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ving daily/사 건, 사 고

不滅

나 그 네 2010. 8. 8. 08:33

 

 

不滅

 

 

멸,

 

23전 23승

 


 

 

순신 해전사

 

 

"     1차 출전     "

(1592.05.04~05.10)

 

 

 

 해전명

조선군 병력

일본군 병력 

전과 

 옥포해전(1592.05.07)

91척 

 30여 척

 26척 격침

 합포해전(1592.05.07)

〃 

 5척

 5척 격침

 적진포해전(1592.05.08)

〃 

 13척

 11척 격침


 1592년 5월 4일, 이순신은 신호, 김득광, 어영담, 배흥립, 정운 등의 용맹한 장수를 데리고 출진했다. 조·일전쟁 개전이래 첫 출전이었다.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함대의 규모는 판옥선 24척,  협선 15척, 포작선 46척으로 이루어져 총 85척이었다. 조선 함대는 소비포 앞바다에서 첫날 밤을 보낸 뒤에 당포로 내려가 원균의 잔여세력과 합류했다. 판옥선 3척과 협선 3척이 합쳐져 조선 수군의 규모는 총 91척이 되었다.

 

 7일에 이르러 드디어 옥포에 도착했다. 척후선으로부터 근방에 약 30여 척의 일본 함대가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첫 전투를 앞둔 조선 수군은 일제히 긴장했다. 굳어진 분위기를 눈치챈 이순신은 부하들을 격려하며 이렇게 말했다. "가벼이 움직이지 말고, 정중하기를 태산과 같이 하라."

 

 이순신의 격려에 고무된 조선 수군은 질서정연하게 일본 함대의 앞으로 나아갔다. 당시 일본군은 지상에 상륙해 온갖 노략질을 일삼던 중이었다. 가까이 다가오는 조선 함대를 본 일본군은 혼비백산해 서둘러 배에 올라타 달아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조선 함대의 포격에 일본 군함은 하나씩 무너져내렸고, 일본군은 전멸에 가까운 참패를 당했다. 조선 수군은 단 한 명도, 단 한 척의 배도 잃지 않은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옥포해전〕

 

 옥포에서의 짜릿한 첫 승리에 대한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척후선으로부터 5척의 일본 군선이 합포에 머물러 있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이순신은 다시 군함을 몰아 합포의 일본군을 뒤쫓았다. 대규모의 함대가 몰려오자 일본군은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다. 결국 그들은 군선을 버리고 육지로 도망치고 말았고, 이순신은 일본 군함 5척을 모두 격침시키는 전과를 얻고 유유히 개선했다. 7일은 남포에서 숙영했다. 〔합포해전〕

 

 8일의 아침이 채 밝기도 전이었다. 척후선으로부터 13척의 일본 군함이 통영 적진포에 정박해 여염집을 약탈하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이순신은 곧바로 출정명령을 내렸다. 조선 함대가 적진포로 나아갔을 즈음 일본 함대는 약탈을 끝내고 줄행랑을 놓고 있었다. 조선군은 그들을 향해 거침없이 포격해 들어갔다. 그 결과 일본 군함 13척 중 11척이 격침되었고 단 두 척의 군함만이 빠져나갈 수 있었다. 이순신의 조선 함대는 이 싸움을 마지막으로 그들의 첫 출전을 마무리지었다. 1592년 5월 10일, 함대는 전라좌수 본영으로 귀환했다. 〔적진포해전〕

 

 

"     2차 출전     "

(1592.05.29~06.10)

 

 

 해전명

 조선군 병력

 일본군 병력

 전과

 사천포해전(1592.05.29)

26척 

 13척

 13척 격침

 당포해전(1592.06.02)

 〃

 21척

 21척 격침

 당항포해전(1592.06.05)

51척 

 26척

 26척 격침

 율포해전(1592.06.07)

〃 

 7척

 7척 격침

 

 당초 6월 3일 여수 앞바다에서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연합 함대를 구성해 출동하기를 계획하였으나, 27일에 원균으로부터 뜻하지 않은 급보가 날아들었다. 10여 척의 일본 함대가 사천에 정박해 여러 고을들을 침탈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급보를 받은 이순신은 더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전라우수사 이억기에게는 뒤따라오기를 부탁했고, 이순신은 다급하게 휘하 군함 23척만을 이끌고 출항했다. 판옥선 21척에 거북선 2척, 거북선의 첫 출전이었다.

