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그르 [황제 권좌에 앉은 나폴레옹] 1806
캔버스에 유채 ㅣ 259×162cm ㅣ 파리 군사 박물관 소장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프랑스국 립박물관연합(RMN) 지엔씨미디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1769-1821)는 구체제를 무너뜨린 이후에 자신의 권력을 지속시키고 통제하기 위해서 시각미술 전반에 걸쳐 커다란 변화를 시도하였다. 혁명화가로 불리는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를 비롯해, 앵그르(Jean-Auguste-Dominique Ingres), 그로(Antoine-Jean Gros), 제라르(François Gérard) 등 나폴레옹의 초상화를 제작한 화가들은 모두 나폴레옹의 정치적 페르소나를 구축하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나폴레옹은 그 누구보다 시각예술을 정치적으로 이용할 줄 아는 혁명가였다. 그는 처음에는 궁중 스타일을 회피하고 심플한 스타일을 고집하였지만, 권력을 잡은 이후로는 화려한 장식으로 귀족적인 분위기를 전달하였고 자신의 권력을 프랑스 곳곳에 시각적으로 선전하기 위해서 화가 뿐 아니라 건축가, 가구 디자이너, 태피스트리 등의 장식 디자이너 등에게 많은 작품들을 의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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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과 엠파이어 스타일
앵그르가 1806년에 제작한 [황제 권좌에 앉은 나폴레옹 I 세]는 새로운 혁명가로 등장한 나폴레옹의 정치적 권력을 가장 잘 시각화한 작품이다. 벨벳 소재의 화려한 복장에는 금색의 별이 수놓여 있고, 서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샤를마뉴 대제(742-814)가 들었던 권장(權杖)과 똑같은 것을 들고 있다. 여기서 나폴레옹은 서유럽을 통일했던 마지막 황제와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황제의 권위를 정당화하는 정치적인 선전을 꾀하고 있다. 이 작품에 비해 앵그르가 1804년에 제작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초상화는 다소 연약해 보이면서도 지적이고 진지해 보인다.
앞서 언급한 1806년 초상화는 세로 길이가 2미터 60센티미터 정도 되는데, 앵그르는 나폴레옹의 실제 키보다 훨씬 더 크게 보이게 초상화를 제작하여 이 작품을 보는 관람자들을 심리적으로 위축되게 만들었다. 특히 나폴레옹의 온 몸은 화려한 천에 감싸여 있고, 육중한 몸은 엠파이어 스타일의 왕좌에 파묻혀 있으며, 황제의 발 아래에는 독수리 문양이 자리하고 있다. 고대 신화에서 제우스를 상징하는 독수리는 앵그르가 그린 그림 속에 등장하는 카펫뿐 아니라 왕좌에도 새겨져 있다. 즉, 나폴레옹 체제를 상징하는 사자나 그리폰 독수리는 나폴레옹의 권력을 의미하는데, 이렇듯 나폴레옹의 초상화에는 이집트, 고대 그리스 및 로마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는 모티프가 자주 등장한다. 장식미술에 지배적으로 등장하는 이러한 모티프는 나폴레옹의 권위와 황제의 신성한 이미지를 강조하는 정치적 상징성을 띠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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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이 사용했던 의자 | |
그러나 1806년에 제작된 이 나폴레옹의 초상은 한스 홀바인(Hans Holbein)이 그린 [헨리 8세의 초상(Portrait of Henry VIII)]처럼 독보적인 위상을 내세우는 선전화 같지만, 나폴레옹의 사랑을 받지는 못했다. 특히 샤를마뉴 대제와 유사한 느낌은 나폴레옹을 과거의 인물로 각인시켜 근대적인 인물이라는 느낌을 전달하지 못했다는 점, 정면의 포즈는 뭔가 위협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는 점에서 초상화를 통해 황제의 모습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 작품 이후로 샤를마뉴 대제와 같은 느낌은 나폴레옹의 초상화 제작에서 배제되었다. | |
다비드는 [튈르리 서재의 나폴레옹(Napoleon in His Study at the Tuileries)](1812)에서 의자의 다리를 수직적으로 처리하여 나폴레옹의 다리를 시각적으로 길어보이게 처리했다. 벽 위에 걸린 시계, 왼쪽의 벽 등 모두 수직적인 느낌을 강조한다. 전통 인물화는 의례적으로 모델의 모습을 이상화시켰는데 과거 왕들이나 귀족들의 경우는 과장의 정도가 심했다. 예를 들면 이야생트 리고(H.Rigaud)가 그린 [루이 XIV세의 초상(Louis XIV, King of France and Navarre)]과 다비드가 그린 나폴레옹의 초상화는 비슷한 점을 보여준다. 두 작품 모두 키가 작았던 태양왕과 나폴레옹을 수직으로 길어 보이게 하고, 또 위로 상승하는 느낌을 강조하는 구성에 의존한다. 화려한 색상의 벨벳과 실크 천을 구경하다보면, 초상화가 실제 모습과 닮았는지는 잊어버리고 관람자는 두 인물의 권위와 위엄한 포즈를 기억하게 된다.
