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6일 일본 요코하마 항에서 열린 새 헬기호위함 '이즈모 호'의 진수식 모습
며칠전 모습을 드러낸 일본의 새 헬기호위함 '이즈모(いずも) 호'를 두고 중국 여론이 뜨겁습니다. 국영방송인 CCTV를 비롯한 중국 언론들이 진수식 전부터 이즈모 호의 크기와 무기 제원을 집중 보도하는가 하면, 이즈모 호가 당장이라도 미국 록히드 마틴사의 최신형 스텔스 전투기인 F-35B를 실을 수 있다며 이즈모 호가 전투기를 싣고 날려 보내는 모습을 3D로 만들어 내보내기도 합니다.
지난해 9월에 이미 항공모함 '라오닝 호'를 진수한데다가 최근에는 상하이의 한 조선소에서 자체 항공모함을 만들고 있다는 설까지 돌고 있는 세계 3위의 군사대국 중국이 일본의 헬기호위함에 이렇게까지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선 많은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듯 중국과 일본이 센카쿠 열도를 놓고 영토분쟁을 벌이고 있다는 점과 일본 정부가 과거에 대해 반성의 태도를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하기 위해 헌법 해석을 시도하는 점 등 익히 알려진 여러 가지가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이 외에도 중국이 예민하게 반응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새 헬기호위함의 이름 '이즈모' 때문입니다.
일본에게는 영웅, 중국에게는 침략의 상징인 이름 '이즈모'
이즈모라는 이름은 일본 시마네(島根) 현의 옛 지명입니다. '다케시마의 날' 조례안을 가결시키는 등 우리나라와 독도 영유권 갈등을 빚고 있어 이름이 익숙한 바로 그 시마네 현입니다. 함선의 이름을 지명에서 따오는 것은 흔한 일입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항복문서 조인식이 거행됐던 미국의 전함 미주리 호를 비롯해 네바다 호, 펜실베니아 호 등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즈모라는 이름을 가진 배는 이번 헬기호위함이 첫 번째가 아닙니다. 제국주의 시대에 건조된 일본의 제 1호 순양함의 이름도 이즈모였습니다. 20세기 초 세계열강과의 이권 다툼에 나섰던 일제는 '6대의 전투함과 6대의 순양함을 만들자'는 구호 아래 지난 1900년 영국에 첫번째 순양함 발주를 맡깁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첫 순양함이 바로 이즈모 호. 길이 132미터, 폭 21미터, 최대 배수량 1만 톤인 이즈모 호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기대를 한 껏 받으며 1900년 9월 25일 진수됩니다.▲ 1937년 일본 순양함 이즈모 호가 중국 상하이 항에 정박해있는 모습
이즈모 호는 1905년 러일전쟁, 1937년 중일전쟁에 잇따라 투입됐습니다. 특히 당시 일본 해군 제 2함대, 3함대의 기함(旗艦)으로 전선의 최전방을 누비며 숱한 전투에 참가했습니다. 기함이란 사령관이 타고 지휘하는 함선으로 함대 사령부가 설치된 일종의 지휘선입니다.
이즈모 호는 러일전쟁에서의 승리를 시작으로 숱한 전투에서 승리를 이끌어냈습니다. 1904년 8월 14일 울산 앞바다에서 벌어진 러시아 함대와의 치열했던 전투에서는 일본 순양함 6척이 모두 패퇴하는 가운데 20발이 넘는 적의 포를 맞고서도 침몰하지 않고 교전을 벌였습니다.
잠시 퇴각한 뒤에는 47밀리미터 포를 76밀리미터 포로 교체한 뒤 전장에 참가하기까지 합니다. 1914년에는 작전 영역을 넓혀 또다른 순양함인 아스마 호, 히젠 호와 함께 하와이를 누비기도 합니다. 이후 세계 1차 대전과 2차 대전에 참가하며 일본 해군의 주축으로 명성을 떨칩니다.
상하이 침공에 파견된 순양함 이즈모 호, 그리고 중일전쟁의 결말▲ 1937년 8월 28일, 일본의 상하이 침공 때 중국인 사진가 Wong이 찍은 사진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37년 8월. 일본군은 이즈모 호를 상하이에 파견했습니다. 이즈모 호는 황푸강 하류에서 무려 3개월 동안 머물며 작전을 수행했습니다. 중국군의 공세가 거세지자 이즈모 호를 모함(母艦)으로 삼고 전투를 벌이려는 속셈이었습니다. 이즈모 호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식한 중국군은 이즈모 호를 즉각 공격 목표로 삼습니다.
