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orts/야 구

BABIP란 무엇인가

나 그 네 2011. 8. 26. 17:01

투수가 자신의 능력으로 통제할 수 있는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우선 떠오르는 건 던지는 구종과 공의 스피드다. 이건 대부분의 투수가 통제 가능한 영역이다. 또 공이 타자 몸쪽을 향하게 던질 것인지 바깥쪽으로 던질 것인지, 높은 공인지 낮은 공인지, 볼을 던질지 스트라이크를 던질지 여부도 피칭머신이 아닌 이상 어느 정도 컨트롤이 가능하다. 여기서 좀 더 수준 높은 투수들은 자신의 공이 타자 앞에서 어떤 궤적을 그리면서 변화할지도 성공적으로 제어해낸다. 마운드에 선 투수가 이런 통제력을 어떤 식으로 발휘하느냐에 따라 타자의 타격 결과는 물론 경기의 양상 전체가 크게 달라진다. 야구를 ‘투수놀음’이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피안타는 어떨까. 뛰어난 투수라면 안타를 맞지 않는 능력도 갖추고 있을까. 과거에는 ‘그렇다’는 견해가 우세했다. 선동열이 던진 위력적인 공은 쳐봐야 힘없는 타구가 되어 아웃이 될 가능성이 높지만, 감사용의 느린공은 일단 맞으면 총알 같은 안타성 타구가 된다는 게 사람들의 일반적인 상식이었다. 또 노련한 투수는 타자의 배트를 유도해서 ‘맞혀 잡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고정관념도 널리 퍼져 있었다. 한때 당연하게 여겨진 이런 상식‘이 뒤집힌 것은 지난 2001년 미국의 한 세이버 메트리션이 쓴, 당시로서는 매우 과격하고 터무니없어 보이는 주장이 담긴 글을 통해서였다. 시카고의 로펌에서 근무하던 야구광 보로스 맥크라켄(Voros McCracken)이 문제의 인물이다.

 

 

‘미친 소리’의 등장

평소 야구 통계에 관심이 많았던 맥크라켄은 특히 ‘어떻게 하면 투수의 능력을 정확하게 평가할 수 있을지’를 두고 고심했다. 기존의 평가 기준인 평균자책이나 피안타율, 삼진, 볼넷만 가지고는 만족스럽지가 못했던 것이다. 어느 날 그는 대투수 그렉 매덕스(Greg Maddux)의 기록을 살펴보다가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다. 매덕스는 늘푸른 소나무처럼 매년 한결같은 활약을 보여준 꾸준한 투수. 그런데 매덕스의 탈삼진, 볼넷, 몸에 맞는 공, 피홈런은 매년 거의 일정한 비율을 나타낸 반면에, 피안타율은 최저 .244에서 최고 .376까지 변화의 폭이 컸던 것이다. 여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맥크라켄은 연구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메이저리그 투수들은 인플레이된 타구가 안타가 되는 것을 막을 능력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투수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삼진과 볼넷, 몸에 맞는 공과 피홈런 뿐이다. 일단 타자의 배트에 맞아 페어 지역에 들어간 타구가 안타/아웃이 되는 것은 투수의 능력과는 관계가 없다.” 다시 말해 맥크라켄은 페어 지역에 들어간 타구가 안타가 될지 여부는 투수의 능력이 아닌 ‘수비’와 ‘운’에 의해 좌우된다는 주장을 한 셈이다. 일단 배트에 맞아 파울라인 안에 들어가면 선동열의 공이나 감사용의 공이나 안타가 될 확률에는 별 차이가 없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투수는 인플레이된 타구를 안타가 되지 않게 할 능력이 없다”. 세이버 메트리션들이 내린 결론이다. 언뜻 보면 맞혀 잡는 투수가 불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안타를 통제할 수 없다면, 투수는 자신의 능력으로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을 통제하면 되기 때문이다. 삼진을 많이 잡거나, 볼넷을 적게 주고, 홈런을 적게 맞으면 된다. 사진은 청룡기 고교야구에서 투구하는 장충고 최우석. <출처: 배지헌>

