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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화(士禍) 에 화(禍) 를 당한 홍씨들

나 그 네 2014. 9. 20. 11:06

사화(士禍) 에 화(禍) 를 당한 홍씨들

 

 

글http://blog.daum.net/perseush 순철

조선시대 사화(士禍)

 

사화(士禍)란 조선시대에 정치적(政治的)인 반대파(反對派)에 몰리어 조신(朝臣) 및 선비들이 참혹(慘酷)하게 화(禍)를 입은 사건(事件)을 말한다. 조선은 개국이래 유교(儒敎)를 국교로 삼아 문(文)을 숭상하고 유학(儒學)을 장려()함으로 우수한 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어 선비사회 즉 유림은 매우 활기에 차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주의(主義) 사상(思想) 감정(感情) 향사(鄕士)의 관계(關係) 등으로 인해 여러 파별(派別)을 형성하였는데 그 뿌리는 고려말(高麗末)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조(世祖)때에 싹이 트기 시작하여 성종(成宗)때에 이르러 이들의 반목(反目)은 더욱 심해졌는데 그 중에는 서로 상통하는 파(派)도 있었으나 서로 대립 또는 반목하는 파도 많았다. 대표적인 파당(派黨)은 세조의 찬탈(簒奪)에 가담(加擔)하여 높은 지위와 부귀(富貴)를 누린 훈구파(勳舊派)내지는 기호파(畿湖派)(뜻; 기호파란 우리나라 서쪽 중앙부를 차지하고 경기도 황해도 남부 충청남도 북부를 포함한 지역) 여기에 반대하여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명분(名分)에 따라 절의(節義)를 지킨 절의파 세조의 찬달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면서도 기회를 잡아 조정(朝廷)으로 진출하여 자신(自身)들의 사상과 포부(抱負)를 펴보려던 사림파(士林派) 내지는 영남파(嶺南派) 그리고 중국의 죽림칠현(竹林七賢)을 따라 서울 동대문 밖 죽림에 모여 고담준론(高談峻論)으로 세월을 보낸 청담파(淸談派) 등이 이었다.

 

 이들 각 파는 서로 논쟁(論爭)이 따르는 대립과 투쟁에서 패자(敗者)는 반역으로 몰려 지위(地位)을 빼앗기거나 목숨을 잃었고 한파가 승리하면 이에 대한 또 다른 새로운 반대파가 생겨 사회를 야기 시켜다.

 

 뜻 이는 선비들이 관직을 버리거나 아예 단념하고 서당(書堂) 서원(書院)을 세워 유생들을 교육시키면서 정치의 비판의식 복수관념이 응집(凝集)되어 당파의 결합을 굳게 하면서 후기 당쟁을 격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1) 계유(癸酉), 정난(靖難)과 병자사화(丙子士禍)

 1453년(단종1년)에서 1456년(세조2년)에 걸쳐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을 축출하고 왕위에 오르면서 절개 있는 신하들에게 화(禍)를 입힌 사건이다.

 12세(歲)의 어린 나이로 단종(端宗)이 즉위하였지만 숙부(叔父)인 수양대군은 왕위 찬탈(簒奪)(뜻; 신하가 임금의 자리를 빼앗음)의 야심(野心)을 품고 김종서(金宗瑞) 황보 인(黃甫 仁) 등의 중신(重臣)을 살해(殺害)하는 한편 친동생인 안평대군(安平大君)마저 사사(賜死)하고 전권을 장악하며 재위 2년 만에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양위를 하게 되었다.

 

 이에 분개를 느끼고 “ 하나의 태양아래서 두 명의 왕을 섬길 수 없다,,는 절의파(節義派) 집현전 학자들에 의해 단종 복위운동이 일어났다. 세조는 이를 사전에 알고 성삼문(成三問)등 사육신(死六臣)을 참형하고 단종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시켜 강원도 영월(寧越)로 귀향 보낸 후 뒤에 사사시켰다.

 

(2) 무오사화(戊午士禍)

 1498년 (연산군4년)에 김일손(金日孫)등 신진사류(新進士類)가 유자광(柳子光)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勳舊派)에 의하여 화(禍)를 입은 사건이다.