 

 29일에 노량에서 원균의 군함 3척이 합류해 연합 함대를 구성했다. 사천방면으로 향하는 일본군의 척후선을 격침시킨 뒤 조선 함대는 사천 앞바다로 나아갔다. 사천해안에는 12척의 누각대선이 줄을 지어 있었고 400명이 넘는 일본군이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조선 함대가 다가가자 일본군은 아군을 향해 조총을 난사했다. 이순신은 좁은 해안에서는 아군이 절대 불리함을 이내 깨달았다. 그는 일시적 후퇴로 일본 군함을 넓은 바다로 끌어내는 유인책을 사용했다. 조선 함대가 물러나자 기세가 오른 일본군은 함선에 올라 끈질기게 추격해왔다. 그 무렵, 조선군의 이순신은 물길을 가늠하고 있었다.

 

 "밀물이다!"

 한 병사가 소리쳤다. 이순신은 기회가 왔다고 확신했다. 그는 명령을 내려 군함이 일본군과 마주보도록 했다. 그리고 그 사이를 비집고 거북선 두 척이 일본 군함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온 몸이 철갑으로 되어있는 거북선 앞에 일본군의 조총은 무력했다. 거북선이 천자·지자·현자·황자 등의 총통을 쏘아대자 일본 군함은 대 혼란에 휩싸였다. 곧 조선 판옥선의 집중 포화가 이어졌다. 일본군은 치열하게 항전했으나 결국 패하고 말았다. 조선 수군은 이날 싸움에서 13척의 적 군함을 격침하는 전과를 거두었으나 아군의 피해도 심각한 편이었다. 많은 사상자가 나왔으며 이순신도 왼쪽 어깨에 총탄을 맞았다. 〔사천포해전〕

 

 6월 2일, 사량도에서 숙영하고 있던 조선 함대는 당포에 20여 척의 일본 군함이 정박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이순신은 함대를 이끌고 출정했다. 조선 함대가 당포에 이르자 300여 명의 일본군이 험준한 지형에 진을 치고 조총을 쏘아댔다. 일본군의 무차별 총격에 조선군은 잠시 주춤했다. 그러나 이내  두 척의 거북선이 돌진하며 일본군 대장의 지휘선으로 보이는 누각대선으로 접근했다. 어떠한 일본군의 총격에도 거북선은 미동 하나 없이 돌진했다. 배 등에는 대못을 박고, 용머리를 치켜든 채 달려드는 거북선을 본 일본군의 사기는 곤두박질쳤다.

 

 현자철환과 천자총통, 대장군전, 장군전으로 무장된 거북선 앞에서 일본 대장선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결국 중위장 권준이 쏜 화살에 일본군 장수 구루시마가 맞고 쓰러지면서 일본군은 와해되었다. 이순신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일제히 공격하여 적선 21척을 모두 격침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당포해전〕

 

 모두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싸움이 두 차례나 계속되면서 조선군 병사들은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인 4일에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25척의 지원군을 이끌고 나타났다. 조선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이로써 51척이 된 조선 함대는 이 날 착량으로 이동해 앞으로의 작전을 논의했다.

 

 5일에는 척후선으로부터 당항포에 일본군이 정박중이라는 정보가 들어왔다. 3도 수군의 연합 함대는 당항포로 나아갔다. 신중한 이순신은 먼저 3척의 척후선을 보내 주변의 지형을 정찰하게 했다. 몇 시간이 지난 후 척후선이 돌아왔다. 주변 지형과 더불어 적이 있음을 알려왔다. 이순신은 군함 4척을 따로 떼어 포구 입구에 복병하도록 지시하고는 나머지를 이끌고 포구 안으로 들어갔다. 소소강 기슭에 이르러 조선 함대는 일본 함대와 맞붙었다. 조선 함대가 일본 함대를 포위해 집중 공격하자, 점차 불리해진 일본군은 퇴로를 찾기 시작했다. 이순신은 슬며시 한쪽 퇴로를 열어주었다.

