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tural science /화 학

변화는 세계의 운리인가?

나 그 네 2012. 3. 1. 10:16

헤라클레이토스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다. 그의 생각을 도통 짐작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여러 이미지가 있다. 그는 ‘어둠의 철학자’다. 맞다. 그런 구석이 있다. 그의 철학은 음울하다. 그런 면도 있다. 그래서 ‘우는 철학자’라고도 한다. 그가 하는 말은 알쏭달쏭하다. 그 말도 맞다. 그래서 그를 ‘난해한 철학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도 그의 말은 묘하게도 우리 생각을 자극한다. “그의 생각의 밑바닥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긴 밧줄이 있어야 할 것 같다”는 소크라테스의 말에 나는 동의한다. 이 철학자의 이름은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다.

 

 

 

 

헤라클레이토스 철학의 밑바닥에 접근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섯 개의 밧줄을 내린다. 그를 읽는 다섯 개의 코드라고 해도 좋다. 그 중 첫 번째 밧줄은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가 제공한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에 대한 전기다. 이 전기는 신뢰도가 크게 떨어지기는 하지만 독자 편에서는 고대 철학자들의 일화가 많이 소개되어 있어서 쉽고 흥미진진하게 읽힌다는 덕목이 있다. 헤라클레이토스를 어두운 철학자, 또는 우는 철학자로 기술한 대목도 이 책에서 나온다. 헤라클레이토스에 대한 기록은 단편적이다(하기는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가 다 그렇다). 그가 언제 태어났고 언제 죽었는지 생몰연대도 정확하지 않다. 다만 고대 올림피아 69회 경기가 열린 기원전 500년 무렵에 왕성한 활동을 했으며, 이오니아에 있는 도시 에페소스의 귀족 출신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철학사가들의 의견이 모아진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가 쓴 전기를 통해서 본 헤라클레이토스는 한 마디로 괴팍한 철학자다. 고귀한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모든 지위는 동생에게 넘기고 자신은 산 속에서 은둔하며 살았다. 그는 오만하고 방자했다. 인간의 무지를 비웃고, 지혜 있는 현인들에게 독설을 퍼부었다. 그의 죽음도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다. 그는 수종에 걸리자 외양간으로 가서 소 똥에 자신을 묻었다. 그리고 생을 마감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현인들에게도 독설을 퍼부은 괴팍한 철학자였다.

 

그가 남긴 1백 개가 넘는 단편 중에서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현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이 유독 많다. “사람들은 서투른 시인들을 믿고, 천민들을 스승으로 삼는다”고 비웃고, “피타고라스는 허튼 소리를 하는 사람들의 원조”이며 “호메로스는 강연에서 쫓겨나고 두들겨 맞을만하다”고 모욕의 말을 던지고 있다. 그는 어둡고 조소적인 철학자였다. 

 

 

 

 

헤라클레이토스에게 있어 불은 세계를 움직이는 원리를
뜻한다.


헤라클레이토스를 이해하기 위한 두 번째 밧줄을 내려보자. 이 접근은 헤라클레이토스를 만물의 근원이 불이라고 주장한 철학자로 보는 것이다. 상식 책이나 퀴즈에 많이 등장하는 접근이다. 만물의 근원을 물이라고 말한 탈레스, 공기라고 본 아낙시메네스, 흙이라고 주장한 크세노파네스와 함께 묶어서 고대 그리스 철학자의 계보를 정리하는 일목요연한 방식이다. 이 밧줄로 생각의 흐름, 또는 철학의 역사를 정리하면 편한 측면이 있다. 위에서 정리된 4개의 답(물, 공기, 흙, 불)을 모두 묶으면 4원소설을 주장한 엠페도클레스의 주장이 되고, 여기에 제5의 원소 에테르를 포함하면 고대 그리스 철학을 완성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이 된다. 만물의 근원 찾기 게임을 계속할 수도 있다. 피타고라스는 만물의 근원을 수로 읽은 철학자, 데모크리토스는 만물의 근원을 원자로 읽은 철학자가 된다. 이렇게 우리는 만물의 근원이라는 밧줄로 굴비 꿰듯 고대 그리스 자연철학을 줄줄 엮을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잠시 멈추어 생각해보자. 만물의 근원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던진 최초의 철학자는 <철학의 숲>에서 이미 소개한 바 있는 탈레스다. 그는 이 훌륭한 질문으로 서양 철학의 아버지라는 영예를 얻었다. 어떤 점에서 훌륭한 철학자는 멋진 답변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멋진 물음을 던지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물론 탈레스는 자신이 제기한 질문에 최초의 답을 제시한 인물이기도 하다.