 

 당시 성종실록(成宗實錄)의 편찬(編纂)이 시작되자 사관(史官)이었던 김일손이 훈구파의 비행(非行)과 스승인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弔意祭文)을 사초(史草)(사관이 시정(時政)을 적어 둔 실록)에 올렸는데 이전부터 갈등(葛藤)을 느끼오 오던 훈구파의 유자광과 이극돈(李克墩)등이 이것을 문제삼아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방(誹謗)한 것이라고 연산군(燕山君)에게 고해 바쳤다.

 

 이로 말미암아 김일손을 위시한 모든 김종직 문하(門下)를 제거하기 시작했다, 우선 이미 죽은 김종직에게는 무덤을 파서 관(棺)을 꺼낸 다음 시신을 다시 한 번 죽이는 부관참시형(副棺斬屍刑)이 가해졌으며 김일손, 권오복, 권 경우, 이묵, 허반, 등은 간악한 파당을 이루어 세조를 능멸하였다는 이유로 능지처참(陵遲處斬)등이 형벌은 내렸고 같은 죄에 걸린 강겸은 곤장 100대에 가산(家産)을 몰수(沒收)하고 변경(邊境)의 관노(官奴)로 삼았다.

 

 그밖에 표연말, 홍한, 정여창, 강경서, 이수공, 정희량, 정승조,등은 불고지죄(不告之罪)로 곤장 100대에 3천리 밖으로 귀향 보냈으며 이종준 최보, 이원, 김굉필, 박한주, 임희재, 강백진, 이계명. 강흔등은 모두 김종직의 문도(門徒)로서 붕당(朋黨)을 이루어 국정을 비방하고 조의제문의 삽입(揷入)을 방조한 죄목으로 곤장을 때려 귀향을 보내 관청의 봉수대(烽燧臺)를 짓게 하였다.

 

(3) 갑자사화(甲子士禍)

 1504년 (연산10년)에 갑자사화란 무오사화로 언론기관(言論機關)의 기능이 완전히 제거된 마당이라 그에게 학문을 권하는 이도 간언(諫言)을 하는 이도 없게되자, 조정(朝廷)을 완전히 손아귀에 넣은 연산군은 향락(享樂)과 패륜행위(悖倫行爲)를 일삼았다, 매일같이 궁궐서 연회(宴會)가 벌어졌다.

 

 이렇게 연산군의 사치(奢侈)와 향락(享樂)이 심해지자 점차 국가재정이 거덜나기 시작하자, 연산군은 국고가 빈 것을 알고 이를 메우기 위해 공신들에게 지급한 공시전(功臣田)을 요구하고 노비까지 몰수하려 하자 대신(大臣)들의 태도(態度)는 급변(急變)했다.

 

 공신전을 소유하고 있던 부중파 관료(官僚)들은 왕에 요구가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맞물리자 왕의 처사(處事)가 부당함을 지적하면서, 왕의 지나친 향락을 자제해줄 것을 간청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신하들 모두가 연산군에게 반발했던 것은 아니었다, 무오사화(戊午士禍) 이후 조정은 다시 외척(外戚)중심의 궁중파와 의정부(議政府)및 육조(六曹) 중심의 부중파로 갈라져 있었다.

 

 이런 대립을 이용하여 정권을 잡으려는 인물이 바로 임사홍(任士洪)이었다. 그는 일찍이 두 아들을 예종(睿宗)과 성종의 부마(駙馬)로 만든 척신(戚臣) 세력 중에 하나였다. 임사홍은 성종 시대에 사림파(士林派) 신관(新官)들에 의해 탄핵(彈劾)(뜻; 죄상을 들추어 추궁)을 받아 귀향 살 이을 간 적이 이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사림을 싫어한 그는 연산군과 신하들의 대립을 이용해 훈구 세력과 잔여(殘餘) 사림 세력을 일시에 제거하려는 계획을 하였다.

 

 그리하여 임사홍은 연산군의 모친(母親) 윤씨(尹氏)의 폐비(廢妃)사건 내막을 밀고(密告)하니 연산군은 어머니의 폐출(廢黜)된 경위를 알게되자 엄청난 살인극(殺人劇)이 자행(恣行)한다.  