 

 퇴로를 발견한 일본 함대는 조선군의 포위를 뚫고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지만 그 역시 이순신의 계략이었다. 미리 배치해둔 복병에 의해 일본 군함은 앞뒤로 포위되었고, 거북선과 판옥선의 집중 포화에 의해 일본 대장선은 불타고 일본 장수는 화살을 맞고 바다에 떨어졌다. 다른 적선이 북쪽으로 도망치자 이순신은 그에 대해서도 맹공을 가해 격침시켰다. 육지로 도망치는 일본군은 따라가서 목을 베고, 기슭을 타고 도망치는 적선들은 뒤쫓아가서는 일부러 한 척의 배만을 남겨둔 채 모두 격침시켰다. 날이 어두어지자 이순신은 함대를 돌려 포구 바깥으로 이동했다. 다음 날 새벽, 살아남은 왜군들이 남은 한 척의 배를 타고 도망치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리 매복해 있던 전부장 이순신의 기습에 의해 이들은 모두 참살되고 말았다. 〔당항포해전〕

 

 7일 아침에는 척후선으로부터 대선 5척과 소선 2척으로 이루어진 일본 함대를 발견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3도 연합 함대는 군함을 이끌고 이들을 뒤쫓았다. 연합 함대를 본 일본군은 혼비백산했다. 노략질하던 물건을 모두 던져두고 도망쳤으나 정운, 이몽구 등은 끝까지 쫓아 이들을 모두 격침시켰다. 〔율포해전〕

 

 

"     3차 출전     "

(1592.07.05~07.13)

 

 

 해전명

조선군 병력 

일본군 병력 

전과 

 한산도대첩(1592.07.08)

56척 

 73척

47척 격침, 12척 나포 

 안골포해전(1592.07.10)

 〃

 42척

 42척 격침

 

  잇따른 수군의 패전 소식에 당황한 일본 정부는 육군이 파죽지세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조선 수군을 격파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다. 막부의 실권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와키자카 야스하루, 구기 요시타가, 가토 요시아키 등을 남하시켜 수군을 돌보게 하고, 병력을 증강해 부산으로 파견하였다.

 

 7월 5일, 이순신과 이억기는 작전회의를 가진 후 연합 함대를 이동하여 6일 노량에서 원균의 함대와 합류했다. 창신도에서 숙영하던 조선 함대는 8일에 이르러 당포를 지나 견내량으로 나아갔다. 견내량에서 조선 수군을 기다리고 있던 일본 함대의 규모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싸움이 될 것을 예고하고 있었다. 적은 대선 36척·중선 24척·소선 13척, 무려 73척에 달하는 군함으로 이루어진 대규모 함대였다.

 

 이순신은 견내량이 지형이 좁아 많은 수의 적을 상대로 싸움을 벌이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곳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이순신은 5척의 전함을 보내어 일본 함대를 유인했다. 다행이 일본 함대는 이순신의 기대대로 조선 군함을 추격해주었다. 이순신은 적선과의 거리와 속도를 적절히 유지하면서 조선의 주력함대가 있는 곳으로 서서히 유인했다. 마침내 일본군이 한산도 앞바다에 이르자 이순신은 장졸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모든 전선은 학익진으로! 선봉선을 공격하라!"

 

 학익진은 쉽게 응용할 수 없는 아주 어려운 전법이었다. 하지만 잘 훌련된 조선 수군은 조금도 흔들림 없이 학익의 진형을 갖추었다. 학익진을 갖춘 조선군은 선봉선 3척을 향해 집중 포화했다. 선봉에 있던 일본 군선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갑작스런 공격을 받게된 선봉의 다른 적선도 반격을 개시했으나, 벼락처럼 쏟아져 내리는 조선군의 포탄을 막아내기는 불가능했다. 순식간에 여러 척의 배가 또다시 부숴졌다.