 

여기서 근원이란 ‘아르케’(arche)라는 말의 번역어다. 아르케는 근원(source)이라는 뜻 말고 원리(principle)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만물의 근원이 무엇이라고 이야기할 때는 왜 그것이 만물의 근원이 되는지 그 원리를 분명하게 이야기해 주어야 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왜 만물의 근원을 불이라고 보았는가? 또 그 원리를 어떻게 설명했는가? 그는 탈레스에서 시작한 밀레토스 학파 처럼 그 점을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는가? 아니다. 그렇다면 그에게 어둡고 난해하며 수수께끼를 던지는 철학자라는 수식어가 붙을 리가 없다. 그는 불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불의 죽음이 공기에게는 생겨남이고, 공기의 죽음이 물에게는 생겨남이다”. 그는 또 이런 말도 했다. “모든 것은 불의 교환물이고, 불은 모든 것의 교환물이다. 마치 물건들이 금의 교환물이고, 금은 물건들의 교환물이듯이.”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은 모호하지만, 그가 말하는 불의 개념은 밀레토스 학파의 자연철학처럼 세계를 구성하는 물질적 원소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움직이는 원리를 가리키고 있다고 보는 편이 더 낫다. 그렇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지적은 불이 세계의 원질이 아니라 원리라는 측면에 방점을 찍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 원리는 만물은 변화하고 생성한다는 원리다. 여기서 우리는 세 번째 밧줄을 내린다.

 

 

 

 

헤라클레이토스 철학을 만물의 근원은 불이라는 명제로 정리하는 것이 탈레스 식으로 헤라클레이토스를 읽는 법이라고 한다면, 만물은 변화하고 생성한다는 명제로 그의 철학을 정리하는 것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식의 독해법이라고 할 수 있다.

 

만물의 변화 속에는 그 변화를 규정하는 역동적 질서가 있다.


“우리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는 없다”는 철학적 격언은 헤라클레이토스 철학에서 가장 유명한 말인지도 모른다. 이 말의 뜻은 간단하다. 강물은 끊임없이 흐른다. 우리가 첫 번째 발을 담그는 물은 이미 하류로 흘러갔다. 그래서 두 번째 발을 담그는 물은 첫 번째 담그는 바로 그 강물이 아니다. 이것을 일반화하면 “만물은 유전한다”는 격언이 나온다. 이 정식을 확장하면 변화한 것은 강물 뿐이 아니다. 강물에 발을 담그는 나도 다르다. 첫 번째 발을 담그는 나와 두 번째 발을 담그는 나는 동일한 내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이 유명한 이야기는 플라톤의 대화편 [크라튈로스]에 나온다. 이 강물의 은유를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들의 철학을 정초하는데 이용했다.플라톤은 변화하는 세계와 별도로 변화하지 않는 세계가 있다고 상정했다.

 

끝없이 흐르고 변화하는 세계에 대한 지식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플라톤은 변화와 생성, 그리고 다양성을 중시하는 헤라클레이토스와 존재와 진리, 그리고 ‘일자’를 중시하는 파르메니데스를 대척점에 놓고 이데아 이론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의문은 남는다. 과연 만물이 유전한다는 것이 헤라클레이토스가 정말 강조하고 싶은 말이었을까? 나는 고개를 젓는다. 헤라클레이토스의 강조점은 만물이 유전한다는 데 있지 않다. 그는 세계가 겉으로 보이는 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수많은 수수께끼를 만들어낸 철학자로 보아야 한다. 그는 “세계(피시스)는 숨기를 좋아한다”고 했다. 그는 숨어 있는 세계를 드러내기 위해서 역설을 동원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제 우리는 네 번째 역설의 밧줄을 내린다.