 연산군은 우선 윤씨 폐출에 간여한 성종의 두 후궁 엄(嚴) 귀인(貴人)과 정(鄭) 귀인을 궁중(宮中) 뜰에서 직접 참하고 정씨의 소출인 안양군 봉안군을 귀양보내 사사시켰다. 그리고 윤씨 폐출을 주도한 인수대비를 머리로 들어  받어 부상을 입혀 절명(絶命)케 했으며 비명에 죽은 생모의 넋을 위로하고자 왕비로 추숭(追崇)하고 성종묘에 배사 하려 하였다. 이때 연산군의 행동을 감히 막으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다만 응교(應敎) 권달수와 이행 두 사람만이 성종묘에 배사하는 것은 있을수 없는 일이라고 반론을 펴다가 권다수는 죽엄을 당하고 이행은 귀양길에 올랐다. 하지만 연산군의 행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윤씨의 폐위(廢位)에 가담하거나 방관한 사람을 모두 찾아내어 추적하기 시작했다.

 

 이 결과 윤씨 폐위와 사사에 찬성(贊成)했던 윤필상, 이극균, 성 준, 이세좌, 권 주, 김굉필, 이 주, 등 10여명이 사형 당하였고 이미 죽은 한치영, 한명회, 정창손, 이세검, 심 회, 이 파, 정영창, 남효온, 등은 부관참시(副棺斬屍)에 처해졌다, 이밖에도 홍귀달, 주계군, 신 원, 이유녕, 변형량, 이수공, 곽종번, 박한주, 강백진, 최 부, 성중엄, 이 원, 신 징, 심순문, 강 형, 김천령, 정인인, 조지서, 정성근, 성경온, 박 은, 조 의, 강 경, 홍 식, 홍 상, 김척선, 등이 참혹한 화(禍)를 입었으며 이들 가족자녀에 이르기까지 연좌(連坐) (뜻; 다른 범죄에 관련되어서 연대 책임을 짐) 죄를 적용하였다.   

 

(4)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년 (중종 14년)에 남 곤(南 袞) 심 정(沈 貞)등 훈구파 재상들이 당시 새로운 현실을 감행한 30대 젊은 선비들에게 화(禍)를 입힌 사건이다.

 

 연산군을 폐(廢)하고 왕위에 오른 중종은 정치를 개혁(改革)하고 패기(覇氣)에 넘치는 조광조(趙光祖)등 신진사류(新進士類)를 등용(登庸)하여 성리학(性理學) (뜻; 송 나라 때의 유학(儒學) 즉; 주자학(朱子學)) 을 크게 장려하였다.

 

 이에 조광조 등은 중종의 신임을 받아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실행하고 우선 반정공신 2, 3, 등 중 일부를 3, 4, 등으로 개정(改正)하고 4등 50여 명은 모두 공(功)도 없는 공신들에게 공신호(功臣號)를 박탈하는 등 과격한 혁신정책(革新政策)을 썼다. 마침내 이러한 실천대안(實踐代案)은 받아들여져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전체 공신의 4분의 3에 해당(該當)하는 75명(名)의 훈작(勳爵)이 삭탈(削奪) 일보직전에 놓이게 되었다.

 

 사태(事態)가 여기에 이르자 훈구 세력들은 강하게 반발하기 시작했고 중종도 조광조의 급진적(急進的)인 개혁정치에 염증(厭症)을 내고 있던 터였다. 중종의 이러한 내면을 잘 읽고 있던 훈구 세력은 조광조를 제거하기 위한 계략(計略)을 짜고 실행하였다.

 

 조광조를 몰아 내는 데 앞장선 사람은 사림파로부터 소인배(小人輩)로 비난받던 남곤(南袞)과 공신자격을 박탈당한 심정(沈貞) 그리고 한때 조광조의 탄핵(彈劾)을 받아 실권(失權)할 지경에 처했던 희빈홍씨(嬉嬪洪氏)의 아버지 홍경주(洪景舟) 등 이였다.    