 

 이 때 중위장 권준이 나서서 일본군 대선에 달려들었다. 권준과 그를 따르는 조선군은 일본군 지휘관과 병사들을 모두 격살하고 층각대선 한 척을 나포하였다. 어영담·김완·배흥립 등도 지휘관을 사살하기도 하고 배를 불태우거나 나포하는 등의 선전을 했다. 이 같은 난전 중에 수많은 일본군 지휘관이 목숨을 잃자, 일본군의 지휘계통 자체가 무너져 혼란이 가중되었다. 후방의 일본 군함 14척은 차마 구원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도망쳤으며, 선방에 있던 400명의 일본군은 한산도로 상륙해 도주했다. 이순신은 그들이 버리고 간 함대를 모두 불살랐다. 이로써 이순신의 조선 함대는 이 날 싸움에서 격침한 군선이 무려 47척, 나포한 군선이 12척에 달하는 사상 최고의 전과를 올렸다. 조선 함대는 견내량 내양으로 개선했다. 〔한산도대첩〕

 

 8일 한산도에서 짜릿한 대승을 거둔 이순신은 이후 안골포에 다시 대규모의 일본군이 집결해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10일 이순신은 함대를 정비하여 다시 출정했다. 그러나 안골포 역시 견내량처럼 아군이 공격하기에 유리한 장소가 아니었다. 이순신은 적선을 넓은 바다로 끌어내기 위해 갖은 유인책을 써 보았지만 와키자카의 함대가 유인책으로 섬멸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일본군은 쉽게 응하지 않았다.

 

 유인계가 계속해서 실패하자, 이순신도 전략을 달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러 장수들이 번갈아가며 일본 군함이 있는 종열진으로 드나들면서 각종 총통과 화살을 쏘게 했다. 일본군이 유인에 응하지 않는다는 점을 노린 것이었다. 안골포에서는 온종일 함포소리가 요란하게 울려퍼졌다. 양 함대의 공방전이 종일 계속되는 동안 일본군의 군함은 거의 모두 격침되고 말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일본 장수 구키 요시다카와 가토 요시아키는 도주하였고, 이순신의 함대는 자랑스럽게 귀환했다. 불리한 지리적 조건을 극복하고 얻어낸 값진 승리였다. 〔안골포해전〕

 

 

"     4차 출전     "

(1592.08.29~09.02)

 

 

 

 해전명

조선군 병력 

 일본군 병력

 전과

 장림포해전(1592.08.29)

 173척

 6척

 6척 격침

 화준구미해전(1592.09.01)

 〃

 5척

 5척 격침

 다대포해전(1592.09.01)

 8척

 8척 격침

 서평포해전(1592.09.01)

 〃

 9척

 9척 격침

 절영도해전(1592.09.01)

 〃

 2척

 2척 격침

 부산포해전(1592.09.01)

 〃

 470척

 128척 격침

 

 8월 1일 이순신과 이억기는 좌·우도의 연합군을 편성해 출전을 위한 훈련을 실시했다. 그리고 24일 드디어 훈련이 끝났다. 이순신은 이억기와의 연합 함대를 이끌고 좌수영을 출발해 25일에 삼천포에서 원균을 만나 앞으로의 작전을 논의했다. 27일에 이르러서는 칠천도를 거쳐 원포에서 숙영했다. 이 때부터 이순신은 주변을 철저히 수색하기 시작했다. 29일에는 이순신의 수색망에 드디어 적선이 걸려들었다. 상대는 본대에서 낙오된 듯 보이는 6척의 일본 군함이었다. 이순신은 함대를 몰고 나아가 그들을 모두 격침시켰다. 〔장림포해전〕

 

 9월 1일의 아침이 밝았다. 이순신은 좌·우도의 연합 함대를 지휘하며 부산포로 향했다. 화준구미에 이르러서는 일본 군함 5척을 격침시켰고〔화준구미해전〕, 다대포에 이르러서는 8척을〔다대포해전〕, 서평포에 이르러서는 9척을〔서평포해전〕, 절영도에 이르러서는 2척을 격침시키며〔절영도해전〕 부산포로 나아갔다.