중국군의 계속된 공격에도 불구하고 이즈모 호는 큰 타격을 입지 않았습니다. 상하이 전장에서는 이즈모 호에 대한 각종 소문이 돌기 시작합니다. 이즈모 호가 전장의 축복을 받았기 때문에 적의 공격이 닿지 않는다는 소문이었습니다. 일본군도 이 소문을 십분 이용해 이즈모 호에 대한 소문을 널리 퍼트리기 시작합니다.
당시 상하이 지역 언론인 노스 차이나 데일리 뉴스(North China Daily News)는 1937년 10월 16일자 지면을 통해 "이즈모 호는 상하이 시민들 사이에서 각종 소문의 근원이 되고 있다"고 보도합니다. 당시 이즈모 호가 중국군에게 얼마나 큰 타격을 입혔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다만 고전을 면치 못했던 일본이 3개월만에 상하이 함락에 성공할 때 그 중심에 이즈모 호가 있었던 것은 확실합니다.
침몰되거나 큰 타격을 입지 않은채 상하이 침공에 성공한 이즈모 호는 이후에도 상하이에 오랫동안 정박했습니다. 그리고 그 해 12월, 수도 난징이 함락되고 중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이어진 난징대학살. 중국인들은 중일전쟁의 패배로 영원히 치유되지 않을 상처를 입고 맙니다.
아소 다로의 미소에서 중국인들은 무엇을 느낄까
1941년 일본의 진주만 폭격 때도 상하이에 정박해있던 이즈모 호는 일본군이 열세에 빠지자 미 해군과의 전투에 참가합니다. 영국 해군의 포함(砲艦)을 침몰시키는 등 선전했지만 이미 전세는 기운 상황이었습니다. 패망을 얼마 앞둔 1945년 7월 24일, 일본 히로시마현 구레 해군기지에 정박해있던 이즈모 호는 미 공군 편대의 공격을 받습니다. 나흘 뒤인 7월 28일 20대에 달하는 미국 공군기의 폭격에 이즈모 호는 침몰합니다. 2년 뒤 구레 앞바다에는 이즈모 호의 부서진 선체와 잔해들이 떠올랐습니다.▲ 새 헬기호위함 이즈모 호의 진수식에서 웃고 있는 아소 다로 일본 부총리
순양함 이즈모 호가 침몰된지 68년 뒤인 지난 6일, 일본 요코하마 항에서는 새 헬기호위함 이즈모 호의 진수식이 열렸습니다. '나치의 개헌 수법을 배우자'는 망언을 해 일본 국내외에서 큰 비난을 받아온 아소 다로 부총리를 비롯해 많은 관료들이 진수식에 참여했습니다.
사진에서 볼 수 있듯 아소 부총리는 매우 즐거운 모습이었습니다. 동영상으로 보면 연신 싱글벙글하는 모습이 눈에 확연히 들어옵니다. 새 이즈모 호의 선두(船頭)에는 욱일승천기가 일본 국기와 함께 보란듯이 펄럭이고 있는 모습도 보입니다.
중일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순양함 이즈모 호는 한국이나 중국이 아닌 미국에 의해 침몰됐습니다. 미국 폭격기가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떨어트려 항복을 받아냈던 것처럼 이즈모 함도 미국에 의해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겁니다.
이쯤 되면 중국인들이 이즈모라는 이름에 치를 떠는 것이 상당부분 공감이 갑니다. 침략과 정복의 상징이었던 이즈모 호의 이름을 딴 배, 그것도 항공모함으로 사용이 가능한 2차대전 이후 최대 규모의 함선이라니.. 중국 언론이 들끓는 것도 당연합니다.
만약 일본이 '이토 히로부미'라는 이름의 헬기호위함을 만든다면 우리는 기분이 어떨까요. 중무장한 헬기 14대를 실은 채 호위함이 독도 근처로 항해를 시도한다면 어떨까 상상해보니 갑자기 불쾌감이 밀려옵니다. 일부 중국 언론은 이즈모 호가 센카쿠 열도 분쟁을 대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즈모 호가 센카쿠 근처라도 왔다가는 중국 대륙이 거센 분노에 휩싸일 겁니다. 우리라고 해서 이런 분노를 겪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늘 그래왔지만, 이즈모 호의 진수식을 보며 짓는 아소 부총리의 미소가 오늘 따라 더 거부감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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