 

 

이런 맥크라켄의 ‘지동설’을 이해하려면 우선 야구를 투수와 타자의 일대일 대결로 보는 개념에서 탈피해야 한다. ‘야구는 9명씩 팀을 이뤄 하는 구기 종목’이라는 사전적 정의로 회귀하는 것이다. 쉽게 생각해 보자. 어떤 투수도 모든 타자를 삼진으로 잡아낼 수는 없고, 반대로 어느 타자도 모든 타구를 담장 너머로 날려 보낼 수는 없는 법. 결국 투수가 던지고 타자가 치면, 그 이후는 수비와 행운의 몫이 된다. 사람들은 흔히 투수가 자기가 원하는 공을 정확하게 원하는 곳에 던지고, 타자가 정확하게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받아쳐서 원하는 곳으로 보낼 수 있는 절대적인 존재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런 투수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일단 손에서 공이 떠나면 닌텐도 게임이 아닌 이상 투수가 공에 대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공을 던진 투수는 그저 공이 타자의 배트를 비껴가기를, 맞더라도 타구가 수비수가 있는 곳으로 향하기를 기대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잘 맞은 타구가 야수 정면으로 가거나 호수비에 걸려 아웃되기도 하고, 빗맞은 타구가 재수 없게 아무도 없는 곳에 떨어져 안타가 될 수도 있는 게 야구다.

 

타자 역시 마찬가지. 흔히 ‘안타를 만들어내는 선수’라는 표현을 쓰곤 하지만, 타자들이 실제로 하는 일은 투수의 공을 정확하게 좋은 타이밍에 받아쳐서 보다 강하고 멀리 뻗어가는 타구가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자신의 타구가 수비수들이 없는 곳으로 가서 떨어지게 조절하는 능력을 지닌 타자는 없다. 투수와 마찬가지로 타자도 정통으로 맞은 타구가 야수 정면으로 가서 아웃이 되는가 하면, 형편없이 빗맞은 뜬공이 텍사스성 안타가 되는 행운을 누리기도 한다. 다만 좋은 타구를 지속적으로 생산하면 그만큼 안타로 연결될 가능성을 높일 수 있을 뿐이다. 이런 개념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맥크라켄의 주장에 처음 사람들이 보인 것과 같은 반응(그의 말에 따르면 “당신 미쳤소?”가 대부분이었다)을 나타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맥크라켄의 주장은 기존 야구계의 고정관념을 통째로 뒤흔드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처음 발표 당시 일반 야구팬은 물론 세이버 메트리션 중에도 맥크라켄의 주장을 비웃는 이가 적지 않았을 정도. 하지만 야구 통계 역사상 가장 뜨거운 논쟁과 검증이 뒤따른 결과, 현재는 맥크라켄의 주장이 상당부분 ‘근거 있는 것’으로 결론이 난 상태다. 여러 차례 수정과 보완을 거친 현재까지의 연구 결과는 이렇다: “‘인플레이된 타구’가 안타가 될 확률에는 투수의 능력도 어느 정도는 관련되어 있다. 특히 너클볼 투수의 인플레이 타구 피안타율은 역사적으로 낮은 경향을 보인다. 하지만 이런 예외적인 경우도 다른 투수들과 유의미한 수준의 차이를 보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인플레이 타구의 안타 여부에 ‘수비’와 ‘운’이 가장 큰 영향을 끼친다는 맥크라켄의 기본적인 발상은 여전히 유효하다.

 

 

Batting Average on Balls in Play

이제 맥크라켄의 주장을 실제로 검증해볼 차례다. 이를 위해서는 ‘인플레이 타구의 타율’을 나타낸 통계 수치인 BABIP(Batting Average on Balls in Play)를 살펴봐야 한다. BABIP는 의미 그대로 인플레이 상황, 즉 타자가 친 공이 페어 영역 안에 떨어진 경우만을 토대로 구하는 스탯(Stats)이다. BABIP는 (안타-홈런)/(타수-삼진-홈런+희생타)로 계산하는데, 여기서 홈런을 제외하는 건 홈런은 인플레이가 아닌 그 자체로 플레이가 종료된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를 토대로 앞서 언급된 매덕스의 연도별 성적 변화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그렉매덕스의 연도별 스탯.