 

 부산포에 도착한 조선 함대는 일단 멈췄다. 척후선을 보내 일본 함대의 규모가 얼마인지 파악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몇시간이 흐른 뒤 척후병이 돌아와 보고했다. 척후선의 보고에 따르면 적은 자그마치 500여 척에 달하는 대규모 함대를 가지고 있었다. 순간 이순신 주위의 제장들의 기가 파랗게 질렸다. 이순신은 그 낌새를 눈치채곤 제장들을 향해 말했다.

 

 "우리 수군의 위세를 가지고 지금 공격하지 않고 돌아간다면, 적은 반드시 우리를 멸시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다. 이 곳에서 싸워 전멸을 당할 지언정 싸우지 않고 돌아가지는 못한다."

 

 이순신의 독려에 힘입어 정운, 이언량, 이순신(李純信), 권준, 신호 등의 장수들이 비교적 사정거리가 긴 대형총통을 사용하며 공격해 들어갔다. 그 결과 적 군함 4척이 격침되었다. 기회를 잡은 조선 함대는 긴 장사진(長蛇陣)을 형성하며 포구로 돌진했다. 일본군은 조선 함대가 가까이 다가오자 감히 해상으로 나아가지 못하고는 육지에서 철환과 편전만을 발사했다. 조선 수군도 죽음을 무릅쓰고 공격해 들어갔다. 천자총통과 지자총통, 황자총통, 대장군전, 장군전, 피령전을 쟁여 쏘고, 또 철환과 장전, 편전도 함께 쏘아댔다. 종일 이어지는 치열한 싸움에서 녹도만호 정운이 전사하는 등 조선군의 피해도 속출했지만, 결국 조선 함대는 일본군 전함 128척을 격침하는 쾌거를 올렸다. 〔부산포해전〕

 

 

"     5차 출전     "

(1593.02.01~03.08)

 

 

 해전명

조선군 병력 

일본군 병력 

전과 

웅포해전(1593.02.01) 

 89척

 40척

일본군 100명 사살 

 

 본래 일본군의 주 기지는 안골포였다. 그러나 안골포가 조선군에게 쉽게 노출되고 육군의 지원을 받기도 쉽지 않자, 웅포에 이르러 새로운 진지를 구축했다. 웅포는 조선 함대가 부산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지리상의 요충지이며, 함선을 숨기기도 쉬운 데다가 육군의 지원을 받기도 용이해 주진지로써는 최적의 장소였다. 육지에서는 명의 이여송이 남하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이순신은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웅포를 깨뜨려야만 했다. 2월 3일 집결한 이순신의 함대는 6일 출정하여 7일째에 이억기의 함대와 합류했다. 3도의 연합수군을 편성한 이순신은 온천량에서 이틀을 보낸 뒤에 10일 웅포로 나아갔다.

 

 하지만 문제는 일본군이 당췌 전투를 응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순신이 웅포로 나아가도 일본군은 진채에 틀어박혀 조총만을 쏘아댈 뿐 함대를 몰고 나아가 붙을 엄두를 내지 않았다. 이순신은 몇날 몇일을 나아가 도발을 해 보고, 유인도 해 보았지만 번번히 씁쓸하게 귀환해야만 했다. 10일과 12일에는 진채에 대고 일제히 포격을 행사해 숫한 사상자를 내었지만, 해상 공격의 한계상 웅포진채를 완전히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18일 이순신은 모든 함대를 이끌고 다시 한번 공격했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일본군이 방어사격만을 계속하자 이순신은 유인계를 다시 한 번 시도했다. 사도첨사 김완을 복병장으로 삼아 대기하게끔 해 놓고, 나머지 전함을 이끌고 진채로 나아갔다. 다행스럽게도 유인계는 성공했고 10여 척의 일본 전함이 뒤따라왔다.

