코 그러한 일이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었다.
1974년초에 이르기까지 여러 명의 전 백악관 보좌관들이 기소되거나 워터게이트 사건과 관련된 혐의에 대해 유죄를 인정했다. 워터게이트라는 용어 자체가 본래의 가택침입뿐만 아니라 선거자금을 받고 정부가 특혜를 준 사실, 1972년 선거운동에서의 '부정한 공작', 백악관에 설치된 초법적 정보기구 등을 포함한 여러 가지의 부정행위를 의미하게 되었다. 백악관에 설치된 그 정보기구는 베트남 전쟁에 관한 국방부 자료들을 유출한 전 국방부 직원 다니엘 엘스버그에 관한 자료를 얻기 위해 한 정신과 의사의 사무실을 불법침입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러한 혐의들이 갖는 복합적인 중대성 때문에 1974년 5월에 하원 사법위원회는 정식으로 탄핵심리에 착수했다. 5월 20일 시리카 판사는 닉슨에게 콕스의 후임으로 특별검사에 임명된 레온 야보르스키에게 나머지 테이프를 넘겨달라는 영장을 발부했다. 그후 7월 24일에 연방대법원은 닉슨이 테이프들의 사본을 마땅히 넘겨 주어야 한다고 만장일치로 판결했다.
7월 27~30일 하원 사법위원회는 3개 조항의 탄핵안을 통과시켰다. 8월 5일 닉슨 대통령은 자신이 은폐 과정에 관련되어 있음을 명백히 보여주는 3개의 녹음 테이프를 내주었다. 이 녹음 테이프들이 폭로되자 의회는 완전히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닉슨은 "이제는 국가를 통치하는 데 필요한 정치적 기반을 상실했다"고 말하면서 8월 8일 대통령직 사임 성명을 발표했다. 그 다음날인 8월 9일 오전 11시 35분 그는 대통령 관저를 떠났다. 1975년 홀더먼·에일리크먼·미첼 등은 음모·재판방해·위증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들은 2년 6개월에서 8년까지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전 대통령 닉슨은 그의 후임자 제럴드 R. 포드가 1974년 9월 8일 무조건 사면을 내림으로써 더 이상의 처벌은 받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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