 

 이들은 갖은 모략과 음모로써 후궁과 궁녀를 이용하였으며 한편 홍경주와 남권, 김전, 이장곤, 고형산, 심정, 등은 밤에 은밀히 왕을 만나 조광조 일파가 붕당(朋黨)을 조성하여 중요한 자리를 독차지하고 임금을 속여 국정을 어지럽히고 있기에 이를 엄히 다스려야 한다는 상소(上訴)를 했다. 이들의 상소가 있자 중종은 조광조를 비롯한 일단의 사림세력을 치죄(治罪)하도록 했다. 그 결과 조광조, 김정, 김식, 유자임, 박세희, 박훈, 등이 투옥(投獄)되었다

 

 이들이 투옥되자 남곤 홍경주 등의 훈구 세력들은 그들을 단장에 처벌해야 한다고 했으나 이장곤, 안당, 정광필 등이 반대하였고 성균관(成均館) 유생 1천여 명은 광화문(光化門)에 모여 조광조 등의 무죄를 호소하였다. 이때 조광조의 문하생(門下生)이었던 홍봉세(洪奉世)(홍경주의 조카)도 참석하였다.

 

 치죄(治罪) 결과 조광조는 능주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훈구파인 김정 남곤 이유창 등이 영의정(領議政) 좌의정 우의정에 임명되자 곧 사사되었다. 김정, 한충 김식 등도 귀양갔다가 사형되거나 자결(自決)했으며 그밖에 김두, 박세희, 박훈, 홍언필,(토홍댁) 이자, 유인숙 등 수십 명이 귀양길에 올랐다. 아울러 이들을 두둔한 김안국 김정국 형제 등은 파직을 당하였다.

 

(5) 신사사화(辛巳士禍)

 1521년 (중종 16년) 안처겸(安處謙) 일파들이 심정(沈貞), 남곤(南袞), 등에 의하여 화(禍)를 입은 사건이다.

 

 기묘사화로 세력을 잃은 안당(安塘)의 아들 안처겸은 남곤 심정이 사림을 해치고 왕의 총명을 흐리게 한다하여 이들은 제거할 것을 모의하였다. 때마침 안처겸의 모친상(母親喪)을 당했는데 남곤의 부하 송시련은 여기에 방문한 사람들의 명단(名單)을 적어 이들이 대신(大臣)을 해치려 한다고 무고(誣告)(뜻; 사실이 없는 일을 거짓 고발)하여 관계된 많은 사람들이 처형(處刑) 되는 큰 옥사(獄死)가 일어났다. 

     

(6) 을사사화(乙巳士禍)

 1545년 (인종2년) 왕실의 외척(外戚)인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의 반목(反目) (뜻; 서로 못 사귀어 미워함)으로 일어난 사건이다, 중종의 첫 번째 계비(繼妃) 장경왕후에 아들인 인종의 외숙인 윤임(尹任) 일파의 대윤과 두 번째 계비 문정왕후에 아들 경원대군(慶原大君) (명종(明宗)의 외숙인 윤원형(尹元衡) 일파의 소윤 사이에 왕의 계승을 둘러싸고 암투(暗鬪)가 벌어졌는데 사람들은 인종(仁宗)의 외숙은 대윤 이고 명종(明宗)의 외숙은 소윤 이라고 하였다.

 

 1544년 중종이 승하(昇遐)하고 인종이 왕위에 오르니 대윤이 득세(得勢)했다. 그러나 인종이 7개월만에 승하고 그 아우 되는 경원대군이 왕위에 오르니 바로 명종(明宗) 임금이시다.

 

 12세 나이로 명종이 즉위하자 모후(母后)인 문정왕후 윤씨가 수렴청정(垂簾聽政)(뜻; 왕대비가 신하를 대할 때는 그 앞에 발을 늘이던 대서 생긴 말로 임금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을 때 이를 도와서 정사를 돌봄)으로 왕권을 대신하였는데 친정 동생 윤원형의 계교(計巧)로 인종(仁宗)의 외숙(外叔)인 윤임의 일당이라고 하여 유관(柳灌), 유인숙(柳仁淑), 유임을 죽이고 백인걸(白仁傑), 노수신(盧守愼), 정황(丁), 이언적(李彦迪)등 380여명을 유배시키고 윤원형의 20여년 세도와 독재가 시작되는데 이것이 세칭 을사사화이다,  