 

 

애틀랜타 이적 후 매년 꾸준한 성적을 기록하던 매덕스가 1999년 들어 갑작스레 평균자책과 피안타율이 크게 악화된 것을 볼 수 있다. 과연 무엇이 문제였을까? 그해 매덕스의 BABIP 수치를 보면 답이 나온다. 데뷔 이후 .250~.270 사이를 맴돌던 매덕스의 BABIP가 1999년에는 3할대로 치솟은 것이다. 다시 말해 그해 매덕스는 유독 맞는 공마다 수비가 없는 곳에 가서 떨어지거나 동료 수비수들의 도움을 받지 못하면서 불운한 시즌을 보낸 셈이다. 실제로 다음해인 2000년 매덕스의 BABIP는 예년 수준(.274)으로 돌아왔고 그의 평균자책도 회복(3.00)됐다. 아래 표는 메이저리그 현존 가장 위력적인 투수이자 ‘판타스틱 4’의 리더인 로이 할라데이(Roy Halladay)의 연도별 성적이다.

 

로이 할라데이의 연도별 스탯.

 

 

흔히 타자가 가장 안타를 쳐내기 힘든 투수로 여겨지는 할라데이지만, 인플레이된 타구의 타율만 놓고 보면 보통 투수들과 큰 차이가 없다. 특히 유독 부진한 모습을 보인 2004년과 2007년에는 BABIP가 3할 대 가까이 치솟으면서 불운과 수비 지원 부족에 울었다. 올 시즌도 현재까지의 BABIP는 .304로, 평균 80마일대의 ‘똥볼’을 던지는 칼 파바노(.305)나 지오 곤잘레스(.302)와 큰 차이가 없는 수준이다. 투수의 구위나 투구 유형이 인플레이 타구의 타율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얘기다. 내친 김에 올 시즌 메이저리그에서 뛰고 있는 몇몇 투수들의 BABIP 수치를 무작위로 나열하면 아래와 같다.

에드윈 잭슨(Edwin Jackson) .336
브라이언 두엔싱(Brian Duensing) .322
하이메 가르시아(Jaime Garcia) .317
맥스 슈어저(Max Scherzer) .310
브랜든 머로우(Brandon Morrow) .301
클리프 리(Cliff Lee) .301
프레디 가르시아(Freddy Garcia) .295
데이빗 프라이스(David Price) .288
파우스토 카모나(Fausto Carmona) .277
숀 마컴(Shaun Marcum) .259
조쉬 톰린(Josh Tomlin) .246

역시 강속구 투수건 아리랑볼 투수건, 리그 정상급 투수건 수준 이하 투수건 BABIP 수치와는 큰 연관이 없는 것을 볼 수 있다. 언뜻 생각하기엔 타자가 안타를 쳐내기 힘들 것 같은 강속구를 던지는 에드윈 잭슨, 맥스 슈어저 등이 꽤 높은 BABIP를 기록한 반면, 빠른 볼과는 거리가 먼 마컴이나 톰린은 낮은 BABIP 수치를 보였다. 이처럼 BABIP와 투수의 능력 간에는 유의미한 관계를 찾기 어렵다.

 

그렇다면 BABIP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무엇일까. 팬그래프닷컴(fangraphs.com)의 칼럼니스트 스티브 슬로윈스키(Steve Slowinski)는 크게 3가지로 요약한다. 첫째는 수비수의 능력이다. “어떤 선수가 3루쪽으로 강한 라인 드라이브를 날렸다고 가정하자. 3루수가 뛰어난 수비수라면 그 타구는 잡혀서 아웃이 될 것이다. 하지만 만일 수비범위가 아주 좁은 선수가 3루에 있다면 그 타구는 안타로 기록될 것이다.” 슬로윈스키의 설명이다. 둘째는 ‘운’이다. 텍사스성 안타 같은 경우가 여기 해당된다. 마지막 세 번째는 장기 레이스를 치르는 동안 선수 개개인이 겪는 ‘변화’다. 시즌 도중 타격이나 투구폼을 바꿀 수도 있고, 웨이트 트레이닝을 통해 구속이나 파워가 늘어날 수도 있다. 또 약점이 노출되거나 보완되면서 성적에 변화를 겪을 수도 있다.