 

 

 

 

사실 그가 하는 이야기는 거의 예외 없이 역설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오르막 길과 내리막 길은 같은 것이다” “삶과 죽음, 깨어남과 잠듬, 젊음과 늙음은……같은 것이다” “건강을 달콤하게 만들고 좋게 만드는 것은 병이며, 배부름을 달콤하고 좋게 만드는 것은 배고픔이고, 휴식을 달콤하고 좋게 만드는 것은 피곤함이다” 겉으로 볼 때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실제로는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이야기다. 어쩌면 그의 말이 모호하고 역설로 가득한 것은 세계가 본래 이렇게 서로 반대되는 대립항의 통일이라고 보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에게 세계는 서로 대립해서 싸우면서 동시에 서로 융합하는 것이다. 그는 상호 대립적인 것인 동시에 하나의 통일을 이룬다는 점을 활의 비유를 통해서 설명하기도 했다. “그것이 어떻게 자신과 불화하면서 그 자신과 일치하는지를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은 마치 활과 리라의 경우처럼, 반대로 당기는 조화이다”. 헤라클레이토스가 남긴 단편들을 퍼즐 조각처럼 이어서 하나의 그림을 그려본다면 그의 최종 목표는 만물의 유전을 강조하는 데 있지 않다. 서로 다투고 있는 만물 사이의 조화에 있다. 모든 생성과 운동을 규정하는 역동적 질서를 그는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서로 대립하는 것의 조화에 대해서 헤라클레이토스는 여러 이름으로 그 원리를 설명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신은 낮이며 밤이고, 겨울이며 여름이고, 전쟁이며 평화이고, 포만이며 굶주림이다.
(불이) 향료들과 함께 섞일 때 각각의 향에 따라 이름 붙여지듯이 신은 그렇게 변화한다.

 

 

여기서 낮/밤, 겨울/여름, 전쟁/평화, 포만/굶주림 등 대립자는 서로 갈등하지만 그것은 실제로는 모두 같은 것이다. 그는 신의 이름으로 그 원리를 설명한다. 이 대목에서 물어보자. 신은 변화하는 것인가, 아니면 변화하지 않는 것인가? 헤라클레이토스는 비유를 통해서 그것을 설명한다. 향료를 불에 넣어 태우면 향료에 따라 각각 다른 향기가 피어난다. 이 때 불은 그 향기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향이지, 불이 아니다. 그러면 이때 불은 향과 구분이 되는가? 또 대립자들을 하나로 품은 신은 대립자들과 구분이 되는가? 그는 그렇다고 말한다. 이것을 그는 ‘로고스’(logos)라고 부른다.

 

로고스는 모든 것이 변화하고 생성하는 것처럼 보이는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는 조화의 원리다. 이것이 헤라클레이토스가 진정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로고스는 변화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다. 로고스는 서로 반대되는 것들이 분리되고 서로 대체되는 관계를 지칭하며, 또 대립과 통일을 지배하는 원리를 가리킨다. 또 모든 생성과 변화를 규정하는 질서를 말한다. 그래서 그는 우리에게 항상 로고스에게 귀를 기울이라고 주문한다. “나에게 귀를 기울이지 말고 로고스에 귀를 기울여, ‘만물은 하나이다(hen panta einai)’ 라는 데 동의하는 것이 지혜롭다.” 여기서 헤라클레이토스는 놀랍게도 ‘만물은 하나’라는 말을 한다.  

변화하는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는 조화의 원리가 로고스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신의 이름으로 그 원리를 설명했다.

 

생성의 파라독스를 강조한 헤라클레이토스가 내린 결론이 존재의 파라독스를 강조한 파르메니데스가 내린 결론과 일치한다는 사실이 무릎을 치게 한다. 그래서 극과 극은 서로 통한다고 하는가?  나는 조심스럽게 헤라클레이토스 철학의 밑바닥에 접근 가능한 가장 길고 튼튼한 밧줄이 로고스라고 상정한다.  탈레스를 시조로 하는 밀레토스 학파의 핵심 개념이 ‘아르케’이고, 피타고라스 철학의 핵심 개념이 수로 표현할 수 있는 ‘코스모스’라고 한다면, 헤라클레이토스 철학의 근간을 이루는 개념으로는 로고스를 꼽아야 한다.