  

(7) 정미사화(丁未士禍)

 1547년 (명종2년) 9월에 부제학(副提學) 정언각과 선전관 이로가 경기도 과천의 양재역(良才驛)에서 벽서(壁書)에 (위로는 여왕이 집권하고 간신 이기(李)등이 권세를 논하여 나라가 망하려 하니 이를 보고만 있을 것인가)라는 익명의 벽지를 발견하여 임금에게 보고했다,

 

 윤원형 일파는 이 사건 이 윤임파(尹任派)에 대한 처벌이 미흡해서 생긴 사건이라고 주장하며 잔당세력(殘黨勢力)을 처벌할 것을 간언 했다. 이 말을 들은 문정왕후는 명종으로 하여금 윤임의 잔당세력과 정적(政敵)들을 제거하도록 한다. 그 결과 한때 윤원형을 탄핵하여 삭직(削職)케 했던 송인수와 윤임과 혼인(婚姻) 관계에 있던 이야수를 사사하고 이언적, 정자, 노수신, 정황, 유희춘, 백인걸, 김만상, 권응정, 권응창, 이천계 등 20여 명은 유배되었다, 그 중에는 특히 사림계(士林系) 인물이 많았다.

 

(8) 기유사화(己酉士禍)

 1549년 (명종 4년)에 이홍남(李洪男), 이홍윤(李洪胤) 형제의 난언(亂言)을 상주(上奏)하여 이흥남이 모욕죄(侮辱罪)로 몰려 그의 아우 이홍윤 등이 능지처참(陵遲處斬)되는 한편 이에 연루된 많은 사람들이 화를 입은 사건이다.

 

(9) 계축사화(癸丑士禍)

 1613년 (광해군 5년)에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지지(支持)하는 소북파(小北派)를 제거하고 영창대군을 몰아내기 위하여 광해군(光海君)을 지지하는 대북파(大北派)인 정인홍(鄭仁弘) 이이첨(李爾瞻)등이 일으킨 사건이다.

 

 경상도 문경(강원도(江原道 聞慶) 새재에서 강도사건이 일어났는데, 당시 권세를 잡고 있던 정인홍 이이첨 등은 이 사건이 김제남(金梯男) (영창대군의 외조부)과 관계가 있다고 고발(告發)해 영창군이 서인(庶人)으로 폐봉(廢封)되어 강화(江華)에서 위리안치(뜻; 집 주위에 울타리를 치고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는 조친) 증살(蒸殺)(뜻; 방안에 가두고 장작불을 지펴 그 열기로 죽게 하는 것) 이렇게 죽음을 당하였으며 계비(繼妃)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西宮) (덕수궁(德壽宮)에 유배시키고 김제남은 사사(賜死)당했다.

 

(10) 기사사화(己巳士禍)

 1690년 (숙정 15년)에 서인(西人)과 남인(南人)들 사이에서 정치적(政治的) 야욕으로 일어난 사건이다. 당시 정권을 장악한 서인의 송시열(宋時烈)등은 소의장씨(昭義張氏) 장희빈(張嬉嬪)의 아들(후에 경종(景宗)을 원자(元子)로 책봉하는 것은 시기가 빠르다고 반대했는데, 이를 계기로 실각 중이던 남인들이 왕을 충돌하여 서인들이 축출(逐出)당하는 큰 옥사(獄死)가 일어났다.

 

 현종(顯宗)때부터 숙종(肅宗)때 까지 서인과 남인은 예론(禮論)(예론 이란 효종의 상중(喪中)에 서인은 1년 상 남인은 3년 상을 가지고 당파 싸움에 비롯된 말)에 대한 논쟁(論爭)으로 싸움을 하였으며 서인은 내부분열(內部分裂)로 송시열 노론(老論)계와 소론(小論)계 간에 분쟁이 계속되었다.