 

한편 타자의 BABIP는 투수와 달리 타자 개인의 스타일이나 선천적인 능력이 밀접하게 관련되어 나타난다. ‘하드볼 타임스’의 크리스 더튼(Chris Dutton)은 타자의 BABIP에 영향을 주는 요인으로 “타자의 스피드, 타구 비거리, 컨택 능력, 라인드라이브 비율” 등을 거론한다. 가령 가르시아처럼 극단적으로 당겨치는 타자일 경우에는 BABIP가 낮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공이 떨어지는 지역이 우측에 치우치게 되고, 수비수들 역시 그에 맞게 우측으로 수비위치를 조정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갑자기 가르시아스프레이 히터로 변신하지 않는 이상 그의 BABIP가 급격하게 높아지는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또 같은 땅볼 타자라도 이대형이숭용의 BABIP 수치는 큰 차이를 보이게 마련이다. 이숭용이 아바타를 동원하지 않는 이상, 1루에서 살 확률은 발이 빠른 이대형 쪽이 월등하게 높기 때문. 그런가 하면 이용규가 피나는 훈련을 통해 이대호 수준의 장타자로 변신을 했다거나, 가르시아가 교타자로 변신한다면 그들의 BABIP 수치 역시 변화가 불가피할 것이다. 하지만 그 같은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경우는 흔치 않다.

 

타자의 BABIP는 운과 수비 외에도 타자의 타고난 타격 성향이나 재능이 관련된다. 달리는 스피드, 타구 방향, 라인드라이브 비율 등이 타자 고유의 BABIP를 형성하는 요인이다. 사진은 청룡기 고교야구에서 타석에 들어선 북일고 김주현. <출처: 배지헌>

 

 

한 가지 유의할 점은, BABIP는 기량이 일정한 단계 이상에 도달해서 꾸준한 성적을 보여줄 수 있는 선수들을 대상으로 고안된 것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이를 꾸준함이나 기량이 모자란 하위리그 선수들에게 그대로 적용할 경우 신뢰할 만한 데이터를 얻어낼 가능성은 크지 않다. 다만 미국 마이너리그 트리플 A 선수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신뢰도가 높은 결과가 도출되었다고 한다. 국내에는 현재 BABIP를 제공하는 웹사이트가 전무한 관계로 정확한 확인은 불가능하지만, 프로야구도 30년째를 맞이한 만큼 어느 정도는 적용이 가능할 것으로 볼 수 있다.

 

 

시간을 달리는 BABIP

BABIP는 특히 투수와 타자의 앞날을 미리 예측하는데 유용하다. 만일 어떤 투수의 BABIP가 이례적으로 낮은 수치를 기록했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이 선수는 그해 매우 운이 좋은 시즌을 보냈거나 수비수들의 지원을 많이 받았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앞서 매덕스처럼 특정 투수가 BABIP에서 유독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면, 운과 수비 지원이 평상시 수준으로 돌아오는 다음 해에는 성적이 나아질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가령 ‘퍼펙트 오심’의 희생자로 유명한 아르만도 갈라라가(Armando Galarraga)의 2008년을 보자. 그해 갈라라가는 13승 7패에 3.73의 수준급 평균자책을 기록하며 최고의 한해를 보냈다. 하지만 그의 성적에는 함정이 있었는데, BABIP 수치가 .236로 비정상적으로 낮았던 것이다. 운과 수비 지원이 절정에 달한 시즌이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이듬해 갈라라가의 BABIP는 마이너리그 시절 수준인 .298로 다시 치솟았고, 그는 6승 10패에 평균자책 5.64라는 충격적인 성적으로 2009 시즌을 마감했다. 반대로 탬파베이의 제임스 쉴즈(James Shields)는 2010년 5.18의 평균자책으로 부진했지만 BABIP도 .341로 매우 높았다. 올해 그는 .265의 정상적인 BABIP를 기록하며 2.80의 평균자책으로 최고의 시즌을 보내고 있다.

