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율표를 만들어 낸 멘델레예프의 생애
드미트리 이바노비치 멘델레예프는 1834년 서시베리아의 토볼스크(Tobolsk)에서 14형제 가운데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멘델레예프가 14세일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자식들은 어머니의 손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멘델레예프의 비범한 재능을 알아보고 무엇보다 그가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 했으며, 대학에도 진학시켰다. 나중에 멘델레예프는 어머니가 마지막에 남긴 '과학의 진실을 추구하라.'는 말을 논문에에서 인용하면서 '신성한 말씀'이라고 기록했다.
1855년 멘델레예프는 교사 자격을 얻어 교직 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연구도 계속했다. 그러나 당시의 러시아 과학계는 모든 분야가 유럽에 뒤져 있었다. 그리고 멘델레예프는 그토록 바라던 유럽(파리) 유학을 2년 동안 하게 되었다.
그 뒤 멘델레예프는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구스타프 키르히호프(Gustav Kirchhoff, 1824~1887)가 연구하던 곳으로 옯겼다. 키르히호프는 로베르트 분젠(Robert Bunsen, 1811~1899)과 더불어 '분광기'를 개발한 인물이다. 그들은 원소를 가열하면 그 원소 고유의 휘선 스펙트륨을 내는 것을 발견하고, 분광기를 사용해 새로운 원소를 잇달아 발견했다.
멘델레예프는 그곳에서 화ㅏ학의 진보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으며, 원소에 관한 지식을 탐구했다, 그러나 멘델레예프의 타고난 거진 성격이 재앙이 되어, 대인관계에 문제가 생겨 대학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위업을 달성하고도 노밸상을 받지 못하다.
1860년 훗날의 멘델레예프 주기율표의 고안으로 이루어지는 큰 사건이 있었다. 독일의 카를스루에서 개최된 국제화학자회의에 참석한 멘델레예프는 이탈리아의 화학자 스타니슬라오 칸니차로 (Stanislao Cannizzaro, 1826~1910)의 원자량에 관한 강연에 감격했다.
칸니차로는 강연 중에 1811년 아보가드로가 제안한 '모든 기체는 온도와 압력이 일정하면, 같은 부피 안에서 분자 수가 일정하다'는 '아보가드로의 법칙'에 기초해, 원자를 최소 단위로 원자와 분자를 정확히 구분했다. 드리고 회의의 명제이던 ' 원소의 질량 측정'에는 이 때 멘델레예프는 원자량의 중요성을 깨닫고, 주기율이라는 생각으로 발전시켰다고 한다.
1861년 멘델레예프는 러시아로 돌아가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의 강사가 되었다. 유럽의 근대 화학을 들여온 멘델레예프의 강의는 좋은 평판을 받아, 1867년에 교수로로 승진했다. 그리고 유럽에 뒤진 러시아 화학계를 이끌어 근대화 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1869년, 표를 완성했다.
멘델레예프는 화학계의 우ㅣ업을 이루고 명성을 얻었으나, 1890년에 장학금 증액을 대학에 요구하는 학생운동을 지지한 것을 이유로 대학에서 면직되고 말았다.
1906년에는 노벨 화학상 후보에 올랐으나, 플루오린(플루오르)의 연구와 분리 및 전기 난로 제작'의 공을 세운 프랑스의 화학자 앙리 무아상(Henri- Moissan, 1852~1907)에게 단 1표 차이로 패했다, 그리고 그 다음해, 멘델레예프는 세상을 떠았다.
현재 멘델레예프의 위업을 기려 모스크바의 지하철에는 '멘델레예프 역' 이라는 이름의 역이 있다. 또 달 뒤쪽의 화구(크레이터) 중 하나에도 '멘델레예프'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또 한 가지, 1905년에 발견된 101번원소에는 ' 멘델레븀 '이라는 그를 기념 한 이름이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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