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선데이, 오피니언 리더의 신문"
일제는 우리 밤 문화도 크게 바꿔놓았다. 일제 침략사를 연구했던 임종국 선생이 밤의 일제 침략사에서 ‘일제는 한 손에 대포와 한 손에 기생을 거느리고 조선에 건너왔다’고 말한 것처럼
일본은 조선의 밤 문화를 창기(娼妓)문화로 타락시켰다. 우리 사회가 술과 여자에 빠질수록 독립운동에 나서지 않을 것이란 계산도 한몫했다.
식민통치 구조
⑤ 공창(公娼)
대한제국은 1895년 갑오개혁 때 관기(官妓) 제도를 혁파했다. 이로써 관기는 국가의 예속에서 해방되어 자유 신분이 되었다. 그러나 한 해 전인 1894년의 청일전쟁 때 일본군이 진주하면서 관기 혁파는 무의미해졌다.
1894년 6월 해군 중장 이도(伊東祐亭)가 선발대를 이끌고 서울에 온 것을 필두로 일본군이 속속 진주하자 일본 거류민회는 묵정동에 대지 70평을 구입해 유곽(遊廓)을 만들었다. 군대 진주와 더불어 유곽을 만드는 일본군의 이런 전통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뿌리인 셈이다. 러일전쟁으로 일본군이 대거 증파되면서 이 유곽은 8300여 평으로 크게 확대된다. 이 유곽지대가 일종의 공창(公娼)지대였다. 공창이 확산되는 데 큰 공헌을 한 두 인물이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일진회의 송병준(宋秉畯)이었다.
천도교에서 발행하던 종합월간지 개벽(開闢) 48호(1924년 6월호)는 경성의 화류계 란 흥미로운 기사를 싣고 있다. 필자인 일기자(一記者)는 송병준을 색작(色爵), 이토를 색귀(色鬼)라고 표현하고 있다. 송병준이 망국 후 자작(子爵) 작위를 받았다가 1920년에 백작(伯爵)으로 승진한 것을 그의 엽색(獵色) 행각에 빗대 색작이라고 비꼰 것이다. 송병준은 1900년 10월 일본인 첩 가쓰오(勝女)를 시켜서 요릿집 청화정(淸華亭)을 열었다가 1906년에 개진정(開進亭)으로 확대했다. 충무로 2가의 개진정은 양식까지 제공하던 요릿집으로서 친일파들의 단골 회식장소였다.
이토는 1906년 3월 초대 조선통감으로 부임할 때 육군 소장 무라다(村田淳)와 해군 소장 미야오카(宮岡直記), 통감부 외무총장 나베시마(鍋島桂次郞) 같은 공식 수행원뿐만 아니라 4명의 화류계 여성들도 데리고 왔다. 도쿄 니혼바시(日本橋) 출신의 오카네(お柳), 표면상으론 이토의 전용 간호사지만 실제로는 정부였던 오류우, 비파(琵琶)의 명인 요시다 다케코(吉田竹子), 도쿄 신바시(新橋) 출신의 게이샤 사다코(條子)였다. 이토는 사다코를 4500원의 1년 출장 화대를 주고 데려왔는데, 당시 쌀 한 가마 값은 5원 정도였다. 그래서 주한 일본인들도 이토를 ‘풍류 통감’이라고 불렀다.
이토가 통감으로 부임하자 시모노세키 시절 이토의 이웃이었던 닛다(新田又兵衛)가 한국으로 건너와 남산동에 천진루(天眞樓)를 열었다. 천진루 연회에서 닛다는 주차군 사령관 하세가와(長谷川好道) 대장과 무라다(村田淳) 소장 사이에 앉아 ‘닛다(新田) 중장’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이토는 “취해서 미인의 무릎을 베고 눕고, 깨어서 천하의 권력을 잡는다(醉臥美人膝,醒掌天下權)”는 한시(漢詩)를 지을 정도로 여자·술과 정치를 동일시했던 인물이었다.