 

 조선 함대를 쫓았던 일본 전함이 돌아서려는 순간을 잡은 이순신은 복병장 김완에게 공격을 지시했다. 10척의 일본 전함은 빠른 속도로 퇴각했다. 이설과 이언량은 후방 3척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으나, 배 위의 적병 100여 명을 사살하는데 그쳤고 10척의 함대는 진채로 귀환했다. 〔웅포해전〕

 

 

"     6차 출전     "

(1594.03.04~03.05)

 

 

해전명

조선군 병력

일본군 병력 

전과

 당항포해전(1594.03.04)

 124척

 50여 척

31척 격침 

 

 이순신에 위세에 눌려 좀처럼 활동하지 않던 일본군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진해·고성 등지에 피해를 입는 마을이 속출했다. 이순신은 침착하게 척후선을 파견해 사태를 주시하며 일본 함대의 동향을 살펴보고 있었다. 일본 함대가 춘원포와 소소포 등지에서 활동한다는 확신이 서자 이순신은 3도 수군을 한산도에 집결시켰고, 순변사 이빈에게 육지로 올라가는 일본군을 공격해 달라는 공문을 보냈다. 3월 4일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함대는 한산도를 출발하여 진해로 나아갔다. 진해 선창에서 일본 군함 10척이 출항하자 공격을 시작해 읍천포에서 6척, 어선포에서 2척, 자구미포에서 2척을 격침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이윽고 함대는 당항포로 나아갔다. 이순신은 함대를 동원해 당항포를 봉쇄하고 21척의 일본군을 고립시켰다. 그리고는 곧 대대적인 공세라도 가할 것처럼 자세를 취해 일본군을 육지로 도망가게 만들었다. 다음날 5일이 밝자 당항포에는 빈 배 21척만이 남아있었다. 이순신은 모두 불태우고 귀환했다. 〔당항포해전〕

 

 

"     7차 출전     "

(1594.09.26~10.08)

 

 

 해전명

조선군 병력 

일본군 병력 

전과 

 1차 장문포해전(1594.09.29)

 50척

 117척

 2척 격침

 2차 장문포해전(1594.10.04)

 〃

 〃

 일방 공격

 

 당항포 해전 이후 일본군의 움직임은 오히려 활발해졌다. 일본군은 장문포를 중심으로 각지에서 출몰하여 그 연안에 집을 짓는 등 장기간 머무를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이순신은 이들을 더이상 두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군사들을 소집하고, 도원수 권율에게 공문을 보내 수륙 협공을 위한 작전을 논의했다. 22일 드디어 권율로부터 공문이 왔다. "27일 군사를 일으킨다."

 

 26일 이순신은 한산도를 출발해 적도 앞바다에 이르러 곽재우, 김덕령 등의 육군과 합류했다. 28일에는 흉도에서 숙영하고 29일 일제히 장문포 앞바다로 돌진했다. 하지만 일본군은 이에 응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 함대는 일본의 전함 두 척만을 격침시키는 성과에 만족해야 했다. 이순신은 장문포의 일본군을 완전히 격멸하고자 함대를 돌려 칠천량을 기점으로 일단 주변의 지형을 정찰했다. 이 후 몇번을 더 공격해 봤지만 성과는 없었다. 〔1차 장문포해전〕

 

 10월 4일, 이순신은 웅포해전에서의 전술을 응용하여 본격적인 수륙 협공작전을 개시했다. 이순신은 해상에서 함포를 쏘았고 김덕령과 곽재우는 육상으로 도망치는 일본군을 맡았다. 하지만 병력이 많지 않았던 조선 육군은 달아나는 일본군을 감당해 낼 수 없었다. 이순신은 분통을 터뜨리며 별다른 성과없이 퇴각해야 했다. 아군의 피해는 없었지만 장문포의 일본군을 깨뜨리지도 못했다. 〔2차 장문포해전〕

 

 6일 이순신은 함대를 몰아 재차 공격했으나 일본군은 장문포에서 이미 철수한 뒤였다. 7일 이순신은 수륙군을 해체하고 8일 본영으로 귀환했다.

