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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노벨상 기회 세 번 놓쳤다”

나 그 네 2011. 3. 7. 21:36


“한국, 노벨상 기회 세 번 놓쳤다”

시사저널 유장훈

노벨상 창안자 알프레드 노벨은 1895년 11월 유언장에 '노벨재단 운영은 북유럽인이 맡는다'라고 적시했다. 노벨재단에 덧씌워진 이러한 금기를 깬 이가 한영우 노벨재단 특임자문역(78)이다. 스웨덴 명문 의과대학 까롤린스카 내과 전문의인 한박사는 노벨재단에서 일하는 유일한 동양인이다. 이제 희수를 갓 넘은 신사의 삶은 한마디로 금기에 대한 도전이었다. 지난 1953년 11월3일 한국인으로는 맨 처음 스웨덴으로 유학을 떠나 1955년 스웨덴 명문 웁살라 대학 의대에 입학했다. 까롤린스카 의과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1963년부터 20년 동안 스웨덴 각료의 주치의를 지냈다.

한박사는 지난해 12월11일부터 한국에 머무르고 있다. 낮 시간이 두 시간밖에 되지 않은 스웨덴의 겨울을 피해 조국에서 겨울을 나기 위해 부인과 함께 입국했다. 한박사 부부는 겨울나기를 마치고 3월15일 스웨덴으로 떠난다. 한박사는 지난 2월23일 < 시사저널 > 과 가진 인터뷰에서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시상하는 노벨상을 한국인이 받는 장면을 보는 것이 마지막 소원이다"라고 말했다. 노벨상위원회는 해마다 12월10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문학, 물리학, 화학, 생리학(의학), 경제학 부문 노벨상 시상식을 연다. 고 김대중 대통령이 받았던 노벨평화상은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시상식이 열린다.

한국인 최초로 스웨덴에 유학을 떠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숙부가 일제 시절 중국 하얼빈에서 무역을 했다. 당시 하얼빈은 국제 도시였다. 하얼빈 상류층은 영어를 구사하고 사교춤을 즐겼다. 숙부는 하얼빈에서 상류층과 어울리면서 영어와 사교춤을 배웠다. 광복 이후 한국에 돌아온 숙부는 어린 조카에게 '한국말만 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며 영어와 사교춤을 가르쳤다. 숙부 덕에 영어에 능숙해진 것이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부산까지 피난 가 전시종합대학에 다녔다. 전쟁이 발발하기 전 서울대 의대 본과 1학년생이었던 나는 전시종합대학을 나와 국제연합(UN) 소속 스웨덴 야전병원에서 군무관(통역병)으로 일했다. 스웨덴 군 대령이자 야전병원장이던 얀 에껭 그렌 씨가 당시 내게 스웨덴 유학을 권유하고 추천서까지 써주었다.

유학 생활은 어떠했나?





20세 때 스웨덴행 비행기를 탔다. 당시 한국 국영 항공사 비행기를 타고 일본 도쿄로 갔다. 일본 도쿄에서 스웨덴 항공사 SAS의 항공기를 탔다. 도쿄에서 스웨덴 스톡홀름까지 36시간이 걸렸다. 프로펠러 비행기이다 보니 비행 도중 일곱 곳에 기착해 연료를 채워야 했다. 갖은 고생 끝에 스톡홀름에 도착해 추천서를 들고 웁살라 대학을 찾았다. 당시 행정처장이 '당신 다닌 대학이 어느 수준인지 모르겠다'라고 하며 입학시험을 치를 것을 요구했다. 생물·물리·화학·수학 네 과목이 각각 90점이 넘어야 했고 스웨덴어 시험에 합격해야 했다.

경기중학교와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의대에 합격한 내 학습 능력을 무시한 것이다. 오기가 생겼다. 하루 16시간씩 스웨덴어 공부에 매달렸다. 1년 동안 코피까지 쏟으며 공부한 끝에 입학시험에 합격했다. 하도 고생한 탓에 천만금을 준다고 해도 시험 공부를 다시 하고 싶지 않다. 웁살라 대학 의예과를 졸업하고 카롤린스카 종합의과대학에 진학해 내분비선 전문의가 되었다. 칼로린스카는 3백년 넘게 외과의사를 양성한 의료 기관이다. 지금은 의사, 간호사, 물리치료사까지 양성하는 종합의과대학으로 성장했다. 처음에는 불쌍한 이를 돕겠다는 뜻으로 사회의학을 전공했으나 나 혼자 나선다고 될 일이 아니라고 판단해 나중에 내과로 진로를 바꿨다. 내과 과정을 마치고 내분비선이라는 세부 전공을 5년 동안 더 공부해 내분비선 전문의가 되었다. 당시 스웨덴에서 내분비선 전문의는 10명밖에 없었다.

타국 생활이 힘들지 않았나?

당시 스웨덴에 유학 온 한국인은 달랑 두 명이었다. 당시 열두 살에 불과했던 바이올리니스트 이희춘씨가 나와 함께 스웨덴에서 유학했다. 추천서를 써준 그렌 원장이 내 유학 생활을 도와줄 스웨덴 현지 가족을 소개해주었다. 스톡홀름에서 40분 거리 떨어진 곳에 사는 스웨덴 가족과 함께 살았다. 하루는 너무 김치가 먹고 싶어 김치를 담그기로 했다. 당시 스웨덴에는 배추가 없고 양배추만 있었다. 양배추를 소금물에 절이고 고향에서 보내온 고춧가루를 섞어 발효시키려 했으나 발효가 되지 않아 바짝 말라버렸다. 나중에 배추가 나오고 나서야 제대로 된 김치를 담을 수 있었다.