임종국 선생이 밤의 일제 침략사 에서 ‘일제는 한 손에 대포와 한 손에 기생을 거느리고 조선에 건너왔다’고 말한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일제 식민통치에 비판적인 역사학자 야마베 겐타로(山邊健太郞)는 일본 통치하의 조선(日本 統治下の朝鮮:1971, 번역서는 일본의 식민지 조선통치 해부 ) 에서 “병합은 그 경과로 보더라도 일본군의 강대한 무력을 배경으로 한국 상층의 일부를 매수해서 이루어진 것이 명백하다”라고 쓰고 있는데, ‘한국 상층 일부’를 매수하는 방법이 술과 여자였던 것이다. 이토는 대한제국의 고위 관료들을 초청해 연회할 때 게이샤 한 명을 각각 앉혀 대접하게 했다. 일제가 경의선 부설권을 얻기 위해 내부대신 이재완(李載完:망국 후 자작 수여)에게 거금 5만원을 준 것도 이런 술자리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일본이 사실상 공창(公娼)을 허용하면서 조선의 기생들은 일패(一牌), 이패(二牌), 삼패(三牌)로 나뉘게 된다. 그 유래는 분명치 않지만 갑오개혁 때 관기 제도가 폐지되자 관에서 풀린 기생들이 자신들을 몸 파는 기생들과 구분하기 위해 나눈 것으로 짐작된다. 일패는 과거의 관기들로서 몸은 절대 팔지 않고 가무를 선보였던 예인(藝人)들이다. 이들 중에 생활고에 시달려 은밀하게 매춘도 하는 기생들이 이패였다. 이패를 ‘숨어 있는 군자’라는 뜻의 은군자(隱君子), 또는 ‘은근짜(慇懃-)’라고 불렀는데 그만큼 몸을 파는 것을 부끄러워했다는 뜻이다. 삼패는 돈만 있으면 아무나 안을 수 있는 창부(娼婦)로서 세칭 가무 못하는 ‘벙어리 기생’이었다.
일본에서 건너온 기생은 대부분 3패에 속하는 저질들이었다. 이런 일본의 저질 밤 문화가 퍼지자 1908년 관기(官妓) 출신들이 한성(漢城) 기생조합을 만들었다. 한성 기생조합은 유부녀 기생들의 모임으로서 기예는 팔아도 몸은 팔지 않는 예인들의 조합이었다. 그러자 송병준이 평양 출신의 남편 없는 기생들을 주축으로 만드는 것이 다동(茶洞) 기생조합이었다. 기생조합의 명칭이 권번(券番)으로 바뀌면서 다동 기생조합은 대정권번(大正券番)이 된다.
1929년도 조선은행 회사조합요록(朝鮮銀行會社組合要錄) 에는 1923년 창립한 경성권번이 자본금 2200원의 합자회사로 버젓이 등재되어 있는데 사업 목적은 ‘예기(藝妓)의 양성, 유흥업’으로 적고 있다. 일제가 공창제도를 버젓이 운영했다는 뜻인데, 경성권번의 대표 홍병은(洪炳殷)은 송병준의 대정권번에서 사무를 보던 인물이었다. 영·호남 출신 기생들이 주축인 한남(漢南)권번이 있었고 경화(京和)권번도 있었다. 경화권번은 조선권번으로 명칭이 바뀌는데 그 대표 하규일(河奎一)도 송병준의 대정권번에서 감독으로 있던 인물이었다. 송병준을 색작(色爵)이라고 부른 것은 이런 까닭이 있었다.
하규일이 송병준의 심복 안순환(安淳煥)과 충돌한 후 독립해서 차린 권번이 경화권번인데, 안순환의 이력도 특이하다. 경시통감(警視總監) 와카바야시(若林賚藏)가 2대 통감 소네(曾<79B0>荒助)에게 보낸 비밀보고서에 따르면 안순환은 궁중의 음식을 담당하는 전선사(典膳司) 상선(尙膳)으로 있으면서 이용구·송병준의 일진회에 가입한 자였다. 이런 안순환이 궁중에서 나와 1908년 12월 지금의 광화문 일민미술관 자리에 차린 요릿집이 한세월을 풍미하던 명월관(明月館)이었다.
일제 진출 이후 서울의 밤 문화는 이토 같은 색귀 통감과 송병준 같은 친일 색작 등이 주도하면서 과거의 기예(技藝) 중심의 품격은 사라지고 삼패 중심의 천박한 매춘으로 전락했다. 일패 기생들 중에는 애국자도 적지 않았다.
매천야록 1906년조는 미모에다 서예도 잘했던 진주(晋州) 기생 산홍(山紅)의 이야기를 싣고 있다. 이지용(李址鎔:망국 후 백작 수여)이 첩으로 삼으려고 하자 산홍은 “세상 사람들이 대감을 5적의 우두머리라고 하는데, 비록 천한 기생일지라도 어찌 역적의 첩이 되겠습니까?”라고 꾸짖어 구타당했다는 것이다. 이지용은 1904년 러일전쟁 때 외무대신 임시서리로 대한제국의 영토를 일본군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게 허용하는 한일의정서를 체결해준 대가로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에게 1만원을 받았는데, 이때 산홍에게 주려고 한 돈이 1만원이었다는 뒷얘기도 있다.
