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ving daily/조선왕조, 왕릉

광해군과 영창대군

나 그 네 2013. 8. 17. 15:46

[광해군과 영창대군]

 

광해군이 쫓겨난 주된 이유는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실리를 지켰다는 중립외교 문제 말고도 가족문제가 있었습니다.

광해군의 아버지인 선조는 첫 왕후인 의인왕후에게서

자식을 보지 못했습니다. 후궁들에게서 난 아들은 13명이

있었는데, 그 중 광해군은 공빈 박씨의 둘째 아들입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터졌습니다.

정비에게서 태어난 왕자가 없는 상황에서

나라의 위급한 상황이 닥치자, 선조와 신하들은 평소에

왕자 중에서 가장 영리하다고 생각했던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여 조정을 둘로 나누었습니다.

 

즉, 선조는 평양을 거쳐 의주로 피난길에 나서고

세자는 위험을 무릅쓰고 전쟁에 휩싸인 나라를 돌아다니며

군사들을 독려하고 의병들을 모으기도 하였지요.

그 과정에서 백성들로부터 신망을 얻게됩니다.

 

전쟁이 끝나고, 왕이 다시 한양으로 돌아온 지 2년 후

의인 왕후는 죽었습니다. 51세가 된 선조는 새 왕비를

들이게 되는데 그녀가 인목왕후이며 당시 나이는 17세였습니다.

광해군으로서는 자신보다 열 살 정도가 어린 사람을

새어머니로 모시게 된거지요. 그리고 1606년 인목왕후가

아들을 낳으니 그가 영창대군입니다. 즉 정비에게서 난

유일한 적자인거죠.

 

이 때 부터 집권당이었던 북인은 둘로 나뉘어 집니다.

즉, 영창대군이 적자이므로 왕위를 이어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소북파와 이미 세자로 책봉된 광해군이 왕위를 이어 받아야 한다는

대북파로 나뉘어 싸우게 되지요.

 

선조는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싶었으나 너무 어리고

또 광해군은 워낙 똑똑하게 처신하는데다, 전쟁 중에 공도 세운 상태라

폐세자를 할 핑계거리가 없었습니다. 그런 중에 병중에 있던 선조가

1608년 운명함으로써 광해군이 즉위하였습니다.

그러나 소북파는 왕의 정통성을 계속 문제 삼았으며

명나라는 형인 임해군을 제치고 광해군이 세자가 된

일을 문제 삼았지요.

 

7년 간의 전쟁 뒤라 해야 할 일은 산적해 있었습니다.

피폐해진 국토를 복구해야하고, 병들고 굶주린 백성을

돌보아야 하며, 명나라와 청나라의 압박에서 슬기롭게

대처 해야하는 상황에서 신하들은 왕의 정통성 문제로

서로 싸웠습니다. 그러므로 왕은 반대파를 제거해 나가야 했습니다.

 

먼저, 형인 임해군이 역모죄로 제거 당합니다.

그는 성격이 포악하여 세자 자리를 동생에게 빼앗겼다고 합니다.

그런데 명나라가 형을 두고 동생이 왕이 된 것을

계속 문제 삼자, 힘을 얻었는지 사람을 모았다고 합니다.

그것이 역모를 꾀했다는 혐의가 되었습니다.

 

1613년엔 칠서의 난이 일어납니다. 7명의 서자가 일으킨 난인데

그들을 심문하던 중 박응서라는 자가 역모를 자백합니다.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과 인목대비가 공모하여

영창대군을 왕으로 올리려 했다는 내용이었지요.

 

그 사실 여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이것은 역모

사건이므로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 김제남은 사약을 받았으며

8살 된 영창대군은 강화도에 유배 됩니다. 이후, 강화부사가

영창대군을 가두어 놓고 계속 불을 때서 질식해 죽었다고 합니다.

 

친정아버지와 아들을 잃은 인목대비는 광해군에게 원한이 맺힐 수 밖에

없겠지요. 왕의 문안인사도 받지 않고 불평불만으로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이에 대북파인 이이첨과 정인홍은 인목대비를 폐하자는 상소를 올립니다

결국 인목대비는 서궁 (경운궁)에 유폐 되었습니다.

 

이로써 광해군은 형제를 죽이고 어머니를 폐한 폭군으로

인식되고 민심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서인이 인조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쫓아낸 명분도 인륜을 저버린 왕은

왕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