 

 

 

 

 

삶과 죽음처럼 세계는 서로 반대되는 대립항의 통일이다. 세계의 대립적 모습 속에는 조화가 숨어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생전에 제자를 두지 않았다. 당연하다. 그는 철저하게 외톨이였고 독불장군이었다. 그러나 그가 던진 1백 개가 넘는 수수께끼 같은 단편과 그가 해결의 열쇠로 제시한 로고스는 많은 이들을 자극했다. 기독교에 관심이 있는 이는 로고스가 기독교 사상의 뼈대를 이루는 개념이라는 점을 떠올릴 지도 모르겠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요한복음]의 첫 구절의 ‘말씀’에 해당하는 원 개념이 바로 로고스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열 두 제자의 한 명이자 [요한복음]의 저자인 사도 요한이 예수의 사후에 예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를 모시고 살았던 도시 에베소는 헤라클레이토스가 살았던 에페소스를 가리킨다. 여기서 우리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로고스가 5백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초기 기독교 사상의 형성에 씨를 뿌렸다는 단서를 잡는다.

 

헬레니즘 시대에 형성되어 로마 시대에 절정을 이룬 스토아 철학의 연원도 따지고 보면 헤라클레이토스 철학으로 소급된다. 로고스를 따르라는 것이 바로 스토아 철학의 빼대를 이루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서양사상의 원류를 이룬 헬레니즘헤브라이즘은 헤라클레이토스의 로고스를 매개로 서로 손을 잡는다. 근대에 와서도 헤라클레이토스 철학은 그 맥이 이어진다. 아니, 근대 철학의 원류가 그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그리 큰 과장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생전에 제자 한 명 두지 않은 헤라클레이토스는 사후 수 많은 제자들을 길러낸 셈이다. 특히 근대 철학의 끝자락에 위치한 헤겔이 그렇고, 탈근대 철학의 앞자리에 있는 니체가 그렇다.


헤겔이 내세운 “철학은 사상으로 파악된 그 시대”라는 명제는 헤라클레이토스 식으로 말하면 사상은 역사적으로 흐르는 하나의 운동이라는 것이다. 헤겔은 잘 알려져 있듯이 사상이 변증법적 운동을 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런데 누가 이 법칙을 최초로 발견했을까? 헤겔에 따르면 이 법칙의 발견자는 바로 헤라클레이토스다. 그는 낮과 밤, 여름과 겨울, 전쟁과 평화, 건강과 질병, 삶과 죽음 등 대립항이 공존해 있다는 것을 주장한다. 이 대립항은 투쟁 또는 전쟁 상태에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로 화해할 수 없다고 여긴다. 그러나 헤라클레이토스는 이 대립적 양상이 감추어진 조화라는 것을 주목한 최초의 철학자다. 니체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또 다른 제자다. 니체는 헤겔과는 달리 변화의 원리를 변증법적으로 보지 않았다. 니체는 변하지 않고 영원하다고 믿는 모든 것은 삶의 자기 보존을 위한 가치라고 생각했다. 플라톤이 부르는 이데아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 또는 도덕 규칙은 아무 것도 아닌 ‘니힐’(nihil)이다. 니체가 보기에 헤라클레이토스는 니힐리즘의 본질을 꿰뚫어 본 고대 철학자다.


이제 우리는 고대의 이 괴팍한 철학자와 떠날 시간이다. 여러분은 헤라클레이토스 철학을 누구의 밧줄로 묶을 것인가? 플라톤의 변화 생성하지 않는 밧줄로 묶을 것인가, 아니면 헤겔의 변화 생성하는 밧줄로 묶을 것인가? 사도 요한의 눈으로 로고스를 세계의 구원으로 해석할 것인가, 아니면 니체의 눈으로 로고스를 철저한 부정으로 볼 것인가? 우리는 그를 또 다른 장에서 만날 것을 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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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영 / 철학자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2,30대에 언론사 기자를 지냈다. 나이 40에 늦깎이 유학생으로 영국에 건너가 워릭대에서 사회 존재와 인간의 이해에 대한 리얼리즘 접근법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기도 양평에 있는 대부산 중턱에 자리를 잡고 철학 저술 작업을 하고 있다. 저서로는 [철학, 도시를 디자인하다] 1, 2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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