주요한(朱耀翰)이 발행하던 동광(東光) 28호(1931년 12월호)에는 한청산(韓靑山)이 쓴 기생철폐론 이 실려 있다. “옛날은 관기(官妓)라고 해서 군수 사또가 아니면 데리고 놀지 못하던 기생이 하루아침에 양반정치가 무너지고 섬 건너 양반정치가 된 뒤로 아주 철저히 민중화가 되어 이제는 개쌍놈의 아들이라도 황금만 가졌으면 일류 명기(名妓)를 하룻밤에 다 데리고 놀 수 있게 되었다”고 비난하고 있다. 양반·쌍놈 등의 인식에는 문제가 있지만 예기 중심의 고급문화가 매춘 위주로 천박해졌다는 문제의식은 맞는 말이었다.
앞에 인용한 경성의 화류계 는 “많은 권번을 일본인 또는 준(準)일본인이 경영한다. 그의 세력이 화류계에서까지 위대한 것은 참 주목할 일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일본인들이 조선에 진출해 전개한 사업은 고리대금업과 매춘업이 주류였다. 임종국 선생은 1930년 무렵 한국인은 4만3700여 명에 한 명꼴로 기생이 있었지만, 일본인은 1400여 명에 한 명꼴로 서른 배 이상 많았다고 분석하고 있다. 기생철폐론 은 “기생이 없어져도 내외 술집이 있고 카페가 있고 은군자(隱君子)가 있고 유곽(遊廊)이 있고 무엇이야 없으랴. 그러하나 공공연하게 사회가 허락하는 소위 요리관 교제만 없애도 우리 사회의 능률이 얼마나 증진되랴”면서 기생 철폐론을 주장했다.
술자리에 여자를 동석시키는 현재의 잘못된 밤 문화도 알고 보면 그 뿌리는 일제시대에 있다. 1919년 기생들이 3·1운동에 대거 동참한 것은 밤 문화까지 잠식한 일제에 대한 항거이기도 했다.
중앙SUNDAY 구독신청
일제는 우리 밤 문화도 크게 바꿔놓았다. 일제 침략사를 연구했던 임종국 선생이 밤의 일제 침략사에서 ‘일제는 한 손에 대포와 한 손에 기생을 거느리고 조선에 건너왔다’고 말한 것처럼
일본은 조선의 밤 문화를 창기(娼妓)문화로 타락시켰다. 우리 사회가 술과 여자에 빠질수록 독립운동에 나서지 않을 것이란 계산도 한몫했다.
조선에 진출한 일본인들은 고리대금업과 매춘업을 많이 했다. 일본식 유곽 문화가 퍼지면서 기예 중심이던 조선의 밤 문화는 매춘 중심의 하급 문화로 전락했다. [백범영-백귀야행(百鬼夜行), 43×99㎝, 화선지에 수묵담채, 2011]
식민통치 구조
⑤ 공창(公娼)
대한제국은 1895년 갑오개혁 때 관기(官妓) 제도를 혁파했다. 이로써 관기는 국가의 예속에서 해방되어 자유 신분이 되었다. 그러나 한 해 전인 1894년의 청일전쟁 때 일본군이 진주하면서 관기 혁파는 무의미해졌다.
1894년 6월 해군 중장 이도(伊東祐亭)가 선발대를 이끌고 서울에 온 것을 필두로 일본군이 속속 진주하자 일본 거류민회는 묵정동에 대지 70평을 구입해 유곽(遊廓)을 만들었다. 군대 진주와 더불어 유곽을 만드는 일본군의 이런 전통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뿌리인 셈이다. 러일전쟁으로 일본군이 대거 증파되면서 이 유곽은 8300여 평으로 크게 확대된다. 이 유곽지대가 일종의 공창(公娼)지대였다. 공창이 확산되는 데 큰 공헌을 한 두 인물이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일진회의 송병준(宋秉畯)이었다.