노벨이 직접 작성한 유언장. 노벨 재단 운영원칙과 수상자 선정기준을 담고있다. ⓒ시사저널 유장훈

학비나 생활비는 어떻게 해결했나?

할머니가 여행 경비뿐만 아니라 학비, 생활비를 지원했다. 달마다 100달러를 보냈다. 당시로서는 큰돈이었다.

스웨덴 각료의 주치의가 된 계기는?

잉에 카롤린스카 문화부장이자 교수가 추천해 사회민주당 내각 주치의가 되었다. 당시 나는 카롤린스카 사회의학 조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잉에 교수는 당시 우로 팔메 스웨덴 총리와 친분이 두터웠다. 팔메 총리는 베트남의 호치민과 함께 베트남에서 미국이 물러날 것을 공개적으로 요구한 반미 정치인이었다. 팔메 총리는 나중에 암살되었다. 당시 미국 정보기관 짓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아무튼 잉에 교수의 소개로 팔메 내각 주치의가 되었다. 그 뒤 20년 동안 언론과 단 한 차례도 인터뷰하지 않고 죽은 듯이 일했다. 질투가 심한 스웨덴 의료계를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노벨재단에 합류한 것도 잉에 교수 추천에 의한 것인가?

잉에 교수는 평생의 은인이다. 스웨덴인이 낯선 동양인을 괴롭히기라도 하면 앞장서서 변호했다. 잉에 교수는 노벨재단에도 나를 추천했다. 노벨재단은 노벨상 수상자를 결정하는 노벨위원회, 노벨상 관련 홍보 업무를 맡은 노벨미디어, 노벨상 관련 전시물을 관리하는 노벨뮤지엄으로 구분된다. 처음에는 노벨뮤지엄에 들어갔으나 나중에 노벨미디어로 자리를 옮겼다. 노벨미디어에서 일한 지는 10년가량 되었다. 얀 리스덴 전 노벨재단 사무총장이 소개해 노벨재단에 합류했다는 보도는 오보이다. 리스덴은 훨씬 후에 노벨재단 사무총장이 되었다. 리스덴과는 둘도 없는 친구이다. 함께 카롤린스카를 다닐 때 어울렸다. 자주 요리를 만들어 함께 먹었다. 내가 요리하고 리스덴이 설거지했다.

노벨미디어 자문역으로서 무슨 일을 했나?

ⓒ시사저널 유장훈

고 김대중 대통령이 2000년 노벨평화상을 받는 데 기여했다. 김한정 당시 청와대 제1부속실장이 잘 안다. 김대통령이 수상할 때 노벨뮤지엄에서는 김대중 대통령이 감옥에서 부인 이희호 여사에게 보낸 서한과 옷을 전시했는데, 이 업무도 주관했다.

한국인으로서 노벨상 수상에 유력한 이가 있다면 누구인가?

두 명이다. 고은씨는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다만 5년가량 시만 쓰며 조용히 지내야 한다. 노벨상 운운하며 국내 언론이 떠들수록 수상이 어려워진다. 나머지 한 명은 한국 여성 정치인으로 노벨평화상 후보에 거론되고 있다. 지금 이름을 밝히면 수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조만간 알려질 것이다. 일부에서 주장하는 것과 달리 한명숙 전 총리는 아니다.

노벨상 수상을 위해 정부 차원에서 무엇을 해야 하나?

한국은 노벨상을 수상할 결정적인 기회를 세 차례 놓쳤다. 지난해 노벨상위원회는 첨단 신소재 그래핀을 발견한 영국 맨체스터 대학 안드레 가임 교수와 콘스탄틴 노보슬로프 박사에게 노벨물리학상을 주었다. 김필립 미국 콜롬비아 대학 교수는 두 노벨상 수상자 못지않게 그래핀 연구에 탁월한 성과를 냈다. 한국 정부가 노벨상 추천 기관에게 김필립 교수의 연구 성과를 알렸으면 김필립 교수는 틀림없이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을 것이다. 노벨상 추천 기관은 심사의 공정성을 위해 해마다 바뀐다. 노벨상위원회는 1년 전에 추천 기관을 발표한다. 각국 정부는 자국 인사의 연구 성과물을 추천 기관에 적극적으로 알린다. 정부가 나서 김필립 교수의 연구 성과를 당시 노벨물리학상 추천 기관에 알렸어야 했다.

황우석 박사가 주도한 배아줄기세포 연구도 거짓이 아니었다면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이 확실했다. 내가 스웨덴 줄기세포연구소장을 초청해 황박사와 1주일 동안 공동 연구를 주선하기도 했다. 당시 스웨덴인 연구소장도 속았다. 이 탓에 노벨재단 내에서 내 신인도가 크게 떨어졌다. 당시 황박사의 연구 성과를 노벨재단에 적극적으로 알린 이가 나였다.

노벨상위원회의 실수 탓에 아깝게 노벨상을 놓친 적도 있다. 국내 연구진이 세계 최초로 불임 부부를 위한 시험관 아기 시술에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당시 노벨상위원회는 시험관 아기 연구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인류 복지에 크게 기여한 시험관 아기 연구를 과소평가한 것이다. 노벨상위원회도 실수를 인정하고 있다. 노벨상위원회가 시험관 아기 연구에 대해 제대로 평가했다면 국내 시험관 아기 연구진은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꿈이 있는가?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시상하는 노벨상을 한국인이 받는 모습을 보고 싶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기초과학을 연구하는 한국인을 찾아달라. 기초과학 분야에서 탁월한 연구 성과를 이룬 한국인의 명단을 추려서 보내주면 노벨상 수상까지 이루어지도록 노력하겠다.

이철현 기자 / lee@sisapress.com

출처: 한국 노벨상 기회 세번 놓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