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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디 암살은 운명이다

나 그 네 2010. 9. 4. 14:37

케네디 암살은 운명이다

냉전체제는 자유진영 미국과 공산진영 소련이라는 세계 두 진영의 머리를 앞세운 거짓말이다. 그 내부는 돈벌이에 혈안이 된 美 보수정치권과 금융재벌들의 농간이 숨어있다. 우리가 아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1961년 당시 미국이 프랑스령 국가인 알제리와 베트남 독립을 부추기고, 프랑스군을 상대로 이른바 '동시 두 개의 전쟁'을 주도한데 따른 유럽 강대국들의 비난을 일소하고자 내놓은 웃는 얼굴을 한 '얼굴마담'이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착오가 생겼다. 40대의 젊고 잘생긴 케네디가 백악관에 입성하자 美외교협회에서 계획해온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반대하고, 카리브해에 해군기지를 건설하던 프랑스에게 손을 들어준 것이다. 쿠바침공(1961)이 대표적이다.

당시 케네디 대통령과 백악관이 주도한 '쿠바침공'은 프랑스의 영향력을 키우는데 크게 일조한 사건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소간 냉전구도에 심각한 균열이 생겼고, 외교협회 수장들은 그들의 첨병인 美 CIA에게 새로운 임무를 지시한다. 바로 '케네디 암살'이다.

                                    


1954년 프랑스는 북아프리카 알제리 독립전쟁과 베트남의 인도차이나 전쟁 등 '두 개의 전쟁'을 동시에 치루고 철군한 뒤, 관련 배후를 놓고 미국을 지목한 바 있다. 현재도 미국은 이를 극구부인하지만 결과적으로 록펠러 같은 美금융재벌과 군산업체가 한국전쟁을 전후로 미국.소련간 냉전체제를 매개체로 세계 곳곳의 자원개발건을 수주하며 돈벌이를 해온 점은 사실이다.

표면상으로는 미국의 외교협회(CFR)가 주도했다. 결국 프랑스가 미정보부의 농간에 '알제리.베트남 전쟁'에서 패하고, 철군을 결정한 뒤, 급기야 프랑스군 내부가 쿠데타가 발생하고 정치분열을 겪고서야 알제리를 포괄하는 북아프리카와 인도차이나 해상이 미해군에게 넘어가고야 말았다.

당시 프랑스는 구겨진 체면을 만회하고자 다양한 첩보활동을 벌였고, 결론을 내렸는데. 다름아닌 미소간 냉전체제가 유대계 美재벌들의 돈벌이였던 점을 파악한 것이다. 따라서 냉전체제 균형을 깨기위해 프랑스 해군을 카리브해로 집결시킨다. 이와중에 소련으로부터 미사일을 제공받은 쿠바혁명군. 그 뒤로 프랑스해군이 카리브해 프랑스령 섬들을 토대로 미국을 압박해 소련에 이어 새로운 우파적국이 생겨난 것이다. 

물론 이런 긴장국면을 깬 것은 존 F 케네디 대통령이다. 백악관에 입성한지 3개월도 안돼 1961년 4월 '쿠바침공'을 명령한 것이다. 이것은 케네디 대통령이 美 외교협회가 주도한 월남전 계획을 무산시키고, 동시에 미국의 안방이나 다름없던 카리브해로 전세계 이슈를 돌려놓은 사건이다.

결국 1963년 11월 미국 재벌들과 모든 정계거물들이 배후이며 美 CIA가 준비한 거사가 일어났다. 대통령 재선을 위해 미국 보수주의의 홈그라운드인 텍사스주 댈러스에 입성한 케네디 부부가 오픈카를 타고가다 훗날 전직 미정보국 요원으로 밝혀진 리 하비 오스왈드에 의해 암살된 것이다.

젊고 유능한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인 케네디 대통령을 환호하던 수많은 군중과 세계인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대놓고 처형한 것이다. 그 뒤 오스왈드는 '인간청소부'로 악명높은 뉴저지 마피아에 의해 살해됐다.

                  

월남전전후로 미국 대통령은 허수아비가 됐다

 
그 뒤로 美 대통령은 1992년까지 50대 이하는 될 수 없었다. 보수층은 '케네디 악몽'이 재현되지 않길 바랬기 때문이다. 로버트 케네디가 암살된 것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빌클린턴이 그 사례를 깼지만 그의 성추문 또한 일종의 압력으로 행사돼 힐러리 클린턴이 백악관 입성후 주도한 '건강보험개혁안'도 무산되고야 말았다. 

현재 미국 대통령은 40대로 젊은데다 시카고에서 오랫동안 인권변호사로 활동한 흑인 버락 오바마다. 한때 가십거리를 다루는 미국 매체들에 따르면 "미국은 여자는 안되도 남자는 인종과 상관없이 누구든 대통령이 될수있다는 걸 증명한 사례"라고 떠벌였지만 작년부터 아프간.이라크 철군을 미루고, 건강보험개혁안과 금융개혁안을 주도하는 오바마와 젊은 민주당이 왠지 불안하긴 하다.  

미국은 지금 수많은 시민들이 미국경제파탄의 주범인 월가와 전쟁을 벌이는 등 과거에도 전례가 없는 정치사회적 대립이 확산되고 있다. 이어 미국을 이끌어가는 보수정객들과 재벌들은 현재 멕시코만에서 벌어진 기름유출사건을 놓고, 오바마를 시험하고 있다.