천도교에서 발행하던 종합월간지
이토는 1906년 3월 초대 조선통감으로 부임할 때 육군 소장 무라다(村田淳)와 해군 소장 미야오카(宮岡直記), 통감부 외무총장 나베시마(鍋島桂次郞) 같은 공식 수행원뿐만 아니라 4명의 화류계 여성들도 데리고 왔다. 도쿄 니혼바시(日本橋) 출신의 오카네(お柳), 표면상으론 이토의 전용 간호사지만 실제로는 정부였던 오류우, 비파(琵琶)의 명인 요시다 다케코(吉田竹子), 도쿄 신바시(新橋) 출신의 게이샤 사다코(條子)였다. 이토는 사다코를 4500원의 1년 출장 화대를 주고 데려왔는데, 당시 쌀 한 가마 값은 5원 정도였다. 그래서 주한 일본인들도 이토를 ‘풍류 통감’이라고 불렀다.
이토가 통감으로 부임하자 시모노세키 시절 이토의 이웃이었던 닛다(新田又兵衛)가 한국으로 건너와 남산동에 천진루(天眞樓)를 열었다. 천진루 연회에서 닛다는 주차군 사령관 하세가와(長谷川好道) 대장과 무라다(村田淳) 소장 사이에 앉아 ‘닛다(新田) 중장’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이토는 “취해서 미인의 무릎을 베고 눕고, 깨어서 천하의 권력을 잡는다(醉臥美人膝,醒掌天下權)”는 한시(漢詩)를 지을 정도로 여자·술과 정치를 동일시했던 인물이었다.
임종국 선생이
일본이 사실상 공창(公娼)을 허용하면서 조선의 기생들은 일패(一牌), 이패(二牌), 삼패(三牌)로 나뉘게 된다. 그 유래는 분명치 않지만 갑오개혁 때 관기 제도가 폐지되자 관에서 풀린 기생들이 자신들을 몸 파는 기생들과 구분하기 위해 나눈 것으로 짐작된다. 일패는 과거의 관기들로서 몸은 절대 팔지 않고 가무를 선보였던 예인(藝人)들이다. 이들 중에 생활고에 시달려 은밀하게 매춘도 하는 기생들이 이패였다. 이패를 ‘숨어 있는 군자’라는 뜻의 은군자(隱君子), 또는 ‘은근짜(慇懃-)’라고 불렀는데 그만큼 몸을 파는 것을 부끄러워했다는 뜻이다. 삼패는 돈만 있으면 아무나 안을 수 있는 창부(娼婦)로서 세칭 가무 못하는 ‘벙어리 기생’이었다.
일본에서 건너온 기생은 대부분 3패에 속하는 저질들이었다. 이런 일본의 저질 밤 문화가 퍼지자 1908년 관기(官妓) 출신들이 한성(漢城) 기생조합을 만들었다. 한성 기생조합은 유부녀 기생들의 모임으로서 기예는 팔아도 몸은 팔지 않는 예인들의 조합이었다. 그러자 송병준이 평양 출신의 남편 없는 기생들을 주축으로 만드는 것이 다동(茶洞) 기생조합이었다. 기생조합의 명칭이 권번(券番)으로 바뀌면서 다동 기생조합은 대정권번(大正券番)이 된다.
1929년도
하규일이 송병준의 심복 안순환(安淳煥)과 충돌한 후 독립해서 차린 권번이 경화권번인데, 안순환의 이력도 특이하다. 경시통감(警視總監) 와카바야시(若林賚藏)가 2대 통감 소네(曾<79B0>荒助)에게 보낸 비밀보고서에 따르면 안순환은 궁중의 음식을 담당하는 전선사(典膳司) 상선(尙膳)으로 있으면서 이용구·송병준의 일진회에 가입한 자였다. 이런 안순환이 궁중에서 나와 1908년 12월 지금의 광화문 일민미술관 자리에 차린 요릿집이 한세월을 풍미하던 명월관(明月館)이었다.
일제 진출 이후 서울의 밤 문화는 이토 같은 색귀 통감과 송병준 같은 친일 색작 등이 주도하면서 과거의 기예(技藝) 중심의 품격은 사라지고 삼패 중심의 천박한 매춘으로 전락했다. 일패 기생들 중에는 애국자도 적지 않았다.
주요한(朱耀翰)이 발행하던
앞에 인용한
술자리에 여자를 동석시키는 현재의 잘못된 밤 문화도 알고 보면 그 뿌리는 일제시대에 있다. 1919년 기생들이 3·1운동에 대거 동참한 것은 밤 문화까지 잠식한 일제에 대한 항거이기도 했다.
중앙SUNDAY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