 

 

"     8차 출전     "

(1597.08.26~09.16)

 

 

 

 해전명

조선군 병력 

일본군 병력 

전과 

 어란포해전(1597.08.27)

12척 

 8척

 도주

 벽파진해전(1597.09.07)

 〃

 13척

 도주

 명량대첩(1597.09.16)

13척

 333척

 31척 격침

 

 2차에 걸친 장문포해전은 역대 해전 중 가장 적은 성과를 올렸던 해전이었다. 그런데 그 정도의 의의에 그칠 해전이 아니었다. 지난 장문포에서의 수륙 협공작전이 한창 진행 중일때 작전의 중지를 명하는 선조의 유서가 날아들었던 적이 있었는데, 이를 이용한 일본 요시라의 반간계와 조정 중신들의 탄핵에 힘입어 이순신이 명령 불복종의 죄를 뒤집어 쓰게 되었다. 이순신은 파직되었다가 무장으로서는 최대의 치욕이랄 수 있는 백의종군의 길을 걷게 되었고, 삼도수군통제사에는 원균이 임명되었다. 원균은 7월 16일 출전하여 칠천량에서 일본 함대와 맞붙었다. 결과는 조선 함대의 전멸이었다. 그동안 이순신이 육성했던 조선 함대의 대부분이 칠천량 앞바다에서 모두 가라앉고 말았다. 그 수가 무려 256척에 달했다.

 

 사태가 급박해지자 8월 3일 조정은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했다. 15일에 선조는 수군을 폐하고 육군을 도우라는 유서를 내리지만 이순신은 수군의 중요성을 언급하며 명령의 불가함을 역설한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사온 바, 죽을 힘을 내어 싸우면 오히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제 만일 수군을 모두 폐한다는 것은 적이 만 번 다행으로 여기는 일일 뿐 아니라, 충청도를 거쳐 한강까지 갈 것이므로 그것을 신이 걱정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비록 전선은 적지만, 신이 죽지 않은 한에는 적이 우리를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27일 아침 어란포 앞바다에 8척의 일본군 선발선이 나타났다. 이순신은 몸소 최선두를 지키며 일본 함대를 추격했다. 다가오는 조선 함대의 기세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일본 함대는 뱃머리를 돌려 퇴각했다. 일본 함대가 물러가자, 이순신은 추격을 멈추고 장도로 함대를 몰아 숙영했다. 〔어란포해전〕

 

 29일에는 벽파진으로 진을 옮겼다. 진도의 동쪽 끝머리에 위치한 벽파진은 남해에서 서해로 빠져나가는 마지막 길목인 명량해협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이기 때문이었다. 9월 7일 12척의 일본 함대가 벽파진으로 들어오자 이순신은 즉각 공격명령을 내렸다. 생각보다 강한 저항에 당황한 일본 함대는 견디지 못하고 퇴각하였다. 〔벽파진해전〕

 

 여태까지 두 번의 공격을 막아내기는 했지만, 14일 어란포 앞바다로 50여 척의 일본 함대가 진입했다는 정보가 들려옴에 따라 이순신은 결전의 시간이 임박했다는 판단을 했다. 이순신은 명량해협에서의 일전을 준비하기 위해 다시 함대를 몰아 전라우수영으로 진을 옮겼다. 결전을 앞두고 이순신은 휘하 장수들을 모두 소집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병법에 이르기를, 죽고자 하면 반드시 살고 살고자 하면 반드시 죽는다고 하였다.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잘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모두 지금의 우리를 두고 한 말이다. 한 사람이라도 군령을 어긴다면 비록 작은 일이라 할 지라도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

 

 16일 명량해협으로 333척에 달하는 일본 함대가 이동 중이라는 첩보가 들어왔다. 이순신은 13척의 전함을 이끌고 출항했다. 명량해협에 이르자 333척 가운데 133척의 전함이 명량해협을 지나고 있었다. 이순신은 미리 설치해 둔 수중철색을 이용해 일본 전함을 걸리게 했다. 많은 수의 일본 전함이 서로 부딪쳐 깨어지고 무너져내렸으나, 워낙 대규모의 전함이었기 때문에 수중철색을 넘어 온 일본 전함만으로도 조선 함대를 겹겹이 포위하고도 남았다. 거제현령 안위가 겁에 질려 차마 나서지 못하자 이순신은 그를 꾸짖으며 말했다.

 

 "안위야,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네가 감히 물러난다고 해서 살 듯 싶으냐!"