 

타자 역시 마찬가지. <하드볼 타임스>의 데릭 카티는 “타자들의 BABIP는 각자 자기만의 고유한 수치로 회귀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지적했다. 시즌 초반이나 특정 시즌 동안 어떤 타자의 BABIP가 특별한 이유 없이 평소보다 매우 높게 나타날 경우, 이는 일시적인 현상일 뿐 나중에는 원래 자신의 평균과 비슷한 수치를 내게 된다는 얘기다. 만일 어떤 타자의 BABIP가 평소보다 비정상적으로 높게 나타난다면, 이는 그의 타구가 평소보다 유독 높은 비율로 수비수 없는 곳에 가서 떨어지고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다시 말해 그에게 평상시보다 훨씬 ‘운’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가령 2008년 프로야구에서 유난히 BABIP의 증가폭이 컸던 선수들의 다음 시즌 성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2008년 BABIP 증가폭이 컸던 타자들.

 

 

대부분의 선수가 큰 폭의 타율 하락세를 보였다. 이는 2009년에도 마찬가지. 다음 표에 등장하는 선수 중 2010년에도 변함없는 활약을 보여준 선수가 몇이나 되는지 찾아보기 바란다.

 

2009년 BABIP 증가폭이 컸던 타자들.

 

 

DIPS, FIP, DER


BABIP를 활용한 파격적인 발상은 DIPS와 FIP, DER 등의 새롭고 창의적인 스탯으로 이어졌다. 이중 DIPS는 앞에 언급한 맥크라켄 본인이 개발한 스탯으로 Defense Independent Pitching Stats의 약자이고 FIP는 Fielding Independent Pitching를 줄인 말로 유명한 세이버 메트리션인 톰 탱고(Tom Tango)가 처음 개발한 스탯이다. 계산하는 방식은 다르지만 둘 다 투수 평가에서 수비의 영향을 배제한다는 점은 공통적이다. BABIP와는 정반대로 ‘투수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인 삼진과 볼넷, 홈런, 몸에 맞는 공을 갖고 평균자책점의 형태로 나타낸 것이라고 보면 된다. 따라서 FIP와 DIPS에 사용되는 스탯은 BABIP의 계산에서는 모두 제외된다. 최근에는 여러 연구를 통해 DIPS보다는 FIP가 훨씬 우수하고 활용도가 높다는 점이 밝혀졌으며, DIPS를 제공하는 사이트는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이다. FIP를 계산하는 공식은 다음과 같다.

 

 

FIP는 BABIP와 유사한 발상에서 나온 스탯으로 투수의 미래 성적을 예측하는데 매우 유용하다. 특히 평균자책점과 같은 형태로 산출되기 때문에 비교해서 살펴보기에도 편리하다는 것이 장점이다. 가령 2006년과 2007년 배리 지토(Barry Zito)의 성적을 보자. 지토는 2006년 16승을 따내며 평균자책 3.83을 기록했지만 그의 FIP는 4.89에 달했다. 다시 말해 지토는 그해 수비수들의 도움으로 평균자책에서 1점 이상 이익을 봤다는 얘기다. 하지만 샌프란시스코와 7년 계약을 맺은 이듬해에 지토의 평균자책점은 4.53으로 치솟았다. 급작스런 부진을 보였다기보다는, 더 이상 전년도와 같은 수비 지원과 운이 따르지 않았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한마디로 ‘예고된 먹튀’였던 셈이다. 반면 조쉬 베켓(Josh Beckett)은 2008 시즌 평균자책 4.03으로 부진했지만 FIP는 3.24로 나쁘지 않았다. 그가 유독 수비수들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불운한 해를 보냈단 얘기. 예상대로 다음 시즌 그는 평균자책 3.83에 17승 6패의 성적으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물론 투수가 내년에도 같은 수준의 공을 던진다는 전제가 따르기는 하지만, FIP가 투수의 성적을 예측하는데 유용한 스탯인 것만은 분명하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수비 효율’로 번역되고 있는 DER(Defense Efficiency Ratio)이다. DER 역시 BABIP와 같은 아이디어에서 유래한 스탯으로, 한 팀이 홈런, 삼진, 볼넷 등을 제외한 인플레이 타구를 얼마나 많이 아웃으로 잡아냈는지를 보여준다. 이 비율이 높은 팀은 보통의 수비로는 안타가 될 타구를 아웃으로 만들어낼 확률이 그만큼 높았다는 얘기가 된다. 수비효율이 높으면 높을수록 실점을 최소화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다. DER의 계산 공식은 다음과 같다.