과연 미국 남부해안가에 사상최악의 기름유출과 환경오염사태를 일으킨 영국의 BP社와 어떤식으로 사태를 수습할지 궁금한 것도 그의 정치지도력을 음해하려는 움직임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40대 기수론'으로 독재자에 맞섰던 김대중
 

故김대중 대통령이 1971년 박정희 대통령과 대선전에서 맞설때 '40대 기수론'을 내놓은 적이 있는데 이때부터 미CIA가 적극 가담해 대선승리를 막은 일이 두 차례나 있었다. 뒤이어 1973년 일본 도쿄에서 발생한 '김대중납치사건' 또한 중앙정보국과 美CIA측 합작품이라는 사실이 육영재단 발간 박정희추모회고록에서 공개됐다.

그만큼 美정부측의 '케네디 악감정'이 극에 달했다는 반증이다. 그럼에도 미국은 유럽과 서구국가들의 눈을 피하기위해 '민주화'라는 명분으로 김대중 전대통령을 살려줬고, 이 때문에 당시 한국 군사정부와 마찰을 빚기도 했다.

             


2009년 11월 김대중 전대통령 서거


군사독재가 서슬퍼렇던 시절 젊고 유능한 정치지도자로 '40대 기수론'을 주창하며 온 국민의 사랑과 지지를 한 몸에 받았던 김대중 전대통령. 납치사건 이후로도 민주화투사로 활동하다 지난 1980년 전두환과 노태우의 신군부에 의해 5.18 광주시민 학살사건으로 말미암아 망명정치인의 신분으로 해외를 떠돌던 그는 한많은 사람이다. 

클린턴 美대통령과 미 민주당이 필리핀의 코라손 아키노에 이어 한반도 평화를 위해 김대중을 지원해왔고, 그 결과가 지난 1997년 외환위기로 알려진 이른바 'IMF사태' 전후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 뒤 지난 2000년 '6.15남북한공동선언'을 토대로 한반도는 10년동안 유례없는 평화국면이 펼쳐졌다.

그랬던 83세의 김대중 전대통령이 노무현 전대통령 영결식날 한맺힌 울음을 터뜨린 사건은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그것은 그의 마지막 운명을 예감한 사건이며, 더 이상 버텨봐야 우군도 없이 비참한 최후를 맞을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노무현

2002년 한일 월드컵 사상 '첫 4강'이라는 축제 분위기 속에 이른바 '노풍'을 일으키며, 당선된 노무현 대통령은 국민들을 오른쪽 끝(극우)에 서서 왼쪽으로 이동시키기 위해 무던히 노력해왔다. 이른바 중도성향의 균형적인 민주한국을 만들기위해 기존 정치권의 아웃사이더였던 노무현 인권변호사가 대통령으로 올라선것이다.

                    

물론 참여정부시절 정치지도력에 많은 오해와 반목이 있었지만 그를 지지한 국민이 노대통령에게 요구한건 한반도평화유지와 별도로 군사독재와 기득권주의가 남은 한국에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라는 염원인 것이다.

이제 돌이켜보면 한편으로는 미완이고 다른 한 편으로는 성공했다. 바꿔말해 한동안 화제가 된 '절반의 성공'이라는 프레임이 낯설진 않다. 노무현은 대통령 당선직후부터 美 부시행정부의 집요한 요구와 협박을 조절하며, 한반도 평화유지를 위해 노력했건만 역시 미국의 힘은 강했다. 지난 해 5월 노무현 전대통령 자살사건뒤 한반도는 평화가 아니라, 대결구도가 미국의 진심어린 요구라는걸 깨달은 것이다.

이로인해 결국 집권연장은 불가였다. 언론은 정권교체를 모토로 참여정부의 연약함을 알면서 질타했으며, 국민들은 돈벌이를 위해서라면 위법도 마다않던 2007년 그 이기적이고 가식적인 시기가 모든 것을 되돌려놨다. 이런 형태의 파국은 사실 지난날 베트남부터 시작해 중동의 이란, 남미의 칠레, 뒤이어 민주투사였던 코라손 아키노이후의 필리핀에도 적용됐다.

미국 외교협회와 정보국의 실력이 입증된 것이다

덧붙여 10년전. 20년전 지금은 50년 전으로... 게다가 오늘날 민주세력은 과거의 열정은 간데없고, 마치 '보따리 장사치'마냥 한자리 해보려는 위선자들의 놀이터가 됐던 것은 이미 예상된 상황이다.  

이를 두고, 노년의 사회운동가는 "한번 더 고생해야 정신차릴거다"라고 말하는 가 하면, "현 민주 정치권이 과감한 세대교체로 이어지지 않으면 변화는 없다"고 일갈한다. 둘 다 맞는 이야기다. 이제 국민의 의식은 주먹구구로 성장한 경제만큼이나 인터넷을 통해 달라졌다.

즉 사회가 고도화될수록 더 많은 조건과 더 많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덧붙여 일제때부터 미군정에 세명의 군사독재자들을 거치며 살아남은 재벌과 보수기득권들은 과거 지난 10년간 법정에서 변호하던 때부터 정치도 같은 맥락으로 보고 진화했다.

           아래 영상은 노무현 대통령 출마영상이다. 이것은 분명 찬반논란과 상관없이
         그의 연설로만 기억될게 아니라 국민의 꿈을 담은 장면이기에 여기에 올려본다.

        

이 길고 긴 글을 끝까지 읽어준데 대해 감사하며..
출처: drewermann's wel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