 

(11) 신임사화(辛壬士禍)

 1722년 3월 (경종 3년)에 소론(小論)의 강론 자들이 노론(老論)의 과다한 처분을 요구하고 있을 때 남인의 서얼 출신 목호룡은 노론측에서 경종(景宗)을 시해(弑害) 하고자 모의했다는 이른바 삼급수설(三級手說) (대급수(大急手)*칼로 살해,) 소급수 (小急手) (약으로 살해) 평지수(平地手) (모해하여 폐출 함)을 들어 고변(告變)(뜻; 반역 행위를 고발함)하였다. 이 고변에 따르면 음모(陰謀) 관련자는 정이종, 김용태, 이기지, 이희지, 심상길, 홍의인,  김민택 백망, 김성행, 등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노론 4 대신(大臣)의 아들 또는 조카이거나 아니면 추종자(騶從者) (뜻; 상전을 따라 다니는 하인)들이다.

 

 이 사건은 노론(老論)에 엄청난 타격을 안겨주었다. 목호룡의 고변이 있자 국청(鞠廳) (뜻; 역적 등의 중죄인을 신문하기 위해 임시로 만들었던 관청)이 설치되어 역모(逆謀) 관련자들을 잡아와 처단하였고 노론 4 대신(大臣)도 다시 한성으로 압송(押送)되어 사사되었다.

 

 국청에서 처단(處斷)된 사람 중에 법에 의해 사형된 사람이 20여명 맞아서 죽은 이가 30여 명 그밖에 그들의 가족(家族)이라는 이유로 체포(逮捕)되어 교살(絞殺)된 자가 13명, 유배 114명 스스로 목숨을 끊은 부녀자가 9명, 연좌된 사람이 173명에 달했다.

 

 반면에 권력을 잡은 소론파(小論派)에서는 윤선거와 윤중을 복관(復官)시키고 남구만, 박세채, 윤지완, 최석정 등을 숙종묘에 배향하였으며, 목호룡에게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의 직(職)이 제수되고 동성군의 훈작(勳爵)이 수여되었다. 이 대대적(大大的)이 옥사(獄死)가 신축년(辛丑年)과 임이년(壬寅年)에 연이어 일어났다고 해서 신임사화(辛壬士禍)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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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홍씨(南陽洪氏) 현조(顯祖)의 절의고(節義考)

 

(1) 고려인종시(高麗仁宗時) 이자겸(李資謙)의 반란(反亂)

6세(世) 충평공(忠平公) 휘(諱) 관(灌)에 기록(記錄)은 남양홍씨 역삭교본 141페-지에 내용이 기록되어 있어 생략(省略)함.

 

(2) 단종손입시(端宗遜位時) 단종 계유에서 세조 병자시

(가) 17세(世) 휘(諱) 연(演) (字)는 자원(子源) 호(號)는 호은(湖隱)

남양군파 척(陟)의 아들이며 태종(太宗) 계미(癸未) (1403)생이고 관(官)은 집의(執義) 단종이 손위(遜位)(뜻; 임금의 자리를 사양함)하자 종신(終身) 토록 자취를 감추었다가, 세조 무인(1458년) 2월 23일에 죽었다.

 

 이 소식이 세조(世祖)에게 전(傳)하여지니 세조가 연(演)의 아우 정(淀)을 불러 형(兄)의 유고(遺稿)가 있을 터인데 내가 보고싶으니 갖다 달라하였다 정(淀)은 형(兄)의 문집(文集)이며 유고등을 갖다 주었다. 그랬더니 구구절절(句句節節)이 단종을 사모(思慕)하고 자기를 불가(不可)하다는 내용뿐이었다. 세조는 자기비위를 건드린 것이 화가 나서 불 속에 모조리 넣고 태워 버렸다. 그래서 호은공 유고는 전해져 내려온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한다, 연(演)의 충절(忠節)을 기리 받들어 공주 숙모전(公州 肅慕殿)에서 제사를 모신다.

 * (숙모전이란 단종 대왕을 위하여 억울하게 화를 당한 원혼(冤魂)을 모신 곳이다)

 

(나) 18세(世) 문정공파(文正公派) 휘(諱) 구서(九敍) 호(號) 고봉(高峰)

 문정공(文正公) 휘(諱) 언박(彦博)의 5 세손(世孫)이시며 관(官)은 한성판윤(漢城判尹) 증(贈) 병조판서(兵曹判書) 단종의 퇴임시(退任時)에 재종(再從)형 달손(達孫)을 엄책(嚴責)하여 말하기를 충신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이라고 너는 듣지 않았느냐 하고 드디어 이와 절의(絶義)(뜻; 맺었던 의(義)를 끊음)하였다.