 

 

DER은 ‘실책이 적으면 좋은 수비수’라는 기존의 관념과는 전혀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가령 어떤 수비수가 경기 내내 선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다고 치자. 아마도 이론상으로 이 선수는 수비율 100%를 달성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반면 전성기 이종범처럼 잡을 수 있는 타구는 물론 잡을 수 없는 타구까지 커버하며 어떻게든 아웃을 만들려고 하는 ‘적극적’인 수비수일 경우, 실책이 나올 확률도 그만큼 높아질 수밖에 없을 게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수비율이 높은 선수가 실제로는 나쁜 수비수일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는 얘기다. 반대로 DER의 개념에 따르면 어떤 팀이 실책 수는 많더라도 실제로는 안타성 타구를 많이 잡아내면서 좋은 수비를 펼친 팀일 가능성도 충분하다.

 

가령 1999년의 삼성이 대표적인 예다. 그해 삼성의 수비실책은 76개로 8개 구단 중에 가장 적었지만, DER은 110개로 최다실책을 기록한 팀인 해태보다도 못했다(삼성 .670/해태 .674). 특히 한국시리즈 진출팀인 롯데(.699)와 한화(.684)와의 차이는 더욱 컸다. 외야에 찰스 스미스빌리 홀이라는 ‘구멍’이 자리잡은 탓에, 다른 팀이면 잡아냈을 무수한 타구가 죄다 안타로 처리된 탓이다. 삼성 투수들은 수비수의 도움을 받지 못해 롯데보다 3% 가까운 주자를 더 내보내야만 했다. 롯데가 플레이오프에서 예상을 깨고 삼성을 격파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최근 4년간 3차례 우승을 차지한 SK 와이번스는 거의 매년마다 DER 부문에서 상위권을 달린 팀이다. 두산 베어스도 지난해까지는 DER에서 SK와 1, 2위를 다퉜다. 하지만 올해 들어서는 DER이 최하위권으로 떨어졌는데, 이는 두산의 성적 부진의 원인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상위권을 달리는 KIA와 삼성은 DER도 상위권인 반면, 한화의 DER은 8위에 그치고 있다. 수비에서의 효율성이 팀 성적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점이 드러난다.

 

BABIP를 통한 발견은 야구에서 스타크래프트 속 검게 칠해진 지도처럼 뒷전으로 밀려나 있던 ‘수비’의 중요성을 일깨웠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야구는 투수와 타자의 일대일 대결이 아니라 아홉 명이 팀을 이뤄 공격과 투수, 수비에서 겨루는 경기라는 사실에 주의를 돌린 것이다. 사진은 청룡기 고교야구에서 수비 준비동작을 취하는 북일고 선수. <출처: 배지헌>

 

 

맥크라켄의 창의적인 ‘발견’은 야구 통계의 역사상 가장 논쟁적인 순간이자, 한편으로는 최고의 혁신이기도 했다. 그의 발견은 사람들이 야구를 보는 관점과 선수를 평가하는 기준을 크게 바꾸어 놓았고, 투수와 타자에 가려져 홀대받던 ‘수비’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하게 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