 

 이에 안위는 정신을 바로잡고 앞에 나아가 용전을 펼쳤다. 적선이 안위의 전함으로 몰려들자 이순신은 배를 몰아 다가가 총통을 쏘아 적선 3척을 격침시켰다. 녹도만호 송여종과 평산포 대장 정응두는 힘을 합하여 대장선을 격침시켰다. 일본 장수 마다시의 목을 베어 돛에 달자 일본군은 전세가 불리함을 깨닫고 명량에서 물러났다. 이 싸움에서 무려 31척의 전함을 격침시키고 일본 함대를 격퇴했다. 가히 기적이라고 할 만한 해전이었다. 〔명량대첩〕

 

 명량에서의 빛나는 이 승리로 조선 함대는 남해안에서의 제해권을 다시 거머쥐게 되었다.

 

 

"     9차 출전     "

(1598.11.18~11.19)

 

 

 해전명

조선·명 연합군 병력 

일본군 병력 

전과 

 노량해전(1598.11.19)

 146척

 500여 척

 200여 척 격침

 

 명량대첩 이후 이순신은 고금도로 본영을 옮기고 1년여 동안 수군 재건에 노력한 결과, 이순신은 칠천량 해전 이전을 넘는 군용을 갖추게 되었다.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자 1598년 7월 16일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이 이순신을 지원하기 위해 합류해 연합 함대를 편성했다. 이제 일본군은 부산을 거점으로 주변 지역만을 장악하고 있을 뿐이었다. 11월 퇴로가 막힌 고니시가 진린에게 뇌물을 보내며 철군을 용이하게 해 줄 것을 청하자, 이순신은 불같이 노하며 반대했다. 이로써 고니시를 구하기 위해 각지에 흩어졌던 일본 함대가 노량으로 집결했다. 조선·명 연합 함대도 일본 함대를 깨뜨리기 위해 19일 출항했다.

 

 조선·명 연합 함대는 일본 함대가 광주양을 지나 노량으로 들어오고 있다는 정보를 얻고, 죽도와 관음포 사이에 매복하고 적을 기다렸다. 일본 함대가 관음포 앞바다에 다가서자 연합 함대는 좌우에서 나타나 일제히 포격을 가했다. 기습에 혼란에 빠졌던 일본 함대도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해왔다. 이순신은 적선으로 가까이 다가가 땔감을 던져 불태우는 등 격전을 벌이자 일본 함대는 견디지 못하겠던지 뱃머리를 돌려 관음포로 쫓겨 들어갔다.

 

 그러나 관음포에 들어간 일본 함대는 독안에 든 쥐 꼴이 되었다. 관음포는 밖에서 보면 탁 트인 바다였지만 막상 들어서 보면 막혀서 도망갈 길이 없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항전의 자세를 갖춘 몇 척의 일본 전함이 이순신의 전함으로 달려들었다. 이순신을 잡을 요량이었다. 일본군의 전함에 포위되어 이순신이 위험에 처하자, 진린이 전함을 몰아 포위망을 뚫고 그를 구원해 주었다.

 

 이번에는 진린의 배가 적선에게 포위되어 위험에 처했다. 이를 본 이순신이 일본 장수가 타고있는 대장선을 집중 사격하여 한 명의 적장을 쓰러뜨렸다. 그러자 일본 전함은 대장선을 구하기 위해 포위망을 풀었고 진린은 위험에서 벗어났다. 이렇듯 조선 함대와 명 함대는 서로 힘을 합해 일본 전함을 하나씩 깨뜨렸다. 이 날의 싸움으로 무려 200여 척의 일본 전함이 격침되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선두에서 병사들을 독려하다 왼쪽 가슴에 총탄을 맞고 전사하고 말았다. 이순신은 죽으면서 방패로 자신을 가리며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싸움이 한창이다.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

 

 이 날 싸움은 조선·명 연합 함대의 대승으로 끝났다. 그러나 전투가 끝나고 이순신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어느 누구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근세일본사>에서는 이순신과 노량해전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그는 이기고 죽었으며 죽고 나서도 이겼다. 조선전쟁 7년 동안에 참으로 이순신 한 사람을 자랑삼지 아니할 수 없다. 그는 실로 조선의 영웅일 뿐만 아니라 동양 3국을 통틀어 최고의 영웅이었다."

 

 

 

 

 

 

聖雄

'라가 위로울   잊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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