 

 조족(趙族)을 보고 서로 통곡(痛哭)하여 상왕(上王)이 실각하니 아등(我等)은 장차 어디로 가리오 하고 강진(康津)에 퇴거(退居)하여 세사(世事)를 사절하고 천일(天日)을 보지 않았다. 달손(達孫)이 세조에게 권(勸)하여 전라감사에 임명하였으나 마침내 응낙(應諾)(뜻; 응하여, 승낙함)하지 않았다, 단종의 승하시(昇遐時)에는 북망(北望) 통곡(痛哭)하여 3년 상(喪)을 치렀다. 세조 23년 임자 5월 17일에 죽었다. 공주(公州) 숙모전(肅慕殿)에서 제사지내다.   

 

(다) 남양군파 16세(世) 지평공(持平公) 휘(諱) 령(齡)의 부자(父子)

 단종(端宗)이 세조(世祖)에 의하여 노산군(魯山君)의로 강등되어 영월(寧越)로 쫓겨나가자 지평공 휘 령(齡)과 아드님 좌랑공(佐郞公) 휘(諱) 원숙(元淑) (* 원숙공은 수양대군이 대권을 잡기 위하여 제거한 인물가운데 당시 영의정이었던 황보 인(황보 인)의 사위가 되신다)부자가 합께 단종의 재소(在所)로 따라가서 정성껏 시중하였는데 자객(刺客)을 시켜 먼저 부자(父子)를 살해(殺害)하고  단종을 목 졸라 죽인 것이다.

 

 이때 우국재공(友菊齋公)께서는 의금부 진무(塵務)(뜻; 속계의 번잡한 사무)로 내직에 계실 때인지라 이 소식을 듣고 사촌(四寸) 호은공 휘 연(演)과 둘째아들 윤선(閏善)을 보내어 숙부(叔父)이신 휘 령(齡)과 사촌 원숙공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를 치른 후 단종의 위령제(慰靈祭)를 지낸 준 것이 알려져서 호은공은 태형(笞刑)(뜻; 대쪽으로 볼기를 치던 형벌)를 당한 후 은거(隱居) 하셨고 우국제공은 벼슬을 버리고 10여년간을 방랑(放浪)의 길에 접어들면서 가진 고생을 다 겪게 된다.     

 

(3) 연산 무오사화 (燕山 戊午士禍)

 17세(世) 휘(諱) 문광공(文匡公) 귀달(貴達) 호(號)는 허백당(虛白堂)

재신공파(宰臣公派)(부계홍씨)로서 증조(曾祖)는 휘(諱) 순(淳)이며 조(祖)는 휘 득우(得禹) 부(父)는 증자헌 병조판서(贈資憲兵曹判書) 휘 효손(孝孫)이다.

 

 세조(世祖) 6년 문과에 급제 이시애(李施愛) 난(亂)(1469년) 평정(平定)에 공을 세우고 예종(睿宗)때는 세조실록 편찬에 참여 직제학 도승지 등을 거쳐 성종 12년에 천추사(千秋使)(뜻; 중국에 황제나 황후에 생일날 축하하기 위에 가는 사신)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왕명으로 오례의주(五禮儀註)를 개정했다. 대사성 대제학 호조판서 등을 역임 연산군 4년 무오사화 때는 왕의 난정을 직간 하다가 좌천되었으며 동년 10월 자기의 손녀(언국(彦國)의 딸)를 궁중에 들여보내라는 왕명을 듣지 않아 장형(杖刑)을 받고 경원(慶源)으로 유배(流配) 가는 도중에 살해되었다. 상주 함창(咸昌) 임호서원(臨湖書院)에 제향 하고있다.

 

@ 대동기문(大東奇聞)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 되어있다.

