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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술국치 100년 기획④ 식민 통치에 반대한 일본인들

나 그 네 2013. 3. 2. 18:39

 

[경술국치 100년 기획] 망국의 뿌리를 찾아 ④ 식민 통치에 반대한 일본인들

[중앙일보]입력 2010.08.27 01:49 / 수정 2010.09.15 17:08

“조선 정벌 반대” 할복한 이단아 요코야마 … 하지만 그들은 미약했다
한국 침략·약탈에 저항한 제국주의 일본의 ‘마이너리티’들





일본 도쿄 스기나미구에 있는 사찰 다이엔지에 세워진 요코야마 야스타케의 묘비.
일본에서 메이지(明治) 유신 이후 조선을 강제병합 하자 많은 일본인은 환호했다. 그러나 극소수이기는 해도 식민 통치에 반대하는 일본인들도 있었다. 이들은 일본의 침략이 조선은 물론 일본의 장래에도 맹독이 될 것이란 점을 예측 했다 . 한·일 강제병합 100 년을 맞아 이들의 언행은 새삼 일본을 위해 무엇이 옳은 길이었던가를 말해 주는 역사의 교훈이다.


“조선을 정벌하자는 목소리가 국민 사이에 확산되고 있다. … 일본이 융성하고 강한 국력을 갖고 있다면 뭐 때문에 조선을 상대로 무례한 일을 벌여야 하는가. …우리는 조선뿐만 아니라 이미 아이누인(일본 홋카이도 등에 있는 소수민족)에게 원망을 사고 있지 않느냐.”

일본에서 메이지 유신이 성공한 직후 정한론(征韓論)이 거세게 불 때 이에 반대하는 건의문과 신정부 개혁안을 메이지 정부에 내고 할복 자살한 일본인이 있다. 메이지 유신의 주역인 사쓰마번(薩摩藩·지금의 가고시마현) 출신 무사이자 지식인이었던 요코야마 야스타케(橫山安武)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내각에서 초대 문부상을 지낸 모리 아리노리(森有禮)의 친형이다. 어릴 때 요코야마 집안의 양자가 돼 이름을 바꿨다.

그의 흔적을 쫓아 20일 도쿄 스기나미(杉竝)구의 조용한 주택가에 있는 사찰 다이엔지(大圓寺)를 찾았다. 사찰 안에는 매미 울음소리만 그악스럽게 들려올 뿐 고즈넉했다. 이 절의 주지 오쓰지 도쿠겐(大辻德彦)의 안내로 절 뒤편으로 돌아가니 묘비가 즐비했다. 오쓰지는 높이 3m 정도의 묘비 앞으로 다가섰다. 묘비에는 ‘요코야마 쇼타로 후지와라 야스타케(橫山正太郞 藤原安武)’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이 절은 17세 중반부터 도쿄에서 숨진 사쓰마번 출신 인사들의 무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오쓰지는 “요코야마는 일찍 숨져 그에 관한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당시 부패한 신정부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고 정한론 등 외교 정책에도 매우 비판적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토 히로부미 등 일본의 조선 강제병합에 앞장섰던 사람들의 묘와 유적지 등이 지금도 화려하게 남아 있는 것에 비하면 그의 무덤은 초라하고 쓸쓸하기 짝이 없었다. 메이지 정부가 부국강병과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외치며 침략적인 제국주의로 나아갈 때 반대했던 극소수 인사들의 실상이 피부로 느껴졌다.

당시 개혁을 선도하던 정치인 가쓰 가이슈(勝海舟·1823~1899)도 1895년 청일전쟁 당시 “조선은 일본의 선생님이었다. 조선이 망국병에 걸렸다 해도 소생할 때가 올 것”이라며 반대했지만 ‘부국강병과 침략’이란 흐름을 막지는 못했다.

일본은 1905년 러시아전쟁에서 승리한 뒤 조선과 을사늑약을 강제로 맺어 외교권을 강탈하는 등 조선 식민지화를 구체화했다. 일본 사회는 축제 분위기에 젖어 있었지만 일부 사회주의자는 제국주의 반대 이념을 근거로 조선 침략에 반대했다.



언론인·변호사로 활동했던 기노시타 나오에(木下尙江·1869~1937)는 을사늑약 체결 직전 신문에 “조선은 결국 독립국이 되지 못한 채 오직 지리책에서만 존재하게 됐다”는 글을 실어 일본의 침략을 비판했다. 사회주의자였던 고도쿠 슈스이(幸德秋水·1871~1911)도 1907년 신문에 “조선인민의 자유독립을 인정하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1861~1930)와 같은 기독교 인사들 사이에서도 조선 침략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일었다. 우치무라는 1910년 “자신의 영토를 확장해 전 세계를 자기 것으로 만든다 해도 영혼을 잃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썼다.

강제병합 후 일본 정부의 탄압과 일본인들의 조선 착취는 더욱 심해졌다. 사회주의 성향의 변호사 후세 다쓰지(布施辰治·1880~1953)는 1910년대 “한국의 독립운동에 경의를 표한다”는 말을 했다가 검찰 조사를 받았다. 그는 일제시대에 조선인들의 인권과 독립운동가들을 변론했던 대표적인 변호사였다. 2004년 일본인으로는 처음 한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을 받은 그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가 올해 일본에서 제작돼 도쿄 등에서 상영 중이다. 일왕 메이지가 죽은 뒤 다이쇼(大正·재위 1912~26)의 시대가 열리면서 일본 사회에 민본주의 바람이 불자 도쿄대 교수였던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1878~1933)와 같이 일본의 가혹한 조선 동화주의 정책을 비판하면서 조선의 독립운동에 공감하는 학자들이 나타났다.

언론인이자 정치인이던 이시바시 단잔(石橋湛山·1884~1973)은 정치적 관점에서 ‘대일본주의’를 비판하면서 다른 국가와 협력해 발전하는 ‘소일본주의’를 강조했다. 그는 1921년 동양경제신보사에 “ 조선과 대만에 자유를 줘라. 동양과 세계의 약소국 전체를 우리의 지지자로 만든다면 얼마나 큰 이익인가”라고 썼다.

이들은 소수에 불과했고 1930년대 들어 군국주의 세력이 집권하면서 대체로 위축됐지만 이들은 일본 사회의 양심적인 보루였다. 특히 기노시타가 강제병합 직후 일본이 제국주의라는 대홍수에 휩쓸려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경고했듯이 일제시대의 예언자이기도 했다. 이들의 정신은 지금도 시민운동 등을 통해 소소히 이어져 오고 있다.

오대영 선임기자·박소영 도쿄 특파원



“지도 위 조선에 먹을 칠하며” … ‘일본의 윤동주’ 이시카와 ‘저항 시’

‘地圖の上 朝鮮半島に 黑黑と 墨を塗りつつ 秋風を聽く’

(지도 위 조선국에 새카만 먹을 칠하며 가을바람 소리를 듣는다).

일본의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1886~1912·사진)가 1911년 발표한 ‘9월 밤의 불평’(1911)이란 제목의 와카(和歌·일본의 고유 시) 34수에 들어 있는 시다. 정재정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은 “이시카와는 ‘일본의 윤동주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며 “조선이 식민지가 돼 없어진 것을 ‘먹을 칠하는 것’으로 표현해 강제병합에 항의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시카와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에 대해 “우리는 조선인을 미워해야 할 까닭을 모른다”며 연민을 표시했다. 또 “누가 나에게 권총이라도 쏘아 보렴. 이토처럼 나도 죽어 보이리라”라는 시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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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국의 뿌리를 찾아 ④ 식민 통치에 반대한 일본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