위대한 과거의 역사와 관련된 상징적 이미지
나폴레옹의 초상화 의뢰는 주로 권력의 전성기였던 1812년을 기점으로 절정에 달했다. 프랑스 제국은 스페인과 이탈리아, 네덜란드, 러시아 일부 등을 포함하면서 그는 누구보다 많은 작품들을 화가들에게 의뢰하였다. 1805년 나폴레옹은 점차 장식미술로 주문의 영역을 확장하면서 로마 황제들이 입었던 흉갑(breastplate)을 모방하게 했다. 나폴레옹의 흉갑에는 전쟁의 신인 마르스의 모습이 중앙에 나타나 있는데, 이는 나폴레옹을 신화 속 마르스에 비유하며 전쟁에서 승리한 나폴레옹을 의미했다. 마르스가 나폴레옹이라는 점은 다비드가 제작한 [비너스와 삼미신에 의해 무장해제 당하는 마르스(Mars Being Disarmed by Venus and the Three Graces)](1822-1824)에서도 나타난다. 이 작품은 삼미신이 무기를 뺏는 동안에 마르스를 유혹하는 비너스를 보여준다. 1823년에 제작된 이 작품은 한때 혁명화가로 군림하던 자신이나 나폴레옹 I세 모두 이젠 화려한 권좌에서 물러나게 되었음을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다비드는 1825년 브뤼셀에서 사망했다). | |
자크-루이 다비드 [비너스와 삼미신에 의해 무장해제당하는 마르스] 1824년 캔버스에 유채, 308×262cm, 벨기에 왕립미술관 |
신고전주의풍의 화가들이 다룬 나폴레옹의 초상화에는 엠파이어 스타일을 강조하는 장식미술 등이 의도적으로 배치되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나폴레옹의 초상화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이 바로 엠파이어 스타일의 의자를 비롯하여 가구와 패션이다. 엠파이어 스타일은 나폴레옹이 프랑스를 장악했던 19세기 초반에 패션과 장식미술 전반에 걸쳐 풍미했던 양식을 일컫는다. 시기적으로는 1800년을 기점으로 1815년에 가장 많이 나타나지만 1830년까지도 지속되었다. 신고전주의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정신과 이상을 바탕으로 성립되었다면 엠파이어 스타일도 같은 맥락 내에서 형성되었다. 특히 엠파이어 스타일은 대담한 색채와 사치스러운 고급 재료를 이용하였다. 샤를 페러시에(Charles Percier)와 피에르 퐁텐(Pierre Fontaine)이 엠파이어 스타일의 가구와 인테리어 디자인을 주도적으로 장악했다면, 다비드는 회화에 있어 엠파이어 스타일을 자리 잡게 한 장본인이었다.