 송질(宋軼) (1454 - 1520)은 성종(成宗) 8년에 문과에 급제한 분으로 훗날 벼슬이 영상(領相)에까지 올랐던 어른인데 문광공 허백당이 사사(賜死)될 때에 용천역(龍川驛)에서 유숙(留宿)하고 있었다. 이날 밤에 갑자기 차가운 기운이 멀리서 달려오더니 말소리가 들려왔다.

 

 가중(可中) (송질의 본이름)은 자는가? 송질은 그 소리가 허백당(虛白堂)의 말소리임을 깨닫고 반기었다. 허백당은 반갑게 창문(窓門)을 열고 맞이하는 송질에게 말하였다. “나는 이미 죽었는데 날씨는 춥고 시체(屍體)는 얼었으니 따뜻한 술이나 한 잔 주게,, 송질은 곧 술을 따뜻하게 데워서 앞에 놓아두었더니 훌쩍 훌쩍 들어 마시는 소리는 들리지만 술은 줄어들지는 않았다, ”추운 기운이 조금 풀렸으니 매우 고맙네,, 이윽고 허벡당은 작별하고 떠나갔다.

 

(4) 중종기묘(中宗己卯) 신사사화(辛巳士禍)

 신복(順福) 사원(士源)의 아들 호(號)는 고암(顧庵) 기묘사화로 말미암아 경진(庚辰)에 화(禍)를 당했다. 인종(仁宗) 갑진(甲辰)에 신원(伸寃)되어 영의정으로 추증(追贈)되었다. 중종이 문치(文治) (뜻; 문덕을 숭상하는 정치)할 뜻이 있어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등 제현(諸賢)을 뽑아 쓰자 년소신진(年少新進)의 선비들이라 개혁(改革)하는데 용력(勇力)하요 요순지치(堯舜之治)의 날을 기약하며 회복할 수 있을까 기대했더니 남의(南哀) 심정(沈貞)등이 무모(誣謀)하여 사림에게 화를 입혔다, 남원(南原) 로봉서원(露峰書院)에서 제향함.

 

(5) 경종 신임사화(景宗 辛任士禍)

(가) 계적(啓迪) 우석(禹錫)의 아들 호(號)는 수허재(守虛齋)

 문과에 급제하고 관(官)은 간선대부 대사헌(嘉善大夫大司憲) 임인(壬寅) 10월 20일 화(禍)를 입음 신임사화의 3재신(三宰臣)의 한 분임 영조(英祖) 을사(乙巳)에 신원(伸寃)되어 이조판서에 추증(追贈)되었다.

 

 임오사화는 사림(士林)들이 경종(景宗)의 환후(患候)가 위중하여 세제(世第)책봉을 급(急)히 하고 세제 영조(英祖)로서 대리(代理)케 해야 한다고 논(論)하자 소론(小論)의 대신 조태구(趙泰) 최석항(崔錫恒) 이광좌(李光佐) 유봉휘(柳鳳輝) 조태억(趙泰億)등이 금상(今上) (경종)이 춘추(春秋)가 정성(鼎盛)하 무로 세제책봉이 급하지 않고 금상(今上)이 비록 환후중(患候中)이시나 위급하지는 않으며 또 재위반년에 정치가 실수함이 없으니 세제로서 대리함은 불가(不可)하다 하여 사화(士禍)을 일으킴.

 

(나) 의인(義人) 남양군파 휘(諱) 언도(彦度)의 아들이다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여 관(官)은 종묘서직장(宗廟署直長) 임인년 4월 22일에 화(禍)를 당하고, 영조(英祖) 을사에 신원(伸寃)(뜻; 원통한 일을 푸러버림)하고 정조(正祖) 임인년에 집의(執義)로 추증(追贈)하고 다시 이조참판으로 추증 하였다. 경기도 양주군 상수세장지에 형제분이 모셔져있다.

 

(다) 철인(哲人) 의인(義人)의 아우이다

 생원(生員) 임인년(壬寅年) 7월 13일에 화를 입음. 영조 을사년에 신원되고 정조(正祖) 임인년에 지평(持平)으로 추증 다시 순조(純祖) 을축에 이조참판으로 추증 되었다. 경기도 양주군 상수세장지에 형님과 같이 모셔져있다. 

 

 

가져온 곳 : 
블로그 >남양홍씨 우리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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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페르세우스 H| 원글보기