1798년 나폴레옹 황제의 이탈리아 원정이 승리하게 되자 고대 그리스-로마 미술뿐 아니라 이집트 미술에서 보이는 스핑크스 문양, 날개달린 사자, 연꽃잎 문양 등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엠파이어 스타일의 장식미술에는 유독 날개를 활짝 편 나비문양이 많이 등장하는데, 그리스어 프시케의 의미가 나비, 영혼이라는 점과 연관되어 있다. 또한 나비는 메로빙거 왕조의 무덤에서도 발굴되었는데, 나폴레옹은 이러한 과거의 역사와 연관된 상징적 이미지를 자신의 문장이나 의뢰하는 작품에 많이 사용하도록 주문했다. | |
나비 모티프는 독수리 다음으로 많이 엠파이어 스타일에서 자주 등장한다. [여성의 가슴모양을 한 컵]에는 한 마리의 나비가 컵 가장자리에 걸쳐있다. 가슴 모양의 컵이라는 주제는 그리스 미술에서 풍요와 관용을 의미하던 대지의 여성을 상징한다. 고대 그리스의 컵이 보통 가슴 모양의 컵을 도자로 구운 다음 채색했다면, 장 오디오(Jean-Baptiste-Claude Odiot)가 제작한 도금 청동 컵은 나폴레옹의 여동생이었던 폴린 보르게제(Pauline Borghese)의 가슴을 주형으로 뜬 것이다. 그러나 은유적으로 이 작품은 프시케의 가슴을 상징하며 비너스의 저주를 받은 애절한 프시케의 사랑을 보여준다.
나폴레옹을 위해서 일했던 많은 미술가들과 장식 디자이너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엠파이어 스타일을 고집한 이유는 새로운 정치질서를 내세우려한 나폴레옹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구체제와는 다른 새로운 시대정신을 표현하려는 나폴레옹의 의지도 있었을 뿐더러, 예술과 패션 분야에서 새로운 스타일을 주도하면서 프랑스의 경제 상황을 개선하려는 의지도 숨겨져 있다. 장식미술과 패션 분야에서 새로운 스타일이 부각되면 당연히 프랑스산 실크, 프랑스산 재료들이 장식미술과 공예분야에서 수요가 늘어나기 때문이다. 당시 인도산 실크도 수입되었기 때문에, 나폴레옹을 위해 일한 직물 디자이너들은 의도적으로 이러한 외국산 실크 대신 프랑스 실크를 사용하라고 지시했다. | |
우아함을 강조한 여성적 이미지
나폴레옹 황제가 권위적인 이미지를 강조한다면 조세핀의 경우는 이와 달랐다. 조세핀은 엠파이어 스타일의 드레스를 입은 채 관능적이면서도 여성적인 모습을 부각시킨다. 여성적인 실루엣을 보여주는 엠파이어 스타일은 꽃이나 나비, 백조와 같은 모티프로 가득 찬 장식미술에서도 나타났으며, 아폴로와 프시케의 신화도 인기가 많았던 주제 중 하나였다. 프랑소와 제라르(François Gérard)가 그린 초상화는 엠파이어 스타일의 드레스를 입은 조세핀을 표현하며, 조세핀이 사용한 [곤돌라 체어]에는 백조모양의 팔걸이가 사용되었다. | |
특히 엠파이어 스타일의 드레스는 몸의 실루엣을 드러나게 했기 때문에 여성스러움과 우아함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모습은 [레카미에 부인(Madame Récamier)]에서 극에 달한다. 다비드는 이 작품을 완성하지 못했지만 레카미에의 몸을 따라 흘러내리는 드레스는 23세밖에 되지 않은 부인을 우아하게 감싼다. 비슷한 시기에 앵그르가 그린 카롤린 리비에르(Caroline Rivière)의 초상도 섬세한 색감과 미묘하게 잘 어울리는 패션 스타일을 보여준다. 코는 약간 크고 어깨에 비해 목이 두껍게 왜곡된 느낌을 주지만, 이 작품이 완성되었을 때는 카롤린 리비에르가 이미 죽은 뒤였기 때문에 파란 계열의 색채와 함께 슬픔을 함께 내포하는 듯 하다. 엠파이어 스타일의 드레스는 섬세한 선의 윤곽선을 강조하던 앵그르의 기법과 잘 맞아 떨어졌다. 엠파이어 스타일은 결국 어떤 화가나 디자이너가 다루느냐에 따라 독특하게 변형되었지만, 정치인의 파워가 영원하지 않듯이 정치적 권력과 함께 태동했던 엠파이어 스타일 역시 역사적 모멘텀과 함께 19세기 초반에 반짝 나타났다 사라지고 말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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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정연심 / 홍익대 예술학과 교수
- 홍익대학교 영어교육과에서 학부를 마치고 동대학원 미술사학과를 졸업, 1995년에 도미하며 뉴욕대학교 예술행정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2005년 뉴욕대학교 Institute of Fine Arts에서 미술사박사학위를 취득했고, 뉴욕 Fashion Institute of Technology에서 조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홍익대학교 예술학과 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